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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
글/스텔라 박
개봉날 영화 <사도>를 보다
영화 <사도>를 보고 왔다. 예고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감정에 설득되어서이다. 뒤주에 갇혀 입술이 바싹 타들어간 사도세자를 바라보는 것은 고통이지만 감독은 그 짧은 예고편만으로도 역사에 별 관심 없는 나같은 인간에게까지 울림이 큰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무관심이 장땡이 아니야, 너처럼 멍 때리는 사람들 때문에 그가 죽었어."
가슴 속에 울려퍼진 메아리이다. 그래서 결국, 개봉일에 극장을 찾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도>를 지켜봤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부터 나의 인터넷 검색의 키워드는 당연히 '사도세자', '영조', '정순왕후', '혜경궁 홍씨' 등이 되었다. <다빈치코드>를 보고 난 후에 한 달 이상, 시온 수도회, 프리메이슨 등을 주제로 웹서핑을 하며 밤을 지새웠던 것과 같은 열병이다.
국사 교과서 한 페이지에 적혀 있던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개성 강한 주인공들이 펼치는 막장 드라마가 되어 뇌리를 때린다. 이는 거의 셰익스피어가 울고갈 수준이다.
영화 <사도>는 역사적 사건인 임오화변을 다루고 있다. 1762년(영조 38년) 윤 5월 13일, 창경궁 제 휘경궁 앞뜰에서 당시 28세였던 사도세자는 부왕인 영조의 명에 따라 뒤주에 들어가 8일만에 아사한다.
영조 역에는 국민배우 송강호가, 그리고 비운의 사도세자 역에는 유아인이 열연했다. 혜경국 홍씨 역에는 국민 여동생 문근영, 그리고 영화 후반부를 장식하는 정조 역에는 소지섭이 출연했다. 연출은 이준익 감독이 했다.
영국 작가 드래블의 장편소설 <붉은 왕세자빈>
그렇게 몇날 몇일을 피곤한 줄도 모르고, 날밤을 새가며 웹서핑을 하던 중, 아주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2004년, 영국 작가인 마가렛 드래블(Margaret Drabble)이 한중록과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쓴 <붉은 왕세자빈(The Red Queen)>이라는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 여자의 피를 타고났고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달달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내게 그닥 큰 의미를 갖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영국인 작가, 마가렛 드래블은 <한중록>에 감동을 먹고 이를 모티브로 장편 소설까지 쓴 걸까.
마가렛 드래블이라는 작가는 2000년 가을,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 아마도 그녀는 이 여행으로 인해 이국적인 나라, 한국에 대해 신비와 동경을 갖게 된 것 같다. 영국으로 돌아간 후,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인 김자현 (JaHyun Kim Haboush)이 영어로 번역한 <한중록 - The Memoirs of Lady Hyegyŏng: The Autobiographical Writings of a Crown Princess of Eighteenth-Century Korea 1996>을 읽게 된다.
혜경궁 홍씨는 환갑을 맞던 1795년, 자신의 회고록인 <한중록> 1편을 쓰기 시작했다. 2편과 3편은 각각 67세와 68세에 집필했고 1편을 쓰기 시작한 날로부터 10년 후에 4편을 완성한다.
그녀는 9세 때, 동궁의 빈으로 간택돼 궁에 들어가지만 시아버지에 의해 남편이 죽어가는 것을 견뎌내야만 했던 불운의 여인이다. 왕의 자리에 오른 정조(혜경궁의 아들)는 혜경궁의 아버지, 즉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뒤주를 가져 왔다는 이유로 풍산 홍씨 집안을 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내 이를 후회하고 어머니에게 지극 정성을 다 했다고 한다.
아들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손자,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씨 집안의 정적인 대왕대비 정순 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정순 왕후와 혜경궁 홍씨의 암투는 영화 <역린>을 통해서 이미 보아왔다.
300여 년 전, 아시아의 코딱지만한 나라에서 벌어진 이 역사적 사실은 그녀의 가슴에 충격적으로 다가왔으며 창작혼에 불을 지폈다. 결국 그녀는 <한중록>을 모티브로 하여 <붉은 왕세자빈>이라는 3부작 장편소설을 완성하게 된다.
