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순원[편집]
黃順元 (1915-2000) 소설가.평남 대동(大同)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부 졸업. 경희대학 교수역임. 처음에는 <단층> 동인으로 1935년경 <신동아>에 시를 투고했고, <목가> <골동품>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1940년 이후 <황순원 단편집>을 냄으로써 소설로 전환, 치밀한 문장과 감각적·심리적인 소설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 간행된 단편집으로는 <목넘이 마을의 개>(1948) <기러기>(1951) <곡예사>(1952) <학(鶴)> <탈> 등과 장편소설 <별과 같이 살다>(1950) <카인의 후예>(1954) <인간 접목>(1957)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日月)>(1964) 등이 있다. 1954년 자유문학상을 받음. 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서정주[편집]
徐廷柱 (1915-2000) 시인.호는 미당(未堂). 시동인지 <시인부락>을 통해 문단에 등장, 시단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처음에 그는 토속적인 체취와 강렬한 생의식(生意識)의 세계를 표현한 시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집 <화사집>은 초기의 시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방랑·관능·토속·고뇌의 세계 속에서 생의 갈등과 방황을 보여주었으며, 시집 <귀촉도>에서부터는 점차 긍정적인 세계로 변모되어 시집 <신라(新羅)> 이후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전통적인 신라정신을 그 독특한 개성으로 표현하였다. 예술원 회원·동국대 교수 역임.
유치환[편집]
柳致環 (1908-1967) 시인.호는 청마(靑馬). 경남 충무 출생. 연희전문 문과 수업.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靜寂)>을 발표하여 시단에 등장했다. 초기 시에서부터 형이상학적 관념과 생의 의지를 시세계에서 표현하여 흔히 의지의 시인이라 불렸는데, 허무주의적인 것과 대결하는 것을 시의 과제로 삼았다. 다작의 시인으로 시집에 <청마시집>(1939) <생명의 서(書)>(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보병과 더불어>(1952)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등이 있다. 1946년에 제1회 조선 시인상을,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받음. 예술원 회원·경남여고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김용호[편집]
金容浩 (1912-1973) 시인.마산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 졸업. 시지 <맥>의 동인으로 활동. 시집으로 <향연(饗宴)>(1941) <해마다 피는 꽃>(1948) <푸른별>(1951) <남해찬가> 등이 있고 저서에는 <시문학 입문> 역서에 <문학 원론>(허드슨 원저) 등이 있다.
여류 문학의 세계[편집]
女流文學-世界 1920년대에 김명순(金明淳)이 <조선문단>에 시를 발표한 이후, 1930년대에서 1935년 사이에 박화성, 강경애(姜敬愛), 백신애(白信愛) 외에 최정희(崔貞熙), 김원주(金源周), 이선희(李善熙), 모윤숙(毛允淑), 노천명(盧天命), 임옥인(林玉仁) 등의 여류 작가·시인들이 등장했다. 먼저 강경애는 성실하고 끈질긴 집념으로 일관했는데, 그의 작풍은 소박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것이었다. 백신애는 <조선일보>를 통해 문단에 등장, 주관성과 정열이 강한 작가로 계속 <광인수기(狂人手記)>(1937) <소독부(小毒婦)>(1938) <정조원(貞操怨)> 등을 발표했으나 작품이 원숙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정희의 초기작은 경향성을 띤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가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한 것은 1937년 <흉가(凶家)>를 발표한 이래 <정적기(靜寂記)>(1938) <인맥(人脈)>(1940) <지맥(地脈)>(1940) 등을 발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작가의 특색은 주인공을 통해 대담하게 자기 폭로를 치밀한 수법으로 묘사했는데 한마디로 주정성(主情性)이 강렬하게 반영되었다. 이선희는 북방적인 엑조티시즘의 세계를 그의 작품에 반영했는데 <연지>(1937) <계산서(計算書)>(1937) <매소부(賣笑婦)> <탕자(蕩子)>(1940) 등을 발표, 그 중에서도 <매소부>가 대표작이다. 장덕조(張德祚)는 1932년 <개벽>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작품을 발표했는데, 초기의 단편으로는 <해바라기> <자장가>가 두드러진 편이며, 이 작가의 통속적인 스토리 전개는 뒤에 대중소설로 전환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1934년 처녀 시집 <빛나는 지역>으로 문단에 등장한 모윤숙은 감상과 정열에 넘치는 시인으로 장편시 <렌의 애가>에는 여심(女心)의 동경과 연모(戀慕)의 감정이 세련되게 표출되어 있다. <중앙일보> 기자를 지내면서 시를 발표한 노천명은 이지적인 시인으로 꾸준히 좋은 작품을 발표했다.
백신애[편집]
白信愛 (1908-1939) 여류 소설가.경북 경산(慶山) 출생. 대구사범 강습과를 졸업. 1928년에 단편 <나의 어머니>가 <조선일보>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 <꺼래이>(1933)를 발표하면서부터 문단의 주목을 받음. 정열적이고 다혈질(多血質)의 작가였으나 결국 미완성의 작품세계를 남기고 죽음. 주요 작품에 <정현수(鄭賢洙)> <정조원> <적빈> <광인수 기> <소독부> <혼명(昏冥)>에서 등이 있다.
강경애[편집]
姜敬愛 (1907-1943) 여류 소설가.황해도 출생. 간도(間島)에 이주하여 살다가 그 곳에서 죽음. 1931년 <어머니와 딸>로 문단에 등장, 자연주의 경향이 짙은 소설을 발표함. 작품에 <부자>(1932) <소금>(1934) <해고>(1935) <산남(山男)>(1936) <어둠>(1937) 등의 단편과 중편으로 <지하촌(地下村)>(1936)이 있으며, 장편으로는 <인간문제>(1933) 등 소박한 리얼리즘이 반영된 작품이 발표되었다.
