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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춘 시집 까꿍
|해설|
절대고독으로부터의 탈출
그 패러독스의 화법
박윤배 시인
1.
가뭄이 계속되는 여름의 중심에 불쑥 시집 해설을 부탁한다고 보내온 60여 편의 시 원고를 받아 들고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전혀 일면식이 없는 사람 같으면 몇몇 시 이론과 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이 시인의 시가 어떤 색채와 사유로 독자에게 읽힐 것인가에 대하여 혹은 시인의 시가 지향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도 있을 텐데, 여명춘 시인이 어떻게 시를 시작하게 되었고, 어떻게 시와 함께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지를 얼핏이나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시를 쓴 사람에게서 시를 따로 떼어내어서 무어라 말하기에는 상당한 부담감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시인이 입고 있는 시의 겉옷만 살피는 것 같아서 좀 더 이 시인이 가지고 있는 절실한 고민을 시 속에서 들춰내고, 이분이 마치 시를 쓰지 않아도 이미 시인이라는 것을, 그가 쓴 시들과 시인으로서 사는 일은 어떻게 동화되고 있는지를, 미력한 문장이지만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2010년쯤인가, 시를 공부하고 싶다고 당시 내가 운영하던 <대구시창작원>을 그는 찾아왔다. 약 2년간의 수업을 통해 2012년 계간 《문장》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여명춘 시인은 문단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수업 중에도 평소 감성이 여린 풀잎 같았던 시인은 늘 말수가 적었으며, 하나의 생각을 붙잡으면 곰곰이 삭히고 곱씹어서 마침내 익은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 매우 신중하고 침착한 정서를 가진 좋은 서정시인의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우연찮게도 당시 신인상 심사를 본인이 맡게 되었는데 응모된 그의 시를 뽑으면서 평을 이렇게 한 기억이 난다.
“어떤 모방이나 시풍의 아류에서 자유로운 여명춘 씨의 「창문窓門」 외 3편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여명춘 씨의 시들은 어느 한 곳, 어렵게 읽히는 곳이 없다. 이는 지나치게 장식적이거나 현학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나름의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으로 보아 오랜 습작의 결과인 것이며, 독자를 외면하지 않는 친절한 울림이었다. 읽는 재미도 있으며, 동시에 끊임없는 절제의 고민도 보여주고 있어, 나름의 높은 미학적 완성도에 이르러 있다. 끊임없는 정진을 통하여 삶의 곳곳이 시와 닿아있음을, 생명력을 지닌 시로 보여주길 당부한다.”-(《문장》 2012 봄호 신인상 시 부문 당선작 심사평 일부)
인연으로 치면 예사 인연은 아닌 것이다. 나는 그의 시의 장점을 이야기했고, 한편으로는 더 좋은 시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일상의 사건과 내면의 고뇌를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지나친 감정을 절제한 이미지의 언어로 시를 쓰고 있기는 하나 사물의 본질 너머의 본질을 발견하기를 은근히 전도에 당부 아닌 당부 같은 권유로 평의 끝말을 남겼던 것이다. 세상의 소외되고 쓸쓸하고 낮은 곳까지 위안이 될 서정시인이 되기를 사석에서 당부하기도 했었다. 당시 당선작 「창문」, 「장떡의 내력」, 「겨울 가로수」, 「찾아 나선 봄」 중에서 창문을 본다.
