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23 - 황거, 옛날 쇼군의 에도성에서 12회의 조선 통신사를 떠올리다!
11월 8일 아침에 니혼바시 (日本橋 일본교) 다리를 보는데, 1603년 에도 막부가 세워지고 처음
세운이래 근대에 이르러 20번째 건축된 다리라 철근콘크리트인게 아쉬운데....
오래된 일본 전통양식의 고풍스러운 다리는 그림으로만 볼수 있으니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広重) 가 그린 "동해도53역참(東海道五十三)“ 첫 번째 그림에 니혼바시 아침풍경 이 있습니다.
일본교를 본 이후 다음 여행지는 일왕이 사는 황거(皇居) 이니 도쿄역에서 마루노우치
로 나가 찾아가는데.... 현재 일왕(천황) 의 거처인 황거(皇居, 고쿄) 는 옛날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도쿠가와 막부 의 쇼군이 거주하던 에도성(城) 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요청으로 조선은 일본과 수교하고는 1607년 쇄환사 에 이어 1636년 부터
400~500명에 이르는 통신사 를 12회나 파견해 270년간 선린우호 합했는데.... 동서고금
인류 5천년사에 이웃한 나라는 99% 원수지간이니 외교는 "원교근공" 이라, 이웃한 나라 끼리
100년 평화가 드무니 저 조선과 일본의 270년간 우호 는 세계사에 특필한만한 예외 인가 합니다?
조선 통신사 가 지나가면 도로 옆에는 일본인들이 구름 처럼 모여들어 저 화려한 통신사 일행의
행열을 구경했고 또 밤이 되면 숙소에는 글씨 하나 받을려고 일본인들이 길게 줄을 섰습니다.
그때 통신사들은 일본 거리의 가게들을 구경하다가 책 을 파는 곳에서 놀라자빠질 경험을
하니..... 국내에서는 벌써 없어진 “유성룡의 징비록” 이 버젓이 팔리고 있었던 것이라?
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유입된 징비록은 '2권본' 으로 1695년 일본 교토의 야마토야 (大和屋)
에서 야마토야 이베에(大和屋伊兵衛) 가 한자 책에 일본어 훈독 을 달아 간행한 것입니다.
조선에서는 징비록은 당시에는 인쇄되지 못하고 개인이 직접 붓글씨로 필사 해서
몇사람이 돌려 보다가 사라진 후.... 1936년 조선사 편수회 에서 안동군
하회리 종가(宗家) 의 필사본(筆寫本) 을 얻어 300부 를 인쇄 출판한게 처음 입니다.
고려에서는 서양의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 보다 앞서 1234년에 "고금상정예문" 을 50권 인쇄
했다는 기록이 있고, 현존하는 출판물로는 1377년(우왕 3년) 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백운화상 직지심체요절 이 실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의 금속활자본 이니 직지(直指) 는
조선 고종때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해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중입니다.
그런데 징비록은 왜 조선시대에 인쇄되지 못했을까요? 금속활자는 구리· 철· 납등 금속이 사용되었는
데, 사각 기둥으로 글자가 뒤집어져서 튀어나게 새겼으니 주물사주조법 으로 인쇄는 고착식을
거쳐 조립식으로 바뀌는데, 활자 배열 이 끝나면 공간을 죽목으로 메워 움직이지 않게 하고는
편편하게 고른후 먹솔로 활자면에 먹물을 골고루 칠한후 종이를 놓고 말총이나 헝겊 뭉치 로 누릅니다.
조선시대 관(官) 의 인쇄에서 한 권에 한 자의 착오가 있으면 30대의 곤장 을 맞고, 한 자씩 더 틀릴 때 마다
한등씩 더 엄한 벌을 받았는데, 인출장은 한 권에 먹이 진하거나 희미한 글자 한 자가 있을 때 30대의 매
를 맞고 한 자가 더할 때마다 벌이 한 등을 더했으니.... 교서관은 다섯 자 이상 틀렸을 때는 파직 되었습니다.
금속활자는 제작방법이 힘든 데다가, 인쇄 부수는 고금상정예문이 50부 에 불과했 듯 "하루에 25장"
정도에 불과하고 몇번 인쇄하면 풀어 다시 배열 해야 하니, 인류사에서 구텐베르크의 영향력에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는데, 고려시대는 불경 몇십권을 찍고 조선시대는 한자로 책한권을 만들면
“대학” 이나 “중용” 처럼 얇은 책도 논 두세 마지기에 해당하는 2천만원 값이니 누가 살수 있을까요?