지하촌[편집]
地下村 강경애의 단편소설. 1936년 3월 12일부터 4월 3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동네의 조무래기 아이들에게도 시달림을 당해야 하는 불구자 칠성이는 마을의 처녀 큰년이를 사랑했다. 어느날 그는 멀고 먼 읍에 가서 큰년이에게 줄 인조견 저고리감을 떠 가지고 다 죽다시피한 피곤한 몸으로 돌아와 보니, 억수같은 비는 다 가꾸어 놓은 조밭을 망쳐놓았고 큰년이는 바로 전날 시집을 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칠성이는 품속에 인조견 저고리감을 안고 한없이 울었다. 사회의 밑바닥을 파헤쳐, 강렬한 사회개혁의 의욕을 나타낸 작품이다.
최정희[편집]
崔貞熙 (1912-1990) 여류 소설가.함남 단천(端川) 출생. 중앙보육학교 졸업. 시인 김동환이 남편이다. 1932년경부터 <삼천리>의 여기자로 있으면서 <람프등> <정당한 스파이> 등을 발표했는데, 그의 초기작은 경향성이 짙게 나타나 있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한 것은 1937년 <흉가>를 발표한 뒤부터로 <정적기>(1938) <인맥>(1940) <지맥>(1940) 등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며, 광복 뒤에는 <풍류 잡히는 마을>(1947) <우물 치는 풍경>(1948) <수탉> 등의 단편과 <녹색의 문>(1954) <인간사(人間史)> 등의 장편을 발표했다. 단편집에 <인맥(人脈)> <풍류 잡히는 마을> 등이 있으며, 1958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모윤숙[편집]
毛允淑 (1910-1990) 여류 시인.호는 영운(嶺雲). 평북 출생.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뒤 1934년 처녀시집 <빛나는 지역>으로 문단에 등장, 애국적인 감정과 열정이 넘치는 시인으로, 1937년 장편시 <렌의 애가>를 발표, 성숙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광복 후에는 문예지 <문예(文藝)>를 발간했고, 광복 후의 시집으로는 <옥비녀> <속 렌의 애가> 등이 있음. 1971년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제 펜클럽 부회장 역임.
노천명[편집]
盧天命 (1913-1957) 여류 시인.황해도 장연(長淵) 출생.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 <중앙일보>기자 등을 지냈다. 감상을 억제한 이지적인 시인으로 꾸준히 좋은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에 <산호림>(1938), <창변(窓邊)>(1945) <노천명 시집>(1949) <사슴의 노래> 등이 있고, 유고에 <노천명 전집>(1960)이 있다.
이선희[편집]
李善熙 (1911- ? ) 함남 함흥 출생(원산이라고도 알려짐). 이화여전 문과 3년 수료. 1934년 <중앙>지에 <불야 여인(不夜女人)>을 발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는 여성의 심리세계를 파고들어 감상성과 낭만성을 짙게 풍기는 작품을 남겼다.
문장과 인문평론[편집]
<文章>-<人文評論)> 1939년을 전후하여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의 양대 순문예지가 출현하여 일제 말기의 민족 수난기에 있어서 최후의 보루(堡壘) 역할을 했다. 이 두 잡지는 문학사적으로 큰 공적을 남겼는데 1941년 4월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될 때까지 한국 현대문학을 이끌고 나간 유일한 작품활동의 무대였다. 이 두 문예지를 통하여 문학사에 남을 허다한 주옥편이 형성되었거니와, 특히 이 두 잡지가 발굴한 신인들의 활동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특히 <문장>지의 추천제도를 통하여 나온 작가와 작품을 들면, 곽하신(郭夏信)의 <나그네>(1940) <신작로>(1941), 최태응(崔泰應)의 <바보 용칠이>(1939) <봄>(1939) <항구>(1940), 임옥인(林玉仁)의 <봉선화>(1939) <후처기(後妻記)>(1940) <고독>(1940) 등이 있다. 특히 <문장>은 다수의 유능한 시인들을 배출했는데, 박두진(朴斗鎭), 조지훈(造芝薰), 박목월(朴木月), 김종한(金鍾漢), 박남수(朴南秀), 이한직(李漢稷) 등이며 <인문평론>을 거쳐 등장한 작가로는 윤세중(尹世重), 임서하(林西河) 등으로 이들은 광복 후의 재생하는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은 전위적 역할을 담당했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의 작품은 뒤에 언급되겠지만, 김종한의 <할아버지> <계보(系譜)>(1939), 이한직의 <온실> <낙타>(1939), <한(翰)>(1940), 박남수의 <밤길> <거리(距離)>(1940) <주막(酒幕)> <호롱불> 등의 시작품이 모두 <문장>지에 추천된 작품들이다. 기성작가의 작품으로는 이광수의 <무명>이 <문장> 창간호에 발표되었고, <인문평론>에서는 1940년에 전작소설(全作小說) 시리즈를 계획하여 이효석의 <화분>, 유진오의 <화상보>, <김천의 대(大)> 등의 장편소설을 간행,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문장(文章)[편집]
1939년 4월에 이태준이 주간이 되어 창간된 순문예지. <인문평론>과 더불어 일제 말기의 문학 발전과 유능한 신진 작가·시인의 발굴에 크게 공헌함.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끝까지 항거하여 문학사의 명맥(命脈)을 유지하여 오다가 1941년 4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인문평론(人文評論)[편집]
1938년 12월 최재서의 주재로 창간된 문예잡지. 일제 말기에 우리 문학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으나, 1941년 4월 일본 관헌의 탄압에 의해 폐간됨. 얼마 후 잡지명이 <국민문학>으로 개제되어 처음에는 우리말과 일본어를 섞어 쓰다가 나중에는 일어(日語) 전용의 추태를 부리면서 8·15 광복 전까지 계속됨.
