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맞으려 도봉산에 오르며/전성훈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지긋지긋한 폭염이 정말 거짓말처럼 하루 만에 사라졌다. 그토록 힘들고 짜증나게 한 무더운 날씨가 몰라보게 일순간에 그 모습이 변하자 자연의 신비로움에 무서울 정도로 경이로움을 느꼈다. 청명한 하늘을 보면서 그냥 집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토요일이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당초에는 창동역 동측 버스정류장에서 무수골행 마을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한동안 버스가 오지 않았다. 버스정류장 안내판을 보니 무수골행은 차고지 대기라는 표시가 보였다. 주머니에 있는 스마트 폰을 꺼내어 T-MAP을 확인해 보아도 무수골행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방학동 정희공주릉 방향 버스를 탔다. 버스가 출발하여 창동 사거리에서 신호를 받으려고 대기하였다. 그러자 농협 하나로마트 네거리 모퉁이에서 무수골행 미니버스가 고개를 살짝 들이밀었다. 순간적으로 갈등하였으나 이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바, 방학동/원통사/우이암/무수골 계곡으로 코스를 정하였다. 방학동 신동아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고 전형필 선생 묘소를 지나 산행을 시작하였다. 반소매 티에 긴 바지를 입고 팔에는 토시를 끼고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무릎에는 보호대를 부착하고 양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서 산길을 걸었다. 10여 년 전 정형외과에서 사진을 찍었을 때 무릎 연골이 많이 닳아서 무리하게 산행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로 산에 갈 때는 무릎보호대를 착용하고 다녔다. 약 10분 정도 걸어가자 송송 땀이 나기 시작하여 땀에 젖은 옷이 끈적거렸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은 상쾌하였다. 몸 컨디션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가자 푸르디푸른 옷을 입고 한여름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숲속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등산복 속으로 스며들어 땀으로 범벅이 되어 간이 조금 밴 속살을 간지럽혔다. 바닷가 마을의 짠 바람 냄새와는 달리 도봉산 숲속의 향기는 ‘숲의 요정’의 노랫소리처럼 다가왔다.
‘어렵고 힘들어 기운을 차릴 수 없어 한숨만 토해내는 슬픔에 빠지면 날 만날 수 없어요.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언젠가는 이 무정한 세월이 지나가고 기쁨과 즐거움이 넘실대며 춤추는 대지를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으세요. 아무도 없어 나 혼자만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황량하기만 느낌을 주는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면 ‘숲의 요정’을 만날 수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신라 때 지어진 천년 고찰 ‘원통사’로 올라가는 가파른 ‘깔딱 고개‘를 앞두고, 쉼터에서 잠시 쉬면서 매실청을 탄 물로 목을 축이고 초콜릿 하나와 자두 한 개를 먹었다. 시원한 바람 덕에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쉼터에는 몇 사람이 쉬고 있었는데, 연신 부채질을 하는 여성도 보였다. 조금은 쌀쌀한 느낌을 주는 바람 속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보자 속세의 삶이 너무 힘들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통사 입구에서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보면서 원통사와 우이암 그리고 초록빛 물감 같은 모습의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어서 아는 이에게 보냈다. 땀을 흘리며 간혹 거친 숨소리를 내쉬기도 하였지만 소귀를 닮았다는 우이암까지 무사히 올라갔다. 우이암 근처, ‘나의 쉼터’에 배낭과 등산화를 벗어놓고 주위 경관을 살피며 한참 머물렀다. 다섯 봉오리가 형제처럼 오순도순 사이좋게 자리를 잡고서 늘 포근한 미소를 띠고 있는 오봉, 칼바위를 지나 도봉산의 주 능선인 포대능선에 우람하게 서 있는 만장봉, 자운봉, 선운봉의 웅장한 자태. 이렇듯 도봉산 주위 경치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듯 깨끗하게 보이는 날이 1년에 며칠 되지 않을 듯하다. 이틀 전 비가 조금 뿌린 덕분에 정말 시계가 탁 트이고 맑아서 저 멀리 남산 타워와 그 너머 관악산까지 선명하게 바라다 보였다. 너무나 아름답고 화창한 맑은 하늘에 놀라 꿈속의 세계에 빠져들 듯 정신없이 쉬다가 무수골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데 도봉산 매표구 입구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제법 많았다.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거칠게 내뿜으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바로 얼마 전 내 모습을 새까맣게 잊었다.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서 가을맞이를 준비하는 숲에서 들리는 자연의 이치에 귀를 기울였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매서운 긴 겨울이 지나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짧은 봄날이 찾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무덥고 길고 긴 폭염의 여름이 온통 세상을 지배한다. 폭군처럼 군림하던 그 무서운 여름이 떠나면 결실과 사색의 가을은 갑자기 다가오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잡을 수 없는 지나간 과거에 미련을 두고 연연해하지 말자, 오지도 않은 있지도 않은 미래에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애걸복걸도 말자. 늘 몸담고 있는 이 자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다.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자연 안으로 들어가 함께 존재하는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2016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