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일 : 2024년 11월 16일
44번째 성지순례는 1.왜고개 성지 → 2.당고개 순교 성지 → 3.용산 예수성심신학교 → 4.용산 성직자 묘지 → 5.새남터 순교 성지 입니다.
순례를 떠나면서 바치는 기도
† 자비로운신 주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친척 엘리사벳을 돕기 위하여 길을 나선
겸손 과 순명의 여인 마리아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듯이
지금 길을 떠나는 저희(신 다빗, 김 소화데레사, 신 미카엘)를 돌보시고
안전하게 지켜주시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또한 주님께서 언제나 저희(신 다빗, 김 소화데레사, 신 미카엘)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하시고
길에서 얻는 기쁨과 어려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사랑의 생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나이다.
아멘.
"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거듭난 순교성지 "
당고개 순교 성지
[서울대교구]
성지 알아보기
당고개 순교성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이다.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41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은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이곳 저자거리를 중심으로 하던 장사치들은 음력설 대목장에는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이다. 원효로 부근 만초천(蔓草川) 변에 위치한 이곳은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이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와 홍영주 바오로 형제, 손소벽 막달레나, 이경이 아가타, 이인덕 마리아, 권진이 아가타, 이문우 요한, 최영이 바르바라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만은 시복 조서에서 제외돼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다.
기해박해 순교자의 시복 조서를 꾸밀 때 왜 이성례 마리아를 제외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젖먹이 자식이 아사(餓死)를 당함으로써, 나머지 네 아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리겠다는 일념에 잠시나마 배교를 범함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본래 부모와 함께 어린 아이를 투옥시키는 일은 국법에도 없었으나 큰아들 최양업을 사제로 봉헌하기 위해 외국에 유학 보낸 이 집에 대해서는 예외였다. 어머니와 함께 옥에 갇힌 아이들은 국법에도 없는 일이라 밥도 나오지 않고 어쩌다 한 덩어리 밥이 나오면 어린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굶기 일쑤였다. 세 살짜리 막내는 그나마도 얻어먹지 못해 빈 젖을 빨다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린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당한 어머니는 자칫 네 자녀를 모두 죽이고 말 것만 같아 짐짓 배교하겠노라고 하고 옥을 나왔다. 지극한 모성애와 극도의 슬픔 속에서 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아이들과 문전걸식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남편 최경환이 홀로 감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동냥 간 사이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갇힌 몸이 되었다.
6세부터 15세까지 네 형제가 부모를 가둔 옥에 찾아와 울부짖자 철이 든 맏이 희정은 어머니가 다시 배교할 것을 우려해 어린 동생들을 달래 발걸음을 돌렸다.
그 후 동냥한 음식을 틈틈이 부모에게 넣어 주면서 이성례가 참수되기 하루 전 어린 형제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들고 희광이를 찾았다.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한칼에 하늘나라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당고개에서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먼발치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어린 4형제는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용감한 어머니의 순교를 기뻐했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모성을 초월해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전시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던 예전 당고개 성지에 올라서면 한가운데 순교 현양탑이 있고 한쪽으로는 기념제대가 있었다. 이 제대는 여성 순교자가 많이 시성된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서울대교구 가톨릭 여성연합회에서 봉헌하였다.
제대 뒤로 당고개 순교자들을 표현한 청동 부조상에는 열 명의 순교자와 한복 차림의 예수님이 있고, 성지 둘레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성지를 담당하고 있는 삼각지 본당은 2008년 4월 당고개 순교성지 현지에서 성지 개발을 위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당분간 삼각지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이는 성지가 포함된 지역 일대가 서울시의 용산 뉴타운 개발, 국제 업무단지 개발 등과 맞물려 대대적인 재개발이 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삼각지 성당 신자들은 언덕을 깎아내리고 새로 조성될 성지에 뿌리고자 유리항아리에 성지의 흙을 담아 본당에 보관하기도 했다.
3년여의 재개발 공사를 통해 당고개 성지는 관내 근린공원과 연계해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었다.
공원 명칭 또한 ‘순교 성인의 역사’가 깃든 신계 역사공원으로 변경되어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순교자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특히 삼각지 성당 권철호 신부와 한국화가 심순화 씨는 성지 전체를 ‘어머니의 따뜻한 품’으로 형상화해 순교자들의 고통보다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신앙의 후손인 우리를 감싸주는 모성적 사랑을 표현하였다.
한옥과 황토토담을 이용해 고층 빌딩 한가운데 고향 마을처럼 포근함을 갖도록 재개발된 당고개 성지는 2011년 9월 4일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신계 역사공원(1만 5000㎡) 내에 있는 성지는 대지 1752.2㎡, 총건평 1252㎡로 지하 1층에 성당과 전시관,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잔디 광장인 지상 1층에는 당고개 순교자들을 표현한 청동 부조상과 야외 제대, 십자가의 길, 한옥 성물방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성당은 제대 뒤 하얀 벽을 중심으로 옅은 황토색 벽과 한지를 이용한 색유리의 은은한 조명, 나무 바닥으로 인해 들어서는 이들에게 어머니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느낌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