아침 햇살이 투명해지기 전에
창문은 거기 있었다
이웃집 초록지붕 위에서 까치가
흰 소식, 검은 소식 지저귀기 전에
벌써 창문은 열려 있었다
담장 너머 흑장미
타는 향기로 능청스레 울 때도
주저앉은 채송화 꽃물 배어 나올 때도
창문은 깊은 눈으로 걸려 있었다
구렁이처럼 감아 오른 뒷집 등나무가
건넛집 빨랫줄 분홍 잠옷이
내 창문으로 날아들어
서러운 화분의 꽃으로 얹힐 때도
창문은 거기 있었고
누군가 훔쳐 갈지도 모르지만
창문이 거기 있는 동안은
그리움은 언제나 생겨날 것이다
- 「창문」 전문
문단 데뷔작인 위 시에서 그는 일상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창문이라는 대상을 두고, 왜 거기 있었는지 물음을 던지면서 창문이라는 그 대상물이 이미 유리를 가둔 틀이 아닌 자신의 혹은 의인화된 시적 대상물로서의 창으로 그려놓고 있다. 본질 너머의 또 다른 본질에 대해 시 「창문」은 도입부에서 독특한 기술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매달려 있는 창문과 열려 있는 창문의 차이에서 시인은 창밖 이웃집 지붕 위의 까치보다도 먼저 소식을 접하고 있는 자신이 되어, 새로운 소식을 알고 싶어 하는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흑장미와 채송화도 바라보는 창은 결국 시인의 눈인 것이며, 선이라는 상관성을 지닌 등나무와 빨랫줄 그리고 이웃집 빨랫줄에 걸려있는 분홍 잠옷이 내 창으로 날아들어 서러운 화분으로 얹혀질 때도 창문은 거기 있었다고 시인은 자신의 내면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아마도 본인의 처절한 이별에 슬픔을 질투의 본능으로 바꿔놓고 있다. 탁월한 패러독스의 어법이다.
그렇게 생겨난 마음의 거울인 창문은 결코 그 위치를 바꾸지 않는 시인에게, 시인의 눈에게 그리움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등단작 「창문」을 통해서 볼 수 있기에 아마도 이번 시집에 등장하는 시의 많은 부분들이 어쩌면 고독 혹은 외로움의 산물들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한을 지닌 여성에 질투의 화법을 통한 비꼼의 시각 혹은 역설쯤으로 이해하면 여명춘 시인의 시는 동병상련의 심정을 가진 독자들에게 충분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거라고 본다.
2.
절대라는 말과 고독이란 말을 합쳐놓으면 “절대고독”이 된다. 이때, 절대라는 말은 피하려고 하나 피할 수 없음이고 인간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일정양의 고독을 의미한다. 한 생을 살면서 어느 시기에 이러한 고독을 어떻게 소비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그 쓰임도 종교적 활동을 또는 예술 활동, 사회적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고독의 그림자를 지우면서 사람들은 살아가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물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인간은 절망과 고통을 알게 되고 나르시스의 세계에 빠지기도 하면서 원초적으로 인간은 외롭고 고독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 속에서 신을 모방하며 살고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고독이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함께 사랑하며 함께 짝을 이루어 살던 상대가 어떤 예고도 없이 훌쩍 세상을 떠났을 때 남겨진 한쪽이 앓는 외로움 즉 고독은 엄청난, 겪어보지 않은 남들은 잘 모를 만큼의 또 다른 고독이 되기도 한다.
여명춘 시인이 아마도 시를 쓰게 된 것 또한 그러한 말 못 할 외로움이 시적인 대상물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밖으로 튀어나와 언어화된 것이리라. 그렇게 표출된 응어리진 외로움이 아마도 시인 자신에게 어떤 치유와 희열을 가져다주었을 것임을 다음의 시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혹시나 신을 날이 있을까 해서
가끔씩 꺼내 보는 하이힐은
오래된 미련이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는데
높은 신발 신고 삐딱거리는 것 같아
신발장 안쪽에 꼭꼭 밀어 두었던 욕망
무릎에 관절염이 와서 낮고 폭신한 신발만
신고 다니느라 못 신은 굽 높은 신발
운동화에 자리를 내어준 후
발등이 벌려놓은 구두의 안쪽은
얼마나 헛헛했을까
이제 나이가 들어 허리도
무릎도 낫는다 해도
하이힐 너를 부릴 수가 없으니
너와 나는 동병상련
벗었다가 신었다가
신었다가 벗었다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정겨움에
서로의 눈시울을 적시고 만다
- 「가장 오래된 신발」 전문
아침이면 누군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
귀밑머리 보송한 사람
눈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
지울 얼룩이 없는 사람
날씨에 맞게 얼굴이 많은 사람
시 잘 쓰고, 시처럼 사는 사람
- 「부러운 사람」 전문
지그시 감은 눈에 구름이 있다
울음을 코에다 가두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하며
가슴을 치는 구름이 있다
바람의 목줄을 잡고
비와 산책을 하는 구름이 있다
천사들과 마귀들이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숲으로
내가 옳다. 나에게 오라. 부르는 손짓에
어쩔 줄 모르는 구름이 있다
무더기 예쁜 꽃들
이마를 찧는 타일 무늬 벽에
오늘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구름이 있다
- 「고독의 무게」 전문