최태응[편집]
崔泰應 (1917-1998) 소설가.황해도 출생. 일본 니혼(日本)대학 예술과 수업. 1939년을 전후해 <문장>에 <바보 용칠이> <항구> <봄>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 광복전 그의 작품에는 시대에 둔감하고 소박한 인물들을 내세워 심리적인 묘사에 장기를 보였는데, 광복 후의 작품은 제작 태도가 바뀌었다. 장편 <전후파> 등이 있고, 단편 100여 편이 있다.
임옥인[편집]
林玉仁 (1915-1995) 여류 소설가.함북 출생. 일본 나라(奈良) 여자고등사범 졸업. 1940년 <문장>지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장. 광복 후의 작품으로는 <풍선기(風船記)> <월남전후(越南前後)> 등 많음. 1957년 자유 아시아 문학상을 받았다. 건국대학교 가정대학장 역임.
오장환[편집]
吳章煥 (1916- ? ) 충북 보은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 수학. 1933년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여 등단. <낭만>,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이다. 광복 후 월북하였다.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문명 비판적인 시와 보들레르적인 위악적 태도의 시를 썼으나, 1940년대를 전후하여 서정적 사색을 기반으로 한 건강한 생명력을 추구했다. 광복 후엔 현실 비판과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념시를 썼다. <성벽>(1937), <헌사>(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등의 시집이 있다.
박남수[편집]
朴南秀 (1918-1994) 시인.평양 출생. 일본 쥬오 대학(中央大學) 법과 졸업. 1940년을 전후하여 문단에 등장한 후 오랫동안의 침묵 끝에 1950년부터 다시 활동하여 지적 서정의 한 경지를 천착하고자 했다. 1957년 제5회 자유문학상을 수상. 시집에 <초롱불> <갈매기 소묘(素描)> 등이 있다.
이한직[편집]
李漢稷 (1921-1977) 호는 목남(木南). 시인.서울 출생. 일본 게이오(慶應)대학 법과 수업. 1939년을 전후하여 <문장>지의 추천을 받고 등장. 그의 시에는 소박한 윤리를 발견하려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일본 도쿄에서 거주. 광복 전의 시로는 <한(翰)> <온실> 등이 있고, 광복 뒤의 작품으로 <붕괴> 등이 있다.
청록파의 시세계[편집]
靑鹿派-詩世界 같은 시기에 <문장>지의 추천으로 시단에 등장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은 우연히 공통적인 시풍(詩風)을 가졌는 바, 자연을 바탕으로 그 표현이 전통적인 율감에 의거하여 이룩되었다는 데서 자연파 또는 청록파(靑鹿派)로 불리는 특징있는 시파를 이루었다. 먼저 박목월의 <길처럼> <그것은 연륜(年輪)이다> <산그늘>과 1940년 <가을 어스름>이 추천되었는데, 그의 시는 대체로 애련·소박한 향토적인 세계를 노래했다. 박두진은 <낙엽송(落葉頌)>(1939) <들국화>(1940)가 추천된 후 뒤에 발표된 <도봉(道峰)> <연륜(年輪)> <숲> <설악부(雪岳賦)> <푸른 숲에서> 등 처음부터 자연과의 친화에서 출발하여 싱싱한 자연의 생활력과 또 피안적이며 신앙적인 시세계를 보여준 시인이었다. 한편 조지훈은 <승무(僧舞)>(1939) <봉황수(鳳凰愁)>(1940) 등의 추천시와 뒤에 발표된 <고풍의상(古風衣裳)> <고사(古寺)> 등 이 시인은 그 제재(題材)·시상(詩想)에 있어서 제2의 자연이라 할 수 있는 고적(古蹟)·고전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어서 화사(華奢)·전아한 전통적이며 고전적 시세계를 이룬 것이 특징이었다. 이 세 사람의 시인은 이후의 활동과 함께 광복 이전과 이후의 한국시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의 구실을 했고 시의 순수성을 굳건히 지키며 시의 바른 길을 밝혀 주었다. 특히 이 청록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연의 세계는 전기의 전원시를 한층 발전시킨 참신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의 자연시는 암흑기적인 시대 현실에 대해 도피적인 시세계라기보다 추악한 도시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에서 자연 복귀(復歸)라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이 동양 시인의 체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세계가 그들의 시적 근거로 형상화되었다. 이 청록파 시인은 광복 후 시단의 전통의 집대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광복부터 6·25 전쟁까지의 한 시기를 대표하게 되었다.
