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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웅, 「조나단에드워즈의 성령론」을 읽고...
원래 나는 2차 자료를 잘 안본다. 2차 자료는 해석과정에서 본 저자의 진정한 의도를 해칠 위험이 있고, 원 저술의 감동을 따라가기가 힘들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참고서라도 원작을 살피는 것만큼은 못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이 책은 정말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에드워즈의 여러 저술들의 명문장들을 주제와 문맥에 따라 정확히 인용하였고, 객관적인 비평 또한 기록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 저자의 원작을 읽는 감동 또한 놓치지 않게 해준다. 저자는 칭찬일색으로 조나단에드워즈를 말하지 않는다. 그의 삼위일체 신학의 일부 문제점에 대해서도 논하고, 그가 23년간 목회하면서 있었던 실수와 허물들 또한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칼빈주의자였다고 평가하며 그의 목회과정에서의 과오는 가시적인 성도다움의 문제와 교회 개혁의 문제가 주요 동기로써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을 체계적으로 논구한다. 보통 교의학에서 “성령론” 이라고 하면 성령의 사역을 “신자에게 구원을 적용하시는 분으로서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책은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적 성령의 사역’, ‘구속사적 성령의 사역’, ‘공동체 속의 성령의 사역’의 이해에 대해서도 살핀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되어 있으며 목차는 다음과 같다.
1장. 서론 : 연구동기, 에드워즈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 등
2장. 에드워즈 성령론의 역사적인 배경
3장.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4장. 구속사적 성령론
5장. 개인 속의 성령의 사역
6장. 공동체 속의 성령의 사역
7장. 결론
■ 1장 서론에서 연구동기와 목적을 보면 왜 이 연구서가 10여년이 지난 뒤에도 고급지게 양장으로 재판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일단 저자는 조나단에드워즈를 신앙의 멘토로 삼고 사랑하는 자다. 내가 주어 들은 바에 의하면 박사학위 논문은 논문을 쓴 뒤에도 10년 이상 연구할 것이 있는 주제로 선정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연구대상으로 탁월한 경건의 사람과 아주 광범위한 주제를 선정했다. 저자가 이 연구의 한계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방법 또한 감동적이다.
■ 2장에서는 에드워즈의 성령론의 역사적 배경을 다룬다.
그러기 위해서 에드워즈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고 그의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배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다룬다. 그점에서 그의 외조부 솔로몬스토다드와 아버지인 티모시에드워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에드워즈는 다른 많은 청교도들보다도 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 3.장에서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적 성령론을 살핀다.
저자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출간된 것은 그의 출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1903년이며, 예일대 교수였던 조지피셔에 의해서 빛을 보게 된 그의 삼위일체론은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 니케아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고 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과 풍성하심과 지혜와 의와 진리 등을 드러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셨으며, 자기 자신을 밖으로 전달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주장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아니라,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신적 본질 안에서의 복수의 위격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했다.
(그러나 정요석 목사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을 정통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보는 것같다. 2011년 출간된 그의 저술「삼위일체 관점에서 본 조나단 에드워즈의 언약론」의 머리글에서 “에드워즈가 전통적 개혁주의의 입장과는 달리 유비론으로 삼위의 존재방식을 보는 것을 확인했고, 이러한 전제 위에서 행한 분석이 그의 언약론과 준비론 등에까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라고 말한다. 참고해서 읽으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같다.)
■ 4장에서는 에드워즈의 구속사적 성령론을 다룬다.
에드워즈는 조직신학 분야에 대작을 남기지 않았다. 그 시절 교과서였던 윌리엄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 프랑수아 투레티누스의 「변증신학강요」, 페터루스 판 마스트리히트가 쓴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신학」등의 교과서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가 만년에 이르기까지 저술하고자 열망했던 대작은 새로운 형태의 신학 교본인 「구속사」였다. 에드워즈는 구속사역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 이후부터 세상 끝날까지 수행하시는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구속사역의 시기를 크게 3가지로 구분하는데 1)인간의 타락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성육신까지의 기간, 2)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그의 부활까지의 기간, 3)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세상 끝날까지의 기간 등으로 삼분하였다. 김남준 목사는 존오웬의 「Biblical theology」가 밖이 잘 보이는 경비행기를 타고 아래를 조망하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작은 배를 타고 아마존 깊숙한 강기슭을 다니면서 나무 하나, 생물들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보는 것 같다고 평한 적있다. 존오웬의 저술이 조속히 번역되기를 바란다.
■ 5장에서는 개인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다룬다.
보통 조직신학적 성령론의 주제들(구원의 서정, 중생, 회심, 믿음, 칭의, 성화, 영화)가 이 장의 내용에 속한다. 조나단에드워즈의 성령론의 특징은 성령을 신자에게 구원을 적용하시는 분이라고 보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선물 그 자체로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그에게 성령을 주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회심과 중생은 동의어다. 저자는 그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넘겼던 「원죄론」에서 회개, 회심, 중생 등을 동의어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또한 5장에서 저자는 에드워즈의 주저 「신앙감정론」에서 나오는 참된 신자의 은혜로운 감정 12가지 표지를 기술한다.
※ 회심의 준비론에 대한 에드워즈의 입장
에드워즈는 “영혼의 구원이 추구되어져야 하는 방식”이라는 설교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속에서 지시하시는 모든 의무들의 지속적인 준수의 방식으로 구원은 추구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 의해 수행되어져야 할 특별한 의무들이 무엇인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와 같은 순종이 구원을 얻게 하는 공로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 6장에서는 공동체 속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다룬다.
