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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고전 오페라 작곡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Orfeo ed Eurydice〉(1762)·
〈알체스테 Alceste〉(1767)·
〈오르페우스〉(1774, 프랑스판)·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ie en Aulide〉(1774)·
〈파리드와 엘레나 Paride ed Elena〉(1770)·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énie en Tauride〉(1779) 같은 오페라가 유명하다.
1756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글루크의 아버지 쪽 조상들은 대부분이 오버팔츠와 보헤미아 사이에 있는 국경지역에 사는 삼림감독원들이었으나 어머니 쪽 조상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아버지 알렉산더 글루크는 1711~12년 삼림감독원으로 에라스바흐에 이주해왔다. 그뒤 그의 가족들은 보헤미아의 뵈흐미슈라이파 근처 라이히슈타트로 건너왔다. 1722~27년 캄니츠에 살았고, 이후 1736년까지 아이젠베르크(코모타우 근처)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알렉산더 글루크는 필리프 히아친트 폰 로프코비치 공(公)의 삼림감독원으로 일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대대로 내려온 삼림관리직을 이어받기를 원했지만, 글루크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아주 좋아하였다.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음악으로 자립할 결심을 하고 집을 떠나 프라하로 가서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했다. 1731년 대학에 들어가서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1735~36년 겨울 빈으로 가서 이곳에서 롬바르드 귀족을 만나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 멜치가(家)의 가족 예배당에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며 오르간 연주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삼마르티니에게 4년 동안 작곡과 새로운 이탈리아 양식의 기악음악을 배웠다.
1746년 영국에서 인쇄된 6개의 트리오 소나타는 본(本)악장과 종결부의 미뉴에트 악장의 2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들로, 밀라노에서 삼마르티니에게 배운 결실이라고 여겨진다. 글루크는 6개의 '런던' 소나타 외에도 삼마르티니 밑에서 더 많은 트리오 소나타를 작곡했을 것으로 보인다.
1741년 12월 26일 밀라노의 테아트로 두칼 극장에서 P. 메타스타시오가 대본을 쓴 처녀작 오페라 〈아르타세르세 Artaserse〉로 처음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745년까지 해마다 이 극장에서 오페라 작품을 무대에 올렸으며, 공연한 작품으로는 〈데모포온테 Demofoonte〉(1742)·〈아르사케스 Arsace〉(G.B. 람푸냐니와의 공동작품, 1743)·〈소포니스바 Sofonisba〉(1744)·〈이폴리토 Ippolito〉(1745)이다. 이외에도 베네치아에서 〈클레오니체 Cleonice(Demetrio)〉(1742)와 〈노예의 딸 La finta schiava, a pasticcio〉(1744)을 공연하였으며, 크레마에서 〈티그라네스 Il Tigrane〉(1743)를, 토리노에서 〈포로 Poro〉(1744)를 공연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결코 장엄하거나 강렬하지 않고 가벼운 선율의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모방한 것이고, 지금은 대부분 그 일부만 남아 있다. 때로 격정적으로 폭발하는 열정과 등장인물을 성격화시키는 기법은 장차 그가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가 될 것을 암시한다.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얻은 글루크는 1745년 당시 런던 하이마켓 극장의 이탈리아 오페라 단장이었던 미들섹스 경(卿)의 초청을 받았는데 미들섹스 경은 런던의 오페라 애호가들을 사로잡고 있던 헨델의 견고한 권위에 도전하기 위해 글루크를 불러들였다. 처음에는 스튜어트가(家)의 반란 때문에 정치적 혼돈상태에 빠졌던 영국 내부의 사정으로 글루크가 영국에 오기 전 이미 런던의 모든 극장들이 문을 닫아버려서 실패했다. 상황이 잠잠해지자 1746년 1월 17일 오페라 〈거인의 전락 La caduta de' giganti〉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이 곡은 A.F. 반네스키의 대본을 바탕으로 당대의 영웅인 컴벌랜드 공작이 컬로든 전투에서 영국 왕위권을 주장하는 스튜어트가의 에드워드 찰스 공(公)의 군대를 물리친 것을 기념해서 작곡한 것이다.