조지훈[편집]
趙芝薰 (1920-1968) 본명은 동탁(東卓). 지훈은 호. 시인이며 국학자. 경북 영양(英陽) 출생. 혜화전문 졸업. 1939년 <고풍의상>이 <문장>에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에 대한 저항으로 암암리에 전통적인 것과 고전에서 소재를 택했고, 광복 뒤에는 역사적인 감각으로 그 시풍이 변모되어서 고전시인·자연시인·민족시인으로 불리며, 그 자신이 배열한 작품 경향은 다음과 같다. ① <고풍의상> <봉황수>(1940) <승무>(1939) 등 전통적인 것에서 취재, 민족정신을 표현했고, ② <파초우> <완화삼(玩花衫)> 등에서는 자연 교감과 정조(情調)를, ③ <마음> <고사> 등에서는 서경(敍景)과 선(禪) 감각을, ④ <풀잎 단장>에서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적막감을, ⑤ <암혈(岩穴)의 노래> <불타는 가슴> 등에서는 광복 후의 민족적 비분을, ⑥ <아침> <풀밭에서> 등에서는 자연미와 인정미를, ⑦ <역사 앞에서>는 현실과 역사의식을 각각 표현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고려대학교 교수·민족문화연구소장 등을 지냈고, 1957년 제4회 자유문학상을 받음. 1946년 박두진, 박목월 등과 <청록집>을 발간한 이후 <풀잎 단장>(1952), <조지훈 시선>(1956), <역사 앞에서>(1959), <여운(餘韻)>(1964) 등 시집과 <시의 원리>(1959), <지조론>(1962) <돌의 미학>(1964) <한국 문화사 서설>(1964) <한국민족운동사>(1964) 등의 저서와 역서에 <채근담(菜根譚)>이 있다.
박두진[편집]
朴斗鎭 (1916-1998) 시인.경기도 안성 출생. 우석대·연세대 교수 등을 지냄. 1939년 <문장>지를 통해 시단에 등장한 이후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초기에는 자연에 대한 싱싱한 생명력과 기독교적 신앙의 바탕 위에서 긍정적인 선미(禪味)를 모색했고, 후기에는 특히 민족의식과 정의감을 시세계에 표현함. 시집으로 <청록집>(공저) <해> <오도(午禱)> <박두진 시선> 등이 있다.
박목월[편집]
朴木月 (1917-1978) 본명은 영종(泳鍾). 시인.경주 출생. 1939년을 전후해서 <문장>지의 추천으로 등장.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민요풍의 서정시를 지음. 그의 초기작은 애련·소박한 향토적인 시풍을 보였고, 광복 후에는 진솔(眞率)한 생활시로 성숙한 시경지를 개척함. <연륜> <청노루> <나그네> 등은 그의 출세작이며, 광복 후에는 <박영종 동요집> <청록집>(공저) <산도화(山桃花)> <난(蘭)·기타> 등의 시집이 있다. 1955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저항의 문학[편집]
抵抗-文學 <문장>이 폐간되고, <인문평론>이 <국민문학>으로 개제된 이후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우리의 모국어가 말살되고, 창씨 개명을 실시하는 등 일제의 탄압은 극도에 달해 단순한 민족의식조차 허용치 않았다. 특히 이 시기는 많은 문인들이 변절하여 이른바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 문학단체에 의해 일본의 전시정책에 동조, 고무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어용문학으로 타락했으니 문학사적으로 보아 이 시기는 암흑기 또는 수난기로 흔히 불리어진다. 민족 수난의 최악의 시기에서 끝까지 민족적 신념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저항한 시인이 1930년대 후반의 이육사(李陸史)와 1940년대의 윤동주(尹東柱)였다. 이육사는 잡지를 발간하고 신문기자로 있었으며 사회운동에 참여한 뒤 소설을 쓰다가 30세가 지난 뒤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 윤곤강, 김광균 등과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행하여 여기에 서정이 풍부한 <청포도> <교목(喬木)> 등 목가풍(牧歌風)의 서정시를 발표했다. 그 무렵부터 <광야(曠野)> <절정(絶頂)> <꽃> 등 서정적 저항시를 썼는데 그는 상징적이면서도 화사한 시풍으로 일제하에서의 민족의 신념과 의지를 노래했다. 그의 조국애가 넘치는 시편들은 만주·간도 등지를 배경으로 한 침통한 북방의 정조(情調)와 함께 전통적인 민족정서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의 시 <청포도(靑葡萄)>가 발표된 것은 1940년이었으며 그의 시작들은 대부분이 1935년 이후에 씌어진 것들이었다. 그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피해 베이징으로 탈출했으나 곧 일본 관헌에게 독립운동의 죄목으로 체포, 민족해방을 1년 앞두고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獄死)했다. 한편 민족어가 말살된 이후 민족 시련이 극도에 달한 1940년 이후의 암흑기적 공백기(空白期)를 저항·고뇌·죽음으로 일관한 시인 윤동주의 작품들은 문학사적으로 기념비적(記念碑的)인 의의를 지닌다. 그의 이름은 생전에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시즘과 전화(戰禍)의 위협 속에서 숭고한 민족적 신념으로 주옥같은 서정시와 저항시를 썼다. 그의 일제에 대한 저항을 절규한 시편들은 그가 민족운동의 혐의로 체포,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한 뒤 광복과 함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이름으로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의 시편들은 수난받은 민족에 대한 자책(自責)과 희생정신으로 이룩된 것이며, 그 섬세한 서정과 치열한 저항정신은 일제 암흑기를 증언하는 유일하고도 빛나는 민족시인으로서 새삼 평가하게 되었다. 그의 <서시(序詩)>는 고난의 시대를 살고 있던 이 시인의 숭고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그의 시편 중 <돌아와 보는 밤> <새벽이 올 때까지>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참회록(懺悔錄)> <간(肝)> 등은 모두 민족에 대한 애정, 고난과 시련, 정의·자유에 대한 갈망과 양심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1945년 2월 조국 광복을 불과 몇 개월 앞두고 이역(異域)에서 순사(殉死)했거니와 그의 순교자적인 사명감에서 비롯된 민족적 신념과 정서가 담긴 서정시들은 공백기의 문학사를 빛내 주는 문학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이육사[편집]
李陸史 (1905-1944) 시인.본명은 활(活)·원록(源祿). 육사는 그의 호. 경북 안동 출생. 중국 베이징(北京) 대학 사회과 졸업. 한때 신조선사·인문사 등에서 근무했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37년 <자오선>의 동인으로 뒤늦게부터 시를 발표, <청포도> <교목> 등을 발표했으며, 민족 정서를 상징적이면서 유니크한 시풍으로 노래한 서정시들은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시작에는 침통한 북방의 정조 속에서 민족정서와 신념을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광야> <꽃> <절정> 등은 저항적인 서정시이다. 1942년 일제에 대한 울분을 품고 중국으로 탈출했으나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일본 관헌들에게 체포, 베이징 감옥에서 죽었다. 그는 일세의 지사(志士)로서 생전에는 시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지만 광복 후 친구들에 의해 유고 <육사시집>이 발간됨으로써 시인으로 그의 이름이 남게 되었다. 그 밖에 논문 <중국문학사초고(草稿)>가 있다.
