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3대 작곡가의 피아노 3중주
김주영 피아니스트
지난 6일 강원도 평창 대관령 음악제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 첼리스트 김두민과 함께 드뷔시와 차이콥스키 피아노 3중주를 연주했습니다.
이번 대관령 음악제는 전 공연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뜨거운 호응 속에 끝났습니다.
75세인 백건우는 풍부한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노련함으로 팀을 이끌며 실내악의 정수를 보여줬습니다.
평창대관령음악제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중간)가 바이올리니스트 클라라 주미 강(왼쪽), 첼리스트 김두민(오른쪽)과 함께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콥스키의‘피아노 3중주’를 연주하고 있어요. 차이콥스키<①>는 이 곡을 선배 루빈시테인<②>을 추모하며
작곡했고, 후에 차이콥스키가 사망하자 라흐마니노프<③>도 피아노 3중주를 만들어 차이콥스키에게 헌정했죠.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1840~1893)의 피아노 3중주(피아노 트리오 a 단조 작품 50)는 풍부한 악상과
거대한 스케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걸작입니다. 3중주(三重奏·Trio)는 악기 3대가 함께 연주하는 작품을
가리키는데, 피아노 3중주는 피아노를 기본으로 바이올린과 첼로 등이 어우러집니다. 현악 4중주는
현악기 4개가 같이 등장하는 작품이고요. 차이콥스키 말고도 다른 러시아 유명 작곡가들도 피아노 3중주를
만들었는데 다들 사연이 있습니다.
https://youtu.be/jNFVR-ZTlyA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며'
이 피아노 3중주는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추억하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그 예술가는 다름 아닌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다.
모스크바 음악원을 설립하면서 초대 원장이기도 했던 그는 차이코프스키를 이 학교에 불러 교편을 잡도록 주선한 장본인이었으며
간혹 피아노 협주곡 등에 대해 혹평을 아끼지 않기도 했던 스승이었다. 1881년 루빈스타인의 작고 소식을 들은 차이코프스키는
그때까지 한 번도 쓰지 않았던 피아노 3중주의 형식을 빌려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을 하였다.
제1악장 Pezzo Elegiaco 차이코프스키의 우울한 성격에 더해 러시아적 우수와 서정적인 선율이 첼로, 피아노, 그리고 바이올린에
의해 번갈아가면서 선보이고 있는 우아하면서도 비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악장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섬세하고 염세적인
성격과 루빈스타인과의 애틋한 추억에 의한 상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제2악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제1부 Theme and Variations 1-11 모스크바 교외에서 들은 농민들의 노래에서 유래한
마주르카와 왈츠 등 다양한 변주를 노래하고 있다. 제2부 Variation Finale Et Coda 힘차고 웅장한 변주로 시작하면서
그 비극적 어두움이 절정을 이룬 후 마지막에 피아노가 잔잔한 장송행진 리듬을 연주하면서 막을 내린다.
1882년 발표된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3중주에는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위대한 예술가란 차이콥스키의 절친이자 선배였던 니콜라이 루빈시테인(1835~1881)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니콜라이는 형 안톤과 함께 형제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합니다.
모스크바 음악원 설립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루빈시테인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탄생 당시 그와
갈등을 빚었어요.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루빈시테인에게 들려줬는데, 루빈시테인은 곡이 미숙하고 난해하다며
다시 쓰라고 지적했죠. 자존심이 상한 차이콥스키는 곡을 고치지 않았고, 둘 사이는 멀어졌어요.
몇 년 후 루빈시테인이 자기 의견을 철회하고 곡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둘은 화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881년 3월 루빈시테인이 46세 젊은 나이에 프랑스 파리에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충격을 받은
차이콥스키는 그해 11월 이탈리아 로마로 여행을 떠났고, 이듬해 2월 그곳에서 선배의 죽음을 애도하는
피아노 3중주를 완성합니다.
