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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과 눈으로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안 하는 마음이 몸 안에 있다. 몸 밖에 있다. 눈 뒤에 숨어 있다. 혹은 중간에 있다. 있다며 일곱 번을 답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답이 아님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생각하니 마음이 머릿속에 있다고 믿거나 가슴이 뛰니 심장에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십시오. 마음이 몸 안에 있다면 우리는 먼저 몸속에 5장 6부를 보아야 할 텐데. 우리는 밖에 풍경만을 봅니다. 반대로 마음이 먼 밖에 있다면 내 마음이 느끼는 고통을 내 몸이 어찌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의 핵심은 마음이 어느 장소에 있느냐를 찾는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생각과 분별이 실체가 없음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려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유도입니다. 중년에 나이가 되면 내 마음을 내가 잘 안다고 자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안다고 믿는 그 마음은 대개 과거의 기억 타일의 시선 그리고 익숙한 습관들이 만들어낸 그림자일 때가 많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라는 고집이 마음의 자리를 한정짓고 스스로를 가둡니다. 마음은 고정된 장소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2년을 따라 일어나고 사라질 뿐입니다. 거울 자체는 아무런 모양이 없지만 앞에 오는 사물에 따라 온갖 형상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하루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 애쓰기보다 지금 내 눈 앞에 나타나는 상황들을 내 마음이 어떻게 비추고 있는지 가만히 관찰해 보십시오.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좁은 아집에서 벗어나 광활한 평온을 마주하게 됩니다.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마음은 원 우주를 품게 됩니다. 거울을 보면 세월이 야속합니다. 탱탱했던 피부는 쳐지고 말든 눈동자는 흐릿해졌습니다. 변에 관한 육신을 보며 우리는 종종 깊은 허무에 빠집니다. 하지만 정말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지기만 하는 걸까요? 능업경에는 파사이광이 부처님께 나이 들매 슬픔을 고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물으셨습니다. 대왕이요. 그대는 3살 때 보았던 겐지스강을 기억하오. 지금 그대의 나이 60이 넘어 다시 보는 겐지 스강의 모습은 어떠하오 왕이 대답했습니다. 강물은 예전보다 흐려졌고 제 모습은 늙었지만 강물을 바라보는 그 성품은 3살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미소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대왕이요. 변하는 것은 죽음이 있으나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사가 없는 것이요. 우리는 평생 변하는 것들에만 매달려 살아왔습니다. 돈 건강 명예 그리고 감정 이것들은 파도와 같아서 밀려왔다가는 반드시 밀려 나갑니다. 파도를 날하고 착각하면 파도가 칠 때마다 내 삶도 요동칩니다. 그러나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 그 자체 즉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그 보는 상품은 늙지도 병들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어린 시절 노후를 보며 감탄하던 그 마음과 오늘 저녁 노후를 보며 숙연해지는 그 마음의 바탕은 같습니다. 육체라는 옷은 낡아지지만 그 옷을 입고 세상을 비추는 주인은 여전합니다. 중년과 노년의 아름다움은 바로 이 변하지 않는 바탕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주름진 얼굴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변하는 법계의 자연스러운 흐름일 뿐입니다. 대신 그 주름진 얼굴을 거울 속에서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진짜 나에게 집중해 보십시오. 보인 대상은 변하지만 보는 상품은 여전합니다. 결코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목격자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순간 우리는 죽음의 공포와 세월의 무상함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오늘도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당신을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그것들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그저 흐르는 물을 보듯 바라보십시오. 당신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그 물을 지켜보는 흔들림 없는 강둑입니다. 늙어가는 것은 육신이지. 세상을 비추는 당신의 성품이 아닙니다. 우리 삶은 늘 분주합니다. 사람의 치이고 일에 치이고 무엇보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에 치이며 살아갑니다. 브랜드 화가 치밀어 오르고 까닭 없는 우울함이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 감정이 곧 그 소용돌이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갑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을 괴롭히는 그 화 그 불안 그 슬픔이 정말 당신 자신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능원경에서 반안전자의 제자였던 아야 다교지녀의 입을 빌려 우리 마음에 혼란을 잠재울 아주 명쾌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객진의 비유입니다. 비유할 건데 여행하는 나그네가 역원에 들러 잠을 자거나 음식을 먹고 나면 짐을 꾸려 길을 떠나지만 여관 주인은 어디로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떠나는 자는 손님이라 부르고 떠나지 않는 자를 주인이라 부릅니다. 또 맑은 하늘의 햇살이 비칠 때 그 빛 속에 어지럽게 춤추는 먼지를 봅니다. 먼지는 흔들리고 어지러우나 허공은 고요하여 흔들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은 사실 내 마음이라는 여관을 잠시 들렀다 가는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그네가 주인 행세를 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나그네가 소리를 지르면 같이 소리를 지르고 나그네가 슬퍼하면 주인인 나도 짐을 싸서 슬픔의 길을 따라 나섭니다. 주인이 주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나그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형국입니다. 