글루크가 영국에서 만든 2번째 오페라 〈아르타메네 Artamene〉는 1746년 3월 14일 작곡한 것으로 너무 시간에 쫓겨서 주로 자신의 초기 작품에서 썼던 음악을 따온 것이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아르타메네〉가 나온 지 얼마 안된 3월 25일 하이마켓 극장에서 글루크와 헨델은 자신들이 작곡한 작품을 직접 연주하는 연주회를 열었다. 헨델은 종종 글루크를 "내 요리사보다 더 대위법을 모른다"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일랜드의 가수 마이클 캘리의 말에 의하면 글루크는 헨델을 '예술의 거장'이라고 평하면서 그를 본받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1746년경 영국을 떠나 2개의 순회 오페라단과 만나게 되었는데, 1747년 6월 29일 그중 한 오페라단이 드레스덴 근처 필니츠 성에서 바이에른과 작센의 선제후(選帝侯) 가문 2쌍의 합동결혼식을 위해서 오페라세레나데 〈헤라클레스와 헤베의 결혼 Le nozze d'Ercole e d'Ebe〉을 공연하였다. 적어도 1748년초에는 빈에 돌아온 것으로 여겨지며, 〈감사받는 세미라미데 Semiramide riconosciuta〉(P. 메타스타시오의 대본)를 1748년 5월 14일 부르크 극장의 개관식 때 공연했다. 이 곡은 그에게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이때 그는 당시 16세였던 마리아네 페르긴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돈많은 상인의 딸이었으며 후에 그의 부인이 되었다.
같은해에 그는 밍고티 순회 오페라단의 지휘자로서 함부르크를 경유하여 코펜하겐으로 연주여행을 하였다. 이곳에서 덴마크 왕의 후계자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 오페라-세레나데 〈신들의 싸움 La contesa dei Numi〉을 작곡하였다. 그후 2년 동안 프라하에 머물렀고 이때 〈에치오 Ezio〉(1750)와 〈이시필레 Issipile〉(1751~52)를 썼다. 1750년 9월 15일 빈에 있는 장크트 울리히 교회에서 마리아네와 결혼했는데 그들은 화목했지만 자식이 없었다. 글루크는 후에 조카 마리아네를 양녀로 삼았다. 1752년 부인을 데리고 나폴리로 가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전에 이미 작곡한 적이 있던 〈아르사케스〉의 대본을 거절하고 메타스타시오의 극 〈황제 티투스의 자비 La clemenza di Tito〉를 작곡하였다.
1752~53년 겨울에 그들은 빈에서 자리잡았다. 빈에서 황제의 육군 원수인 작센-힐데부르크하우젠가의 요제프 프리드리히 대공의 후원을 얻어 그의 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임명받았고, 그뒤 지휘자가 되었다. 대공의 저택에서 매주 열린 연주회 때마다 자신의 교향곡과 아리아를 성공적으로 연주하였는데 특히 1754년 10월 24일 슐로스호프 성의 성대한 축하행사에서 연주한 오페라-세레나데 〈중국인 Le Cinesi〉은 황제부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 연주가 성공하자 황제의 궁정을 위해 '극 음악과 아카데미 음악'을 맡는 궁정극장 감독이 되었다. 1755년 5월 5일에는 빈 근처 락센부르크에 있는 황제의 성에서 오페라-세레나데 〈춤 La danza〉을, 12월 8일에는 〈밝혀진 사실 무근 L'innocenza giustificata〉을 잇따라 연주하였다.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오페라 〈안티고네 Antigono〉를 처음 선보였고, 이듬해인 1756년 빈에서 〈양치기 임금 Il repastore〉을 공연했다. 로마에서 황금박차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그뒤 빈에 돌아와 프랑스 보드빌 희극 음악을 상당수 작곡하기 시작했다. 〈티르시스와 도리스테 Tircis et Doristée〉(1756)는 이 양식으로 작곡한 첫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이러한 파리풍의 희극에서는 대화가 말 또는 노래로 진행된다.
1758년 이후로 더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는데, 〈가짜 여자노예 La Fausse Esclave〉·〈메를랭 섬 L'Ile de Merlin〉(1758)·〈포위된 키티라 La Cythére assiégée〉(1759)·〈4인의 악마 Le Diable á quatre〉·〈마법의 나무 L'Arbre enchanté〉(1759)·〈개심한 술꾼 L'Ivrogne corrigé〉(1760)·〈사기당한 재판관 Le Cadi dupé〉(1761)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에는 서곡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보드빌 가락을 대신하는 새로운 노래들도 많이 있었다.
