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해지기 연습
정태갑
자다가 이가 아파 몇 번이나 잠을 깼다. 아픈 순간을 참으려니 겨드랑이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열흘 전 어금니가 욱신거려서 치료하고 일주일 정도 약을 먹었더니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밤부터 다시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병원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접수하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의사 선생님이 “오셨네요” 하고 인사를 한 후 치료를 시작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데 선생님이 웃으며 “아프면 오십시오.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아프면 해결해 주겠다는 말이 너무 고마워 “감사합니다.” 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더니, 선생님도 내가 허리를 굽힌 만큼이나 숙였다.
내 연배로 보이는 의사 선생님과 만남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가 아파 동네 어느 의원에 갔는데, 이를 뽑고 이런저런 치료를 하려면 300만 원 가까이 든다고 했다. 충격을 받고 다른 치과에 갔더니 “이를 빼지 말고 일단 살려봅시다.”라고 했다. 선생님의 말은 마음속 먹구름을 한순간에 흩어버리는 바람 같았다. 얼마간 치료를 받고 약을 먹었더니 아픈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로 자연스럽게 그 병원의 단골이 되었다.
아내는 나보다 먼저 그 치과에 다녔는데 선생님이 친절하다는 데에 나와 의견이 일치한다.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말 한마디는 치료를 앞둔 사람의 두렵고 긴장된 마음을 풀어준다. 나는 한때 의사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면-내가 부고장을 받을 리는 없지만-찾아가서 세상에 계실 때 치료를 잘해주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사람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행동은 거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을 보고 미소 짓는 것, 말 한마디 부드럽게 건네는 것, 길 잃은 사람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몇 걸음 같이 가 주는 것, 두서없는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주는 것,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주는 것. 하나 같이 작고 단순한 행위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사람들은 친절을 바라지만 누구나 친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 친절함은 개개인이 갖는 삶의 자세 또는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친절한 사람은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을 호의로 대하고, 잘 모르는 사람과도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하며, 남에게 뭔가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오래전 어느 책에서 본 택시 기사 이야기는 지금도 울림을 준다. ‘그 택시 기사는 늘 웃음 띤 얼굴이었다. 어느 날 그의 택시를 즐겨 타는 사람이 택시 기사가 운전이 즐겁다고 한 말을 떠 올리며 물었다. “아직도 즐거우십니까?” 택시 기사는 그 사람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그와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어떻게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제 아내가 죽은 것은 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가 손님에게 불친절하게 대하겠습니까?”
몇 달 전, 외출한 아내가 전화로 태우러 와 달라고 했다. 서둘러 나가 아내를 태워 오는데 “당신 자다가 전화 받았어?”라고 했다. “아닌데!” 하면서 아내가 이전에도 그런 말을 했다는 기억이 났다. 건성으로 전화 받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처지를 바꿔 누군가에게 전화했을 때 상대방이 성의 없이 전화 받으면 다시는 전화하고 싶지 않을 성싶다. 친구 중에 한 녀석은 전화 받을 때 도레미 음계로 치면 ‘도’음으로 말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때는 한번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든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나도 ‘도’음으로 전화 받은 때가 적지 않은 것 같다. 생각은 꼬리를 물어 ‘나는 친절한 사람인가’에까지 이르렀는데, 결론은 ‘친절한 사람이 못 된다.’였다.이제부터라도 남에게 친절해져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친절이라고 하면 미소 띤 얼굴, 상냥한 말씨가 떠오른다. 밝은 표정과 부드러운 말은 모든 친절한 행동의 시작인 것 같아서 우선 미간 펴기, 입꼬리 당기기, 음계의 ‘미’음 소리내기를 연습해 보기로 했다. 거울을 보며 미간을 펴고 양쪽 입꼬리를 당겨보니 표정이 훨씬 좋아 보였다. ‘미’음 소리내기는 ‘미’음 정도로 높여서 말하자는 것인데, 단체 사진 찍을 때 신호에 따라 다 같이 “김치”, “치즈”, “스마일”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찌푸린 내 얼굴은 남이 보기에 좋지 않지만, 내가 보아도 싫다. 내가 한 말은 남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말을 한 본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좋은 말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지만, 거친 말을 내뱉고 난 후에는 기분이 좋지 않다. 환한 얼굴과 다정한 말은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어느 종교 지도자의 미소가 떠오른다. 따뜻하고 편안하다. 평생 ‘사랑’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기에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으리라. 닮고 싶은 미소다.
외출 준비를 하며 친절해지기 연습을 한다. 미간 펴기 한 번, 입꼬리 당기기 세 번, ‘미’음 소리내기 두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