시인은 그의 시 「가장 오래된 신발」에서 신발장 안에 오래전에 모셔둔 굽 높은 신발과의 조우가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꺼내보는 행위다. 혹시나 신을 날이 있을까 해서 가끔씩 꺼내보는 하이힐을 두고 그는 오래된 미련이라고 정의한다. 하이힐이라는 사물은 이미 시인에게서 미련이라 명명된 것이다. 그러한 미련에는 하이힐을 신고 삐딱거리며 걷는 자신이 세상 먼저 떠난 남편이 어떻게 볼까 하는 일종의 죄의식이 묻어 있다. 그래서 또다시 하이힐은 꼭꼭 밀어 두었던 욕망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런 하이힐을 보는 시인의 시각을 하이힐의 입장으로 바꿔놓는 기막힌 시점 이동이 이우러진다. 그러한 하이힐의 감정은 “발등이 벌려놓은 구두의 안쪽은/ 얼마나 헛헛했을까”이다. 그러나 이미 시간은 흘러 나이 든 자신을 보게 되고 하이힐과 자신은 동병상련의 관계가 되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거기다가 정겨움까지 나누는 그런 단계가 되었음을 서러워하면서 서로에게 위안을 나누고 있다. 시인은 이렇듯 사물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그의 시 「부러운 사람」에서는 시인이 부러워하는 사람이기도 하면서 자신도 그 부러운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한 행씩 보면 첫 행에서는 누군가가 아침에 눈을 뜨고 보고 싶어 하는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자신이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귀밑머리 보송한 사람, 눈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 지울 얼룩이 없는 사람, 날씨에 맞게 얼굴이 많은 사람, 시 잘 쓰고, 시처럼 사는 사람 등이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그런 사람이 자신이고 싶다고 표현하고 있다.
가장 감동적이고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한 행을 꼽으면 “날씨에 맞게 얼굴이 많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가끔 살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서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시인에게도 그만큼 어떠한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지 못하는 게 아마도 자신의 단점이라는 생각을 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그에게 고독의 무게란 구름이라는 등가물 즉 훨훨 자유를 구가하는 구름을 자신의 한 모습으로 환치해 놓고 “구름이 있다” 반복적인 종결로 시의 리듬을 구가하고 있으며, 일종의 역설적 화법으로 무거워야 할 고독의 무게를 가볍게 처리하는 독특하고 발랄한 역설이 내면의 감정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싶은, 낯선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3.
이번 첫 시집에 실린 시는 아마도 10년간 혹은 그 이상 매달려온 시인에 창작 산물을 고스란히 모아 놓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10년이면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한 시인에게 시풍도, 사유의 방향도, 가치 기준도 바뀔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한 기간에 쓴 여러 편의 시들을 한마디로 몰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순이다.
과거 여명춘 시인의 안부를 누군가 내게 물으면서 어떻게 하면 연락이 닿겠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매우 간단했던 적이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가 해 떠서 해 질 시간까지 그가 머무는 곳은 성모당이었기에, “성모당 가시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였다. 거의 많은 시간을 그가 성모당서 보낸 것을 알고 있는 나이지만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명춘 시인이 성모당을 아직도 매일 찾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한 그의 일상에 있어, 종교적 가치관이 차지한 비중은 아마도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중 외형적으로 드러난 종교적 성찰을 통한 자신의 고독을 녹여낸 시들을 찾아 소개한다.
당신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영원히 닿지 못할 먼 곳으로
당신을 피해 멀리 멀리 달아났습니다
당신의 구속에서
자유로울 것 같았고
벗어날 것 같았지만
항상 당신은 내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피해 달아나기 전보다
더욱 나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더 많이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당신 손바닥
안이었으니, 당신 옆에 있을 때가
풍요로운 구속이었습니다
더 도망할 곳이 없습니다
- 「굴레」 전문
참새는 담장도 없고 창문도 없는 하늘을 마음껏 날았다. 어느 날 갑자기 강의실 안으로 한 마리 참새 날아들었다. 강의실 창밖 초록 잎들 사이에서 새들이 날갯짓하며 부르고 있었다. 그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날았지만 투명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쳐 떨어졌다. 다시 더 힘차게 날았지만, 또 떨어졌다. 몇 번이나 유리창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다. 새의 귀에 “거룩한 성자의 죽음은 부활의 영광을 위한 영화로운 죽음이다.”라는 신부님의 강의가 서글프게 유리창의 의미를 흔들고 지나갔다. 낙원은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낙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 「새」 전문
하느님!
