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영혼을 위하여/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해설> 1983년 시집 [이 시대의 아벨]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는 상처받은 내면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이미지로 표현하여 내면의 고통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즉, 내적 고통과 맞대면하여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내적 성숙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상처받은 내면의 고통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내면에 지극한 상처를 드리우고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을 노래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갈대의 흔들림'과 '뿌리 깊음'의 이미지와 뿌리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는 '부평초'의 이미지를 통해, 고통을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직접 대면하고 고통을 수용하여 더욱 값진 삶을 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고통을 반드시 부정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이를 통해 더욱 강인해지고자 하는 시인의 소망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고통을 노래한 다른 시들과 구분된다. 이 시에서는 시의 전개에 따라 고통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가 더욱 성숙해지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상한 갈대'와 '부평초'를 넘어 '뿌리 깊은 벌판'으로 옮겨가는 시인의 시선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란 없으며, 따라서 고통을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초월하고자 하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배어 있는 것이다. (현대시 목록, 인터넷)
* 이 작품은 고통을 회피하기보다는 고통과 정면으로 맞서고 견디어 나가야만 진정한 영혼의 성숙이 가능하다는 역설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인생의 길에서 만나는 '고통'에게 다가가, '고통'과 맞대고 걸어가는 적극적인 대응 방식을 보이고 있다. 고통을 배제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포용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면서,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과 끝끝내 홀로 일어서는 강인한 의지만 있으면 생명력의 터전이자 고통을 수용한 경지인 '뿌리 깊은 벌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화자는 현실을 '캄캄한 밤', 즉 암울한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마주잡을 손'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화자를 암울한 현실로부터 구원하고 밝은 세상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동반자에 대한 믿음과 구원의 희망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상한 갈대'와 '부평초 잎'은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역경과 고난을 거쳐 성숙하는 화자 자신을 상징한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고정희 (高靜熙) : 1948 - 1991 >
* 1948년 전라남도 해남에서출생. 본명은 고성애(高成愛). 한국신학대학 졸업.
* 1970년 광주의 새전남, 주간 전남의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 등을 추천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 1979년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과 시창작 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시집으로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이 시대의 아벨](1983)을 출간하고, 장시집 [초혼제](1983)를 내고는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 1984년 기독교 신문사, 크리스천 아카데미 출판간사를 지내고,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 하나의 문화]에서 활동했다.
* 1986년 여성사를 다룬 [눈물꽃], 1987년 [지리산의 봄], 1989년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를 출간했다.
*1988년 12명의 시인이 쓴 75편의 여성해방시를 모아 [하나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이어라]를 엮어내 여성문학사상 중요한 성과를 남긴다. 그 뒤 [광주의 눈물비](1990)를 내고, [여성해방출사표](1990)를 낸다.
* 1991년 연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펴내고, 이해 지리산 산행 중 불어난 계곡물에 실족하는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 1992년에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가 간행되었다.
<광주시 운암동 광주문예회관 고정희 시비, 시제는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전남 해남군 삼산면 고정희 시비, 시제는 '남도행'>
* 남도행/고정희
칠월 백중날 고향집 떠올리며
그리운 해남으로 달려가는 길
어머니 무덤 아래 노을 보러 가는 길
태풍 셀마 앨릭스 버넌 윈이 지난 길
홍수가 휩쓸고 수마가 할퀸 길
삼천리 땅 끝, 적막한 물보라
남쪽으로 남쪽으로 마음을 주다가
문득 두 손 모아 절하고 싶어라
호남평야 지나며 절하고 싶어라
벼포기 싱싱하게 흔들리는 거
논밭에 엎드린 아버지 힘줄 같아서
망초꽃 망연하게 피어 있는 거
고향 산천 서성이는 어머니 잔정 같아서
무등산 담백하게 솟아 있는 거
재두루미 겅중겅중 걸어가는 거
백양나무 눈부시게 반짝이는 거
오늘은 예삿일 같지 않아서
그림 같은 산과 들에 절하고 싶어라
무릎 꿇고 남도땅에 입맞추고 싶어라
* 여성해방 전사-고정희 (발췌)(장석주/문학평론가, '나는 문학이다')
어떤 여성시인보다 투철한 여성해방 의식을 시에 구현한 고정희는 “자그마하고 깡마른 몸집에 커다란 두 눈, 연약하면서도 완강한 조선여자의 골상”을 가진 시인이다. 대학의 여성학 교수들과 《또 하나의 문화》 동인을 결성해 활동했고, 1988년 <여성신문>이 창간되어 그 편집주간으로 일했다. 시인은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나는 이상과 현실을 분리해서 생각지 않으며 정치 현실과 예술의 혼을 따로 떼어놓지 못한다. 삶과 이데아는 동전의 안과 밖의 관계이다.”라고 말해 왔다. 남녀차별과 사회모순을 꿰뚫어 보고 군더더기가 일절 없는 직설적이며 강건한 남성적 문체로 여성해방을 노래한 고정희는 시와 삶을 하나로 밀어갔다.
1970년에 광주에서 나오는 《새전남》, 《주간 전남》의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시대의식과 여성문제에 눈을 떠갔다. 1975년 《현대시학》에 「연가」, 「부활과 그 이후」 등을 추천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79년에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허형만, 김준태, 장효문, 송수권, 국효문 등과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한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로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과 시창작 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한다.
문단에 나온 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이 시대의 아벨』(1983)을 펴내며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장시집 『초혼제』(1983)를 내고는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초혼제』는 새로이 ‘마당굿시’라는 형식을 선보여 서사성과 희곡성을 동시에 회복하려는 뜻 깊은 실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84년에 <기독교 신문사>, 크리스천 아카데미 출판간사를 지내고,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 《또 하나의 문화》에서 활동했다. 《또 하나의 문화》에서 이제까지 쌓아온 출판인으로서의 경험을 발휘해 그 동안 모아둔 여성문제 자료를 바탕으로 여성사 새로 쓰기 작업을 구체화한다. 《또 하나의 문화》 동인지 2호에 여성문학 70년사를 점검하는 논문 「한국여성문학의 흐름」을 발표하는데 여성문학의 개념도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진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1986년에 새로 쓰는 여성사를 다룬 『눈물꽃』을 <실천문학사>에서, 1987년 『지리산의 봄』을 <문학과지성사>에서, 1989년에 수난자의 빛으로 광주를 재해석한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를 <창작과비평사>에서 각각 냈다. 그리고 1988년에 12명의 시인이 쓴 75편의 여성해방시를 모아 『하나보다 더 좋은 백의 얼굴이어라』를 엮어내 여성문학사상 중요한 성과를 남긴다. 그 뒤로도 『광주의 눈물비』(1990)를 내고, 여성해방과 사회변혁에의 갈망을 노래한 시들을 묶은 『여성해방출사표』(1990)를 낸다.
1991년에 사랑하는 이를 향한 간절한 기다림과 절망, 자기비판과 희생을 담은 연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펴내고, 이해 6월 9일 지리산 산행 중 불어난 계곡물에 실족하는 불의의 사고로 아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1992년에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가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