소설의 1부는 혜경궁 홍씨 유령의 독백이다. 자신이 왕세자빈으로 궁에 들어오게 된 경위와 궁중생활, 남편 사도세자와 부친 영조와의 갈등,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들려준다.
21세기 영국과 한국을 배경으로 한 2부에 오면 의학윤리를 전공한 중년의 여성학자, 바버라 할리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녀의 남편은 자살충동을 지닌 정신병 환자다. 영역 <한중록> 을 읽고 학회 참석차 서울에 도착, 역사적 장소들을 찾아다니던 그녀는 학회에서 얀 반 요스트라는 학자를 만나 3일간 사랑을 나누는데 그는 지병으로 급사한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얀 반 요스트의 아내 비베카를 만나고 중국 아이를 입양해 함께 키우는 것으로 얀과의 사랑을 꽃피운다.
바버라는 작가 마가렛 드래블(소설의 한 부분으로 실명의 자신을 등장시킨 것)을 만나 <한중록>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드래블은 이를 소설화하기로 마음 먹는다.
마음이 병든 남편을 둔 여인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작품의 소재 선택이나 구성 면에서 탁월한 소설이라는 느낌이 든다. 혜경궁 홍씨와 바버라 할리웰은 둘다 남편 복이 지지리도 없는 여성들이며 그녀들의 남편들은 둘다 부친으로 인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 <사도>를 보면서 영조와 사도세자 모두 심각한 정신병자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자인 영조가 만들어낸 괴물에 다름 아니다.
영조는 선왕 숙종과 숙빈 최씨(1670-1718) 사이에서 태어났다. 몇몇 역사학자는 숙빈 최씨가 7살에 입궐한 궁녀였지 무수리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무수리나 궁녀나 미천하기로 치자면 50보 100보인 신분이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그녀의 임무가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였다고 쓰여있다.
어쨌든 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소생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왕의 아들이니 왕자이기는 하다만, 어머니의 미천한 출신 성분 때문에 영조는 주위로부터 은근한 멸시를 받았다고 한다.
40이 넘어 늦둥이 사도세자를 얻지만 이 역시 무수리인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물론 태어났을 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워했으나 커가면서 학문보다 무예와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하는 세자에게서 그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던 자신의 모습, 천한 무수리의 피를 본다.
심리학에서는 그런 얘기를 한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은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상대방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영조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열등감을 고스란히 아들에게 떠넘기며 아들을 미워하고 구박한, 참 나쁜 아버지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젖을 먹으며 그 품에 안겨 자라야 따뜻한 정서를 갖게 되건만 사도세자는 백일이 되면서부터 생모와 떨어져 키워진다. 대여섯 살이 된 세자가 엄지 손가락을 빠는 퇴행을 보이는 것은 부족한 모성애에 대한 그의 갈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조는 세자의 학업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가를 평가하는 자리에서도 몇 글자를 빼먹었다며 그야말로 "애를 잡는다." 대님 잘 못 맸다고 꾸중,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구박, 비가 와도 가뭄이 나도 모두 세자가 덕이 없어서 그렇단다.
한두 번도 아니요, 사사건건 간섭하고 야단치며 큰 소리로 윽박지르는 아버지를 어찌 아들이 따를 수 있었을까. 사도세자는 아버지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졌고 더 나아가 공포까지 느끼게 됐다.
모든 마음의 병의 심층부에는 애정결핍이 있다. <한중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대표적 정신 질환은 의대병(衣帶病, 의대증)과 화병(火病)이다. 사도세자는 약 7년 동안 몸에 옷이 닿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고 한다. 영조에 대한 공포심과 강박증을 옷에 투사한지라 옷에 대해서도 공포를 갖고 있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불러들이자 아버지를 배알하기 위해 옷을 갖추어야 하는 사도세자는 그 공포가 극에 달해 옷 입는 것을 거들던 나인의 목을 베어버리기에 이른다.