금 나와라, 뚝딱
도깨비방망이가 되어 주세요
누런 신사임당 나와라, 뚝딱! 하면
지혜가 쏟아지는
도깨비방망이가 되어주세요
하느님!
명품가방 나와라, 뚝딱! 하면
내 머리맡에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명품가방이
이름표를 흔들면서
걸어 나오게 해주세요
하느님!
제 나쁜 것 다 가져가시고
당신의 얼굴이 뿜어내는
선량한 빛을 내게도
좀 나눠 주소서
- 「기도」 전문
하느님, 저는
돈도, 학벌도, 시도 시원찮은
바닥 인생이 맞죠?
하느님 말씀하시길
성당에 가거든 네 나이 또래의 이웃과
비교해보아라
바닥 인생이라는 생각 면할 수 있을 테니
나이가 젊다고
말꼬리 올린 억양으로
심한 꿀밤을 주는 이웃, 그도
한 시대 살아온 배경으로 볼 땐
저보다 더 바닥 인생으로
보이기도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바닥이란
더는 내려갈 수 없으니
솟구쳐 오르는 일만 남은 거죠?
- 「바닥」 전문
그는 시 「굴레」에서 “모두가 당신 손바닥 안이었으니, 당신 옆에 있을 때가 풍요로운 구속이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으며 구속이란 말 앞에 “풍요로운”의 접두사를 붙임으로서의 진솔한 고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다.
다른 시 「새」는 성당에서 어떤 강의 중에 건물 안으로 날아든 새의 상황과 그때 이루어지는 신부님의 강의와 맞물리면서 죽음에 대한 시인의 직관이 번뜩인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 막은 유리창의 양면성을 깨닫는다.
또 다른 시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천진하고 솔직한 심정 표현이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신앙시의 벽을 과감히 깨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재미를 준다.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주세요//하느님! / 명품가방 나와라 뚝딱 하면 / 내 머리맡에 /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명품가방이/ 이름표를 흔들면서/ 걸어 나오게 해주세요” 이 얼마나 때 묻지 않은 투정인가? 이처럼 뻔하지 않고, 교훈적이지 않고, 천진스런 인간의 모습에서 어떤 연민이 물씬 느껴진다면 이 또한 진솔한 감동이 된다.
이에 비해 천진성은 아니지만 시 「바닥」은 자책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바닥을 다시 희망으로 끌어올리는 화법 “그러고 보니, 바닥이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으니// 솟구쳐 오르는 일만 남은 거죠?”라고 너스레를 보이는 그의 문장은 일종의 해학적이기도 하다.
이렇듯 무거워질 것 같은 사건들이 말랑하고 천진한 상황으로 전환시켜 놓기도 하고 가끔은 아주 쉽고 가벼운 서정 속에 깊은 사유를 알레고리로 장치해 놓은 그의 시 속에는 나름 자주 등장하는 사물들은 이미 상징으로 고리가 되고 있다.
그중 하나의 사물이 바로 등단작 「창문」에 등장하는 창이 그 예이다. 투명한 유리의 다름 아닌 창이 그의 시 여러 곳에서 약간의 변모를 계속해가면서 새로운 상징으로 발전해 가고 있음도 주목해볼 만하다.