1764년 1월 7일 빈에서 초연된 〈뜻밖의 만남 Le Rencontre imprévue〉은 보드빌적 요소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전형적인 오페라 코미크 (opéra comique)였다(→ 오페라 코미크). 〈사기당한 재판관〉과 〈뜻밖의 만남〉은 동양적인 악기 효과를 써서 특별한 매력을 발한다. 그의 많은 아리아에 나오는 아름다운 선율과 표제음악 기법은 그의 후기 오페라 양식을 미리 보여주는데, 〈메를랭 섬〉과 〈개심한 술꾼〉에서 복잡하게 얽힌 장면 전개가 그 최초의 예이다.
1761년 2월 모험가 조반니 자코모 카사노바의 친구 라니에리 칼차비지가 빈을 방문하였다. D. 디드로, F. M. 폰 그림, 루소, 볼테르 같은 문학가들의 이론과 실제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둔 칼차비지의 오페라 대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글루크의 친구들로부터 열정적인 찬사를 받았다. 1761년 10월 17일 칼차비지와의 최초 공동작품인 발레극 〈돈 후안 Le Festin de pierre(Don Juan)〉이 공연되었다.
후에 G. 안조리니의 대본에 곡을 붙인 무용극 〈세미라미데 Semiramide〉(1765)·〈이피게네이아 Iénie〉(1765)·〈아킬레 Achille〉(1770경)의 음악을 작곡했고, 빈의 발레 거장인 안조리니가 이 작품들의 안무를 맡았다. 칼차비지의 대본으로 글루크는 3편의 이탈리아풍 '개혁 오페라'들인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1762)·〈알체스테〉(1767)·〈파리드와 엘레나〉(1770)를 작곡했다.
글루크는 〈알체스테〉의 서문에서 '단순성·사실성·자연스러움'이라는 말로 자신과 칼차비지의 목표를 표현하고 있다. 복잡하게 얽힌 줄거리 대신 고전극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하고 사실적이며 자연스런 행동, 즉 궁중의 관습 대신 순수한 인간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고전적인 형식에서 나오는 합창은 주요 등장인물과 동일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극중에 일어나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고 음악은 지나친 꾸밈으로 자연스런 연기의 흐름과 동작을 막지 않는 선에서 표현을 돕고 줄거리 전개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레치타티보 세코'(건조한 레치타티보:몇 개의 악기에 의한 간단한 반주만 따르는 레치타티보)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았고(〈알체스테〉는 예외) 대신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반주된 레치타티보:전체 오케스트라로 반주하는 레치타티보)·아리오소(아리아와 레치타티보의 중간적 성격을 갖는 準 선율적 악구)·아리아·합창·무언극 등의 요소들을 낭송양식과 표현적인 오케스트라와 합쳐서 장면들을 구성하고, 장면들은 또다시 위대한 구성물을 이룬다. 글루크 자신이 말한 것처럼 오페라를 개혁하려는 충동은 칼차비지로부터 나왔지만 칼차비지는 주로 1750년 이후 파리 시문학 작가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복잡한 장면전개 기법과 같은 음악의 새로운 특징들은 글루크 자신의 독창적인 공헌이었다.
이 3편의 이탈리아풍 '개혁 오페라' 외에도 〈클렐리아의 승리 Il trionfo di Clelia〉(1763, 볼로냐), 1750년에 만들었던 〈에치오〉의 재판(1763, 빈) 같은 위탁받은 작품들을 발표했고, 1764년 파리를 잠깐 방문한 뒤 〈혼란해진 파르나소 산 Il Parnaso confuso, Telemaco o sia L'isola di Circe〉과 무용극 〈세미라미데〉를 작곡했다. 이 4개의 작품들은 모두 176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의 2번째 결혼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그중 일부는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에 의한 것임). 같은해 작곡한 오페라-세레나데 〈왕관 La corona〉은 프랑수아 1세의 죽음으로 인해 연주되지 못하였다.
1767년 2월 22일 피렌체에서 T. 트레에타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figenia in Tauride〉와 함께 축제 오페라 〈프롤로그 Il prologo〉를 공연하였고, 이듬해 빈에서는 〈밝혀진 사실 무근〉의 개작인 〈베스타 여신 La Vestale〉을, 1769년 파르마에서는 〈아폴로의 축제 Le feste d'Apollo〉를 공연했다.