이 곡은 피아니스트였던 루빈시테인을 기리기 위해 작곡한 만큼, 피아노 기교가 매우 화려하고, 연주 시간이
50분이 넘어요. 두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첼로의 슬픈 선율로 시작하는 1악장은 피아노·바이올린까지
세 악기가 연주하지만 마치 오케스트라 음향 같은 웅장함이 느껴지고 전반적으로 비장한 기운이 넘쳐 흐릅니다.
2악장은 규모가 큰 변주곡으로, 차이콥스키 특유의 낭만적이고 달콤한 서정성이 돋보입니다.
마지막은 1악장에서 나왔던 첫 번째 선율을 세 악기가 포르티시모(매우 강하게)로 연주하면서 클라이맥스를
형성한 뒤 장송(葬送) 행진곡풍 리듬이 비극적 여운을 남기며 조용히 끝을 맺습니다.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콥스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3중주와 비슷한 창작 동기와 구성을 지닌 곡이 바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의 피아노 3중주 2번 d 단조 작품 9입니다. 러시아 태생으로 미국에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라흐마니노프는 낭만적 선율이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과 독주곡들로 유명하죠.
https://youtu.be/qkSPBZoZSjI
그는 스무 살 때인 1893년 10월 초, 대선배 차이콥스키를 만나 작곡에 대한 조언을 듣고 자신의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작품인 오페라 '알레코'에 대한 격려의 말도 들었어요.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1월 6일 차이콥스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라흐마니노프는 상심했습니다.
그는 막 작곡을 시작했던 자신의 두 번째 피아노 3중주를 차이콥스키에게 바치기로 결심했어요.
그리고 작품 분위기와 구성을 차이콥스키가 루빈시테인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피아노 3중주곡과 비슷하게
맞추었죠. 모데라토(보통의 빠르기)로 연주되는 1악장은 정열적이면서도 깊은 슬픔에 잠겨 있고, 변주곡으로
구성된 2악장은 피아노가 주도적으로 활약하는데 조(調)와 템포 변화가 흥미롭습니다.
마지막 3악장은 매우 격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해 스케일을 키우고 끝부분에선 차이콥스키의 작품처럼 첫머리의
멜로디가 다시 등장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두 곡의 피아노 3중주를 남겼는데, 둘 다 '비가(悲歌)풍의 트리오'
(Trio Elegiaque)라는 이름이 붙어있어요. 이 중 두 번째 3중주가 바로 차이콥스키를 추모하며 만든 곡입니다.
솔레르친스키 추모한 쇼스타코비치
20세기 러시아의 저명한 작곡가였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피아노 3중주 2번 e단조 작품 67
역시 친구의 죽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작곡가의 마음이 담겨 있어요. 쇼스타코비치의 절친이었던
이반 솔레르친스키는 탁월한 음악학자이자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예술 감독이었어요.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을 1년 앞둔 1944년 2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비보를 들은
쇼스타코비치는 이미 작곡을 시작한 자신의 두 번째 피아노 3중주를 솔레르친스키에게 바칩니다.
https://youtu.be/ZoSVI1SUcfo
위대한 음악 작품 중엔 기쁘고 행복한 감정 속에 탄생한 것도 있지만 러시아 작곡가들이 남긴 피아노 3중주
처럼 슬픔 속에 탄생한 곡들도 있답니다. 이 곡들에 스며 있는 추모의 감정을 되새기며 감상해보길 바랍니다.
[도쿄올림픽서 등장한 차이콥스키]
최근 막을 내린 도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면 국가(國歌) 대신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울려 퍼졌어요. 러시아는 자국 선수들 대규모 도핑 스캔들로 국가 차원의 올림픽 출전권을
박탈당해 선수들은 러시아 올림픽 위원회(ROC)라는 이름으로 출전해야 했죠. 이 때문에 시상식에서도
국가를 틀 수 없었습니다. 결국 국가 대신 가장 잘 알려진 러시아 음악인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1분 30초 분량으로 편곡해 틀었답니다. 루빈시테인이 처음에 평가절하했던 바로 그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