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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畿道 安山에서는 2018.10.12(금)~14(일) 3일간 檀園區 화랑유원지에서
<安山 金弘道 祝祭>가 열렸다. 얼마 전에 安山 常綠區에 있는 檀園美術館을 관람하려다가
‘사진촬영불가’라고 해서 가지 않았었는데 ‘꿩 대신 닭’으로 마지막 날(10.14)
<安山 金弘道 祝祭>를 관람하였다.
安山 金弘道 祝祭
安山을 대표하는 畵家로 刻印된 조선 최고의 화가 檀園 金弘道는 18세기 英∙正祖 時代
문화적 토양이 매우 비옥했던 安山에서 7~8세부터 20여세까지 豹菴 姜世晃으로부터 그림과
글을 修業 했으며 豹菴의 薦擧로 圖畵署 畵員이 된 후 御眞을 그릴 정도로 大成하였다.
1991년 문화관광부로부터 ‘檀園의 都市’로 이름 붙여졌으며, 이를 계기로 安山을 檀園의 도시로
定着시키고, 정신을 발전시켜 文化藝術의 꽃을 피우고자 1999년부터 檀園藝術祭를 열고 있다.
초기에는 檀園美術公募展으로 그림 展示를 主로, 체험행사를 附帶行事로 열다가 2003년부터
安山 金弘道祝祭와 함께 열고 있다.
祝祭는 金弘道의 一代記 및 작품세계, 마당극〈檀園 金弘道展〉과 風俗畵 동상 퍼포먼스,
대장간, 길쌈, 자리 짜기, 기와이기, 고누놀이, 投壺 등과 내가 만드는 韓紙, 도자기물레 試演,
짚풀工藝, 21세기 과거시험, 檀園圖畵書員 선발대회, 風俗畵 版畵製作 체험, 아동 미술마당,
茶道 試演 및 체험, 페이스 페인팅, 傳統婚禮 再現 등 체험과 장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安山 古棧驛에서 安山 金弘道가 열리고 있는 檀園區 화랑유원지까지 왕복하면서 찍은 사진을
2회로 나누어 올린다. (*棧: 사다리 잔)
2018.10.21 孤山 朴 春 慶
安山 金弘道 祝祭 (2-1)
安山 金弘道 祝祭場 가는 길에
(01) 전철 4호선 고잔역(古棧驛) (*棧: 사다리 잔)
경기 安山市 檀園區 古棧洞에 있는 지하철 果川-安山線의 古棧驛은 1992년 3월
古棧洞 지역주민을 위해 개통하였다. 驛名은 ‘곶안’이 ‘고잔’으로 變音되어 내려오던 地名을
토대로 제정되었다.
(02) 中央大路 건너 高麗大學校 安山病院이 보인다.
(03) 花井橋에서 본 花井川
花井川은 安山市 檀園區仙府洞에서 發源하여 古棧洞 安山川으로 합류하는 길이 5.2km의
地方河川이다.
(04) 安山 문화예술의전당
2004년 10월 開館한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은 해돋이 극장(1,592석), 달맞이 극장(714석),
별무리 극장(200석) 등 세 개의 公演場을 갖추고 있다.
(05) 안산 와~스타디움 앞 中央大路의 街路樹
(06) 안산 와~스타디움
천연잔디축구장과 육상경기장을 갖춘 綜合運動場으로, 工事費 1,128억 원을 투입하여
2006년 11월에 완공하였으며, 觀衆席 3만 5,000석의 지하1층∙지상4층 규모이다
와 스타디움(WA Stadium)은 ‘와~’하는 觀衆의 喊聲, 웰컴 투 안산(Welcome to Ansan),
월드 안산(World Ansan) 등의 複合的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07) 안산 와~스타디움의 무지개모양 구조물
(08) 안산 와~스타디움 입구에 있는 [蹴球記念物]
(09) 安山 檀園區廳
1986.01.01 安山市가 출범한 뒤 2002.11.01 安山市가 2개 區로 分區될 때 常綠區와 함께
새로 생긴 檀園區의 이름은 安山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畵家 檀園 金弘道의 歷史性과
象徵性을 통해 문화예술의 고장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金弘道의 雅號에서 딴 것이다.
(10) 京畿道美術館 입구를 지난다.
安山市 檀園區 草芝洞에 있는 京畿道立美術館은 延 建築面積 8,277.80㎡, 地上 2층으로
2006년 10월 개관했으며, 韓國畵 ·繪畵 ·寫眞 ·彫塑 ·設置 ·미디어 作品 등을 소장하고 있다.
(11) 2018 安山 金弘道祝祭 입구 -草芝洞 花郞遊園地 제3주차장
檀園區 草芝洞에 있는 安山花郞遊園地는 사람, 자연, 철새들이 함께하는 자연 휴식공간이자
가벼운 레포츠 활동이 가능한 복합 휴식공간이다.
