태백산 눈꽃 산행
낯선 곳으로의 떠남은 늘 기대와 설레임이 있어서 좋다. 태백산의 눈꽃산행을 위해 꼭두새벽에 일어나 배낭을 챙겼다. 도시는 아직도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함께 하기로한 정민이네와 준수네를 동대구역에서 만나 플랫폼으로 향했다. 단잠을 설치고 왔을 텐데도 한결같이 표정들이 밝아보였다. 마침내 열차는 육중한 몸을 일으켜 어둠을 가르며 철로 위를 미끄러져 갔다.
한동안 술렁대던 차내가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설친 잠을 잇느라 이내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모습들이었다. 하루의 빠듯한 일정을 그려보며 나만의 낭만에 젖고 싶어 어둠에 잠긴 차창 너머로 촛점없는 눈길을 던졌다.
한반도의 대동맥인 경부선에 시원함이 있다면 중앙선으로 이어지는 태백선은 굽이굽이 산모롱이를 돌아가는 아기자기함과 정겨움이 있었다. 기차여행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하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오늘은 여행의 멋과 산행의 맛을 마음껏 즐겨보고 싶었다.
영천을 지나 군위쯤에 이르자 날이 밝아오고 의성의 탑리에 이르자 길거리의 가로등불이 하나 둘 꺼졌다. 차창으로 바라보이는 농촌의 전경이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촌놈은 시골 풍경만 봐도 금새 진한 고향의 향수에 젖어드나보다. 비싼 쇳덩이를 길바닥에 젓가락처럼 끝없이 깔아 놓았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자락을 쓴 웃음으로 더듬으며 깜빡 눈을 붙이는 사이에 차는 어느새 안동을 지나 영주를 지나고 있었다.
잔뜩 흐린 하늘이었지만 추위가 풀려 산행을 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차창으로 바라보이는 개울에 얼음이 보이는가 싶더니 봉화에 이르자 응달진 곳으로 눈이 보였다. 산은 점점 높아지고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에 깊이를 더할수록 눈 덮인 겨울의 경치가 멋을 더해갔다.
경북의 땅은 생각보다 넓었다. 새벽부터 달려왔건만 좀처럼 그 끝을 내어 놓지를 않았다. ‘이곳도 경상도 땅’이라고 우겨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춘양을 지나고, 남원의 광한루에서 춘향이와 애틋한 정분을 나누었던 이몽룡의 고향이라는 승부역에 이르자 하늘은 더 이상 참지를 못하겠던지 눈발이 흩날렸다.
조용하던 차안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석보역에 이르자 산은 더욱 가파르고 눈송이는 더 굵어졌다. 4시간을 쉼 없이 달려서야 기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태백으로 가는 철암역의 길바닥에는 제법 눈이 쌓였다.
여기서부터는 버스를 타고 산행의 기점인 태백산의 유일사로 가야 했다. 산행을 하기 위해서는 당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유일사 주차장으로 다시 이동을 해야 했으나 오늘은 산행의 편의를 위해 버스 1대가 유일사 주차장으로 곧바로 운행해서 수고로움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눈이 계속해서 내려 산행을 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 앞섰다. 오늘 산행은 이곳에서 출발해서 천제단을 오른 후 당골 주차장에 4시 30분까지 도착을 해야 하는 종주산행이었다. 통상 4시간이 걸린다는 산행에 4시간 4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눈이 내리는 날씨임에도 어디서 몰려왔는지 들머리부터 등산객들로 길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개미떼의 대이동 같았다. 흰 것은 눈이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등산객이었다. 산이 내려앉을까 걱정스러웠다. 우리나라 사람 절반이 이곳 태백산으로 몰려온 것 같았다.
눈 내리는 태백의 설경은 때 묻지 않은 순수와 아름다움이 있었다. 순백의 세상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잠시 대열에 섞여 언덕을 오르다가 조끼를 벗고 아이젠을 채웠다. 사람들에 떠밀려 앞사람의 엉덩이만 보고 발걸음을 놓아야 했다. 말씨로 보아 각지의 사람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눈을 밟고 눈을 맞으며 오르는 산행은 새색시의 설레임 같은 것이 있었다. 수북이 쌓인 눈길은 모래밭을 걷는 것과 같이 발걸음이 쉽지 않았다.
이마와 등어리에 땀이 베어나도록 30여분을 오르자 유일사 쉼터였다. 여기서부터 길은 가파르게 올려치는데 정체가 극심했다. 대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발자욱도 옮겨 놓을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정해진 시간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겨우 한발을 올려놓고 섰다가 가기를 반복하며 가파른 비탈길을 올랐다. 태백의 날씨는 열아홉 계집애의 속알딱지 같이 변덕스러웠다. 산행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포근한 날씨인가 했더니 금새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쳤다.
오름을 더할수록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마스크를 하고 모자의 귀마개를 내리고 눈만 빼꼼이 내어 놓아도 추웠다. 장갑을 낀 손이 시려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잠깐 눈을 돌리면 일행과 멀어져서 찾을 길이 없었다. 유일사 쉼터를 지나면서 대열에서 이탈한 진수 엄마를 찾지 못해 애를 태워야 했다.