인생의 중반을 넘어서면 이제는 손님과 주인을 구별할 줄 아는 해안이 필요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무례한 말을 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그 두근거림은 나라는 주인이 아니라 잠시 방문한 분노라는 손님입니다. 그 손님은 잠시 머물다 인연이다. 하면 반드시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떠날 때까지 조용히 차 한 잔 대접하며 지켜보십시오. 화라는 손님이 내 여관에 들렀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당신은 이미 그 감정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서게 됩니다. 또한 마음속에 어지럽게 춤추는 생각들은 먼지가 아무리 많 많아도 그것이 고공 자체를 더럽히지는 못합니다. 먼지가 가라앉으면 맑은 허공이 드러나듯 우리의 본래 성품은 본래 고요하고 깨끗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 먼지를 닦아 내려 애쓸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흔들림 없는 허공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아이 씨부야 이를 닦아 내려 애쓸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흔들림 없는 허공임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하루 당신의 마음 여관에는 어떤 손님들이 다녀갔습니까? 시끄러운 손님이 왔다고 해서 여관문을 닫아 걸거나 같이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주인답게 묵묵히 자리를 지키십시오.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갈 것입니다. 주인이 깨어 있으면 손님은 결코 집안을 어지럽히지 못합니다. 당신의 평온을 나그네에게 내어 주지 마십시오. 떠나는 것은 당신이 아닙니다. 떠나지 않고 남은 그 자리가 진정한 당신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불청객 중 하나가 침침해지는 눈입니다. 안경 없이는 신문 한 줄 읽기 어려워지고 멀리 있는 산천 초목도 예전만큼 선명하지 않습니다. 맑았던 눈동자가 흐려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이제 나도 앞이 잘 안 보이는구나 하고 한탄하곤 하지요. 하지만 잠시 멈추어 가만히 자문해 봅니다. 지금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정말 당신의 눈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능원경에서 안 한 존자에게 아주 기묘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바나나 눈 먼 사람이 어둠을 보고 있을 때 그 보는 성품이 없어진 것이냐 아니면 어둠이라는 대상만 있는 것이냐 아나니 답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데 어찌 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눈 먼 사람이 어둠을 보는 것과 눈 뜬 사람이 어두운 방에서 어둠을 보는 것이 무엇이 다르냐? 눈은 단지 도구일 뿐 보는 것은 눈에 있지 않다. 만약 눈이 스스로 보는 것이라면 죽은 사람의 눈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보는 것은 마음의 성품에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삶에 아주 깊은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평생 눈에 보이는 것들에 휘둘리며 살아왔습니다. 남들의 부러운 시선들 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잊고 살았습니다. 눈은 그저 세상을 비추는 창문일 뿐입니다. 창문이 흐려졌다고 해서 방 안에 있는 주인까지 눈이 먼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 살기 힘들다. 앞이 캄캄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육신의 눈이 어두워진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번뇌라는 안개에 갇혔기 때문입니다. 욕심이라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탐욕스럽게 보이고 미움이라는 안경을 쓰면 만나는 사람마다 다시 도친듯 보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투영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중년에 나이가 되어 시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이제 밖으로만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리라는 자연의 배려일지도 모릅니다. 밖에 풍경이 흐릿해질 때 비로소 내 안에 풍경이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찾아내고 더 좋은 것을 가지려 눈을 부라리던 시간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내 마음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내가 어떤 마음에 빛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는지 가만히 응시해 보십시오. 장님이라 할지라도 어둠을 볼 줄 안다면 그는 보는 성품을 읽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역시 삶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그 어둠을 자각하고 있는 나의 빛을 믿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인연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보는 당신의 근본적인 지혜는 결코 어두워진 적이 없습니다. 오늘 저녁 잠시 눈을 감고 고요 속에 머물러 보십시오. 눈을 감아도 여전히 살아 있는 보는 성품을 느껴 보십시오. 밖에 빛이 꺼져도 내면에 등불이 켜져 있다면 당신은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감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것이 진실로 당신이 찾아야 할 보물입니다. 살다 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분명 행복해지려고 애쓰며 살았는데 정작 손에 지는 것은 피로와 공허뿐일 때가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어 마음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상처뿐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늘 제자리를 맴도는 듯한 갈증 속에서 허덕이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능엄경에서 연야 달달하는 한 남자의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어느 날 아침 연야 달라는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너무나 뚜렷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탄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깨달았습니다. 거울 속에 저렇게 얼굴이 있는데 왜 정장 내에 어깨 위에는 머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지? 