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당근과 채찍 양칼 인사의 달인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의 두가지 모습을 인상깊게 간직하고 있다. 하나는 담배 권하는 대통령이다. 朴대통령은 사람을 불러앉히고나면 일단 담배부터 권한다. 담배를 받아들면 곧바로 라이터로 불을 댕겨 턱 밑에 갖다댄다. 또 하나는 대통령의 안광 (眼光) 이다. 검은 얼굴에 작은 체구의 朴대통령은 화가 나면 얼굴이 더 검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작은눈에서 뿜어나오는 눈빛은 푸른빛이 도는 검광 (劍光) 처럼 서늘하다. 朴대통령의 탁월한 용인술 (用人術) 은 이런 두가지 대조적인 모습에서 나온다. 그는 이 두가지 모습을 적절히 보임으로써 내사람을 만들었다. 장기집권의 물꼬를 튼 3선개헌 당시 개헌에 반대하던 김택수 (金澤壽.작고) 의원을 3선개헌의 사령탑인 원내총무에 임명한 과정은 용인술의 백미다. 3선개헌의 움직임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정치권이 들썩거리던 69년 2월 朴대통령은 직접 金의원의 심중을 떠봤다. 그는 대뜸 신세 한탄부터 했다. "대통령 자리란 정말 불편하고 힘들어. 어떤 때는 옛날 다니던 명동 술집에도 가고싶은데 마음대로 안돼. " 金의원은 이때 '절대권력자의 고독' 에 대해 연민의 정을 느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 경제를 생각하면 걱정이야. 어떻게든 근대화과업을 완수해야 할텐데…. 참 큰일이야. " "벌여놓은 경제개발을 완수하기 위해 집권을 연장해야겠다" 는 얘기다. 당연히 金의원은 "후계자에게 맡기면 된다" 며 3선개헌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朴대통령은 대수롭지 않은 얘기인 듯 한마디 흘렸다. "그래, 일리가 있구만. 그러나 권력의 생리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야. " 얼마 뒤 3선개헌 작업이 본격화되면서 金의원은 전혀 다른 대통령의 모습을 봐야 했다. 朴대통령은 점잖지 못한 수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김형욱 (金炯旭.중앙정보부장.실종) 이라는 대역 (代役) 이 악역을 맡았다. 김형욱은 "집안 사업을 계속할거야, 관둘거야" 라고 협박했다. 金의원의 친형은 한일합섬 창업자인 김한수 (金翰壽.작고) 씨. 당시 같이 3선개헌 반대에 앞장섰던 양순직 (楊淳稙.72.충남향우회장) 의원은 金씨의 이같은 고민을 보다못해 "사업은 해야 하지 않겠나" 라며 뜻을 굽힐 것을 오히려 권할 정도였다. 담배.眼光으로 상대제압 두달 뒤 朴대통령이 金의원을 청와대로 다시 불렀다. 자리에 앉자 담배부터 권했다. "방금 피웠습니다" 라며 예의를 차렸지만 기어이 입에 물리고는 라이터불을 댕겼다. 그러곤 한마디. "아무래도 원내총무를 맡아줘야겠어. " 金의원은 "곤란하다" 며 거절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이건 명령이야" 라고 밀어붙였다. 거듭 고사하자 대통령은 "총재의 명령을 듣지 않는 당원이 어디 있어" 라며 몰아붙였다. 金의원이 "물러가겠습니다" 라며 일어서자 대통령도 벌떡 일어섰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金의원의 등이 벽에 닿았다. 金의원은 당시 자신보다 훨씬 체구가 작은 朴대통령의 눈빛 앞에 "완전히 포위된 것같았다" 고 회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기 (氣) 로 제압한 뒤 나온 부드러운 말. "임자, 날 좀 도와줘. " 金의원도 맥이 탁 풀렸다. "각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원내총무로서 金의원이 처음 처리한 일은 楊의원등 동지 5명을 당에서 쫓아내는 일이었다. 楊의원은 "기가 막힌 용인술" 이라고 혀를 찼다. 金의원은 개헌반대의 핵심일뿐만 아니라 이 운동의 자금줄이었다. |
...