또 한 가지 그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화법이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말로 하지 않고 사물이 말하는 것을 자신이 알아듣는 그런 에두름의 표현방법을 자주 쓰고 있다. 이는 각종 사물과 마음으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이처럼 사물이 하는 말을 알아듣고 내 말을 사물에게 얼마나 절실하게 전달하는가가 독자들로 하여금 신선한 재미를 주는 좋은 한 방법임은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는 사람은”이 정상적인 문장임에도 “내가 아는 거울은”이라고 바꾸어 사람을 거울로 환치함으로써 의미가 한 단계 깊어지는 장치를 한다. 아래 시 「까치꼬리춤」에서는 인간 행위를 까치의 행위로 동일화시키고 있으며, 「고로쇠나무」에서는 고로쇠나무가 고로쇠나무가 아닌 그 무엇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성모님일 수도 어머니이기도 한 자신일 수도 있다. 그의 시들은 가끔 아우라를 동반하는 경우가 있어, 분위기로 시를 이해하거나 시인의 절박함을 이해해야 하는 재미가 있다.
내가 아는 거울은
팔십이 되어가는 나이에도
아파트 단지 독서실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 「거울」 부분
왼쪽으로 흔들면
당신이 따르고
오른쪽으로 흔들면
당신이 돌아서고
사랑을 담은 눈이
얼마나 매혹적인지는
오래오래 두고 볼 일이다
여태껏 알지 못했던
긴 꼬리의 흔들며
빼딱빼딱 걷는 저 걸음걸이
장마에 수줍다가
화들짝 핀
마당가 채송화 꽃밭도
무도장인 양
휩쓸고 있다
- 「까치꼬리춤」 전문
가슴이 자꾸만 마른다.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을 닮으라 하셨는가? 찔린 내 옆구리에서 나 아닌 타인을 위한 맑은 핏물 몇 동이나 빠져 나갔나. 젖은 아침 햇살에도 내 어린잎들은 자꾸만 눈에 힘을 잃고만 있다. 흙에서 태어나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바엔 나를 모두 쏟아줌으로써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하리라. 어머니의 젖을 물고 모자란 젖에 쿡쿡 이마를 박으면서 젖 빨아대는 아기 때문에 아린 젖꼭지를 참아내다 수척해진 고로쇠나무는 위대한 사랑을 했다고 말하리라
- 「고로쇠나무」 전문
4.
여명춘 시인은 평소에 말수가 적은 시인이다. 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시인이다. 어쩌다가 부끄러운 듯 빙긋 웃는 게,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표현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안으로 감정을 감추는 만큼 혼잣말에 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혼잣말이 결국엔 한 편의 시가 되어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물들의 이야기도 안으로 삭이고 삭여서 어느 순간 툭툭 직관으로 뱉어낸다. 캄캄한 밀봉의 장독 안에서 발효된 언어다. 특히 완성도가 높은 시일수록 쉽고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은, 막연한 가벼움을 넘어 깊은 사유를 숨기고 있음일 것이다.
고양이의 눈빛은 슬픔이다
슬픔을 먹고 또 먹어
독주를 머금은 양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빛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사람들의 사랑을
혼자 받고 싶은 오만한 욕망이
집착을 보일 때
너는 발톱을 꺼내겠지
사람을 할퀴는 고양이의 눈빛은
붉은 신호등이다
그러니까, 고양이의 눈빛이
내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서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
컴컴한 눈물을 본다
- 「고양이의 눈빛」 전문
골목길 건너 창으로 바라보는
할배와 할매
아침마다 서로 까꿍 한다
서로 마음속은 붉은지, 누런지, 검은지도 모르게
숨기고 또 숨기기에 바쁜 그들
할배는 담배 한 대 피우러 나오고
할매는 빨래 널러 나오고
할배가 웃음 흘리면 할매는 얼굴 돌리고
할매가 쳐다보면 할배는 등을 돌리고
눈앞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아도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조금씩 알아갔다
한 마리 옆집에 사는 흰둥이도
밤새 아무 일 없었음에
아침이면 까꿍 한다
- 「까꿍」 전문
골목길에 들어서는 내 발소리에
반갑다고 짖으면 안 돼
대문 지나 내가 현관문 열 때까지
나에게 매달리면 안 돼
꾸중할 때마다 나에게 더 안겨드는데
그러면 안 돼
내가 마당에 나갈 때
나에게 달려오면 안 돼
내가 널 쳐다보면 뽀뽀를 하려는데
그러면 안 돼
현관 앞에 꼭 보초 서는 것처럼
앉아있는데 그러면 안 돼
뜨거워진 내 마음을
너무 빨리 눈치채는 너
날 보고도 함부로 뜨거워지면 안 돼
나밖에 모르는, 너를 보는
나는 가슴이 아프니까
- 「개에게 꾸중하다」 전문
