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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RIAN STAUFFER |
동료가 “표적”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사이에 능수능란한 소매치기가 표적의 지갑이나 카메라, 여권을 훔친다. 표적을 산만하게 만드는 행동은 원하지 않는 대화일 수도 있고, 물건 강매나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서—이곳이 소매치기의 작업장이다—의 “우연한 부딪힘”일 수도 있다. 바로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당하고 있다.
우리는 극렬 근본주의 이슬람의 위협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전통적인 제도들을 허물어버리고 새로운 이슬람의 질서로 대체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이슬람화 음모”Islamization agenda가 작동하고 있다고 일부는 확신한다. 확실히, 다수의 만행이 극단주의 이슬람의 깃발 아래에서 자행되고 있고, 실제적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진실은 다음과 같다: 가상의 “이슬람화 음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기독교의 진정한 증언과 권위를 훔치는 실제의 위협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다.
이슬람화 음모
아프리카의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나이지리아에서도 이슬람화 음모에 대한 확신이 생생하고 강력하게 살아 있다. 1980년대 초부터 나이지리아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라를 이슬람의 지령을 따르는 나라로 만들려는 음모의 가능성을 깊이 우려했다.
이러한 생각의 씨앗은 1804년 우스만 단 포디오가 주도한 지하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목표는 “쿠란을 대서양에 적시는 것”이었다. 이슬람을 나이지리아 전역에 심겠다는 뜻이었다. 단 포디오는 이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는 이것을 나이지리아의 무슬림 움마(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추구할 유산으로 남겼다. 많은 나이지리아 그리스도인들은 무슬림이 나이지리아 대통령이 될 때는 언제나 무슬림들이 그것을 이슬람화 음모를 도모하고 이슬람을 나이지리아 전체에 부과하려는 노력을 강화하는 기반으로 이용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음모이론이 바로 지금 상당한 열기를 품어내고 있는데, 그것은 현 나이지리아 대통령 무함마두 부하리가 무슬림이기 때문이다.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부하리의 과거 발언들이 그가 극단주의 무슬림임을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나이지리아 어디를 가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라를 이슬람화하려는 음모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이삭 발렌타인 올로리 목사는 “부하리가 이 나라의 이슬람화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우 두렵다”고 했다. 올로리 목사는 “이슬람의 칼의 테러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음모이론들을 퍼트리는 사람들에게 최근 풀라니 유목민들의 기독교 마을 공격 사건이나 보코하람의 만행, 나이지리아 전역에 이슬람 은행들이 들어서는 것 등은 이슬람화의 좋은 증거가 된다.
풀라니 유목민: 13~14세기 무렵에 세네감비아 지역에서 나이지리아 북부지역으로 이주한 유목민들이다. 우스만 단 포디오의 지하드 이후, 풀라니 부족은 나이지리아 북부 하우사 문화에 동합되었다. 2016년 11월 13일, 풀라니 유목민들이 나이지리아 카두나 주 카우루 기독교 마을을 공격해 주민 34명 이상을 살해했다.—CTK
최근에 동료 교수가 이러한 우려에 대한 내 생각을 알고 싶어 했다. 이슬람화 음모는 사실일 수 있다는 우려가 이 나라 공무원 사회에서도 빠르게 번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대답을 심사숙고했다. 나이지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화 음모보다 더 위험한 것—그리스도인들의 공적 삶을 갉아먹는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응답했다.
무슬림들이 세계를 이슬람화하려고 획책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내가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우리의 정치적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고 걱정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슬림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두려워한다. 오히려 이것보다 나는 현재의 나이지리아와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기독교를 특징짓는 심각한 도덕적 퇴폐와 윤리적 쇠퇴가 더 걱정스럽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패와 퇴폐, 부도덕한 생활에 빠져 있다. 우리의 가장 큰 위협은 우리 자신의 삶 속에 있는 죄이다. 그 죄—그것이 어떤 죄이든—는 실로 치명적이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집부터 청소해야 한다. 역사는 방종과 무절제 때문에 무너진 거대한 제국들과 교회들에 관한 이야기로 넘쳐 난다. 따라서 이슬람화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라는 더 큰 위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패의 늪에 빠지다
나이지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 윤리적 붕괴를 목전에 두고서 춤을 추고 있다. 공직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패하고 부도덕해서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적 증언을 해야 하는 소명을 저버리고 있다. 진실성이 결여된 그들은 강력한 도덕적, 윤리적 증인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공적 생활은 정직의 덕성을 결여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매우 종교적인 나라로 여겨진다. 기독교는 교회와 기도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도와 성경 읽기는 기업 이사회나 정부의 사무실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옥외 광고판은 부흥집회를 예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와 “주님께 기도하자”는 외침이 나이지리아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심지어 공적인 자리에서도,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존경 받는 가톨릭 사제 조지 에후사니는 이렇게 지적했다.
종교성과 나란히, 온갖 형태와 규모의 부패가 나이지리아에 성행하고 있다. 사무실 직원이나 검문소의 경찰관이 받아 챙기는 몇 푼 안 되는 돈부터 대규모 프로젝트 계약이 체결되기가 무섭게 받아 챙기는 거대한 뇌물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부패는 공공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계약 성사의 대가로 “뒷돈”을 요구하는 계약 공무원의 탐욕 때문이다.