청포도[편집]
靑葡萄 이육사의 시. 1939년 <문장(文章)>에 발표한 작품으로 작자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향토색 짙은 서정성 시풍으로 민족 고유의 정서를 상징적이면서도 독특하게 노래하여 당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윤동주[편집]
尹東柱 (1917-1945) 시인. 북간도 용정(龍井) 출생.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하였으며 유해는 가족에 의해 북간도에 묻혔다. 광복 후 친구들에 의해 첫시집이 발간되었고, 1955년 미발표 유고를 보충,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었다. 우리 문학사상 일제 말기의 암흑기에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민족의 슬픔과 고난을 지성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대표작으로 <돌아와 보는 밤> <무서운 시간>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등이 있다.
서시[편집]
序詩 윤동주의 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앞머리에 수록되어 있다. 연희전문 졸업을 1개월 앞두고 쓴 이 작품은 서시(序詩)인 만큼 그의 시집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가 가야 할 길이란 식민지 일제의 질곡(桎梏)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의지와 신념으로 민족을 위해 광명을 선사하는 일이며, 고결한 지성으로 불굴의 절조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길을 가기 위해서 종교적인 자세로 하늘에 대고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다. '부끄러움이 없기를 …괴로워했다'는 것은 모호한 표현이면서도 이 작품에서는 희구에 대한 강한 이미지로 부각되어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변영로[편집]
卞榮魯 (1898-1961) 시인. 호 수주(樹州). 서울 출생. 중앙학교 및 미국의 산호세대학 수료(1933). 1920년 <폐허(廢墟)> 동인으로 문단에 데뷔. 1922년 이후 <개벽(開闢)>을 통해 계속 해학이 넘치는 수필과 번역물을 발표했다. 1924년 발간된 첫번째 시집 <조선의 마음>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순화에 기여하는 높은 시정신과 함께 민족적 저항정신이 짙게 깔려 있다. <조선의 마음> 이후 서정시인으로서의 문단적 위치가 확고해졌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영문 번역하기도 했던 그는 <동아일보> 재직시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幀)의 '일장기말소사건'과 관련 퇴사당했고, 일제 말엽에는 향리(鄕里)에서 칩거했다. 광복 전후를 통하여 약간의 시를 발표했던 그는 과작(寡作)이긴 하나, 우리나라 신시(新詩)에 있어 기교파의 선구시인이라 할 수 있다. 즉 민족애와 서정성에서 높고 섬세한 경지를 보여주었던 그의 시는 기교에 중점을 두고 어구(語句)의 선택과 연마에 재능을 보였다. 시집으로 <조선의 마음> 외에 <명정 40년(酩酊四十年)> <수주수상록> <수주시문선> 등이 있다.
논개[편집]
論介 변영로(卞榮魯)의 시. 192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논개의 애국적 정열을 명백한 민족의식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시는 민족적 의분을 밖으로 내풍기는 정열보다도 그 의(義)에 대한 강렬한 찬탄을 내향적으로 응결시키려는 시적 긴장감이 돋보인다. 지금의 안목으로 보면 대단히 소박하고 단순한 비유에 의해 수식됐고, 시의 형태적 구성도 너무 규칙적인 반복으로 일관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당시의 시적 수준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이 얼마나 깔끔하게 시의 기교적 완성을 노렸는가를 짐작케 한다. 아름다운 애국의 연인 논개와 같이 깨끗하고 맑고 꾸밈없이 표현된 작품이다.
국어의 투쟁[편집]
國語-鬪爭 갑오경장 이후의 우리의 한글은 일제의 압력과 낡은 보수층의 완고한 사상에 대해 투쟁하면서 자라왔다. 비록 3·1운동이라는 민족독립의 횃불이 일제의 총칼 아래 잠시 꺼지는 듯했으나, 우리의 국어는 1921년 주시경의 제자이던 권덕규(權悳奎)를 비롯하여 이윤재(李允宰), 장지영(張志暎), 최현배(崔鉉培), 이희승(李熙昇), 이병기, 정인승(鄭寅承), 김윤경(金允經) 등이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를 조직함으로써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하면서 민족항쟁을 지속해 왔다. 이는 뒤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또다시 <한글학 회>로 그 명칭이 바뀌면서 우리나라 한글 투쟁사상 큰 발자국을 남겼다. 이 학회에서는 일본의 탄압 아래서 민족정기와 모국어를 선양하고자 1926년 '한글날'이라는 기념일을 제정하고, 또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함으로써 국문 표기의 지표로 삼았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가중되어 만주사변·중일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마침내 우리 국어의 말살정책이 나타나, 내선일체의 미명 아래 일어(日語)상용을 강요하여 국민학교에서 국어의 교과를 폐지하고, 심지어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학생을 서로 밀고(密告)케 하고 순진한 어린이들에게 가혹한 벌을 주었다. 더욱이 일제는 우리말 신문·잡지를 폐간시키고 급기야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의 회원 31명을 검거하고 사전 편찬의 원고를 증거물로 압수하니, 이것이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 또는 홍원사건(洪原事件)이라 하는 것이다. 그들은 1년 동안 일제의 갖은 고문과 형벌 끝에 10명이 징역 언도를 받았으나, 그 동안 이윤재, 한징(韓澄) 두 사람은 가혹한 고문 끝에 마침내 옥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국어학자들이 수난을 받는 가운데 많은 문인들은 붓을 꺾고 전원에 숨어 모국어에 대한 애정과 신념을 버리지 않고 굳세게 투쟁해 나갔으니 이는 우리 민족문화 투쟁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이다.
