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586] 韓翃(한굉) 7절-寒食(한식)
寒食(한식)
- 韓翃(한굉)
翃= (벌레 날) 굉, “厷”은 넓은 산곡,
“羽”는 가볍게 난다는 의미이다.
본래의 의미는 벌레가 산곡에서 아래위로 춤을 춘다는 뜻이다.
春城無處不飛花 춘성무처불비화
봄날 성에 꽃 날리지 않는 곳 없는데,
寒食東風御柳斜 한식동풍어류사
한식날 봄바람에 궁궐의 버들 비꼈다네.
日暮漢宮傳蠟燭 일모한궁전랍촉
해 저물어 한나라 궁실에 밀랍 초 전하니,
輕烟散入五侯家 경연산입오후가
가벼운 연기 흩어져 오후의 집으로 든다네.
◎ 이 시는 궁중의 한식을 읊은 것이다.
청명 사흘 전을 한식이라고 하는데 곧 금연절이다.
오후는 한나라 성제 때 외숙인 왕담과 왕상․왕음․왕근․왕봉을 봉하였는데,
모두 후에 봉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오후라 불렀다.
한나라의 제도에 금연절에는 궁중에서 새 불로 초를 붙였는데
귀척의 집에만 나누어주었다.
이 시는 한나라 때의 일을 써서 본조의 일에 연관시켜
예로부터 불을 금할 때 귀척의 신하에게 초를 전하는 것이다.
○ 당나라 한익(翃의 오기)은 자가 군평이며, 남양 사람이다.
천보 연간에 진사가 되었으며, 가부낭중으로 지제고가 되었다.
당시 익과 이름이 같은 자가 또한 낭중이 되었다.
이부에 내린다는 명이 있었는데 두 한익의 이름을 올리니 덕종이 비답하기를
「春城無處不飛花」 네 구라 하므로 이 한익에게 주었다.
(此咏宮中寒食也. 淸明前三日, 謂之寒食, 卽禁烟節也.
五侯, 漢成帝時, 封舅王譚․王商․王音․王根․王鳳, 皆爲侯, 時人謂之五侯.
漢制, 禁烟節, 宮中鑽新火然獨, 散於貴戚之家.
此詩用漢事係本朝從古, 禁烟傳燭於貴戚之臣也.
○ 唐韓翊, 字君平, 南陽人. 天寶進士, 駕部郞中, 知制誥. 時有與翊同名者,
亦爲郎中. 命下吏部, 以兩韓翊名上, 德宗御批, 春城無處不飛花四句曰, 與此韓翊)
덕종(德宗) 건중(建中) 초에 시로 덕종 이적(李適)의 칭찬을 받았고,
가부낭중(駕部郎中)으로 지제고(知制誥)에 발탁되었다.
당시 한굉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었는데, 한 사람은 자사(刺史)였다.
재상이 누구를 말하느냐고 물으니 황제가 시인 한굉을 가리켰다고 한다.
1) 韓翃, 字君平, 南陽人. 天寶十三年, 楊紘榜進士. 侯希逸素重其才,
至是, 表佐淄青幕府. 罷, 閒居十年. 及李勉在宣武, 復辟之. 徳宗時, 制誥闕人,
中書兩進除目, 御筆不㸃, 再請之, 批曰, 「與韓翃」. 時有同姓名,
為江淮刺史. 宰相請孰與, 上復批曰, 「『春城無處不飛花』韓翃也.」
俄以駕部郎中知制誥. 終中書舍人. 翃工詩, 興致繁富, 如芙蓉出水,
一篇一詠, 朝士珍之. 比諷深于文房, 筋節成于茂政,
當時盛稱焉. 有詩集五巻, 行于世.
2) 어류(御柳): 어원(御苑)의 버드나무.
고대 한식날 버드나무를 꺾어 문에 꽂아놓았다가 청명날 황제가
다시 불을 살리도록 선포하면서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로 일으킨
신화(新火)를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3) 납촉(蠟燭): 초를 가리킨다.