그는 갑자기 공포에 질렸습니다. 자기 머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한 그는 미친 듯이 머리로 뛰쳐나가 소리쳤습니다. 내 머리 어디라서 내 머리 차단에 사람들이 아무리 내 머리는 내 어깨 위에 그대로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듣지 못했습니다. 미친 듯이 헤매던 그는 스스로 지쳐 쓰러진 뒤에야 혹은 누군가에게 호되게 한데 맞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머리는 단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이 연야 달라와 닮아 있습니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전도 몽상 즉 거꾸로 된 헛된 생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미 온전한 평화와 지혜를 갖추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거울 속 속에 비친 바깥 세상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정작 그것을 누리는 진짜 나의 가치를 잊어버렸습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머리가 없다고 착각하는 연야. 달라처럼 행복의 조건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면 나를 깎아 내리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구멍을 메우려 사방으로 뛰어다닙니다. 내 어깨 위에 위에 머리를 두고서 머리를 찾아 헤매는 가련한 순례잡기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지요. 중년의 위기는 어쩌면 이 미친 질주를 멈출 수 있는 가장 귀한 기회입니다. 이제는 밖으로 향하던 그 간절한 시선을 거두어 보십시오. 당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안정 사랑 평화는 밖에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당신이라는 존재의 바탕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다만 당신이 없다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전도 봉상을 깨는 법은 간단합니다. 달리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앉아 보는 것입니다. 머리가 없다고 소리치는 그 마음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불안하다고 떨고 있는 그 생각이 정말 실체가 있는지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털떡임이 멈추면 비로소 보입니다. 거울 속에 허상을 붙잡으려 했던 손을 넣을 때 당신의 어깨 위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본래의 평원이 느껴질 것입니다. 찾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습니다. 당신은 잃어버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찾고 있다는 착각만 있을 뿐입니다. 사는 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인생이 꼬였다는 말을 합니다. 자식과의 관계가 그렇고 풀리지 않는 경제적 매듭이 그렇고 무엇보다 내 마음속에서 엉켜버린 감정의 실타래가 우리를 숨막히게 합니다. 이 꼬인 매듭을 풀기 위해 우리는 화를 내보기도 하고 억지로 힘을 써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매듭은 더 단단하게 조여올 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능원경에서 이 답답한 마음의 상태를 6 가지 매듭에 비유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숙원 한 장을 가져다가 안환전자 앞에서 차례대로 6개의 매듭을 묶으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바나나 이 매듭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매듭이 묶인 순서를 알고 그 매듭에 속을 잘 살펴서 풀어야 합니다. 양쪽에서 억지로 잡아당기면 매듭은 결코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꽉 조여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열쇠입니다. 우리는 눈 귀코 몸 뜻이라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과 들지 않는 것을 나누며 하나씩 매듭을 묶어 나갑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자존심에 매듭을 묻고 지나간 손해에 미련의 매듭을 묶습니다. 그렇게 여섯 겹으로 단단히 묶인 채로 나는 왜 자유롭지 못한가라며 괴로워합니다. 중년의 삶이 무거운 이유는 내가 묶어 놓은 이 매듭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매듭을 푸는 법은 밖에서 가위나 칼을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매듭은 안에서 묶였으니 안에서 풀어야 합니다.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양쪽에서 당기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는 고집과 상대라는 원망의 두 끝을 탱탱하게 당기고 있는 한 매듭은 절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한쪽 손을 놓으시오. 내가 옳다는 생각을 조금만 헐겁게 하면 내 듭사이에 틈이 생깁니다. 그 틈 사이로 이해와 자비의 숨결이 들어가면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매듭도 스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풀어야 할 매듭은 내가 맞다는 생각의 매듭입니다. 그 매듭 하나만 느슨해져도 나머지 5 매듭은 연쇄적으로 힘을 잃습니다. 삶이 꼬여 있다고 느껴질 때 당신은 지금 어느 쪽을 세계에 당기고 있는지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힘을 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해결책입니다. 매듭은 본래 수건의 본성이 아닙니다. 잠시 모양이 그렇게 잡혀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본래 마음 또한 꼬여 있지 않습니다. 단지 생각이 잠시 매듭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매듭을 푸는 것은 힘이 아니라 팽팽한 마음을 내려놓는 부드러움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시끄럽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들려오는 뉴스 소리부터 시장통에 소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타인의 날카로운 말소리까지. 우리는 원종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내어주고 살아갑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에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가도 나를 비난하는 소리 한마디에 원범을 하얗게 하얗게 지세우며 분노와 슬픔에 잠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소리들에 끌려다니는 당신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