총 면적 632,107㎡로, 花郞湖水와 散策路, 京畿道美術館, 檀園閣 등의 자연 휴식공간으로,
잔디광장 ·중심광장[인라인스케이트장] ·야외공연장 ·자연학습장 등을 비롯하여
어린이교통공원 ·족구장 ·농구장 ·게이트볼장 ·간이축구장 등의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다.
(12) 花郞公園의 역사적 由來
安山은 高麗時代 徐熙 將軍의 愛國魂이 잠든 곳으로, 옛날부터 나라를 지키던
草芝陣 兵士들이 군사훈련을 하면서 농사를 지어 軍糧米를 지급하던
‘둔배미벌판’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傷痍軍警과 參戰勇士들이 농사를 지으며 愛國心을
불태우던 花郞農場이었다. 이와 같이 愛國魂이 깃든 곳에
<國家有功者 功績碑>를 세워 後世에 전한다. -2005.05.13-
(13) [護國 國家有功者 功績碑] -大韓民國 武功受勳 國家有功者-
(14) [花郞遊園地] 地名由來標石
1952~1955년 지금의 仁川 富平區山谷洞 일대에 6∙25전쟁 傷痍勇士들이 ‘화랑농장’이라는
自活院을 만들었으며, 이들 중 일부가 安山 草芝洞으로 集團 移住해 오면서 이곳을
‘화랑농장’, ‘화랑저수지’, ‘화랑낚시터’ 등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1980년 安山 新都市建設로 화랑농장의 30여 家口는 전국으로 흩어졌으며, 1986년 安山이
市로 昇格된 후 都市計劃으로 이곳이 遊園地地域이 되어 ‘花郞遊園地’라고 부르게 되었다.
2018 安山 金弘道 祝祭
(15) 2018 安山 金弘道 祝祭 배치도
(16) 그림 감상, 金弘道 展示館. 천막으로 가설된 임시 展示場이다.
儒生들이 세로로 긴 종이를 잡고 둘러서서 그림을 鑑賞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人物들의 표정이 매우 진지하며 특히 침이 튈 까봐 부채로 앞을 가린
儒生의 모습이 印象的이다. 종이에 아무것도 그려 있지 않아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의 熱情을 느낄 수 있다.
金弘道 - 時代를 비추는 맑은 거울
安山은 學問과 藝術이 살아있는 藝鄕이자 文鄕으로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當代 최고의 畵家였던
豹菴 姜世晃, 玄齋 沈師正, 月城 崔北, 煙客許佖, 檀園 金弘道 등과 文人들이 활동하던 장소였다.
安山의 풍요로운 문화와 예술적 土壤에서 성장하여 凝集과 餘白, 諧謔과 諷刺로 시대를 비추어
맑은 거울이 된 金弘道의 삶과 작품을 감상하는 전시관이다. (*豹: 표범 표 *晃: 밝을 황
*凝: 엉길 응 *諧: 화할 해 *謔: 희롱할 학 *諷: 풍자할 풍 *刺: 찌를 자)
(17) 2018 安山 金弘道 祝祭 -10.12(금)~10.14(일) -화랑유원지 축제장
(18) 金弘道 年報
金弘道(1745~1806?)
-本貫; 金海 -字: 含章, 士能
-號: 檀園, 醉史, 醉士, 醉師, 高眠居士, 檀老, 檀翁, 丹丘, 丹邱, 農漢, 農社翁,
輒醉翁
-堂號: 午睡堂 (*醉: 취할 취 *眠: 잘 면 *輒: 문득 첩 *睡: 졸음 수)
(19) 金弘道 年報. -1745~1765 -1773~1783
=1745(英祖 21년) ~ 1765(英祖 41년, 21세)
-1745: 金海金氏 中人 집안에서 출생.
-1751: 7세무렵 姜世晃에게서 畵法과 文學을 익힘.
-1763~1765: 19대 말~20대 초에 圖畵書院의 宮中畵家
-1763: <筠窩雅集圖> 合作 (*筠: 대나무 균 *窩: 움집 와 *雅: 맑을 아)
-1765: <英祖耆老宴·受爵宴圖 屛風> 제작 (*耆: 늙을 기 *爵: 벼슬 작)
=1773(英祖 49년, 29세) ~ 1783(正祖 7년, 39세)
-1773: <英祖 御眞> 및 <世孫(正祖)의 肖像> 作業에 同參畵師로 참여.
<愼言人圖> 제작
-1774: 司圃署別提로 姜世晃과 함께 근무 (*圃: 채마밭 포 *提: 끌 제)
-1775: <群仙圖> 8폭병풍 제작, 3월 正祖 卽位.
-1778: <西園雅集圖> 6폭병풍 제작 (*雅: 맑을 아)
-1781: <仕女圖>, <洗劍亭雅集圖> 제작, <正祖御眞> 제작에 同參畵師로 참여.
號 ‘檀園’ 사용 (*仕: 섬길 사/벼슬 사)
-1783: 慶尙道 安奇察訪에 임명
(20) 金弘道 年報 -1784~1788 -1789~1792
=1784(正祖 8년, 40세) ~1788(正祖 12년, 44세)
-1784: 正月 安奇察訪 부임. 淸凉山에 가서 漢詩를 짓고 <淸凉吹蕭圖> 제작.