조선어연구회[편집]
朝鮮語硏究會 1921년 12월 3일 서울 휘문의숙에서 조직된 한글연구단체. 창립회원은 장지영, 권덕규, 이병기, 신명균(申明均), 김윤경 등임. 국어의 정확한 법리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매년 4월에 총회, 매달 한 번의 연구발표회를 열어 '훈민정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국어의 계몽 선전에 힘썼으며, 1927년에 동인지 <한글>을 창간. 1931년 그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고쳤다가 그 후 1949년 <한글학회>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윤재[편집]
李允宰 (1888-1943) 호는 환뫼(桓山). 김해 출생. 국어학자·사학자.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영변의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에 관련되어 3년 복역하였으며, 1921년 중국에 건너가 베이징(北京) 대학 사학과를 졸업했다. 1924년에 귀국한 뒤 오산학교 교사, 연희전문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1937년 수양 동우회 및 흥사단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마침내 1943년 12월 함흥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저서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일부를 번역한 <도강록(渡江錄)>과 <표준 조선말 사전>이 있다.
권덕규[편집]
權悳奎 (1890-1950) 사학자·국어학자.휘문의숙 졸업. 일제 때 중앙중학, 이화여고 교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저서에 <조선어문경위(朝鮮語文經緯)>(1923) <조선 유기(朝鮮留記)>(1945) <을지문덕>(1948) 등이 있다.
장지영[편집]
張志暎 (1889-1973) 국어학자.서울 출생. 1906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한어과(漢語科)를 졸업하여 주시경 문하에서 국어를 연구했고, 1921년 조선어연구회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후 중학교 교원·조선일보 문화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조선어 철자법 강좌>를 지어 맞춤법 보급에 이바지한 공이 컸으며, 광복 직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광복 후 연세대 교수를 역임했다.
최현배[편집]
崔鉉培 (1894-1970) 호는 외솔. 국어학자.명예 문학박사. 경남 울산 출생. 1919년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를 거쳐 교토(京都) 대학 철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조선어학회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좌되어 홍원경찰서에 잡혀 투옥되었다. 광복 후 연세대 부총장 및 한글학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50여 년간 한글 문화의 독립을 주장하는 한편, 한국말의 말본 체계를 확립하는 데 노력했다. 저서로 <조선민족 갱생의 도(道)>(1926) <우리 말본>(1935) <한글의 바른길>(1937) <한글 갈>(1940) <한글의 투쟁>(1954) <나라 사랑의 길>(1958) 등이 있다.
이희승[편집]
李熙昇 (1897-1989) 호는 일석(一石). 국어학자.경기도 광주 출생. 경성제대 조선어 문학과 졸업. 이화여전 교수·서울대 교수 등을 지냈으며 학술원 회원·명예 문학박사이다. 광복 전 조선어학회 간부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3년간 투옥당했다. 저서에 <국어학개설> <조선어학논고>, 편저에 <국어 대사전>, 시집에 <박꽃>, 수필집에 <벙어리 냉가슴> 등이 있다.
아동문학[편집]
兒童文學 우리나라의 아동문학을 살펴보면 1908년에 창간된 <소년>을 비롯하여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등의 잡지가 동화나 동요를 다룬 적이 있으나, 옛날얘기가 남의 나라 동화를 다른 나라 말에서 옮겨온 2중 번역이 많았으며, 글도 한문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23년 3월 소파 방정환에 의해 창간된 <어린이> 잡지를 무대로 새로운 동요·동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1925년을 전후해 전례없는 동요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방정환의 <형제별>, 윤극영의 <반달>, 한정동의 <따오기>, 이원수의 <고향의 봄>, 윤석중의 <오뚜기>, 유지영의 <고드름>, 서덕출의 <봄편지> 등은 딱딱한 창가의 굴레를 벗어던진 예술동요의 샛길을 터준 작품들이었으나 창작동화에 이르러서는 동요보다 뒤져서 마해송(馬海松)·고한승(高漢承)이 등장하였다.
방정환[편집]
方定煥 (1899-1931) 서울 출생. 호는 소파(小波). 보성전문을 거쳐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최초로 본격적인 아동문학 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고 순수아동잡지 <어린이>을 창간했다. 계속해서 <신청년(新靑年)> <신여성(新女性)> <학생(學生)> 등의 잡지를 편집·발간했으며, 동화대회·소년문제 강연회·아동예술 강습회·소년 지도자 대회 등을 주재하며 계몽운동과 아동문학운동에 앞장섰다. '어린이'란 말을 처음 쓰기 시작했던 그가 아동문학 활동을 한 기간은 약 10년간으로서 <형제별> <가을밤> <귀뚜라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창작보다는 번안작품이 더 많다. 그의 사후, <소파전집> <방정환 아동문학 독본> <동생을 찾으러> <소파아동문학전집> 등이 발간되었다. 한편 '새싹회'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였다.