용인술의 요체는 적절한 인물을 적합한 자리에 쓰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이렇게 기용한 인물을 다시 '디바이드 앤드 룰 (Divide and Rule.분리지배)' 이라는 고전적 용인술로 통제했다. 그 전형적 사례는 유신 이전 흥청망청했던 정치자금 관리였다. 정치권력의 향배를 좌우하는 예민한 문제인 만큼 朴대통령은 아예 당대의 실력자들을 한데 묶어 '4자 회담' 이라는 틀 속에서 서로 견제토록 했다. 당대의 실력자 4인은 김형욱 정보부장과 청와대의 이후락 (李厚洛.73) 비서실장, 당 (黨) 의 김성곤 (金成坤.작고.쌍용그룹 창업자) 재정위원장, 내각의 장기영 (張基榮.작고.한국일보 창업자) 부총리등. 65년초 金부장은 張부총리의 사무실 금고를 턴 적이 있다. 각종 차관을 다루는 책임자인 張부총리가 '딴 주머니' 를 채우고 있다는 첩보에 금고털이 전문가를 보내 부총리 집무실 금고에 있던 내용물들을 남산으로 옮겼다. 金부장은 각종 수표와 귀금속등 내용물의 사진을 찍은 뒤 청와대로 들어가 "부총리를 해임해야 한다" 며 펄펄 뛰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주의만 주는 선에서 끝냈다. 4자 회담이 만들어진 계기는 金부장의 이후락 실장에 대한 압박. 당시 李실장과 가까웠던 박제욱 (朴齊郁.71.전 영진흥산 사장.미국 거주) 씨는 일본 미쓰비시 (三菱) 상사의 한국 진출을 돕고 있었다. 65년 가을 張부총리에 이어 李실장의 뒤를 파헤치던 金부장이 朴씨를 남산으로 연행했다. 朴씨는 "金부장이 '李실장에게 돈을 얼마나 줬는가' 를 집중적으로 캐묻더라" 고 기억했다. 남산에서 풀려난 朴씨는 곧장 노심초사하고 있던 이후락 실장에게 달려가 '공생 (共生) 의 길' 을 제안했다. "김형욱도 돈 문제에 끼어들고 싶어 나서는 것같은데, 권한을 나눠야겠소. 안그러면 당신이 다치게 생겼어요. 몇 사람에게 권한을 나눠 주고 당신이 총괄조정하면 될거요. " 李실장은 머리 회전이 빠르기로 소문난 사람. 당장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대통령에게 허락을 받아 왔다. 金부장의 측근이었던 X씨는 4자 회담 얘기를 듣곤 "말썽의 소지가 있으니 빠지는게 좋겠다" 고 만류했다. 그때 金부장은 "각하께서 그놈들을 감시하라고 하시는데 빠질 수 있겠느냐" 고 말했다는 것. 김형욱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를 오히려 "나머지 놈들을 감시하라고 대통령께서 만드신 기구" 라는 소명감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박정희의 용인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셈이다. 朴대통령 용인술의 마지막은 사사로운 정에 매이지 않는 버리기, 즉 역할이 끝나면 냉정히 퇴장시키는 것. 73년 윤필용 (尹必鏞.70.전 수방사령관) 사건을 처리한 강창성 (姜昌成.70.한나라당 선대위 공동위원장) 보안사령관의 좌천이 그 전형적인 예다. 姜사령관은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당시 군부 실력자 尹사령관을 구속한 얼마 후 태릉골프장에서 대통령과 골프를 같이 했다. 이날 골프가 끝난 뒤 클럽 하우스에 단둘만 남자 대통령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다가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姜장군을 그냥 두면 경상도 군인들 씨가 마른다고 해. " 바로 며칠 뒤 이민우 (李敏雨.작고) 참모차장으로부터 3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얼마 뒤 인근 유성온천에 쉬러 온 대통령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밤12시 호텔에서 만난 대통령이 은근히 한마디 건넸다. "임자가 쫓겨난 줄 알고 무시하는 놈들이 있으면 얘기해봐. 내가 혼을 내줄 테니까. " "필요하면 언제든 쓴다" 尹사령관을 쫓아내는데 활용한 姜사령관을 팽 (烹) 한 뒤 다시 심야에 불러 은근히 구슬려 놓는 용인술. '언제든지 필요하면 다시 쓸 수 있다' 는 시사를 줌으로써 버림받은 사람의 충성심까지 담보했다. 실제로 朴대통령은 어떤 인물이 물러난 지 3개월 뒤에는 어김없이 전화를, 다시 3개월 뒤에는 측근을 보내 인사를, 한 6개월쯤 더 지나면 청와대로 불러 식사와 함께 촌지를 줬다. 