淸凉聯詠帖 중 金弘道의 詩 (*詠: 읊을 영)
雲屛霧障 面面開/구름병풍 안개휘장이 한 폭 한 폭 드러나니
意匠蒼茫 十二幅/누구의 솜씨인가 아득하고 망망한 열 두 폭 그림
(*蒼: 푸를 창 *茫: 아득할 망)
3년 전 자신의 집 ‘檀園’에서의 모임을 <檀園圖>로 제작
-1786: 安東 棣華亭에 <湛樂齊> 현판을 써줌. 姜世晃에게서
<檀園記>를 받음. (*棣: 산앵두나무 체 *湛: 괼 담)
*棣華亭(경북 유형문화재 제200호): 조선 英祖 37년(1761)에 進士
晩圃(竹西) 李敏迪이 세워 학문을 닦던 亭子
(*棣 : 산앵두나무체 *迪: 나아갈 적)
-1788: 正祖의 命으로 金剛山을 그리기 위해 寫生旅行
=1789(正祖 13년, 45세) ~ 1792(正祖 16년, 48세)
-1789: 日本對馬島에 가서 地圖를 그려 옴..
-1790: 騎驢遠遊圖 제작, 華城 龍珠寺 佛畵製作監督
(*騎: 말 탈 기 *驢: 당나귀 려)
-1791: 스승 姜世晃 他界(79세). <正祖御眞> 제작에 同參畵師로 참여.
-1792: 충청도 延豊縣監(*현재 槐山) 부임
(21) 金弘道 年報 -1794~1795 -1796~1799
=1794(正祖 18년, 50세) ~ 1795(正祖 19년, 51세)
-1794: <黃猫弄蝶圖> 그림. 1월 華城(水原城) 築城 시작.
(*猫: 고양이 묘 *弄: 희롱항 농/롱 *蝶: 나비 접)
-1795: <園幸乙卯整理儀軌 圖說> 揷畵 제작. <乙卯年畵帖> 제작.
<華城陵行圖>8폭 병풍 완성, <華城春秋八景圖 병풍 16폭> 제작
(*揷: 꽂을 삽)
=1796(正祖 20년, 52세) ~ 1799(正祖 24년, 56세)
-1796: <檀園折世寶帖>. <丙辰年畵帖> 그림. <徐直修肖像> (李命基와 합작)
몸 부분 그림. <水原陵幸圖屛風> 완성. (*折: 꺾을 절 *帖: 문서 첩)
-1797: <五倫行實圖> 간행, 金弘道가 揷畵 제작 主導
-1798: <訪花隨柳圖> 그림. (*隨: 따를 수)
(22) 金弘道 年報 -1800 -1801~1806
=1800(正祖 25년, 57세)
-1800년 <朱夫子詩意圖 八幅屛風>을 그려 正祖에게 바침. (*屛: 병풍 병)
6월 正祖 갑자기 昇遐함. (*遐: 멀 하)
=1801(純祖 1년, 57세) ~ 1806(純祖 6년, 62세)
-1801: 純祖水痘 快差 기념으로 <三公不換圖> 제작. (*痘: 역질 두)
-1802: <滄波圖>, <老僧觀瀾圖>, <歸漁圖> 제작. 號 ‘輒醉翁’ 사용
(*滄: 큰 바다 창 *瀾: 물결 란 *輒: 문득 첩 *醉: 취할 취)
-1804: <知章騎馬圖>, <耆老世聯契圖> 제작. 奎章閣 差備待令畵員이 됨.
-1805: <松下談笑圖> 그림, 金弘道의 마지막 그림 <秋聲賦圖> 제작.
-1806: 이 해에 他界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음.
(23) 檀園 金弘道(1745~1806?)
=安山이 배출한 天才畵家金弘道
安山은 文化와 藝術的인 土壤이 매우 肥沃했던 곳으로, 18세기 英∙正祖 시대에 이곳은
學問과 藝術의 香薰으로 가득 차 있었다. (*薰: 향초 훈)
實學의 巨木인 星湖 李瀷(1681~1763)과 그의 조카로 당시 文壇의 巨匠인 惠寰齋 李用休,
그리고 樊巖 蔡濟恭, 許 佖, 安鼎福, 柳重臨 등과 豹菴(添齋) 姜世晃, 崔 北, 玄齋沈師正 등이
활동했던 文人과 藝人들의 중요한 活動處였다. (*瀷: 강 이름 익 *寰: 京畿고을 환
*樊: 울타리 번 *佖: 점잖을 필 *鼎: 솥 정 *添: 더할 첨)
朝鮮의 畵仙이라고 부르는 金弘道는 이처럼 安山의 풍성한 文化的 분위기 속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畵家로 成長의 기틀을 닦았다.
