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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20100606 역사학과 강혜진(姜惠眞)
서지사항
- 저자: Edward Hallett Carr (에드워드 핼리트 카)
- 제목: 역사란 무엇인가
- 출판사: 까치글방
- 번역: 김택현(성균관 대학교 사학과 교수)
- 출판 연도: 1997
- 개정판 연도: 2006 (22쇄)
저자에 관하여
저자인 E.H.Carr는 1892년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대학졸업 후인 1916년에는 외무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1936년까지 공직자, 그리고 정치인의 삶을 살았다. 사임 후 그는 웨일스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교수가 되었고, 그 이후로 옥스퍼드 대학교 등에서 계속 교수직을 맡았다. 1948년에 그는 국제연합(UN) '세계 인권선언'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들어가기에 앞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논술학원 선생님의 권유로 이 책을 샀다가 몇 장 읽지도 않고 내버려둔 기억이 있다. 아마도 고등학생 수준에서 이 책을 읽기에 다소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다. 특히 주장의 근거를 대기 위해 사용한 예시들이 너무나 어려웠던 기억으로 인해 더욱 더 읽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계속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 과제를 시작하면서 다시 읽게 되니, 내용이 어려운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들을 이해하며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도 생겼다.
이 책의 저자인 E.H.Carr (Edward Hallett Carr)는 일반적으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남긴 사람으로 유명하다. 나 역시 국사교과서에서 사실로서의 역사(역사의 객관성)를 중요시한 랑케와 기록으로서의 역사(역사의 주관성)를 중요시한 크로체를 비교하면서 이 두 의견을 주관성 쪽에서 절충한 Carr의 사관을 배웠던 기억이 난다.
본론으로..
저자는 이 책을 총 6장으로 나누어 자신의 역사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6장을 통해서 찾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실은 이미 저자는 역사관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제 1장-역사가와 그의 사실’에서 저자는 전반적으로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열렬히 주장하던 랑케로 대표되는 실증주의자들에 대하여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랑케는 '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 거짓이나 꾸밈없이 정확해야 하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이지만, 꼭 그것에 얽매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역사가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 되는 것들을 추려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중시한다고 해서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또한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숭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모든 역사란 사유의 역사라고 할 수 있으며, 역사란 역사가가 그 사유를 정신 속에 재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역사가의 역할은 매우 강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가는 과거에 얽매여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장은 앞으로 저자가 이야기할 자신의 역사관에 대한 전체적 개관을 했다고 봐도 무방한 듯하다. 이 부분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제 1장은 Carr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제 2장-개인과 사회’에서는 역사가(개인)와 사회에 대한 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1장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역사서술에 있어 역사가의 임무는 매우 중요하다. 이 책 전반적으로 저자는 역사가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가도 한 사회에 속한 개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역사가가 살고 있는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개인이 사회의 영향을 받느냐, 사회가 개인의 영향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불거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며, 서로를 조건 짓는다.즉, 역사가가 살고 있는 그 사회의 가치관이 역사 속에 그대로 반영 된다는 것이다. 아주 유명한 예시이지만 예를 들자면, 1894년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킨 사건을 동학 농민 운동, 동학 혁명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 것은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졌느냐에 따라 명칭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역사가도 사회의 구성원이고, 또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 2장에서는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를 연구하고, 또 역사가를 연구하기 전에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할 것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저자는 역사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사이의 대화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역사의 기능을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이중적인 것으로 설명했다.
한편으로, ‘제 3장-역사, 과학 그리고 도덕’ 에서는 역사를 과학, 도덕과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즉, 저자는 역사와 과학에 대한 잘못된 오해에 관하여 검토하고 있다. 첫째로 역사는 특수한 것만을 다루지만 과학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다룬다는 오해에 대하여 저자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역사가의 진정한 관심은 특수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안에 있는 일반적인 것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를 다룬다. 두 번째로 역사가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오해에 대하여서도 일반화의 진정한 핵심이 우리가 일반화를 통해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고자 한다는 것에 있다고 말하며 반박하고 있다. 즉 다른 사건으로부터 이끌어낸 교훈을 다른 일련의 사건들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저자는 역사가 예견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일반성과 특수성, 보편성과 독창성을 구별하는 데에서 그것을 반박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네 번째로 역사가 인간이 인간을 관찰하기 때문에 주관적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관점은 모든 관찰에 불가피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한다. 다섯 번째로 역사는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와 도덕의 관계는 아주 복잡하며, 아예 역사가와 도덕가의 입장 자체가 다르다고 반박하고 있다. 또한 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역사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고 학문적으로 비슷한 특성을 지니게 된다고 설명하며 잘못된 오해에 대하여 반박하고 있다.