또 금속활자는 손으로 쓰는 붓글씨 필사(筆寫) 보다도 느리고 비효율적 이며 엄청 비싸니 "소설책등
대량 제작을 위해서는 목판인쇄" 가 훨씬 효율적이고 활자도 오래 사용했는데.... 구텐베르크는
"인쇄기" 까지 만들었으니 활자 발명 50년후 유럽에서 250개의 인쇄소에서 4만종의 책 을 발간
했지만, 조선은 왕실 주자소와 교서관에서 열몇 종류 정도 찍어 관리들 에게 보급하는 정도였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약용의 목민심서 는 그 내용 중에서도 일부만이 그것도 활자 인쇄가 아닌 필사본 으로
19세기 말에야 보급되었고, 1883년에 최초로 박문국에서 발행된 신문 한성순보 는 비효율적인 조선
금속활자가 아닌, 박영효가 일본에서 후쿠자와 유기치로 부터 서양식으로 일본에서 만든 금속활자
(한자) 에 인쇄기, 잉크와 종이 에다가 일본 시사신보 인쇄공 이노우에 를 데려와서 발간해야 했습니다.
유성룡의 징비록은 일본에서는 1695년에 활자로 인쇄 되었지만 조선에서는 1936년 조선사 편수회 에서
처음 인쇄했 듯,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도 조선시대에는 필사본으로 유통되다가 일본 식민지
시절인 1932년 에야 서양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서양식 금속활자로 인쇄 되어 대중에게 보급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보스 포럼 이 발표한 Gender Gap (性 격차) 에 세계 146개국 가운데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1~5등
을 휩쓴 반면에, 동양에서는 일본은 125위이고 중국 107위에 한국은 105위 라고 하니.... 우리나라는
일본 보다는 낫지만 꼴찌에 가까운건 아직도 동양 3국은 "유교의 가부장제" 흔적이 남아있다고 여겨 집니다?
그 대표적인게 조선은 500년간 "과부 재혼" 을 철저히 막았는데, 남자들은 상처하면 당연히 처녀에게
새 장가 를 들수 있었고 첩 을 들여 두집 살림을 했으며, 여종을 데리고 잘수도 있었고 기생을 끼고
놀수 있었는데다가 지방에 사또로 가면 관가에 딸린 관기(官妓) 라고 여자들을 데리고 잘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일찍 남편이 죽은 "청상과부" 로 자식 조차 없는데도 평생 재혼이 금지 되었으며,
심지어 결혼 사주단자를 받은후 신랑이 갑자기 죽어 결혼식도 올리지도 못했고 신랑 얼굴
한번 보지못했어도 열녀가 되어야 한다며 “평생 수절을 강요” 당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1894년 일본군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가 경복궁을 공격해 한두시간만에 고종을 포로로
잡고 항복을 받아 이노우에 공사가 지도해 김홍집 친일내각에서 갑오개혁 을 하면서... 양반 상놈의
신분 제도 철폐, 노비제도 폐지와 해방, 천민제도 폐지 등과 함께 저 과부재혼 금지제도도 5백년
만에 철폐 되었는데..... 조선이 왜 스스로 못했을까 하는 의문은 동아일보 기사를 보니 비로소 풀립니다.
동아일보 왕은철 전북대 석좌교수의 ‘스토리와 치유’ 에 올려진 “시대의 노예” 에는....
“시대는 때때로 사람을 노예 로 만든다. 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 순암 안정복 도 그러했다. 그는 당대의 가치관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
그는 남편이 죽었을 때 "부인이 살아도 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의탁할 곳이 없는
시부모를 부양 해야 하는 경우와 자식들이 너무 어려서 남편 제사를 맡길데가 없는
경우였다. 그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음에도 혼자 사는 여자를 가리켜 “경중(輕重) 을
모르는 과부” 라고 했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한다는게 조선의 유교적 가치관 이었다?