초에 불을 붙여 이를 불씨로 삼도록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4) 오후(五侯): 한 성제 때 함께 봉후(封侯)를 받은
평아후(平阿侯) 왕담(王譚)․성도후(成都侯) 왕상(王商)․
홍양후(紅陽侯) 왕립(王立)․곡양후(曲陽侯) 왕근(王根)․
고평후(高平侯) 왕봉시(王逢時)를 말함.
일반적으로 권문세가를 지칭하는 비유로 많이 쓰임.
* 설명(注释)
1) 寒食:한식, 절기 명칭. 음력 청명 전날 혹은 이틀전을 의미한다.
南朝 梁宗懔 《荆楚岁时记》에서는 ‘전해 동지부터 105일 되는 날,
급한 바람이 불고 비가 많이 오는 날을 한식이라 한다
’(去冬节(即冬至节)一百五日,即有疾风甚雨,谓之寒食).
한식일은 3월이라 마침 봄의 경치가 무르익는 시기이다.
고대의 풍속은 한식일 전후로 3일음 불을 금하는데
이는 춘추시기 진나라(晋国) 대부(大夫) 개자추(介子推)를 기념하기 위함이다.
개자추는 진문공(晋文公) 중이(重耳)를 보좌하여 귀국후 산중에 은거하였으며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러 그를 압박하여 산에서 나오기를 원했으나
개자추는 나무를 안고 죽었다. 진문공은 그를 애도하기 위해 개자추가
죽은 날에 불을 피워 음식을 끓이는 것을 금지했고 찬 음식(冷食)만 먹도록 했다.
후에 풍속이 되었는데 이를 ‘한식일에 불을 금한다’(寒食禁火) 라고 한다.
혹은 불을 금하는 것은 주나라의 오래된 규정(旧制)이며
개자추와는 무관하다고도 한다.
시의 제목은 “寒食日即事”라고도 한다.
2) 翃 [ hóng]: (벌레 날) 굉, “厷”은 넓은 산곡, “羽”는 가볍게 난다는 의미이다.
본래의 의미는 벌레가 산곡에서 아래위로 춤을 춘다는 뜻이다.
3) 春城无处:춘성무처, 또는 “春风何处”라고도 한다.
春城: 춘성,봄날의 장안성을 의미한다.
飞花:비화, 또는 “开花”라고도 한다.
4) 御柳:어류, 궁원(宫苑) 중의 버드나무(杨柳).
5) “日暮”句:일모 구절, 한식일에 불을 금지하기에 촛불도 켤 수 없는데
총애를 받는 집안만 특허를 받아 촛불을 켤 수 있다.
日暮: 일모,또는 “一夜”라고도 한다.
汉宫: 한궁,실제로는 당나라 궁전(唐宫)을 가리킨다
. 传蜡烛: 전랍촉,순서대로(依次) 촛불을 전달하다.
6) 轻烟:경연, 또는 “青烟”이라고도 한다.
五侯:오후, 권력을 잡고 있는 외척(外戚) 혹은 환관(宦官)을 의미한다.
《汉书·元后传》에 의하면,한성제(汉成帝) 하평 2년(河平二年, 즉 기원전27년)에
그의 외삼촌(舅) 왕담(王谭), 왕상(王商), 왕립(王立), 왕근(王根), 왕봉시(王逢时)를
후작(侯)으로 봉했으며 그때 사람들은 오후(五侯)라 불렀다.
또,《后汉书·陈蕃传》에서는 한순제(汉顺帝)가 양황후(梁皇后)의 오빠
양기(梁冀)를 대장군으로 봉하고 그의 아들
양윤(梁胤), 숙부(叔父) 양양(梁让), 양숙(梁淑), 양충(梁忠), 양극(梁戟)을
모두 후작(侯)으로 봉해 세상은 그들을 양씨오후(梁氏五侯)라 불렀다.
또 《后汉书·单超传》에 의하면 한환제(汉桓帝)는
환관(宦官) 단초(单超), 서황(徐璜), 구원(具瑗), 좌관(左悺), 당형(唐衡)을
후작으로 봉했는데 역시 오후(五侯)라 불렀다.