이 장은 에드워즈가 1742년에 저술한 「균형잡힌 부흥론」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에드워즈는 당시 일어나고 있는 대각성 운동을 보면서 부흥운동이 극단화되어 광신주의로 기울어지는 것도 목도했고, 그에대한 반동으로 부흥 전체를 부정하려는 반부흥론자들의 맹활약도 경험했다. 이 두극단적인 세력 사이에서 에드워즈는 기본적으로는 부흥을 찬성하는 입장에서 균형잡힌 부흥관을 제시하여 참된 부흥의 증진을 위해 노력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 일을 진행하심에 있어 하나님답게 행하셨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자신의 주권과 능력과 자기 충족성을 높이시며, 사람들이 의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능력, 지혜, 신중성 및 충족성을 멸시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의 교만과 많은 부패를 견제하고 꾸짖고 경계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로 역사 속에 많은 걸림돌을 섞으셔서 인간의 연학함과 허물이 많이 드러나게 하시며, 높고 명에로우며 부유하고 학식있는 자들에게보다 주로 보통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고 최대 최고의 은총을 베푸시며 그들을 자신에게 더 가까이 오게 하신다.(슥 12:7)” ----------- 364p.
■ 7장 결론
결론에서는 앞선 내용들을 요약하며 조나단에드워즈의 신학이 신학의 부재와 잘못된 부흥주의로 물든 한국교회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음을 밝히고 본서의 한계와 남은 과제들 또한 밝히고 있다. 본서가 에드워즈의 주요 저술들에 제한되어 있다는 한계점과 존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들이나 존 칼빈의 신학 사상과 에드워즈의 관련성을 깊이 천착해 볼 것 등 과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 봉구생각
조나단에드워즈는 나의 롤 모델이자, 내가 배우고자 하는 스승 중 한명이다. 그는 11명의 자녀를 둔 아버지였고, 신학교 교수를 지냈고, 회중교회 목회자로 섬겼고, 마지막 생애를 인디언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가 산 시대를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내가 그를 이해하는 것은 시대적‧지리적인 한계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가졌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 그가 보여줬던 하나님나라에 대한 헌신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마직막 청교도”라는 이름답게 그는 청교도 회심론의 정점을 찍었다. 그의 나이 43세의 원숙한 신학으로 저술한 「신앙감정론」은 내가 본 그 어떠한 청교도 서적보다 회심에 대해 깊이, 정확히 다루고 있다. 누구의 말대로 그가 이 저술에서 회심론에 접근하는 방법은 집요하고 마음은 용기로 가득 차있다. 나는 이 저술을 조나단에드워즈의 “요한일서강해”라고 생각한다. 요한일서는 참된 신자들의 표지에 대해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깊게 다루고 있고 실제로 에드워즈는 이 저술에서 요한일서의 내용을 많이 언급하기 때문이다. 「신앙감정론」이 어떤 이가 참된 신자인가? 에 대한 신학적‧이론적 물음에 답한 것이라면 그가 저술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는 그 예증과 본보기를 잘 보여준다. 그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이 두 책이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상술한다.
“세상에 대해 참된 신앙과 가치를 제시하고 추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교리와 교훈을 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증과 본보기를 통한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교리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를 보여주셨고, 그 가치의 본질과 성격을 선포하셨다... 또한 가르치신 가치를 친히 실천을 통해 가장 완벽하게 보여 주셨다.”
나는 조나단에드워즈의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겨 넣고 싶다. 위 두가지 방법은 신자가 추구해야하는 경건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 나는 에드워즈가 회심의 여정을 지나면서 남긴 자서전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회심을 추구하며 때때로 많은 감동을 받았던 에드워즈는 후일에 그 시절의 자신이 가졌던 체험과 즐거움이 참된 것이 아니었다고 비평적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에드워즈는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류의 전적타락과 부패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십자가 구속과 부활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지적확신을 갖지 못했던걸까?‘ ’신자가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 지적확신 외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다른 복음이 아닐까? ’ 13세때 예일대학에 들어갔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윌리엄에임스의 「신학의 정수」를 외우다시피한 에드워즈가 지적확신을 갖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그가 원했던 것은 지적확신을 넘어서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가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닌, “나”를 위해 지셨다는 확신을 원했던 것이리라. 맛있는 음식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직접 ‘맛 보는’ 것이리라. 모든 신자는 반드시 이런 확신을 추구해야 하는 걸까? 아니, 이런 경험을 한 자만이 신자일까? 나는 과연 이런 경험을 한 걸까? 라는 물음들이 생긴다. 이런 물음들은 나의 영혼을 괴롭게도 하지만 더 높은 차원의 확신과 하나님을 더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영적 상태가 있다고 생각하면 나에게 소망이 되기도 한다. 나의 고민과 나의 마음 상함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나를 구원하며 내 영혼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으니 심판 날에 정죄를 받는다면 그분의 공의를 드러내는 일이 될것이며, 구원 받는다면 함께 산 자들과 함께 그 분의 사랑을 영원히 찬양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회심의 신령한 감각과 경험이 아니라 그 결과다. 사과나무는 반드시 사과를 열매로 맺고, 포도나무는 반드시 포도를 열매로 맺는다. 예수님께서도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신자가 자신이 신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표지는 성경이 제시하는 열매다. 이 열매 ‘맺음’이 신자가 자신의 영혼을 확신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이 열매 ‘맺음’을 확인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의 확신을 자신의 열매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둘 것이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