스승 姜世晃은 ‘詩∙書∙畵의 三絶’로, ‘藝苑의 總帥’로 불렸으며 金弘道는 幼年期인 6~7세부터
安山에서 姜世晃으로부터 그림과 글을 修業했으며, 西湖라는 安山앞바다의 地名이 있는
號를 처음 사용한 것과 安山의 地名에 나오는 檀園, 檀丘의 號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安山에서
출생했다고 推論할 수 있으며, 19세가 되던 해에 安山에서 <筠窩雅集圖>를 合作하여 남겼다.
(*筠: 대나무 균 *窩: 움집 와)
=金弘道는 누구인가?
檀園의 外貌와 人品에 대한 記錄
士能의 인품은 얼굴이 淸秀하고 精神이 깨끗하여 보는 사람마다 그가 高尙하고 世俗을 넘어
世間의 平凡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姜世晃 檀園記-
세상이 藝術로써 君을 重히 여기니 나 역시 따라서 藝術로써 君을 重히 여겼다.
오늘 君의 肖像을 대하니 玉 같은 모습, 난초 같은 향기가 들은 바 보다 훨씬 낫구나.
이는 溫雅한 君子의 모습이다 - 李用休 對右庵金君像贊 -
金君 士能은 스스로의 矜持가 크고 또 그림을 가볍게 보지 않음은 대개 그 人品이 아주
높아 優雅하고 韻致 있는 선비의 風이 있기 때문이다. -李用休 對右庵記- (*韻: 운 운)
金弘道의 畵評
金弘道는 그림에 奧妙한 者로 그 이름을 안지 오래다. 삼십 년 전에 나의 肖像畵를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 일에 속한 일은 모두 그에게 맡겼다. –正祖大王弘齋全書-
(*奧: 깊을 오)
書畵家이자 畵評家인 豹菴姜世晃은 <西園雅集圖>에서 그의 솜씨를 神筆이라 評했으며,
<檀園記>에서는 天地開闢 이전의 混沌한 상태를 깨뜨려 연다는 뜻의 ‘破天荒’이라고 적었다.
金弘道와 같은 時期에 생존한 文人 靑城 成大中(1732~1812)은 그의 그림을 國畵라고
命名했고, 近代期 史學者이자 言論人인 湖巖 文一平(1888~1936)은 畵仙이라고 讚辭했다.
(*讚: 기릴 찬)
(24) 朝鮮的인, 너무나도 朝鮮的인 畵家 金弘道
朝鮮的인, 너무나도 朝鮮的인 畵家 金弘道
檀園은 山水며 風俗畵, 翎毛圖(*새와 짐승 그림), 古史人物, 肖像畵는 물론 심지어
佛畵에서 揷畵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그림을 모두 잘 그렸으니 朝鮮을 대표하는
畵家였다. (*翎: 깃 영)
그는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文學에서도 앉은 자리에서 韻을 맞춰 漢詩를 바로 지을 만큼
滔滔했으며 音樂에도 造詣가 깊어 大笒이며 거문고를 잘하여 演奏家로도 이름을 날려
金弘道의 작품 속에는 樂器와 함께 그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韻: 운 운
*滔: 물 넘칠 도 *詣: 이를 예 *笒: 첨대 금)
그는 임금의 肖像畵 제작에 참여한 사실로 알 수 있듯이 寫實的 繪畵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던 畵員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檀園이 그림을 잘 그렸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그려도 우리 固有의 맛을 우러나게 그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中國 古史人物圖나
定型山水에서도 우리의 멋이 농 있게 우러나고 있는 것이다.
金弘道는 지금까지 風俗畵家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림의 素材가 선비적이고 士大夫 思想의
風流에 젖는 素材의 그림을 자주 그렸으며 山川과 들, 동물, 인물, 風景까지 잘 그린
天才畵家였다.
正祖가 昇遐하고 純祖의 在位 時節 어느 해 金弘道는 마치 神仙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風流를 즐긴 호탕한 性品
벼슬이 延豊縣監에 이르렀으나 집이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웠다.
어떤 이가 梅花 화분을 파는데 奇異한 것이었으나 화분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림을 그려달라고 돈 三千을 보낸 이가 있었다. 곧 二千으로 매화 화분을 사고,
八百으로 술 몇 말을 사서 친구들을 모아 梅花 술자리를 열고 남은 二百 냥으로 쌀과
땔감 밑천을 삼았으니 하루 生計도 되지 못하였다. –趙熙龍의 梅花飮 古事-
多才 多能했던 藝術家
容貌가 아름답고 속에 품은 뜻이 맑으며 性品이 音樂을 좋아하며 매번 꽃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때로는 한 두 曲을 연주하며 스스로 즐겼다.
-姜世晃이 金弘道에게 써주었던 <檀園記>-
봄물에 배를 띄어 가는 대로 놓았으니
물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
이 중에 늙은 눈에 보이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金弘道 靑丘永言-
(25) 호접도[胡蝶圖] -105.5 x 29.4cm –종이에 水墨淡彩 -肯園 金良驥作
金良驥(1793~1844 이전)는 金弘道의 외아들이다. 아주 치밀한 線描로 纖細하게 표현한
나비와 花草들은 그도 父親처럼 자세한 觀察과 정밀한 描寫가 능숙했음을 보여준다.