고한승[편집]
高漢承 (1902-1950) 아동문학가. 경기도 개성 출생. 방정환·마해송·윤극영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잡지 <어린이>에 동화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또한 극예술협회 등에 가입, 신극운동에도 참여하여 <장구한 밤> <4인 남매> 등의 창작극을 썼다. 1927년 한국 최초의 창작동화집 <무지개>를 출간하고 색동회를 중심으로 동화의 창작과 구연(口演) 등을 통하여 어린이의 정서함양에 힘썼다. 광복 후에는 개벽사에 근무했으며, <어린이>를 복간, 주재하면서 많은 동화를 발표하였다.
마해송[편집]
馬海松 (1905-1966) 아동문학가. 본명은 상규(湘圭). 개성 출생. 1920년 일본 니혼대학 예술과 재학 중에 홍난파 등과 유학생극단 '동우회'를 조직하였고, 한편으로는 방정환 등과 함께 '색동회' 동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졸업 후, <분게이슌슈(문예춘추)>사 초대 편집장을 거쳐 1930년 <모던니혼>을 창간했다.
윤석중[편집]
尹石重 (1911- ) 아동문학가. 호 석동(石童). 서울 출생. 일본 조치대학 신문학과 졸업(1944). 1924년 <새소년>에 동요 <봄>, 1925년 <어린이>에 <오뚜기>가 입선되면서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향토적이고 정서적인 우리말을 동시어로 가다듬어서 간직해 일제말기에 우리말을 지켜왔으며, 새로운 형태의 동요·동시를 개발해 아동문학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또한 시어의 익살스럽고 생활적인 감각과 재치있는 표현으로 로망주의적인 동심세계를 부각시키려 한 점에서 그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주요 작품에 <낮에 나온 반달> <외나무 다리> <넉점 반> <자장노래> <키 대보기> 등이 있으며, 작품집에 <잃어버린 댕기> <초생달> <굴렁쇠> <윤석중 동요백곡집> <윤석중 아동문학독본> <바람과 연> 등 많은 동요·동시집이 있다.
이원수[편집]
李元壽 (1911-1981) 아동문학가. 경남 양산 출생. 마산상업학교 졸업(1930). 1926년 아동지 <어린이>에 동요 <고향의 봄>이 당선되었다. 이 동요는 홍난파의 작곡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애창되는 노래가 되었다. 1927년 <기쁨사>의 동인이 되어 이 때부터 활발한 동요 창작을 했다. 1949년 동화 <숲속의 나라>를 <어린이나라>에, 소년소설 <5월의 노래>를 <진달래>에 연재, 동요와 함께 동화·소년소설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외재율 중심의 재래적 동요에서 내재율 중심의 현실참여적 동시를 개척하고 산문문학으로서 장편동화와 아동소설을 확립하며 부단한 비평활동을 통한 아동문학 확립에의 기여 등 문학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초기 <고향의 봄> <비누 풍선> 등과 같이 율동적이며 감각적인 경향에서 1940년대 동시 <어머니>에 나타난 바와 같이 현실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경향으로 변천되었다.
강소천[편집]
姜小泉 (1915-1963) 아동문학가. 본명은 용률(龍律). 함남 고원 출생. 함흥 영생고보 졸업. 1930년 <아이생활> <신소년> 등에 동요 <버드나무 열매> 등을 발표하고, 동요 <민들레와 울아기>가 현상문예에 당선, 이후 <닭>을 비롯한 여러 편의 동요·동시를 창작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1939년을 전후하여 동화와 아동소설도 쓰기 시작하여 <돌멩이> <토끼 삼형제> <마늘먹기> <전등불 이야기> <꿈을 찍는 사진관> <호박꽃 초롱>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또한 어린이헌장의 기초, 독서지도, 글짓기 지도 및 아동문학의 보급·육성에 남다른 열성을 기울였다. 그의 작품은 자연에 몰입한 인간상으로 인간본연의 자세를 추구하려했고,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삶의 가치를 정립하려 했다. 만년에는 교훈적인 동화를 많이 썼다. 작품집으로 <강소천 소년무학> <강소천 아동문학 독본> 등이 있다.
박화목[편집]
朴和穆 (1923- ) 시인·아동문학가. 호는 은종(銀鐘). 평양 출생. 봉천 신학교 졸업. 1941년 <아이생활>에 동시 <피라미드>를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죽순> <등불>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에 <개암나무> <고추짱아> <봄> 등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적 이상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어, 일종의 조용함과 허무감을 풍기는 것이 특색이다. 작품집으로는 <초롱불> <저녁놀처럼> <얼룩 염소의 모험> 등이 있다.
