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안식 휴가' 반란?
2008-09-03 12:00
TV드라마 방영 중…일반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여보,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느닷없이 아내가 던진 한 마디!
요즘 들어 가슴이 철렁해지는 남편들이 많단다. 마침, 인기리에 방영 중인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선 40년차 주부가 1년간의 휴가를 즐기는 모습이 방영되고 있어 아내들의 반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드라마를 보며 부부싸움을 한 가정도 있단다.
'아내의 휴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심정 공감하지만 현실과 안 맞다"
우선 사람들이 입방아질(?)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의 사연부터 살펴 보자. 극중 주인공인 한자(김혜자 분)는 결혼 40년차 주부로 시부모를 모시고 3남매를 키우며 시동생, 시누이까지 떠맡아야 했다. 생일날 그녀는 희생하며 산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1년간의 휴가를 받아 '공식적인 가출'을 감행했다. 원룸을 얻어 살림살이를 장만하고 혼자만의 생활을 즐긴다. 심야 영화를 보고 컴퓨터와 서예를 배운다.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 '이렇게 살고 싶었어'를 외친다. 남편과 가족들의 안부전화에 '내버려두라'고 반갑지 않은 반응을 보내는 그녀.
한자의 휴가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부터 이 드라마의 게시판은 연일 그녀의 행동에 대한 찬반이 뜨겁다. "수십년간 가족을 위해 희생한 엄마에게 휴가가 필요한 건 당연하다"는 긍정론과 "엄마만 힘든 거 아니다. 너무 이기적인 발상이다"라는 부정론이 팽팽하다가 최근 남편조차 귀찮다는 반응을 보이는 그녀에게 "가족에게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현실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형국이다.
현실의 주부들의 생각은 어떨까. 한자와 비슷한 세대인 60대들은 마음을 이해하지만 현실적인 것 같지는 않다고 답한다. 올해 38년차 주부인 김명자(65)씨는 "남편과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고 살아온 우리 세대들은 누구나 한자처럼 현실의 짐을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러나 한자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가족을 두고 나가는 행동은 탐탁치 않다"고 반응했다.
30여년간 일을 하며 두 아이를 키웠다는 이성희씨(57)씨는 "드라마 속 그녀의 행동이 불쾌하다"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복에 겨워 별짓을 다한다'는 말이다. 현실의 어머니들은 더한 고생을 하며 살고 있는데 가족을 남겨두고 저 혼자 편하자고 나가는 것이 말이 안된단다. 평범한 주부들에겐 오히려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물론 한자를 보며 대리만족을 즐긴다는 답과 혼자 남은 남편이 불쌍하다는 동정론을 펴는 이들도 있다.
·젊은 주부들은 박수, 남성들은 "불쾌하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50, 60대에 비해 20~40대 주부들은 대체로 그녀의 선택에 지지를 보내는 듯하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전업주부 이금희(42)씨는 "가정에 무조건 희생한 주부들의 경우 늙어서도 자식만 바라보고 산다"며 "60대이지만 자아를 찾아나선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전했다. 최근 시어머니를 문화센터에 등록시켰다는 박희정(38)씨는 "드라마를 보며 새삼 어머니에게도 취미를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한자'의 행동에 대해 남자들은 불쾌하다는 반응이 많다. 결혼 19년차 박성범(49)씨는 "남자 또한 평생 자식과 아내를 바라보며 힘든 직장일을 견딘다"며 "드라마를 보면 남편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찾을 수가 없다"며 섭섭함을 토로한다.
이 드라마의 작가 김수현씨는 "요즘 가정파괴범이라는 안티 글이 올라올 정도로 한자의 휴가사건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다"며 "젊은이들에게 부모의 노고에 대해 무심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부모한테는 자식들에게 너무 모든 것을 걸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여성학자인 안미수씨는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엄마가 했을 때, 우리는 다르게 보는 경향이 있다"며 "엄마는 언제나 우리가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전통적 어머니상이었던 여주인공이 휴가를 얻은 건 마치 기존 사회질서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가사노동에 대한 가치 인정하고 배려를
결혼 6년차 김혜정(35)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을 약속하며 1년에 한 번씩 혼자만의 여행을 약속받았다. 혜정씨는 매년 일주일 정도 아이도 두고 혼자만의 여행을 다녀왔다. 그녀는 일주일의 여유 덕분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출판가에서도 주부들끼리 혹은 여자 혼자서 떠나는 여행에 대한 책들을 내놓으며 이런 분위기를 지지하고 있다. 결혼 10주년 선물로 남편에게서 받은 20일간의 휴가. 신현주(37)씨는 이 휴가를 활용해 17년지기 단짝 친구와 멕시코를 다녀왔고 여행기 '롤리와 까딸리나의 멕시코 여행'을 펴냈다. 김수영(41)씨는 '열대 오지에서 보낸 한 달 안식월'이라는 책에서 혼자 떠난 필리핀의 오지 뚜게가라오와 라굼의 이야기를 담았다. 얼마 전 EBS 다큐 프라임에서는 '결혼 안식 휴가'를 주제로 결혼 후 혼자 여행을 떠나는 아내들을 조명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기도 했다.
부산여성단체연합 이재희 대표는 "여성단체에선 오랜 세월 가사노동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라는 캠페인을 진행해 왔다"며 "직장의 월차, 연차 개념처럼 주부들도 '가사노동'에서 벗어나 휴가를 받아야 한다. 어머니 혹은 며느리에게 휴가를 주는 걸 이해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