또 怪石의 표현은 굵기가 일정하지 않은 筆線으로 바위의 윤곽을 거칠게 표현하고,
變形된 斧劈皴으로 陰影과 質感을 나타냈다. (*驥: 천리마 기 *纖: 가늘 섬
*斧: 도끼 부 *劈: 쪼갤 벽 *皴: 틀 준)
畵題의 내용은 ‘일찌감치 世俗 사람들 눈에 안들 줄 알았던들 차라리 臙脂로 모란이나
그릴 것을’이다. 조선 중기의 유명한 學者 佔畢齋 金宗直(1431~1492) 詩의 일부이다.
(*臙: 연지 연 *佔: 엿볼 점 *畢: 마칠 필)
*斧劈皴(부벽준): 山水畵에서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側筆을 이용해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나타내는 준법. 붓을 기울인 상태로 먹이 묻는 면을 넓게 하여
끌어당겨 그려 수직으로 부서진 단층의 효과를 낸다.
*側筆: 書畵에서 用筆法의 일종으로, 붓을 눕혀 이삭[穗]의 볼록한 부분으로 쓰는 것인데
肥庾가 있고 부드러운 필치로 볼록한 墨點을 얻을 수 있다. (*庾: 곳집 유)
***作者와 所藏處를 기록을 省略한 작품은 金弘道 作, 安山市 所藏이다.
(26) 사슴[鹿]과 동자[童子] -145 x 85.5cm -종이에 淡彩 -金弘道 作
藥草 캐는 童子가 호미와 광주리를 메고 깊은 산 속을 가고 있다. 뒤에는
험준한 바위산이, 아래는 폭포가 쏟아진다. 雙髻를 튼 머리와 허리에 표주박을
찬 童子는 必是 神仙일 것이다.
오른쪽으로 오르는 童子와 왼쪽을 향한 사슴 사이에는 角지게 꺾인 나무줄기가
가로막고 있다. ‘갈之字’로 전개된 山勢 속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오름에 사슴과
神仙을 배치하고 神仙이 뒤돌아보아 사슴과 연결하고 있다. 오른쪽 위 金弘道의
畵題는 ‘봄 산 사슴의 자라난 鹿茸을 보지 못하네.’이다. (*髻: 상투 계 *茸: 풀 날 용)
金弘道의 50代 중엽 圓熟期 작품으로 山水의 표현은 大凡하게 간략한 붓질로
표현했으나 사슴은 生氣 있는 눈동자, 몸체의 터럭까지 비교적 정밀하게 표현했다.
(27) 화조도[花鳥圖] -32.5 x 23.6cm -종이에 먹과 엷은 색
오른쪽 위에서 對角線으로 아래로 드리워진 나뭇가지 위에 콧잔등에
털이 난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화면 오른쪽 아래에 倣林良筆 檀園이라는
自筆 落款과 署名이 있다. (*倣: 본뜰 방 *款: 항목 관)
(28)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112.0 x 59.5cm -종이에 먹과 엷은 색
-合作圖 -1763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畵家 豹菴 姜世晃, 玄齋 沈師正과 가까웠고, 詩人이며 畵家인 烟客 許 佖과
절친했으며, 화가 星齋 崔 北과도 친하고, 金弘道는 그의 弟子인데, 18세기
畵壇의 主役들인 이들이 한 畵幅에 그린 合作圖이다. (*烟: 연기 연 *佖: 점잖을 필)
姜世晃이 그림의 構圖를 잡고, 소나무와 돌은 沈師正이 그렸으며, 彩色은 崔 北,
金弘道는 인물을 그리고, 跋文은 조선후기 학자이자 화가였던 許 佖이 썼다. (*跋: 발블 발)
제일 안쪽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豹菴이며, 곁에 앉은 아이는
金德亨(1750무렵~?), 탕건만 보이는 사람은 玄齋이다. 망건을 쓰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星齋이며, 담뱃대를 물고 있는 바둑 상대는 秋溪이다. 이들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煙客, 앞쪽 안석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사람은 筠窩 申光翼(1746~?)이며,
그 옆에서 통소를 부는 少年이 19세의 金弘道이다. (*筠: 대나무 균 *窩: 움집 와)
1763년에 그린 그림으로 安山 균와의 집에서 모인 雅集(*우아하게 모임)의 장면으로,
이들은 당시 安山을 활동기반으로 했던 화가들로, '筠窩'의 위치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29) 어물장수[賣醢婆行圖] -1778년 –行旅風俗圖屛 中 -90.9 x 42.7cm
–비단에 엷은 채색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醢: 육장 해)
조선시대 安山은 西海 漁場 중에서도 가장 우수하여 宮中에 魚物을 進上하는
安山漁所가 있었다. 한 손은 머리 위의 광주리를 잡고, 다른 손은 지팡이를
짚은 老婆도, 또 손으로 광주리와 업은 아기의 손을 맞잡고 가는 젊은 아낙네도
하나같이 버선목이 들어나도록 걷어 올린 치마자락으로 보아 바쁜 걸음을
걷고 있으나. 바쁜 중에서도 앞사람은 돌아서서 뒷사람을 챙기고, 서로 視線을
맞추며 배려하는 표정이 따스하다.