이러니 물러난 사람은 '언젠가 다시 부를 날이 있을 것' 이라며 오매불망 대통령의 전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특히 朴대통령은 전문 경제관료를 중용하는 데는 '끈질기다' 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김정렴 (金正濂.73.전 비서실장) 씨의 경우 5.16 직후 통화개혁에 참여, 재무.상공장관을 거쳐 대통령 비서실장을 9년 넘게 지냈다. 같은날 물러난 남덕우 (南悳祐.73.산학협동재단 이사장) 부총리 역시 재무장관 5년을 합쳐 9년만에 물러났다. 金실장은 다시 주일대사로, 南부총리는 경제특보로 임명돼 10.26을 맞았다. 이런 끈질긴 중용의 수혜자인 태완선 (太完善.작고) 전 부총리는 72년 국제회의 참석차 프랑스에 들러 정소영 (鄭韶永.65.고려종합연구소 회장) 당시 경제수석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 심경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사실 내가 민주당 정권에서 장관을 했기 때문에 석탄공사 사장 시킬 때만 해도 정치적 제스처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건설장관 시키고, 이렇게 부총리까지 시키잖소. '정말 국가 건설에 필요하다고 생각해 기용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대통령 앞에서 자꾸 고개가 숙여진단 말이야. "
41.권력누수 허용않는 '유아독존'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과 가까웠던 소설가 이병주 (李炳注.작고) 씨는 朴대통령을 '청렴한 유아독존 (唯我獨尊)' 이라고 짧게 설명했다. '청렴' 여부는 다음회에서 다루고, 유아독존이란 면에서 박정희는 정말 한방울 권력의 누수도 용납지 않는 절대권력자였다. 단호한 권력의지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2인자에 대한 불칼 같은 응징으로 나타났다. 2인자 반열에 올랐다고 할만한 인물도 많지 않다. 영원한 2인자 김종필 (金鍾泌.JP) , JP 없는 공간을 잠시 차지했던 김성곤 (金成坤.작고.쌍용그룹창업자.세칭 SK)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이후 유신과 남북대화를 주도했던 당시의 이후락 (李厚洛.73.세칭 HR) 정보부장 정도. DJP연대로 또다시 2인자의 길을 택한 JP는 유신전까지만 해도 '대권 후계자' 였지 '영원한 2인자' 가 아니었다. 5.16직후에는 1인자나 다름없는 2인자였다. 61년 6월5일 쿠데타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황에서 JP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육사 8기생들이 혁명을 구상해 추진했다" "박정희장군이 이번 혁명에 가담한 것은 지난 3월께부터다" "혁명공약과 각종 포고문, 국가재건최고회의 등의 안 (案) 은 모두 내가 기초했다" 고 밝혔다. 국가재건동지회 멤버였던 Z씨는 "1차로 박정희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생각이었지만 내밀하게는 '길어도 8년만 기다리면 JP를 새로운 영도자로 모실 수 있다' 는 기대에서 서약을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고 말했다. 그가 내놓은 서약서는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겠다' 는 등의 비장한 문구로 가득 차 있다. 5.16직후 박정희장군 스스로도 미 군사고문단원인 하우스먼에게 "8기생 호랑이들이 나를 밀어내려 한다" 고 불평했을 정도다. 그러나 JP는 朴대통령이 권력기반을 다져가면서 점차 후계자자리에서 멀어져 간다. JP가 63, 64년 두차례 외유를 다녀왔을 당시만 해도 朴대통령은 그를 불러 위로한 뒤 곧 공화당 의장이라는 후계의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두번째 외유에서 돌아올 무렵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이후락 (李厚洛.73.세칭 HR) 과 김성곤 (金成坤.작고.쌍용그룹 창업자.