총명하고 밝던 사도세자는 이제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그의 광기와 폭력은 새디즘(Sadism) 과 매조히즘(Majochism)적 경향으로도 나타난다. 자신이 아끼던 후궁인 빙애의 목을 치는가 하면, 혜경궁 홍씨에게 바둑판을 던져 이마에 피가 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무덤을 파고 관을 짜 그 안에 들어가 누워 있기도 했다. 두 차례 넘게 물에 빠지며 자살소동도 벌였다. 궁안의 예쁘장한 궁녀들 다 놔두고 왜 하필, 안암골 비구니 가선과 평양기생들을 불러들여 난잡한 행동을 벌인 건지.
영조의 사도세자 구박은 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결국 사도세자는 야밤에 긴 칼을 뽑아들고 영조를 죽이겠다고 왕의 처소를 찾아간다.
어디 그뿐일까. 만역 사도세자가 심리상담가를 만나 면담을 청했었다면 불안신경증, 공포증, 조울증, 강박증, 밀실공포증을 앓고 있는 신경증 환자라는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마가렛 드래블의 <붉은 왕세자빈(The Red Queen)>에 나오는 주인공 바버라의 남편인 피터 역시 사도세자와 여러 면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피터 역시 부친의 영향으로 마음이 병든 남자이다. 자살 충동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던 그는 부인과 말싸움을 하다가 ‘살인자'라고 비난하며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른다.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굶어 죽어가는 반면, 피터는 심한 약물투여와 정신병원 감금으로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그 또한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악영향을 받아 심한 정신분열증을 보안다.
사도세자의 아버지, 영조
83세에 세상을 뜬 영조는 조선의 왕 가운데 최장수 왕으로 꼽힌다. 당시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3.3세였던 것을 보면, 거의 두 배를 산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남성 평균 수명이 75세인 것을 감안한다면 영조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사도> 개봉 이후 온 국민이 새삼스레 영조의 건강 유지 비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영조의 첫번째 장수 비결은 소식이다. 영조는 하루 다섯 번 먹던 수라를 세 번으로 줄였고 반찬 수 역시 보통 임금들의 12첩 반상을 그 절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회의를 하다가도 수라를 챙겨 먹을 정도였다고 하니 좀 유난스럽긴 하지만 자기 관리 하나는 철저했던 것 같다. 즐겨 먹었던 음식은 현미·잡곡 등 거친 곡류와 채식이었다고. 그런 편집적일 만큼의 자애가 있었기에 그는 52년을 치하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이복 형(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앓아 누웠을 대에는 게장과 감을 먹이고, 그 후 다시 인삼탕을 올려 목숨을 재촉하기도 했었다고 하니, 아이러니다.
말로는 계속 왕 못 해먹겠다, 그만 하겠다. 하면서 신하들이 말리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노여워하는 영조. 그만둘 생각은 없고, 너무 오래 해먹는 것 같아 면목이 없으니까 생각해낸 대책 가운데 하나가 대리청정. 처음 개혁적이고 참신한 정책을 펴던 사도세자는 뒷방 노인네 같은 영조의 궁시렁에 정치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잃고 만다.
영조 하면 또 떠오르는 것은 할아버지와 손녀 뻘 되는 어린 왕비의 결합이다. 영조가 환갑을 넘긴 66세에 간택한 새 왕비가 당시 15세였던 정순왕후. 사도세자가 아직 살아 있었던 1757년에 혼례를 올렸으니 늦둥이 아들보다 10살이 어린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한 셈이다. 아무리 어린 여자가 좋다지만 이건 좀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다.
정순왕후 간택의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한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다른 규수들은‘산이 깊다’,‘물이 깊다’는 답을 했지만 정순왕후는‘인심이 가장 깊다’고 답했다고 한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술이다.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답했다니 할아버지 영조가 꺼뻑 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왕비 책봉 이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달라고 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 "어허! 무엄하다.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 가오의 끝판왕 같은 발언을 했다는 전설도 들려온다.
그런 그녀였지만 할아버지 영조가 밤에 자주 처소를 찾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영조와의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생활에 대한 보상을 훗날 권력에서 찾고자 한다.
자식이 없으면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참 죄송스럽지만 자식은 내게 맡겨진 붓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중한 인연, 바램 없이 베풀고 섬긴다면 다음 세상에서 갚아야 할 더 이상의 빚도, 원한도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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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can't write in Hangle, Wonder! very interesting & insightful. enjoy reading. will see the mov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