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봉육가(東峯六歌)ㅡ김시습
1
여기 한 나그네 그 이름은 동봉
휘날리는 백발에 주름살 잡혀도
어린시절엔 학문에 뜻을 세워
언짢은 선비 노릇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갈팡질팡 헤메었노라
오호 첫번째 노래여 소리 슬프건만
아득한 저 하늘은 내몰라라 한다네
2
꼬부랑 지팽이 마디도 많구나
앞세워 길잡이 삼고 사방으로 노니노라
북으로 말갈 남으로 부상
어디에 이 시름을 둘 곳이 있단 말인가
날 저물고 길 지쳐도 갈 길은 아직 멀다.
어찌해야 날개 펼치고 구만리 창공에 날아 보느냐
오호 두번째 노래여 소리 더욱 드높다.
거세찬 북풍도 나를 위해 부노라
3
외갓집 할아버지 어린나를 거두고
돌 남짓한 어린 손자 글 읽는 소리 좋아하고
섬마 걸음 배울적 부터 글 가르친 그의 공로
오세에 글을 지어 문필 의젓 하였다네,
세종임금 이 말 듣고 궐내로 부를 적에
일필휘지 하매 용사 비등 하였더라
오호 세번째 노래여 소리 인정 안타깝다.
염원은 못 이루고 불우한 신세 되었네
4
어머님 어머님 날 기르신 어머님
글방 옆에 집을 옮겨 애지 중지 기르셨네
나 어린 시절부터 공자맹자 글을 읽혀
이 나라 바로 잡으라 크게 기대 하셨지
허나 어찌 알았으랴 선비의 학문도 도리어 쓸모 없이
십년동안 산수간에 떠돌아 다닐줄을
오호 네 번째 노래여 목메인 노래여
저 산골 까마귀도 반포(反哺)를 부르짓네
5
구름개인 하늘은 씻은듯 맑은데
우수수 부는 바람만 풀숲을 설레이네
외로이 시름에 싸여 푸른 하늘 바라보노라
한 바다의 거품인양 절로 늙어 가나니
내 어찌 한평생 고달프고 외로움에 싸였느냐
이 세상 뜨내기들과 어울릴줄 모르고
오호 다섯번째 노래여 애 끓는 노래여
넋이라도 달려라 사방 그침없이 달려라
6
내 화살 잡아 당겨 천량(天狼)별을 쏘려하니
태일(太一)이 한복판에 막아서고
긴 칼 빼어 메고 여우를 치려하니
백호가 바로 산위에서 노려본다
분노에 숨이 막혀 견딜줄이 있으랴
휘 휘파람 내쉬니 사면이 적막하구나
오호 여섯번째 노래의 노래마저 서글퍼
장한 뜻 못 이루고 헛되이 수염만 스다듬는구나.
매월당 김시습
김시습은 보기 드문 제도권 밖의 지사였다.
후대사람들은 그가 제멋대로 였느니 옳았느니 하고 아주 쉽게 말하지만 ,
김시습 자신은 방외인의 절개와 지조를 지키기 위해 거의 자학적으로 몸부림쳤다.
좌절과 변절로 얼룩진 세상에서 자기를 지킨다는 것은 정말로 고독한 자신과의 투쟁일수 밖에 없었다.
1485년 그의 나이 52세 때 김 시습은 동해안 어딘가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비정상적인 삶을 여섯곡의 노래로 회고한 동봉의 여섯노래(東峯六歌)를 지었다.
동봉은 김시습의 별호이다. 이노래를 들으면 그 외로움이 실로 눈물겹게 다가온다.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부친 김일성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신동·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에게 불려가 총애를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세 살 때 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다섯 살 때 세종의 칭찬을 받은 뒤 ‘오세(五歲)’란 별명으로 불렸던 천재. 그는 일찍부터 세상에 알려진 천재였기에 오만하다고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세상과 쉽게 타협할 수 없었기에 일평생을 아웃사이더로 맴돌며 고뇌해야만 했다.
그는 한국 전기체소설(傳奇體小說)의 효시라는 ‘금오신화(金鰲新話)’의 저자이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이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박차고 나서서 일생을 떠돌았던 지조 있는 방랑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200여편의 시에 자신의 삶과 생각을 담아 세상에 남긴 그는 그렇게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시와 산문을 썼던 자유의 문인, 유학의 이상을 글과 행동으로 실천한 올곧은 선비, 불교와 유교를 소통시키려 고민했던 철학자, 탈속과 환속을 반복하며 오직 진리만을 추구했던 수행자, 국토의 아름다움과 거기에 깃들인 역사를 찾아 방랑했던 여행가…. 그는 이 모든 것이었다.
양재역에서 삼각산 패밀리 만나다...
산들해 에서 맛있는 한정식을 음미하고...
< 블랙&화이트님이 가평 농장에서
채취해오신 엄나무와 은행....>
산삼나무라고 불릴 정도로 당뇨에 탁월한 엄나무...
새싹인 엄나무 순에는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 사포닌, 항산화물질, 항암, 향균 성분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의보감』에는 ‘허리와 다리를 쓰지 못하고 마비되는 것을 예방하고,
이질이나 옴, 버짐, 눈에 핏발 서는 것 등을 치료하며 중풍을 없앤다’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지요.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천식에 효험
은행은 여러가지 효능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효능은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혈액의 점도를 낮춰 혈액이 혈관 속을 잘 흐르게 합니다.
은행이 혈액순환 장애로 생기는 여러 질병에
효과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은행은 폐를 보하고 기침과 천식을 가라앉히는 작용도 합니다.
한방과 민간에서는 껍데기를 벗겨 말린 씨를 ‘백과(白果)’라고 하여,
폐와 위를 깨끗하게 하거나
진해와 거담을 다스리는 약재로 썼다고 합니다.
*블랙&화이트님 덕분에 올 겨울 감기는 끄떡없습니다.
우리집 베란다에 걸려있는 약초 주머니들이 두눈 시퍼렇게 별르고 있는데
감기 바이러스 제깐 것 들이 무서워서 접근이나 하겠어요~!!
잘 달이고 볶아서 먹겠습니다~~늘~감사해요~~^^
첫댓글 양재역...가는 젊은이에게 한컷
*^^* 해빈님은 공범 줍느라고 고생 했시요)
지나
지각생 덕으로 식사들이 늦어져서리...미얀효
엄나무 팰때는 제법 양이 많았는데
열두서너집으로 나누다 보니 많은 양이 아니라서
은행도 그렇고요.
적지만 마음으로
(나 은행 털떼
햇 은행이 넘 맛있어요 다섯개씩 먹고 이뻐져야징 감사해요 밖에 드릴게 없는 아즈머니가 ...
찹쌀떡과 강엿 생각엿 호박엿..
딸이 감사하다며 완전 감동했습니다.
한알씩 따고 한알씩 줍고 한알씩 비벼씻고 말리고..
굵은은행알을 보니 뿌듯합니다.
엄나무도 가시가 많아 다루기 힘드셨을탠데
감사히 받기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