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자 <스타크> 게이머 이민석 군(사진 가운데)이 프로게이머 박정석 선수(사진 왼쪽)와 변길섭 선수로부터 한빛 스타즈 프로게임단 유니폼을 선물 받고 기뻐하고 있다.
안창호 씨(사진 오른쪽)가 '제 2의 디아블로 할아버지'를 꿈꾸는 전래식 씨에게 <디아블로2>를 가르쳐주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한국에서 프로게이머 생활 1년을 맞이한 호주 청년 피터. 2003년은 자신의 해가 될 거라며 활짝 웃고 있다.
2003년이 저물고 있다.
게임프라이데이가 세상에 선을 보인지 20주째, 다섯 달이 되었다. 그간 게임프라이데이는 동분서주하며 다양한 게임 피플을 찾아 다녔다. 그들은 시각장애를 게임으로 딛고 일어섰고, 환갑에 가까운 나이를 게임으로 넘어 섰으며, 말도 통하지 않는 타향에서 프로게이머의 꿈을 불태웠다.
게임은 단순한 놀이나 중독성 짙은 도박이 아닌, 삶의 또 다른 스펙트럼을 비춰주는 문화임을 직접 증명해 보였다.
게임프라이데이의 1면을 장식했던 게임 피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운 얼굴들의 후일담과 함께 다사다난했던 2003년을 정리한다.]
찬송가 음반 준비 바쁜 나날속 하루 두세판
■ ‘<스타크>로 세상을 보다’ 이민석 군
게임프라이데이 2호(8월 15일자)의 1면을 장식한 시각장애자 이민석 군(서울맹학교 고등부 1학년·15)은 건강한 모습으로 학업과 신앙활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최근 그는 인터뷰 당시 장래 희망이었던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본지의 기사가 나간 후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자신감의 확보였다. 이 군은 ‘누가 도와주면 할 수 있겠지’식의 안일함을 버리고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달려들었다. 그 결과 꿈도 커졌다. 좋아하던 <스타크>를 할 시간은 줄었지만, 직업으로 꿈꿨던 찬송가 음반을 준비하게 됐다.
작곡과 편곡 공부를 위해 이번 달 초에 전자건반도 구입했다. “할 수 있는 게 늘어나서 너무 기뻐요”라며 활짝 웃는 이 군, <스타크> 실력은 줄지 않았을까? 그는 내년 초 발매될 음반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하루 평균 2~3판 씩 <스타크>를 하고 있었다. 실력도 부쩍 늘어 배틀넷 승률이 50%로 늘었다.
이 군은 지난 22일 오후 7시 서울 신림동에 위치한 한빛스타즈 프로게임단 숙소를 찾았다. 이 날 한빛스타즈 소속 박정석 선수와 변길섭 선수는 그에게 유니폼을 선물하고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빛스타즈 팀원들과 이 군은 지난 여름에 이미 만났던 사이.
박정석 선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단하다고 느꼈다. 시각장애인자를 위한 <스타크> 대회가 열렸으면 좋겠다”며 밝은 표정으로 이 군을 맞았다. 이 군은 “솔직히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줄 몰랐어요. 오래간만에 다시 만나니까 형들처럼 편하고 좋아요”라고 말했다.
한편 블리자드가 이 군에게 연말을 맞아 음성 카드를 보내왔다. <스타크> 개발진의 익살스러운 음성 연하장을 들은 이 군은 “너무 좋고 계속 반복해서 들을 것 같아요. 그 분들에게 편지를 써야 겠어요”라며 감격했다.
이 군에게 2003년은 잊지 못 할 최고의 해였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삶의 분기점”이라고 평가하는 그는 삶의 전환점이 됐던 한 해가 저무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하지만 이제 한 발짝 내딛었을 뿐이다.
내년 초부터는 음악에 전념하기 위해서 <스타크> 게임시간도 줄일 계획이다. “2004년에는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모두 건강하세요.”
PC방 운영하며 '제2 디아 할아버지' 양성
■ ‘할아버지 <디아블로> 짱’ 안창호 씨
게임프라이데이 4호(8월 29일자) 1면은 서울 봉천동 아이들의 게임우상인 안창호 씨(57)가 차지했다. 안 씨는 아들이 운영하는 PC방 일을 도와주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디아블로 2>를 잘하게 돼 ‘제 2의 인생’을 살게 된 경우. 5개월 만에 다시 찾은 봉천동 ‘스페이스 짱’ PC방. 안 씨는 여전히 넉넉한 웃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본지 기사가 나간 이후 ‘디아블로 할아버지’와 한 판 하기 위해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이번 달에도 몇 명이 다녀갔다. 안 씨에게 있어 가장 큰 변화는 아들에게서 PC방을 넘겨받아 사장이 됐다는 것과 기대하던 <디아블로 2> 1.10 패치가 나온 것이었다.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운영이 힘들지. 그래도 <디아블로>를 하는 사람들은 잊지 않아 찾아와.” 안 씨는 패치 이후 어려워진 게임내용 때문에 꽤나 고생했다. 이전엔 2시간이면 손님의 캐릭터를 이끌고 퀘스트(임무)를 모두 깼지만 지금은 2일이 넘게 걸린다. 그러면 이번 패치는 안 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
“아냐, 게임은 확실히 재미있어 졌어. 도전하는 묘미가 더 크지.” 패치 이후 <디아블로 2>를 떠났던 사람들이 여러 명 돌아온 것이 가장 기뻤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제 2의 디아블로 할아버지’를 만났다.