얼마를 쉼 없이 올랐을까? 배가 꼬르륵 대고 허기를 느꼈으나 몰아치는 눈보라에 음식을 꺼내 먹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일행을 찾아야 했기에 지체할 수도 없었다. 드디어 밋밋하게 육산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에 올라서고 태백이 자랑하는 주목 군락지였다. 거친 눈보라를 온몸으로 맞으며 묵묵히 서 있는 주목의 당당함에 일말의 경외심이 들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하는 설경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주목과 함께 상고대가 형성된 나무들은 온통 은백의 세상이었다. ‘우와~’ 하는 소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연초에 멋진 일출을 찍으려다가 추운 날씨에 카메라가 작동 하지 않아 실패를 했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몇 장의 사진에 추억을 담고 금방 품속에 다시 넣어야 했다. 주목군락지를 지나서야 겨우 준수 엄마를 찾았으나 이번에는 다시 정민이네와 헤어졌다. 몰아치는 눈보라는 멋진 설경을 바라보기조차 어렵게 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주목 군락지를 지나자 마침내 돌탑이 있는 태백의 지붕인 장군봉(1,567m)이었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의 등산객은 피난민의 행렬 같았다.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누 떼의 대 이동을 연상케 했다.
장군봉에서 천제단으로 이어지는 길은 태백 최고의 멋진 설경을 자랑했다. 나뭇가지 마다 스티로폴을 입혀 놓은 것 같은 상고대와 고사목은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단번에 앗아갔다. 산상에 펼쳐지는 은백의 세상은 아리도록 아름다웠다. 이 추위에 미친듯이 산을 올라 왜 그토록 태백의 설경에 빠져드는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쉬움이 있다면 몰아치는 눈보라에 좀 더 오래 머무르며 마음껏 가슴과 카메라에 담지 못하는 것이었다.
낙동강의 천삼백리가 이곳 태백에서 발원하고 소백을 팔베개 하고 있는 태백의 능선은 장엄한 기상과 힘이 넘쳐나는듯 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2시간 40분에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에 도착했다. 몰아치는 눈보라는 모든 것을 금새 얼어붙게 했다. 왕이 친히 제를 올렸다는 천제단을 급히 돌아보고 태백산 팻말을 배경으로 이곳을 다녀가는 기념을 남기고 곧장 당골로 내려섰다.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는 잠시도 지체할 수 없게 했다. 모두를 날려버릴 기세였다. 한참이나 가파른 눈길을 더듬어 내려서자 바람이 한풀 꺾인 망경사 절이었다. 이 높은 산자락에 절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절의 마당과 뜨락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로 난장판이었다. 우리도 그 틈에 끼어 컵라면을 사고 정민이 아빠가 손을 호호 불며 끓인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선 채로 손이 얼어 젓가락질을 하기도 어려웠으나 따뜻한 국물에 눈이 뜨였다.
눈송이는 점점 커져갔다. 내려서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고 편안했으나 길고도 지루했다. 사람들이 없을 때는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으나 위험하다고 썰매를 타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길은 떡고물을 부어 놓은 것 같이 부드러웠다. 넘어져도 다칠 염려는 없었으나 걸음을 놓기에 힘이 들었다.
함박눈을 맞으며 지겹도록 느껴지는 길을 따라 무사히 산을 내려서자 약속한 시간이 빠듯했다. 태백 일원에 대설경보로 내려진 것도 모르고 한 산행이었다.
당골은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눈꽃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계곡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눈은 앞이 보이지 않도록 펑펑 쏟아졌다. 차가운 눈을 맞으며 알몸을 다 드러내 놓고 여장을 한 엿장수의 춤과 재담과 노래에 잠시나마 산행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각지에서 몰려온 차들 틈을 빠져나와 잠시 눈을 붙이는 사이에 버스는 우리들을 철암역에 내려놓았다. 눈으로 열차가 20여분이나 연착이 되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철암역은 레일까지 눈에 묻혔다.
마침내 어둠을 뚫고 열차가 다가왔다. 그제서야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이 안심이 되었다.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이내 곤한 잠에 떨어졌다. 대구를 떠난 지 15시간 반이 지난 밤 10시가 되어서야 무사히 돌아왔다. 종일 비가 내렸다는 대구는 촉촉이 땅이 젖어 있었다.
이번 산행은 열차여행의 재미도 느끼고 눈꽃산행의 볼거리도 함께 즐길 수 있었던 참으로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까지 돌아와야 하는 틀에 매인 산행이었기에 충분한 시간과 나 만의 자유가 아쉬웠다.<2008. 1. 20. 도까비>
□ 산행코스
유일사 주차장 - 유일사 쉼터 - 주목군락지 - 장군봉 - 천제단 - 망경사 - 반재 - 장군바위 - 단군성전 - 당골 주차장
□ 시간대별 일정
6:30(동대구역 출발) - 8:54(영주역) - 10:28(철암역 도착) -11:10(태백산 당골 도착) -11:40(유일사 주차장) -14:22(천제단) - 15:10(망경사 출발) -16:35(제2주차장 도착) -17:20(철암역 도착) -17:47(철암역 출발) - 21:52(동대구역 도착)
첫댓글 살다가 보믄~ 때로는 본 정신이 아닐 때도 있는기라~~^^
태백하면 주목과 상고대가 생각나는 설경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산이지! 좋은곳에 뎅겨왔구먼 언제나 유유자작으로 살아가는 칭구가 부러우이 ★글을 읽는 내내 마치 내가 산행하는 착각속에 빠져들수 있도록 현실감있게 잘 표현하였네~~~ 건강하시고 잼있는 글 기대함세
나 보다 미리 댕겨왔구먼 그려~~^^ 눈 속에 자네 발자욱도 있더구먼~~ ㅋㅋㅋ 점심 맛있게 드시게나~~^^
1월 20일날 태백산 산행이 예정되었으나 일정이 변경되어 가지 못했는데, 자네 산행기로 위안하겠네
그랬었구먼 ~~ 함께 했더라면 더 좋은 추억이 되었을텐데...... 아쉽네 그려~~감기조심하시게나 ^^
나두 태백산 설경을 산행하고팠는데 ....칭구의 산행기를 보고 더욱 가고 접구먼...즐감하고 떠남니다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