‘제 4장-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에서는 역사가가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대답하고자 하는 방식들을 검토해 보고 있다.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는 언제나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기능주의 연구방법’이 우리들을 “왜?”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도록 이끌고 있기도 하다.
일단 사건의 원인을 제시해야만 할 때 원인의 문제에 대한 역사가의 연구방법의 첫 번째 특징은 대체로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원인들을 제시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여러 가지 원인을 연구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즉시 우리를 두 번째 특징으로 이끈다고 한다. 진정한 역사가라면 자신이 수집한 원인들의 목록을 앞에다 놓고서는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든가, 그들 간의 상호관계를 고정시키게 될 원인들의 일정한 위계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어떤 원인이나 어떤 범주의 원인들이 ‘결국에 가서는’ 또는 (역사가들이 즐겨 쓰는 말투를 따르면) ‘최종적인 분석에 따라서’ 궁극적인 원인, 즉 모든 원인들의 원인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직업적인 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곧 연구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이끌어 내는 원인을 통해서 알려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역사가가 제시하는 원인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셈이다.
또한 이 장에서는 결정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결정론이란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이 있고 그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원인들 중에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면 다른 식으로는 발생할 수 없었을 것 이라는 신념이다. 역사가도 인간의 행동에는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원인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원인을 연구하는 것이야 말로 역사가의 특별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가가 인간의 행위 가운데 결정된 측면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는 우연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역사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의 근거는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어려운 문제라고 한다. 그것은 역사란 전체적으로 우연의 계속이라는 즉, 우연의 일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가장 뜻밖의 원인에서만 유래하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이론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우연성을 강조하고 있지도, 경시하고 있지도 않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비록 역사에서의 우연의 역할이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지나치게 과장되어 왔지만 역사에서의 우연이 단지 우리의 무지의 표지일 뿐이라는 견해도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역사에서의 우연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전혀 다른 사고방식 속에서 추구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제 5장-진보로서의 역사’에서는 먼저 진보의 개념과 그 전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역사의 법칙이라는 것도 자연의 법칙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진보에 일정한 출발점이나 종점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셋째,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역전과 일탈과 중단 없이 곧장 일직선으로 전진한 그런 종류의 진보를 결코 믿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가장 급격한 역전조차도 반드시 그 믿음에 치명타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의 시기뿐만 아니라 퇴보의 시기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에서 관찰할 수 있는 진보는 그 어떤 것이든 시간상으로나 지역적으로나 확실히 연속적이지 않다는 주목할 만한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다. 넷째는 역사적 행위의 측면에서 진보의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라는 것이다. 진보라는 단어는 그저 추상적인 단어에 불과할 뿐이며, 역사에서의 진보는 종점에 도달했다고 믿기도 어렵다.
이 장에서는 진보에 대한 논의와 함께 역사의 객관성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다. 인류가 추구하는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마다 역사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객관성이라는 말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 오로지 이 세 시기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흔히 어느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혹은 이 역사가는 저 역사가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중요성에 관한 올바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뜻일 뿐이다.
‘제 6장-지평선의 확대’에서는 Carr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고 또한 역사학의 미래에 관해서 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저자는 역사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과정으로 제시했고, 역사가도 그 과정 안에서 움직여 나간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은 저자에게 이 시대의 역사와 역사가의 위치에 대하여 결론적인 의견을 말하도록 하게 했다. 그래서 마지막장인 6장에서 의견의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다. 역사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에는 깊이에서의 변화와 지리적 범위에서의 변화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두 변화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지금이 자기의식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므로 역사가는 언제든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고, 또한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맺음말
솔직히 이 책을 읽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음은 물론이고, 한 문장 한 문장 해석하기에 바빴다. 물론 처음에 몇 장 읽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두 번째로 읽는 건데 이렇게 어렵게 읽어나가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렇지만 E.H.Carr의 역사관을 조금 더 심층 깊게 알 수 있었다는 데에 이번 과제의 의의를 두어야겠다.
나는 저자의 말처럼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Carr의 의견만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역사에는 정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랑케와 같이 실증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크로체처럼 주관적 관점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가의 책임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그가 어떻게 기록하는지에 따라서 같은 사실을 다르게 기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동일 저서에 가서 토론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