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 가수 꿈꿨던 밴드부 소년... 22세에 세계 클래식 콩쿠르 톱 찍었다
김태한, 세계 3대 콩쿠르
퀸 엘리자베스 대회 정상에
브뤼셀(벨기에)=정철환 특파원 김성현 기자 입력 2023.06.04. 21:04 조선일보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인 바리톤 김태한이 지난 2일(현지 시각) 대회 결선에서 노래하는 모습. 한국인 우승은 소프라노 홍혜란(2011년)과 소프라노 황수미(2014년)에 이어서 이번이 세 번째다. /퀸 엘리자베스 홈페이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우리 대한민국 파이팅이다.”(소프라노 조수미)
웬만해선 긴장하는 법이 없던 조수미의 목소리도 가볍게 떨렸다. 4일(한국 시각) 벨기에 브뤼셀에서 폐막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벨기에 왕가가 주관하는 이 대회는 흔히 쇼팽·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더불어 ‘세계 3대 콩쿠르’로 불린다. 현재 콩쿠르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마틸드 벨기에 왕비도 대회 결과가 발표된 자정(현지 시각)까지 자리를 지켰다.
4일(현지시간) 벨기에에서 열린 '2023 퀸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성악가 김태한이 수상 발표 후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한국 성악의 미래들이 조수미를 깜짝 놀라게 했다. 2000년생 바리톤 김태한(22)씨가 이날 폐막한 대회 정상에 올랐다. 올해 결선 진출자 12명 가운데 최연소이자 지난해 9월 금호영아티스트콘서트를 통해서 데뷔한 한국 성악계의 ‘샛별’이다. 그는 한국 음악계의 등용문인 제86회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에도 지난 2월 실기 우수생으로 참가해서 노래했다. 한국인 우승은 소프라노 홍혜란(2011년), 소프라노 황수미(2014년)에 이어서 세 번째다. 아시아 남자 성악가로는 대회 첫 우승이다. 함께 결선에 오른 베이스 정인호(31)씨도 5위에 올랐다.
세계적 성악가·피아니스트 16명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은 조수미는 이날 대회 결과가 발표되자 김태한을 비롯한 한국 입상자들을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를 보냈다. 조수미는 “(노래를 들으며) 내가 아까 많이 울었다. 심사위원들의 반응도 거의 만장일치였다”고 전했다.
4일(현지시간) 벨기에에서 열린 2023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성악 부문 우승자 김태한(왼쪽)이 결과 발표 뒤 성악가 조수미와 기념 촬영하고 있다./연합뉴스
김씨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국립오페라단의 젊은 성악가 육성 프로그램인 오페라 스튜디오 멤버로 활동한 순수 국내파다. 지난해 스페인 비냐스·독일 노이어 슈티멘 콩쿠르 등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그는 우승 직후 현지 인터뷰에서 “한국 가수들이 워낙 노래를 잘하기 때문에 사실 국제 콩쿠르보다 국내 콩쿠르에서 노래할 때 더 떨린다. 지금 당장 한국 대회에 나가도 1등을 할 자신이 없을 만큼 실력자가 많다”고 말했다. 올림픽보다 국가대표 선발전 통과가 더 힘들다는 양궁처럼, 한국 성악계의 치열한 내부 경쟁이 성장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는 뜻이다.
그는 처음엔 록 가수가 되고 싶어서 중학생 때 밴드부로 활동했던 재기발랄한 신세대다. 그는 “록 음악이 하고 싶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성악을 권유하셔서 뒤늦게 성악에 빠졌다”고 했다. 지금도 비틀스와 퀸 같은 영국 그룹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앞두고는 “놀면서도 연습하고, 걸어다니면서도 연습할 수 있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연습했다”고 할 만큼 철저하게 대비했다. 스승인 바리톤 나건용(서울대 출강)씨는 제자에 대해 “24시간 노래를 흥얼거리며 연습할 만큼 열정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성악가”라고 평했다.
<YONHAP PHOTO-1410> 김태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브뤼셀=연합뉴스) 김태한(바리톤)이 4일(현지시간) 발표된 세계 3대 성악 경연대회인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사진은 1위 호명 뒤 축하를 받는 김태한. 2023.6.4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영상 갈무리. 재판매 및 DB 금지] photo@yna.co.kr/2023-06-04 09:13:19/ <저작권자 ⓒ 1980-202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김씨는 이번 대회 결선에서는 작곡가 바그너·말러·코른골트·베르디의 아리아와 가곡 등 네 곡을 불렀다. 벨벳처럼 부드럽고 풍성한 음성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불어권인 벨기에 관객들을 위해서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 아리아를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불어 버전으로 부르는 치밀한 모습도 보였다. 그는 “노래의 마지막 소절이 ‘플랑드르를 구해달라(Sauve la Flandre)’인데, 플랑드르 지역이 지금의 벨기에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음정·박자뿐 아니라 가사까지 꼼꼼하게 분석했다는 의미다. 해외 유학 경험은 없지만 그는 “국제음성기호(IPA)의 발음기호를 공부하고 원어민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등 평소 발음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했다.
오는 9월부터는 독일 베를린 슈타츠오퍼(국립 오페라극장)의 오페라 스튜디오 멤버로 2년간 활동할 예정이다. 그는 “조연·단역부터 가리지 않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가겠다”고 했다. 훗날의 꿈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공연하는 오페라 가수”다. 현지 매체들은 이 말을 “수퍼스타가 되고 싶다(I want to be a superstar)”로 옮겨서 보도했다. 이 구절처럼 성악계의 ‘수퍼스타’ 탄생을 예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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