지난 11월 중순에 한 할아버지가 안 씨의 PC방을 찾았다. 인터넷에서 노래를 들으려 왔던 전래식 씨(75)는 안 씨가 <디아블로 2>를 하는 것을 인상 깊게 지켜봤다. “<디아> 한번 해보겠냐”는 안 씨의 제안에 그는 흔쾌히 응했다.
40년 전부터 취미로 춤을 춰왔다는 전 씨는 지르박, 블루스와 같은 사교춤에 심취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게임을 알게 된 뒤로는 매일 ‘스페이스 짱’ PC방을 찾게 됐다. 레벨은 늦게 오르고 안 씨처럼 <디아블로 2>에 통달할 가능성도 적어 보였지만 중요한 것은 하루에 2시간씩 <디아>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 씨는 “머리를 쓸 곳이 없었는데 도전할 거리가 있어서 좋다. 게임이 재미있어 시간가는 줄 모른다”며 하루 해가 너무 짧아졌다고 말했다.
한편 안 씨는 최근 매우 뜻 깊은 선물을 받았다. 블리자드에서 전세계 100장 한정으로 제작한 ‘<디아블로 2> 명화’를 받게 된 것. <디아블로 2>의 국내 유통사인 한빛소프트는 10개 한정으로 명화를 고급액자로 제작, 그 중 하나를 안 씨에게 전달했다.
“아주 폼이 나. 내가 게임을 해서 전세계에 몇 장 없는 희귀한 그림을 받았다고 가족에게 자랑했지.” 아들 안인범 씨(29)도 “그냥 소일거리 인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이런 성과를 거둘 줄 몰랐다”며 기뻐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고된 PC방 운영이지만 안 씨는 도전 욕구를 자극하는 <디아블로 2>를 더욱 파고 들었다. “게임은 어려워졌지만 절대로 포기는 안 해.”
안 씨는 <디아블로 2>에는 아직도 연구하고 개척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뭔가 하나 잡았으면 확실히 해야지. 꼭 <디아블로 2>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신이 하는 것에서 최고가 된다는 각오로 해야지.”
2004년에도 ‘디아블로 할아버지’의 도전은 계속된다.
MBC 게임대회 최종 진출전 무대도 올라
■ ‘고수 많아 행복한 한국살이’ 호주 청년 피터
게임프라이데이 9호(10월 10일자) 1면의 주인공이었던 피터(Peter James Naete·22)는 한국에서의 두 번째 겨울을 맞았다. <스타크> 고수가 많아 멋진 승부를 벌일 수 있는 한국을 찾았던 열정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다. 아니 더욱 뜨거워졌다.
지난 9월 30일 ‘MBC게임 팀리그’에서 상대팀의 선수 네 명을 잇달아 꺾었던 ‘깜짝 올킬’ 이후 피터는 개인리그 진출을 위해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 결과 지난 15일에 있었던 ‘MBC게임 스타 마이너리그’ 최종 진출전 무대까지 올랐다.
오프라인 예선에서 국기봉 선수(2대0)와 강도경 선수(2대1)를 꺾으며 힘차게 출발을 했지만 박경수(KTEC·테란)과 맞붙은 최종 진출전에서 0대2로 완패하고 말았다. “최근 가장 큰 게임이었다. 연습을 정말 많이 해서 승리를 확신했기에 충격이 컸다.” 어이가 없었던 패배는 피터에게 작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보다 경기의 승리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하지만 게임 자체를 즐기는 것은 변함이 없다.” 피터는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았다. 더욱 단단해지기 위한 즐거운 한국살이는 계속됐다. 그가 소속된 POS 프로게임단 성재명 감독은 “농담 삼아 ‘집에 안가냐’고 물으면 ‘때가 되면 가지 말라고 해도 가겠다’고 답한다”며 피터의 한결 같음을 칭찬했다.
그러나 호주의 집을 떠나온 지도 어느새 1년. “조금은 향수병에 걸린 것 같다”는 피터는 국제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어머니와 연락하고 있다. 그는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는 POS팀원들과 한국인들 덕분에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최근 POS팀 숙소에는 또 다른 외국인 선수 한명이 머물고 있다. 월드사이버게임즈(WCG) 2003 <스타크> 종목에 미국 대표로 참가했던 브라이언(19·테란)이 ‘코리안 프로게이머 드림’을 쫓아 POS에 입단한 것. 그도 원하는 것은 피터와 같았다. “숙식만 제공되고 게임만 할 수 있으면 OK.” 덕분에 영어로 마음껏 수다를 떨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
그에게 있어 2003년 최고의 수확은 “한국의 대중 문화와 함께 <스타크>를 배운 것”이었다. POS팀과 함께한 시간도 빼놓지 않았다. 피터의 도전은 2004년에도 계속될 예정이다. MBC게임과 온게임넷의 <스타크> 리그에 진출을 목표로 연습에 열중할 계획이다.
“지난 한 해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 드린다. 즐거운 연말연시 되길 바라며, 내년엔 노력하는 모든 일이 성취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