(30) 소나무 아래 호랑이[松下猛虎圖] -90.3 x 43.8cm
-비단에 먹과 엷은 색 -삼성미술관 소장
호랑이는 등을 곧추 세우고 꼬리를 치켜 든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어 호랑이의
威容이 잘 표현된 작품이다. 호랑이의 全身은 터럭을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했으며, 소나무는 비교적 簡潔하게 그렸으나 굵은 나무둥치와 상대적으로
가는 가지를 寫實的으로 표현하여 對比시키고 있다. 호랑이는 옛날부터 僻邪의
기능을 담당하여 새해를 맞아 厄을 물리치는 의미로 용과 함께 대문에 붙이거나
서로 주고받는 주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다.
(*潔: 깨끗할 결 *僻: 궁벽할 벽 *邪: 간사할 사)
(31) 무동[舞童] -보물 527호 檀園風俗圖帖 25폭 중 일부
-26.8 x 22.7cm -紙本 水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風樂가락이 숨가쁘게 높아짐에 따라, 춤추며 돌아가는 소년의 옷자락에서는
사뭇 바람이 이는 듯하고, 피리 부는 말뚝벙거지의 사내는 양 볼이 터질 듯
부풀었으며, 모여 앉은 群像들은 자못 熱氣에 들떠 있다.
당시 賤民으로 취급 받던 풍각장이의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흥겨움을
이처럼 諧謔的으로 다룬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로, 檀園은 당시
蕙園 申潤福과 함께 風俗畵에서 獨步的인 境地를 개척한 畵家로, 簡潔하면서도
纖細한 檀園 특유의 筆法을 구사하였다. (*蕙: 풀 이름 혜)
(32) 그림 감상 -檀園風俗圖帖(보물 527호) 중 -28.1 x 23.9cm
-종이에 엷은 채색
儒生들이 세로로 긴 종이를 잡고 둘러서서 그림을 鑑賞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人物들의 표정이 매우 진지하며 특히 침이 튈 까봐 부채로 앞을 가린 儒生의
모습이 印象的이다. 종이에는 아무것도 그려 있지 않아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의 熱情을 느낄 수 있다.
(33) 빨래터 -檀園風俗圖帖(보물 527호) 중 -28.0 x 23.8cm
-종이에 엷은 채색
냇물을 배경으로 빨래터를 描寫했는데 바위 뒤에 숨어 얼굴을 부채로
가리고 빨래하는 女人들의 姿態를 훔쳐보는 閑良을 등장시켜 蕙園 申潤福이
즐겨 다루던 春意를 담고 있는데 檀園의 風俗畵로서는 異色的이다.
그러나 表現技法이나 여인네의 소탈하고 순수한 모습 등은 蕙園의 畵風과는
차이가 있다.
(34) 씨름[相撲] -檀園風俗圖帖(보물 527호) 중 -26.9 x 22.2cm
-종이에 엷은 채색 (*撲: 칠 박)
<씨름>은 檀園의 風俗畵 특징을 대표할 만한 명품으로 두 무리의 구경꾼들을
화면의 위아래에 둥글게 배치하여 가운데 공간을 연 다음, 서로 맞붙어 힘을
겨루는 두 사람의 씨름꾼을 그려 그림의 중심을 잡았다. 왼쪽에 서 있는 엿장수는
구경꾼들의 관심 밖에 있으면서도 이 圓形 構圖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벗어 놓은
신발은 오른쪽으로 터진 餘白을 좁히는 구실을 하고 있다.
이처럼 빈틈없이 짜인 구성과 함께 간결한 붓질로 풍부하게 묘사한 인물들의 표정과
열띤 座中의 분위기가 金弘道의 非凡한 才能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인물들이 입
고 있는 무명옷의 質感에 맞추어 驅使된 투박한 筆致와 둥글넓적한 얼굴, 동글동글한
눈매도 그가 즐겨 다룬 風俗 人物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 (*驅: 몰 구)
(35) 기와이기 -檀園風俗圖帖(보물 527호) 중 -27.0 x 22.7cm
-종이에 엷은 채색
기와를 이어나가는 光景으로 遠近法을 적용하여 多樣한 일꾼들의 모습을
죽 둘러보기 좋게 구성하였다. 밑에서 던진 기와를 맨손으로 받아내고
흙 반죽덩이를 달아 올리는 모습, 먹줄을 늘어뜨린 木工이 한 눈을 감고
기둥의 쏠림을 점검하고 木手가 대패질하는 모습 등을 實感나게 그렸다.