1772년 8월 파리 오페라 극장은 그가 새로 완성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라신의 비극을 바탕으로 프랑수아 루이 르블랑과 바이 뒤룰레가 대본을 썼다)를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글루크는 이와 비슷한 오페라 6곡을 더 만들었고 온화한 이탈리아풍 오페라를 프랑스 작곡가들이 즐기는 정가극(opera seria)으로 바꿨다. 1773년 가을에 파리로 간 뒤, 1774년 4월 19일 공연한 〈이피게네이아〉와 그해 여름 무대에 올린 프랑스판 〈오르페우스〉가 크게 성공했다. 빈에서 정식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었으나 곧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1775년 〈마법의 나무〉의 개정판을 냈으나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완전히 다시 쓴 〈포위된 키티라〉 역시 실패했다.
1776년 4월 23일 3번째 파리 방문 때 만든 〈알체스테〉의 프랑스판도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잇따른 실패와 조카 마리아네의 죽음으로 크게 낙심한 그는 1776년 5월 파리를 떠나 빈으로 돌아왔다.파리에는 글루크의 친구와 적이 함께 있어 두 세력이 서로 대립했다. 프랑수아 아르노, 장 바티스트 앙투안 쉬아르 등이 이끄는 프랑스 작가와 음악 비평가들은 글루크를 지지했던 반면, 피친니주의자들(이탈리아 작곡가 N. 피친니의 이름을 따옴)은 글루크에 반대했다. 1776년 여름 피친니로 하여금 파리에 와서 글루크 양식과 반대되는 오페라를 쓰라고 설득했다. 이 싸움은 1777년에 극에 달했지만 글루크나 피친니 모두 적극적으로 이 논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글루크는 빈에서 〈아르미드 Armide〉를 완성한 후 〈롤랑 Roland〉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피친니가 파리 공연을 위해서 같은 대본으로 작품을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 〈롤랑 Roland〉의 초고를 없애버리고 1777년 5월말경 파리로 왔다.
1777년 9월 23일 〈아르미드〉를 처음 공연했을 때는 관객들의 양분현상이 극에 달했으나 1778년 1월 27일 피친니의 〈롤랑〉이 공연되자 곧 싸움은 누그러졌다. 1779년말 글루크는 인상적인 2편의 오페라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에코와 나르키소스 Écho et Narcisse〉를 완성하자마자 파리를 방문했다.
1779년 5월 18일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파리에서 공연되어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지만, 1779년 9월 24일에 초연된 〈에코와 나르키소스〉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글루크는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리허설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1779년 10월초 파리를 떠나 다시 오지 않았다.
글루크의 뛰어난 프랑스 '개혁 오페라'는 이탈리아풍의 작품들에 비해 더 대담하게 대조의 원칙을 따르고, 빈풍의 오페라들에 비해 가사가 더 낭송적이며 힘이 있고 관현악의 음색이 더 강렬하다. 이 작품들은 다른 작품보다 각 장면과 막이 더 짧고 중단없이 이어지며, 보다 극적이고 심리적인 민첩함을 이루기 위해 장면들의 공간개념을 희생시키고 개연성이 없이 공간을 배치했다.
글루크는 만년의 8년 동안 빈과 빈 근처의 페르히톨츠도르프에서 아내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칠 줄 모르고 계속 작곡을 하였다. 1770년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F.G. 클롭슈토크의 〈헤르만의 전투 Hermannsschlacht〉에 다시 주의를 기울였다. 1770년경에 작곡한 〈클롭슈토크에 의한 찬가와 가곡 Klopstocks Oden und Lieder〉(7곡)을 죽기 겨우 1~2년 전에 출판하였다. 또 이즈음에 〈에코와 나르키소스〉를 개작하였고, 빈의 시인 J. B. 폰 알싱거와 함께 후에 황제 파벨 1세가 된 러시아 대공 파벨 페트로비치가 방문했을 때인 1781년 10월 23일 빈에서 초연한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독일어로 개작하였다.
만년의 글루크는 일찍이 파리에서 한번 그랬던 것처럼 우연히 모차르트와 몇 차례 만났다. 그러나 둘은 개인적으로 친밀해지지는 않았다. 1781년 뇌졸중으로 2번째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고 체력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1787년 11월 15일 다시 한번 뇌졸중을 겪고서 죽었다. 2일 후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빈의 중앙 공동묘지에 묻혔다.
- G. Croll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