* 번역문(译文)
한식
봄날의 장안성에 꽃이 떨어지지 않은 곳이 없다
한식일 이날에 봄바람은 황궁의 버드나무 가지를 불어 휘날리게 한다
한식일에 응당 불을 금해야 하지만 황혼무렵이 되니
황궁에서 하사한 촛불의 연기가 제일 총애를 받는 대신의 집으로 날아간다
* 간략한 소개
당나라 시인 한굉(韩翃)의 칠언절구.
앞 두 구절은 대낮의 풍경을 쓰고 장안성에 버들개지가 날리고
무수한 꼬칭 떨어지며 춤추는 사람을 매혹시키는 봄의 경치와
황궁원림중의 풍경을 묘사했다. 뒷 두 구절은 밤의 경치를 쓰면서
한식절에 비록 불을 금하지만 총애를 받는 관원은 황제가
하사한 촛불을 받으며 집에 가벼운 연기가 휘감으며 올라간다.
시중에는 황성의 봄에 대한 도취와 성세에 대한 노래가 넘치며
그럼에도 암암리에 완곡한 풍자와 간언(讽谏)도 포함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시는 경치를 묘사함에 치중점을 두며 백묘기법으로
사실적이고 구조가 엄밀하며 다중적인 급선회를 포함하며
필치는 함축적이고 의미가 깊다.
* 창작배경(创作背景)
한식은 중국 고대의 전통 명절이며 옛 사람들은 이 날이 되면
전후로 3일을 불을 피우지 않으며 단지 만들어진 찬 음식을 먹어
한식이라 이름이 주어졌다. 《西京杂记》에 의하면 한나라에서
한식일에 전국에서 불을 금지했지만 황제는 작위를 가진 귀족 가문에는
촛불을 하사해 특별히 조명을 허락했으며 이로 은총을 드러냈다.
당나라는 한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역시 촛불을 전해 은총을 드러냈다.
이 시의 구체적 창작시기는 확실치 않으며 만약 당현종 시기이면
‘오후’는 양귀비의 오빠 양국종(杨国忠) 및 자매들을 의미하며
만약 안사의난 이후이면 당대종(唐代宗)이래 권세가 점점 강성해져
가는 환관정치집단을 의미한다.
그들은 조정을 휘여잡고 중당의 정치가 날로 부패하게 만들었으며
한나라의 말기와 비슷했다. 한굉은 황제의 은총이 최상위권에만
혜택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이 시에서 약간의 풍자와 간언의 의미를 드러냈다.
* 한식절(寒食节)
한식절은 중국의 전통 명절이며 동지 이후의 105일 되는 날이다.
일반적으로 청명절의 하루 혹은 이틀 전이다.
처음에는 불만 금하고 찬 음식만 먹다가 점차 성묘,답청,
그네, 축구, 투계(斗鸡) 등 풍속이 추가되었다.
한실적은 이천여년을 내려오면서 한때 중국 민간의 첫번째 제사 지내는 날이었다.
기원을 보면 춘추시기 진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화를 피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19년 동안 망명(流亡)해 있었는데 대신 개자추(介子推)는
시종일관 곁을 떠나지 않았고 심지어 먹을 게 없어 살을 베어 주군에게
먹게 하기까지 했다(割股啖君).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이겨내고
다시 진나라에 돌아와 춘추오패중의 진문공이 되며 이 가운데
개자추는 견마지로(犬马之劳)를 다하게 된다.
그 후 개자추는 이득을 추구하지 않고 어머니와 산에 은거한다.
진문공은 그를 압박해 다시 나오게 하려고 불을 질러 산을 불태운다.
하지만 개자추는 산을 나오지 않으려 하다가 결국 불타 죽는다.
진문공은 그의 충신의 뜻을 기려 은거하던 면산에 매장하고
절을 지어 기리며 개자추가 죽은 날에 불을 금지하고 찬 음식을 먹게 하여
슬픈 마음을 기탁하게 하는데 이것이 한식절의 유래이다.
청나라 초기 탕약망(汤若望)이 역법개혁(历法改革)을 한 후 한식절은
청명절 하루 전으로 정했다.
이야기 발생지인 산시(山西)는 여전히 한식절을 기념한다.
[출처] 寒食(한식)/(唐)韩翃(한굉)|작성자 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