시인이 10년의 이상의 기간에 쓴 시에서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하나의 세계를 읽어내기엔 무리가 있다. 시인의 절대고독이 지닌 빛깔도 다양하다. 시편들 곳곳에서 외로움의 정서와 한때 종부로서 살아오면서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자신의 위치에서 오는 흔들릴 수 없는 삶의 부담감 등등 나름 잘 살아온 흔적들이 뭉클뭉클 감동을 자아내기도 한다. 호박죽을 좋아하는 자신에게 호박죽을 며느리가 끓이고 식기 전에 배달 온 아들의 이야기기 그러하고 자신의 성씨 “여” 씨가 자신도 모르게 “김” 씨로 변해버렸다는 등의 이야기하며, 출산하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도 그러하다. 애틋한 가족사를 다룬 시들을 시인은 첫 시집에서 소중하게 넣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가족사적인 시들은 시인 개인에게는 소중하기는 하지만 가족이 아닌 일반 독자들은 절실함으로 읽지 않는다. 시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가족인 것은 틀림이 없으니 가족 못지않게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애견 가족 또한 매우 특별하다. 고양이이나 개를 가까이 한다는 것도 알고 보면 외로움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의 시 「고양이의 눈빛」을 보면 시인은 첫 연에서 “고양이의 눈빛은 슬픔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 슬픔이란 것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고 사람들의 사랑을 혼자 받고 싶은 오만한 욕망이 집착을 보일 때 “너는 발톱을 꺼내겠지?”라고 물음을 던진 뒤 다시 붉은 신호등이 된다. 그렇게 변모를 거듭하는 고양이 눈빛은 “그러니까, 고양이의 눈빛이/ 내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서/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 컴컴한 눈물을 본다”라고 시인은 뛰어난 절대고독에 잇닿은 직관을 얻고 있다. 컴컴한 눈물이란? 그것도 보이지 않는 달의 뒷면의 컴컴한 눈물은 나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먼저 간 한 사람의 눈물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하는 직관인 바, 시인의 심미안은 그만큼이나 깊다는 것이다.
한편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시 「까꿍」은 눈을 깜빡이는 행위를 통해서 신생아에게 대상영속성 즉 어떤 사물이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을 가르쳐주는 놀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 놀이는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널리 행해오는 놀이인 바 시인은 엉뚱하게도 아이가 아닌 노인 그것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골목을 사이에 둔 까꿍 놀이로 노년의 삶에서 찾는 새로운 활력을 시로 표현하면서 자신 또한 옆집의 개와 눈뜨는 아침의 인사를 나눈다고 기술하고 있다. 놀라운 패러독스다.
또 다른 시 「개에게 꾸중하다」에서는 반갑다고 짖으면 안 돼, 안 돼, 안 돼를 반복하고 있다. 결국 반복의 의미는 안 된다가 아닐 수도 있겠다. 강한 부정은 긍정인 것처럼 “나밖에 모르는 너를 보는/ 나는 가슴이 아프니까” 마지막 이 행의 표현 또한 나만을 지속해서 봐달라는 역설의 표현일 수 있겠다.
아무튼 여명춘 시인의 시집 『까꿍』 속의 시들은 어떻게 어떤 방향에서 읽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가능해서 즐겁다. 이상하리만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지속되는 대구의 여름 날씨에 한 시인이 오래 쓴 시를 읽는 일로 폭염 속 나름 즐거움이 컸다. 고추 몇 포기 심어놓고 시인이 손톱에 물들이던 봉숭아를 나도 화분에 심어놓고 꽃 피기를 기다리는데, 뽑아주지 않아 잡초 무성한 쪽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잘 견디는데, 잡초 알뜰히 뽑아준 쪽은 물 주기를 조금만 늦춰도 비실비실 목이 마르다 한다. 결국 시인도 시를 쓰는 일도, 외롭게 너무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다 보면 깊어진 고독의 수렁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이 말은 이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고, 여명춘 시인은 훨훨 자신을 가둔 유리창을 깨고 잡초 우거진 세상 밖으로 나와 까꿍! 까꿍! 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기를 권유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