세칭 SK) 이 JP의 자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朴대통령의 '2인자 견제' 용인술의 결과다. HR는 63년 5대 대통령선거 직후 비서실을 구성할 때만 해도 JP측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JP계 사람들에 의해 조선호텔에 연금당한 채 사퇴협박을 받아야 했다. JP와 비교될 수 없는 위상이었다. 민주당정권 당시 중앙정보위원회 (세칭 79부대) 의 책임자였던 HR를 구원, 중용해준 인물이 JP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HR는 JP가 2차 외유에서 돌아온 뒤인 65년말 국회의장선거 당시 대통령의 번의를 요청하러온 JP의 대통령면담을 물리칠 정도로 힘을 발휘했다. 물론 HR의 뒤에는 대통령이 있었다. SK의 중용 역시 HR의 JP에 대한 견제용이었다. 당시 HR와 가까웠던 박제욱 (朴齊郁.71.전 영진흥산사장.미국 거주) 씨는 HR에게 "당 (黨) 쪽에 뜻을 같이 할 사람이 필요하다" 며 SK를 추천했다. 물론 HR는 "당내에 각하의 직계세력이 필요하다" 는 건의로 SK의 중용을 승인받았고, SK는 65년말 당의장 JP가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의 돈줄을 거머쥐는 재정위원장이 됐다. 여기에 김형욱 (金炯旭.실종) 정보부장이 가세해 JP를 에워쌌다. 그물망 둘러싸 JP견제 JP에 대한 견제세력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朴대통령이 '후계자가 필요없다' 는 마음을 굳힌 시점, 즉 3선개헌을 구상하면서 부터다. JP와 육사8기 동기로 김형욱과도 가까웠던 최영택 (崔榮澤.69) 씨는 67년 가을 김형욱과 만났다. "종필이는 아직도 대통령꿈 꾸나. 지 배때기에는 까만 콩 (총알) 이 안들어갈 줄 아는기야, 뭐야. " 崔씨는 "朴대통령이 뭔가 언질을 주지 않고는 그렇게 내놓고 협박할 수 없다" 고 판단했다. 역시 사건은 이어졌다. 金부장은 '국민복지회' 사건을 만들어 냈다. 68년 봄 JP는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대통령은 대수롭지 않은 듯 한마디 물었다. "임자, 거 복지회라는 게 뭐야. " JP는 "그게 뭡니까" 라고 되물었다. "그거 임자가 만들었다면서. YT (金龍泰공화당의원)가 임자 뭐 시킨다고 세력화한다는 얘기던데. " JP는 심상찮다는 느낌을 갖고 청와대에서 나오자마자 알아봤다. 김용태의원이 회장인 '국민복지회' 를 김형욱이 이미 수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JP는 "그때 이미 경상도세력과 이북출신들이 나를 내쫓으려고 안달이었다" 고 기억했다. 경상도세력이란 SK와 HR, 이북출신이란 김형욱을 일컫는 말이다. 이때 JP는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朴대통령에게 반발했다. 지구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부산 해운대로 내려가 호텔 베란다에 화폭을 펼치고 바다를 그렸다. 탈당은 곧 의원직 상실과 정계은퇴를 의미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朴대통령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오늘같이 불쾌한 일은 없었을 거야" 라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부산으로 사람을 보냈지만 JP는 움직이지 않았다. 밤에는 대통령이 직접 JP에게 전화를 했다. "올라와 나하고 얘기 좀 하지. " "제가 좀 가라앉으면 올라가겠습니다. " 며칠뒤 JP는 부인 박영옥 (朴英玉.68) 여사와 함께 청와대로 들어갔다. 당시 朴대통령은 조카 朴여사에게 술을 따르면서 "옥아, 삼촌이 밉제" 라고 물었다고 한다. 朴여사는 "예, 밉습니다" 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朴대통령은 조카 부부의 심경을 알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조카의 술잔에 술을 부었다. 