(36) 서당[書堂] -檀園風俗圖帖(보물 527호) 중 -26.9 x 22.2cm
–종이에 엷은 채색
쪼그리고 돌아앉아 훌쩍이는 學童을 畵面의 焦點에 두고, 그 주위에 方巾을
쓰고 儒生 옷차림의 훈장을 축으로 學童들을 둥글게 배치하였다.
畵面의 구성이나 생략된 背景, 옷 주름의 筆致, 얼굴모습 등 모두가 現場感
넘치는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서러움이 완연한 學童의 표정도 재미있지만,
주변 인물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에도 情感이 넘쳐나,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微笑를 머금게 한다.
(37) 협접도[蛺蝶圖] -29.0 x 74.0cm -종이에 수묵담채 -1782년 작
-국립중앙박불관 소장 (*蛺: 나비 협 *蝶: 나비 접)
부채 면에 나비를 그린 작품으로 檀園은 翎毛(*새, 짐승을 그린 그림)나 花卉草蟲에서도
우수한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개나 고양이뿐 아니라 石竹, 제비꽃, 나비와 같은 화훼초충에
서도 實物을 방불케 하는 뛰어난 技倆을 볼 수 있다. 화면의 우측 하단에 흰 꽃을 배치하고,
좌측에 다양한 종류의 나비를 그려 간결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그 사이에는 餘白을 적절히
분할하여 석초와 姜世晃의 評과 또 다른 인물의 전서 題跋을 기록하여, 그림의 韻致를
더해주고 있다. (*翎: 깃 영 *卉: 풀 훼 *倆: 재주 량 *跋: 밟을 발)
오른쪽 아래에 ‘壬寅秋士能寫’의 干紀와 款識가 있어 檀園이 38세에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干: 방패 간 *款: 항목 관 *識: 적을 지)
나비의 가루가 손에 묻을 듯, 人工이 自然의 調和를 빼앗기 족함이 이름을 보매 敬歎하여
한마디 부친다. 豹菴의 評에 나비가 비스듬하게 날개를 펼치는 모습 정도는 비슷하게
그릴 수 있으나 자연에서 부여 받은 빛깔을 이 境地로 나타내니 붓끝에 神이 붙었다고나
할까 - 석초 평 – (歎: 탄식할 탄)
(38)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156.5 x 65.4cm –
비단에 채색 -華城行幸圖屛 중 제7폭 -삼성미술관 러움 소장
6,000여명의 인원과 1,400여필의 말이 동원된 盛大했던 行列을 그린 장면이다.
이 행렬은 漢陽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始興行宮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남쪽의
安養橋 앞에서 行列을 잠시 멈추고 正祖가 惠慶宮 洪氏에게 米飮과 茶盤을
올리는 매우 孝誠스러운 장면을 그렸다. 旗手隊 앞의 길이 급격하게 꺾인 부분에는
임금의 行次를 알리는 거대한 龍旗가 펄럭이고, 그 앞에 지금은 비어있는
正祖의 正駕轎가 있다. (*駕: 멍에 가)
*華城行幸圖 屛風 -보물 제1430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正祖가 父親 思悼世子의 回甲을 맞아, 正祖 19년(1795) 윤 2월 9일부터 8일간 母
親 惠慶宮 洪氏를 모시고 思悼世子의 墓所인 華城의 顯隆園을 行幸했을 때 거행한
주요 행사를 그린 8첩 병풍이다.
각 폭의 내용은 華城聖廟展拜圖, 洛南軒放榜圖, 奉壽堂進饌圖, 洛南軒養老圖,
西將臺夜操圖, 得中亭御射圖, 還御行列圖, 漢江舟橋還御圖 등으로 구성되었다.
(*榜: 방 붙일 방 *饌: 반찬 찬 *操: 잡을 조)
(39) 규장각도[奎章閣圖] -144.4 x 115.6cm -종이에 채색
-1776년 작 -국립중앙박불관 소장
奎章閣은 昌德宮에서 景觀이 가장 아름다운 暎花堂 옆에 2층 樓閣으로
건축했으며, 1층은 奎章閣, 2층 樓閣은 宙合樓였다. <奎章閣圖>는 규장각이
그림의 主題였던 만큼, 畵面의 중앙에 규장각을 실제보다 크게 강조하여
그렸으며, 四方에 부속건물과 주변 경치를 에워싸듯 묘사하였다.
<奎章閣圖>는 金弘道가 32세에 그린 그림으로, 초기 본격적인 山水畵風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暎: 비칠 영)
正祖 때 學術과 政治의 中樞機關이었던 奎章閣을 단독으로 그린 그림으로
규장각의 位相을 가늠하는데 참고가 된다. 繪畵的으로는 金弘道의 다양한
畵風 중에서 山水畵風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그 多樣性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며,
正祖代記錄文化의 發展相을 파악할 수 있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40) 옥순봉[玉荀峯] -<金弘道筆 丙辰年 畵帖(보물 제782호)> 중 -26.7×31.6㎝
-종이에 수묵담채 -1796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金弘道筆 丙辰年 畵帖>의 첫 번째 그림으로 丹陽 八景의 하나인 玉荀峯을 그린 것이다.