그는 또한 횡령과 부정행위 같은 행동들—학생부터 고위 공직자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다—을 신앙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거나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가짜 출생증명서와 허위 주민증은 말할 것도 없고 허위 진단서까지 받는다. 세금을 회피하고, 고객에게 허위 청구서를 발행하고, 허위 회계 감사를 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이런 모든 관행들은 너무나 일반적이고 너무나 만연해서 나이지리아의 많은 젊은이들이 선악,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어떤 이슬람화 음모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더 치명적이다.
번영의 부패
20세기에 아프리카 전역에, 그리고 특히 나이지리아에, 토착 교회들이 폭발적으로 세워졌다. 나이지리아 내전(1967~70) 후, 그 갈등을 종말의 징표로 본 그리스도인들은 나이지리아 전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대규모 캠페인을 시작했다. 학생연합회들과 선교운동들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다. 나이지리아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에서 일어났던 것을 재현하기로 결심했다: “세상을 소란하게” 하기로(행17:6).
유감스럽게도 이야기는 변질되었다. 주류와 오순절파 기독교 둘 다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여전히 열심을 내고 있지만, 건강과 부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프리카와 더 넓게는 세계 기독교의 얼굴을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목회자들과 교인들은 지금 이 세상에 있는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민족들에게 다가가는 것보다 아름다고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데 더 관심이 많다. 많은 목회자들이 물질적 소유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자가용 비행기를 그것도 여러 대를 소유하고 있는 목사들도 있다! 기독교적 도덕 가치의 부패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주의와 쾌락을 숭배하게 되었다. 우리의 진짜 신은 이제 맘몬이다(마6:24). 우리는 미국인 신학자이자 사회비평가였던 라인홀드 니버가 자기애, 이기심, 권력에의 의지라고 불렀던 것에 헌신하고 있다.
어느 나이지리아인은 이 나라 교회를 이렇게 비판한다.
도둑들에게 교회의 앞자리를 내주었다; 십일조와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를 기준으로 대우가 결정된다; 목회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원하는 헌금 액수를 대놓고 지정하고, 교인들은 그 액수를 가장 먼저 충당하는 사람이 되어 축복을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전력질주 한다.…목회자들은 번영과 행복은 교인들이 십일조와 헌금을 얼마나 충성되게 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관념을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퍼뜨린다; 한 사람이 소유하는 물질적 소유물의 양이 이제 그 사람의 영적 복지의 지표로 여겨진다.
더욱 더 심한 문제는 사술邪術이다. 2010년에 이 심각한 현상을 조사하면서, CNN은 스텝핑 스톤즈 미니스트리즈의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인 럭키 인양을 인터뷰했다. 이 단체는 버려진 아이들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종교 지도자들이 부모들의 무지를 이용하여 돈을 뜯어낸다. 그들은 당신 아이는 마녀인데 아이를 교회에 데려오면 우리가 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아이를 구해내지 못한다.…부모들은 목사에게 다시 가서 말한다. “왜 당신은 우리 아이를 구하지 못했나요?” 그러면 목사는 말한다. “이번 구원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아이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었으니 그 아이를 내다버려야 한다.”
CNN은 대부분의 목사들이 아이들을 구해 주는 대가로 돈—어딜 가나 그 돈은 300달러에서 2000달러까지 되었다—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처럼,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화에 맞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자고 말하지만 동시에 깊은 부도덕성과 물질주의와 이교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순의 길을 걷고 있다.
아프리카 기독교의 미래
2015년에 퓨 리서치 센터는 2050년까지 전 세계적인 종교 환경의 변화를 연구한 대규모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기독교는 세계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800파운드짜리 고릴라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 “그 예리함을 상실하고 있다.” 이 연구 보고서는 2050년에 이르면 기독교는 이슬람을 근소하게 앞설 뿐이라고 내다본다. 그리고 2070년이 되면 이슬람이 기독교의 세계 제1위 종교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현재 아프리카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라고 해서 이것이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항상 변화의 길 위에 있었다. 그렇다. 기독교는 점차 아프리카 종교가 될 것이다. 그러나 2011년의 연구에서 퓨 리서치 센터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기독교의 역사적 움직임을 입증하고, 그러한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나는 이슬람이 기독교를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의 충성심을 높이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고가 교회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여 집을 바로 세우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슬람과 경쟁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부르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습니다.”(벧전1:16) 사실, 나이지리아에서 기독교 신앙은 공적인 불명예와 악평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의 자제력의 결여와 경건하지 못한 생활과 불성실함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하셨다(요14:6).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힘과 권위의 원천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바로 그 힘이시다(엡1:18-20). 우리는 사탄과 마귀의 억압을 물리칠 수 있고, 육의 일을 무너뜨리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몰입을 치유하고, 그리고 인류의 번영을 보장하는 정의로운 구조와 제도를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능과 권위를 주셨으니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실패의 핑계거리도 없다. 우리에게는 나이지리아와 온 세상의 사회적, 영적 변혁을 위한 비옥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다.
이슬람화 음모에 대한 두려움은 실제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그리스도를 닮아감, 거룩한 생활, 근면, 그리고 도덕적 성실성—으로부터 우리의 주의를 흩뜨리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슬람의 확산을 걱정한다면, 우리가 이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도 똑같이 걱정해야 한다. 공포를 전파하는 음모 이론 때문에 정작 진짜 위협을 깨닫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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