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단순하여야 한다.
진리는 실천 가능하여야 한다.
복잡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다.
진리는 무언가 심오할 것이란 생각, 심오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란 생각, 어리석음이다.
불교의 팔만대장경과 신약과 구약을 합쳐 66권인 그리스도교.
불교가 심오한 종교라고 한다.
웃기는 말이다.
경전이 많다고 심오한 종교이고 진리일까?
불교 경전은 매우 많아서 수십 년을 공부한 승려도 아마 다 모를 것이다.
철학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다. 심오해도 너무 심오하여 나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도 없다.
나같은 사람은 진리의 ㅈ자도 맛 보질 못할 것이다.
평생을 수행하여도 깨달지 못하는 불교, 언제 깨달아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인가?
진리는 단순하다. 진리이기 때문에 단순하여야 한다.
현학적인 철학이나 불교에서 진리를 찾을수는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면서 나와 타인을 잘 관찰하면 삶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출가한 수행자가 아니다.
먹기위해 일을 하여야 하고 일하는 가운데 사람과 부딪친다.
사람과 부딪치는 이 현실을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여기서 지혜를 찾고 진리를 얻어야 한다.
나는 영생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
영생한 자를 듣거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어 소멸한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태어나 살다가 죽는다는 사실, 이것만 받아들인다면 삶은 생각보다 수월하고 즐겁다.
생각보다 수월하고 즐거운 삶을 위하여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까?
너와 나, 갈등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내 삶을, 너는 네 삶을 산다.
할 수 있으면 나는 너를 돕고, 너는 나를 돕는다.
상부상조하면 싸울 까닭이 없다.
설령 상부상조하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해를 입히지만 않아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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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처구니없는 기대'를 가지고 산다.
부모니까, 남편이니까, 아내이니까, 자식이니까. 형제이니까, 친구이니까.
~이니까 당연히 나에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 기대가 정말 어처구니없는 기대이다.
~이니까 당연히 해줘야 한다는 관념, 이 관념이 합리적인가를 생각한 적이 있는가?
기대감은 내 욕심일 뿐, 당연한 것이 아니다.
내 기대에 부응하여 해주누다면 고마운 일이다. 나도 상대의 기대감에 당연히 부응하여야 한다.
서로의 기대감을 충족하면 불만이 없고, 싸울 일도 없다.
이런 기대감, 딱히 어떻게 정의할 수 없으니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기대감을 버리는 것이다.
"~이니까, 그 정도는 해줘야하는 것 아냐?"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기대한 바가 없는데 상대가 나한테 무언가를 베풀면 매우 고맙다.
기대하지 않을 때 상대가 나를 위한 행위에 고마워할 수 있다.
서로에게 고마움을 줄 때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할까?
어떻게 처신하는 게 평화로운 공존의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이게 깨달아야 할 진리다.
무아니 무상이니, 어려운 것, 말장난 같은 것, 그걸 개닫는다고 삶이 바뀌겠는가?
깨달은 자는 오직 하나이니 알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내게 주어진 화두는 <이 뭐고?!>가 아니다. 평화로운 공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