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과 휴일, 남의 혼사에 참석할 때마다 ‘잔칫집 술과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으니 즐거운 날’ 또는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어 영광’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적도 있다.
모처럼의 휴일에 나만의 귀중한 시간을 남을 위해 써야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었다. 갑작스런 청첩을 문자메시지를 통해 받고 계획했던 여행을 포기한 적도 있다. 혼례식은 신성한 의식이다. 인간대사다. 예식장이 우선이란 생각에 개인적인 사정은 뒤로 미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른 바 ‘길일(吉日)’에 많게는 3~4곳 중첩될 때는 가족을 동원하고도 안 되면 부득이 축전과 함께 우편환을 이용할 때도 있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원칙이랄까, 변함없이 지키려고 노력해온 것이 있다.
아무리 번거롭고 힘들어도 남의 혼사에 참석할 때는 불만스런 내색을 하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과거 공직에 있을 때, 직원들이 우편물을 가져다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또 고지서 날아 왔네요.”
남의 청첩장을 건네주면서 농담으로 던지는 말이었지만, 왠지 듣기 거북해서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그런 말 쉽게 하지 마, 자식을 둔 부모는 그런 말 농담이라도 가급적 안하는 게 좋아. 금방 자신에게 닥쳐올 문제거든! 청첩이란 ‘예(禮)’야, 보낼 분에게는 보내야 하는 격식이요 절차야, 꼭 보낼 분에게 안 보내는 것도 결례거든.”
내가 이렇게 말하면 후배 직원은 ‘저 이는 자식 혼사가 가까워 오는 모양이로군!’ 생각했을 것이다. 맞다. 나만 그런가. 자네도 마찬가지야. 아무리 ‘작은 결혼식’을 조촐하게 치른다고 해도 자넨 청첩도 내지 않고 혼자 큰일을 치를 건가?
세월은 참 빠르다.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 바로 내 일이 돼 코앞에 닥쳤다. 인근 우체국에 가서 ‘요금별납’ 우편물을 발송하고 나니, 까닭 모를 두려움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경사스러운 일에 남들 다 보내는 청첩을 보내면서 나는 왜 이런 감정일까. 마치 남몰래 쓴 연애편지를 누군가에게 들켜버린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하였다.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식들을 결혼시켰을까?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평범한 그분들처럼 수첩과 비망록을 꺼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한 분 한 분과의 아련한 추억을 더듬고, 크고 작은 인연의 실타래를 새삼 풀어 보았다. 그분도 잊지 않고 나와의 각별했던 추억을 기억해 주실까? 내가 생각하는 것만치 그분도 나와의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고 계실까? 소식도 없다가 갑작스럽게 자식 혼사에 청첩을 보내왔다고 혹여 씁쓸한 표정을 짓지는 않을까.
청첩장을 뜯어보면서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지, 설렘보다는 두려운 마음으로 상상해 보았다. 내 청첩을 받고 “이 친구도 드디어 며느리 보는군. 제백사(除百事)하고 축하해 줘야지”라면서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고 있을 다정했던 옛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경사가 있을 때는 꼭 연락하라”고 따뜻한 인정으로 당부했던 옛 직장 상사의 얼굴도 떠오르고, 남달리 따뜻한 사랑을 주셨던 문단의 어르신도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정중하면서도 아름다운 인사말은 무얼까, 감사하는 마음만 가득 담긴 한마디 인사말은 무엇일까, 우체국 창구 직원에게 청첩장을 넘겨주고 나서 나는 벌써 설레는 가슴으로 그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식을 키워 짝을 맺어주는 ‘생애 가장 성스럽고 가슴 벅찬 날’을 맞이하면서 이런 상상이 ‘나만의 착각’이 아니길 바랐다. ‘작은 결혼식’을 치르자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감안하면 가족끼리만 모여 ‘비밀 결혼식’ 치르듯 해야 한다.
당신 자녀 혼사에 나의 소중한 주말을 반납하고 힘들게 찾아다녔으니, 당신도 꼭 참석해 주길 바라는 것은 나만의 욕심이다.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살았던 처지라서 청첩을 보냈으니 양해를 바라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다. 그래서 혼주의 마음은 무겁다.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마음의 부채(負債)’다. 평생 갚아야 할 빚이다.
결혼문화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닥치면 과감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 부채인줄 알면서도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 인간사 순리인가, 버릴 수 없는 풍습인가. 고민해 보지만 지혜로운 답이 나오지 않아 밤새워 고민한다.
절제와 겸양으로 전래의 미풍양속은 지키되, ‘나만의 착각’에 빠지지 않고 하객을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중히 맞는 게 최소한의 양심이요, 도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2012년 11월 29일)
※ 아들 결혼식은 이 글을 쓰고 나서 이틀 후인 2012년 12월 1일 치렀습니다. 그 날의 셀렘과 긴장감은 두고 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첫댓글 문득 유년시절 고향 마을에서 3박4일 동안 전통혼례 모습을 목격했던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대전에도 전통 혼례식장이 있습니다. 드레스가 아닌 전통혼례복을 입고 야외에서 예식을 하는데 특별해 보였습니다. 전통 혼례식이 오히려 특별해 보이니, 결혼풍습도 많이 변했습니다. 요즘은 주례 없는 예식도 있더군요. 허례허식을 벗어나기 위한 작은 결혼식은 긍정적이나 혼례의 기본 의식은 지켰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네. 저도 궁극적으로 직계 가족끼리만 작은 결혼식을 추천합니다.
저도 작은 결혼식에 공감합니다. 미풍양속은 존중하되, 과도한 허례허식은 줄여 나가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