(고아가 될 어린아이들을 걱정한게 아니고 아이들이라 제사를 지내지 못할 것을 걱정한 것이니.... 제사 보름전
부터 술을 담가야 하고 놋그릇등 제기를 꺼내 빛나도록 닦아야 하며 집안 대청소를 하고 비누를 만들며
물 긷고 나무해서 불을 때 옺가지들을 삶아 빨고 숯불 다리미로 다려야 하며 돼지를 잡고, 생선은 장날에
사오며 떡을 만들고 과일을 갖추고 지방과 축문을 쓰고 향을 피우는 제사 준비를 아이들이 하지 못함을 걱정?)
남편이 병으로 죽자 어린 자식 들을 두고 "목숨을 버린 어떤 부인" 을 안정복이 칭찬한 것은 그러한
가치관에 예속된 탓이었다. 그 부인에게는 남편 형제들이 있어서 시부모 봉양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아들이 아홉 살에 딸은 열네살로 어린지라 죽지 않아도 되는데도 죽기를 자청 했다.
자식들이 울며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녀가 어린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는 이랬다. “내가 너희들에게 연연하고
있을수 없어 아버지를 따라간다. 너희들이 잘 커서 뒷날 지하로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어라.” 순암은
"자결한 그 과부" 가 어지간한 남자들 보다 낫다고 칭송하며 집안 사람들에게 본받으라고 장문의 글 을 남겼다.
지금 돌아보면 모두가 시대의 노예 였다. 목숨보다 이념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순암은
아이들을 두고 죽은 어머니를 칭송함으로써 시대의 폭력에 공모 했다. 주자학적 가치를 내면화하여 죽음
을 택한 여성은 칭송이 아니라 연민의 대상이었어야 했다. 그리고 더 큰 연민의 대상은 아이들 이었어야 했다.
순암은 어머니의 자살로 상처받고 어머니 없이 살아야 할 아이들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따뜻한 연민의 마음 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복종한
결과였다. 시대의 한계는 그의 한계, 아니 모두의 한계 였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이라고 그런 일이 없을까.
조선시대의 고루하고 켜켜묵은 유학자들에 비해서 우리가 희망을 갖는 것은 그 시대에도 깬
사람들 이 있었으니 이런 유학자들을 “실학자” 라고 부르는데, 그 중에 한 선비가
“안정복” 이니,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이 근간이었던 시절에 조선 역사의 독자성에
입각한 역사 발전이라는 사관(史觀) 으로 "동사강목" 을 지은 선비라 더욱 당황스럽습니다?
안정복은 <잡동산이(雜同散異)> 라는 책을 저술했으니 자주 쓰이는 “잡동사니” 의 어원이 되었는데,
권근이 3년상을 모셔야 할때 전쟁 을 일으킨 "광개토대왕의 백제에 대한 복수가 과하다"
고 말하자.... "원한이 남아있을수 도 있지, 뭐가 심하냐" 고 비판했고, 권근이 "계백이
일가족을 죽이는 것은 심하지 않냐" 고 하자 안정복이 "권근은 병법도 모른다" 고 비판했습니다.
스승 이익이 천주교 에 관대한 태도를 취했던 것과 달리 안정복은 서학(西學)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배척
했으니 “천학문답(天學問答)” 에서 괴력난신을 배격하는 유교적 세계관과 이기론에 근거하여
천주교를 비판했으니 오로지 내세의 천당 지옥설을 믿어 사람을 황당한 지경에 빠뜨리며 아침, 저녁
으로 지옥 고통을 면하고자 자기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함이 무당이나 불가와 다를바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안정복의 딸 은 같은 성호학파인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과 혼인했는데 형제가 대표적인 남인
천주교 신자들 이었으니 안정복은 이들에게 천주교와 거리 를 두라는 편지를 계속
보냈으며..... 이후 신해박해 때 권씨 형제가 발각되었는데, 안정복은 <천학문답>
으로 박해에 연루되지 않고 살아 남았으며 사후에는 노론 벽파에게 추증되기 까지 합니다.
고루하고 켜켜묵은 유학자들에 비해 깬 사람들이라는 실학자로 자주적인 역사관을 담은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 쯤 되는 사람의 사고방식 이 저러하니 다른 유학자들은 볼 것도 없는데....
"여자는 오로지 한 지아비" 만을 섬겨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 이 지배한 나라가 조선이니 이제 왜
자식도 없는 청상과부 재혼을 결사적으로 막고 500년간 고치지 않았는지 그 이유을 알수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