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드레아 김 대건 신부 순교자 대축일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찾으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한국 최초의 사제 김 대건 신부가 사형장인 새남터에서 한 마지막 설교입니다. 김 신부는 하느님을 '임자'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에게 "천주님은 임자이기 때문에 임자를 알아보지 못하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임자를 알고 난 후 배반하면 세상에 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라고 자주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김 대건은 하느님을 '임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인류를 대가족으로 표현하였듯이 하느님을 대가족의 가장인 임자로 여겼습니다. 그는 가정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지상의 아버지에 대한 경험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소유주이고 생사여탈권을 가진 임자입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존경과 위엄의 대상일 뿐 아니라 복종과 사랑의 대상이었고, 사람으로서 이러한 임자를 잊고 몰라본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 하였습니다. 비록 하느님을 위해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상에 비할 데 없이 귀한 제자라는 이름을 받았더라도 성화(聖化)되고 의화(義化)되지 않는다면 세례 받은 의미가 없다 하였습니다. 더구나 죄에 죽고 하느님을 위해 살려는 생활을 포기하여 배은망덕 한다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하므로, 배교는 보은을 저버리는 행위이자 큰 죄악이며, 하느님은 국가의 임금 위에 있는 지상 절대권자일 뿐 아니라 당신을 공경하도록 명령하므로 배반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충실히 복종하며 순교한 것입니다. 그의 효애 정신과 임자께 대한 순종은 교계 질서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서도 드러납니다. 즉,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주교와 신부들의 죽음을 임자인 하느님께 대한 순정의 태도로 여겼고, 자신도 그러한 모범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그래서 선교사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라는 주교의 명령에 항상 주저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죽기까지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효애 정신을 강조하며 살았듯이 부모께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 김제준이 순교한 후 유랑하는 신세나 진배없었고, 그래서 그는 순교하기 전 주교에게 자기 어머니를 보살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김 대건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효도의 시작이었습니다.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1836년에 마카오로 유학, 1845년에 사제수품 후 입국해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관가에 잡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장렬하게 순교합니다.
사제 수업을 하던 중 김 대건을 비롯한 최 양업, 최 방제 등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8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 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 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1995년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대회 참가 도중 김 대건 신부가 피신하여 공부하였던 롤롬보이(마닐라에서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곳)라고 하는 도미니코 수도원을 순례하면서 김 신부가 신학생 때 한국 땅을 바라보며 눈물 흘렸던 대추나무 아래에서 그가 겪었던 아픔을 잠시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반드시 사제가 되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것을 굳게 서약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마침내 사제가 되어 한국 땅에 돌아왔지만 관헌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는 사형을 당했습니다. 김대건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여 차례의 문초를 받고, 9월 15일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되어 16일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문초가 끝난 뒤 관리들은 김 신부의 두 귀에 화살을 꿰고 얼굴에는 물을 뿌리고 회를 발랐습니다. 그 때 김 신부는 태연하게 "자, 이렇게 하면 나의 목을 쉽게 자르겠느냐?"라고 했답니다. 12명의 휘광이가 칼을 내리쳤고 여덟 번째 칼날에 목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김대건 신부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기백과 용기를 갖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때 나이 26세였습니다. 그의 시체는 모래사장에 가매장 되었는데 40일 후 이 민식 (빈첸시오)에 의하여 미리내에 안장되었고, 1901년에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졌다가 1951년 그의 두개골을 혜화동 소재 가톨릭 대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습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 7월 5일에 복자로 되었다가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25편의 편지를 남겼는데. 한글본 1편, 한문본 1편 나머지는 라틴어로 쓰여 졌습니다. 라틴어 편지는 23편으로 비망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은사 신부님에게 보낸 편지들로서 조선 입국 통로를 답사할 때의 보고와 옥중 편지입니다. 서두를 "신자들 보아라"로 시작하는 한글 편지는 사형을 앞두고 옥중에서 조선 신자들에게 보낸 회유문입니다. 한문 편지는 장문으로 되어 있으며 조선 입국 통로의 개척을 위한 네 번째 답사 여행 후 기록한 것인데 한문 진본은 없고 프랑스 번역본만이 남아 있습니다.
김 대건 신부는 마지막 편지에서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헛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삼구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너희들의 영혼 대사를 경영하라.”라고 유언을 하고 있습니다. 김 대건 신부님의 이 말씀은 오늘의 복음 말씀과도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마태 10,18-21)”라고 하시며 박해로 인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a)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b)라고 순교자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거룩한 대축일을 지내면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여기에서(Sic et Nunc / Here and Now) 순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려보아야 할 것입니다. 순교는 하느님의 시대적 징표를 헤아리고 예언자적인 말씀의 선포로써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몸으로 이를 실천해 보이는 것입니다.
김 대건 신부님은 조선의 교회 재건을 위한 영적인 노력은 물론이요 사목자로서 당시 천연두로 죽어가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처방전을 얻고자 하는 등 백성들의 고난과 아픔에도 함께 하였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시대의 선각자로서 하느님의 세상 구원은 영적, 물적 모든 것을 망라한 전적인 구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성인으로서 성직자의 길이 무엇인지 그의 장렬한 순교로써 그 길을 제시하였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서 시대의 빛과 소금으로써 어둠을 밝히는 또 하나의 순교자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거룩한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님이 건네주시는 오늘의 편지를 다시 읽습니다.
<믿음으로 솟아오르는 산이 되십시오.
사랑으로 흐르는 강이 되십시오.
겸손하고 부서지는 흙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뿐인 모국을
가장 아름답게 하십시오.>(이해인)
성 안드레아 김 대건 사제와 한국의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