친일문학[편집]
親日文學 일제 강점기간 동안 일본의 침략전쟁이나, 황민화 정책의 강행에 의해서 이를 고무·찬양한 문학을 일반적으로 지칭한다. 당시에 있어 '국민문학'으로 호칭된 친일문학은 '일본국민으로서의 문학'을 의미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하면 황민문학과 동일한 뜻이 된다. 친일문학의 시작은 1937년 5월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의 결성에서 시작된다. 학무국 사회교육과가 주동하여 조직하게 한 이 단체는 총독부 방침인 사회교화를 위해서 가요(歌謠) 정화운동을 전개했다. 안서 김억이 작사한 <종군간호부의 노래> <정의의 수(帥)에>, 최남선이 작사한 <김소좌를 생각함> <정의의 개 가> <총후의용(銃後義勇)> <방호단가(防護團歌)> <장성(長城)의 파수> 등이 이른바 '애국가요'라는 것들인데, 이것은 1940년대의 국민문학운동의 원시적 출발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안서는 <매일신보>에 <신춘문단의 전망>(1933)에서 "앞으로의 시가는 가장 농후하게 군가적(軍歌的)으로 씩씩하고 우렁찬 경향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하고 시 <신년송>(<매일신보>, 1944년 1월 4일)을 통하여 대동아 결전과 미·영 격멸을 읊었으며, <님 따라 나서자>(<매일신보>, 1944년 12월 7일)라는 시로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가네하라군조(金原軍曹)를 뒤따르자는 징병 격려시를 쓰기도 했다. 이어서 1939년 4월 임화·최재서·이태준이 주동하여 황군위문 작가단을 결성한다. 이에 김동인·박영희·임학수 등 3명이 파견되어 박영희가 <전선기행>을, 임학수가 <전선시집>을 창작 발표했다. 이후 1939년 10월 29일 부민관에서 학무국의 산파 역할로 '조선문인협회'가 탄생하였다. '조선문인협회'는 초대 회장으로 이광수가 선출되었는데, 이 조직을 통하여 문학가들이 문필보국운동에 총동원되기에 이른다. 이광수는 결성식장에서 "이 협회의 창립목적은 새로운 국민문학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구현에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문인협회'의 활동은 범민중적인 지탄의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한 친일문학은 새로운 자리를 잡게 된다. 더욱이 1940년대에는 <문장> 등이 친일문학으로 돌아섰고, 1941년 <문장>과 <인문평론>을 통폐합해서 <국민문학>지가 창간되어 조선문학의 일어화가 가속화되고야 만다. 이렇게 생성된 친일문학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정신을 그 기본으로 한다. 이 때 일본정신이라 함은 천황 중심의 제정일치(祭政一致), 가족국가적 조직을 고무·찬양함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일본에 대한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과 긍지와 감사를 그 내용으로 한다. 셋째, 일어(日語)로 창작된다. 그들이 말하는 국어(國語)는 바로 일어였다. 이러한 친일문학을 부르짖은 대표적인 인물은 최남선과 이광수를 들 수 있다. 최남선은 청일전쟁이 "일본의 진보적 정신이 청조(淸朝)의 정신을 구축하려는 전쟁"이라는 성전론을 주장하면서 태평양전쟁을 미화시키기도 했다. 그의 <성전의 설문> <아세아의 해방> 등이 성전론을 피력한 작품들이다. 이 외에 주요한도 친일문학의 선두주자였다. 그는 시 <성전찬가>를 통하여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찬양하였다. 그의 친일시들은 대단히 격정적이기도 하다. 또한 <적, 미국의 사상모략>이라는 평론에서 미국을 백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지적하면서, 대동아 단결을 이룩하여 조선의 청년들은 분연히 일어나 미·영의 모략을 분쇄해야 한다고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인물뿐 아니라 프로문학 쪽에서도 친일을 한 인물이 많은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박영희와 김기진이다. 박영희는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면서 전향논리를 폈지만, 기실 그의 전향은 부일(附日) 협력의 길목으로 걸음을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1938년 동경에서 열린 '시국대응 전국위원회'에서 전향의 면모를 드러냈다. 박영희는 '시국대응 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의 간사로 참여하면서, 김동인·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 작가단'의 일원으로 화베이(華北)를 다녀와 <전선기행>을 창작하였다. 김기진은 일찍이 경향파 쪽에서 대중화론을 주창한 뛰어난 이론가였지만, 1943년 8월 1일 징병제 실시 당일에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시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 행적을 드러내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 <봄봄> 등 서정적인 소설을 많이 쓴 이효석은, <아자미의 장>이라는 소설에서 일제가 민족말살의 수단으로 권유했던 이른바 일선통혼(日鮮通婚)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광복 이후 남쪽 문단의 비평계를 주도한 백철의 친일행각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백철의 평론 <낡음과 새로움>은 국민문학의 원칙을 밝힌 것으로, 이 글을 통해 일본의 정신을 실천적으로 수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연극인으로 유치진의 부일 협력을 거론할 수 있다. 유치진은 국민연극 이념의 수립에 이론과 창작 양측면에 기여했다. 그는 <국민연극 수립에 대한 제언>과 <신체제하의 연극> 등의 평론을 발표하였으며, 1941년 현대극장을 발족시켜 총독부의 만주 이민정책에 호응하는 내용의 <흑룡강> <북진대>를 공연했다. 이상에서 열거하는 사람과 달리 언론계에서의 친일자로는 최린을 거론할 수 있다. 최린은 1919년 3·1운동 당시 33인 대표의 한 사람이었으나,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는 친일파로 전락하고 만다. 어용언론의 기수인 <매일신보>의 사장직을 거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장·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조선언론보국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읍소'라는 연제로 임전대책 연설을 했고, 언론총진격대강연회 등을 주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친일 부역은 단지 몇 사람의 일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당시의 저명인사들 모두 이에 해당된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나, 당시 일본의 정책은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는 전시행정체제였다. 이에 부합되어 한반도는 일제의 병참기지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앞에 열거한 친일문학자들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친일을 강요했으며,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식민지정책을 한반도에 강요하였다. 이러한 정책이 극에 달한 시기가 1945년 초부터 광복 전까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