나란히 선 玉荀峯의 최고봉을 가운데 두고 점차 왼쪽으로 비스듬하게 내려오도록 배치했으며,
제일 높은 봉우리를 짙은 線描로 강조하여 主題를 浮刻시켰다. 반면에 岩峰 아래와 遠景은
中淡墨의 번지기를 사용하고 餘白도 적극 살려 主題를 부드럽게 감싸주고 空間感을
살렸다. (*荀: 풀 이름 순)
金弘道가 延風縣監 時節 인근의 丹陽 일대를 유람하고 그린 것으로 보인다. 강물에 떠 있는
작은 배에 앉아 있는 두 선비의 모습이 여유롭고, 그림의 왼쪽에 ‘丙辰春寫檀園’이라고 썼다.
*번지기: 美術技法의 하나로, 종이의 한쪽 면에 붓으로 물을 바르고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물감을 칠하거나 떨어뜨릴 때 번져 나가는 효과.
(41) 조어산수도[釣魚山水圖] -<金弘道筆 丙辰年 畵帖(보물 제782호)> 중 -26.7×31.6㎝
-종이에 수묵담채 -1796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큰 절벽 아래 개울가에서 한가롭게 낚시하는 두 사람을 그렸는데. 화면 오른쪽 위는 절벽,
왼쪽아래는 시내와 아슴푸레한 遠景으로 처리하였다. 절벽 아래 물가부분에 집중적으로
皴法을 써 安定感을 주었으며 그 위의 넓은 면을 빠르고 물기 많은 線描와 바람을 爲主로
간결하게 처리했다.
낚싯대를 드리운 두 사람은 右下 구석에 앉아 있으나 對角線上으로 배치된 나무들이
延長線上에 있어 눈에 잘 띈다. (*釣: 낚을 조 *皴: 틀 준)
*皴法: 동양화에서, 산악∙암석 따위의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쓰는 技法.
(42) 기우도강도[騎牛渡江圖] -<金弘道筆 丙辰年 畵帖(보물 제782호)> 중 -26.7×31.6㎝
-종이에 수묵담채 -1796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넓은 개울을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마주 보이는 건너 마을에 이들의 집이 있는
모양이다. 소 잔등을 탄 두 사람에게는 송아지가 딸려있고, 다리를 건너는 인물들은
지게를 진 두 사람과 갓을 쓴 사람이다. (*騎: 말 탈 기)
(43) 추림쌍치도[秋林雙雉圖] -<金弘道筆 丙辰年 畵帖(보물 제782호)> 중 -26.7×31.6㎝
-종이에 수묵담채 -1796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深山幽谷의 어느 點景에 꿩 한 쌍이 위아래에서 對角의 자세로 마주보고 있는데 背景의
山水는 꿩의 布置와 相反되게 대각선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 좌우의 나무들이 對角線 構圖의 강한 對比를 누그러뜨리면서 자연스러운 멋을
돋구어주고 있다. 특히 淡墨으로 처리한 은은한 背景山水에 樹木과 꿩의 표현이 예리한
濃墨으로 點綴되어 主題를 부각시키면서 背景은 毅然하면서도 柔軟한 분위기를 자내고
있다. (*雉: 꿩 치 *淡: 맑을 담 *濃: 짙을 농 *毅: 굳셀 의 *柔: 부드러울 유)
(44) 해도[蟹圖] -30.9 x 41.2cm -종이에 수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의 크기나 중앙의 접힌 자국으로 보아 畵帖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水草를 배경으로 한 쌍의 게[蟹]만 나타낸 것으로 ‘爲柳老贐行饌需寫贈’ 墨書가 있다.
水墨만으로 그린 게 그림은 갈대와 게를 함께 나타낸 그림이 일반적인데, 갈대가 아닌
일반 물풀[水草]에다가 송사리 등 작은 물고기를 함께 그린 작품들도 있다.
(*蟹: 게 해 *贐: 전별할 신)
*贐行(신행):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주는 詩文이나 물건.
(45) 하화청정도[荷花蜻蜓圖] -30.9 x 41.2cm -종이에 담채 -澗松美術館 소장
붉은색의 연꽃과 싱그러운 푸른 연잎 등 設彩와 섬세한 描寫技法의 뛰어난 작품으로
畵面 아래의 일정한 범위에 淡靑을 옅게 입혀 水面雰圍氣만 暗示的으로 나타냈다.
화면 왼쪽 위에 짝짓기하고 있는 붉고 푸른 잠자리를 나타내 滿發한 연꽃과 더불어 視線을
兩分하고 있다. (*蜻: 잠자리 청 *蜓: 잠자리 정)
*設彩: 바탕을 먹으로 먼저 그린 다음 色彩를 올림
- 安山金弘道 祝祭 (2-2)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