당시 심경에 대해 JP는 "쓸데없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만드는 대상이 되기 싫어 아예 정계를 떠날 생각이었다" 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는 감정의 앙금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JP는 오랜 정치방학에 들어가 서산농장과 제주도 감귤밭을 일구었다. 그러나 그는 1년도 지나지 않은 69년 봄 다시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3선 개헌에 반대해 물러난 JP인데 개헌 반대파를 돌려놓기 위해 끌어들인 것이다. 버린 사람이라도 필요하면 불러쓰고야마는 박정희의 용인술이다. HR가 몇번이나 JP를 찾아왔다. 결국 JP는 청와대로 불려갔다. "임자가 안도와주면 누가 나를 도와주겠어. 속상하는 일 많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어. 이제 뭔가 돼 가는데 아무리 봐도 앞길이 순탄치 않아. 이 시기를 놓치면 더 어려워져. 임자가 하는 셈 치고 날 좀 도와줘. " 청와대를 물러나온 JP는 개헌에 반대해온 측근의원 16명을 불러놓고 말했다. "끝까지 반대한다고 안하실 분이 아닙니다. " JP는 이 무렵 문인들과의 모임에서 朴대통령 개헌의지를 "자식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집에 '말 안들으면 불지르겠다' 며 횃불을 들고 날뛰는 무서운 아버지" 에 비유했다. 며칠뒤 JP는 청와대를 찾아가 "반대하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대신 제가 죽을 곳이라도 따라가겠습니다" 며 고개를 조아렸다. 30년전 앙금 아직도 남아 이후 JP는 국무총리라는 2인자 자리에 올라 장수했다. 총리시절 朴대통령의 종신집권을 예고하는 유신이 선포됐을 당시에도 JP는 "내친 김에 하실 때까지 하십시오. 없는 힘이지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라며 따랐다. 사실상 3선 개헌 이후 JP는 후계자의 시련보다 영원한 2인자로서의 아늑함을 택한 셈이다. 朴대통령의 확고한 권력의지, 칠종칠금 (七縱七擒.마음대로 잡았다 놓았다 함) 의 용인술 앞에서 JP는 영원한 2인자일 수밖에 없었다. JP처럼 순종하지 않을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 경우가 SK다. SK는 65년 재정위원장으로 돈줄을 거머쥔 뒤 HR와 함께 사실상 2인자의 영향력을 누렸다. 71년 SK로 대표되는 당내 신주류의 영향력이 지방자치단체와 경찰조직에까지 미치자 朴대통령은 반SK성향인 오치성 (吳致成.작고) 씨를 내무장관에 임명한 뒤 직접 SK의 영향권내에 있던 내무관료와 경찰의 명단을 주면서 '정리' 를 지시했다. 여기에 반발한 SK가 야당에서 제출한 吳장관 해임동의안에 동조해 吳장관을 해임시켜 버린 것이 10.2항명파동이다. 항명한 SK는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정보부에 붙잡혀가 온갖 수모를 겪은 뒤 정계를 은퇴하고 방랑생활을 해야했다. 그는 아무래도 JP보다 선이 더 굵었든지 朴대통령을 잘 몰랐음이 분명하다.
42.가사엔 엄격,, 정치엔 여유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은 '자손을 위해 미전 (美田.좋은 땅) 을 사지 않는다' 는 일본 한시 (漢詩) 를 자주 암송하곤 했다. 일본 메이지 (明治) 유신을 주도한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隆盛)가 지은 것이다. 실제로 朴대통령이 1남2녀의 자손을 위해 남긴 재산은 대통령이 되기 전 살았던 서울신당동 집 한채 뿐이었다. 물론 청와대 금고에서 적지않은 돈 (8억원) 이 나왔지만 이는 자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쓰다 남은 정치자금으로 보인다. 그 돈중 3억원은 합수부가 가져가고 5억원은 유족에게 돌아갔다. 스위스은행 비밀계좌가 있었다는 주장도 끊이지 않지만 지금껏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설령 있었다손 치더라도 몇 푼 아니었을 것이고 그나마 '정치자금'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그의 개인적인 청렴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러닝셔츠를 해지도록 입고 허리띠도 너덜너덜할 때까지 바꾸지 않았다. 체질적으로 호사스러운 것에 거부감을 느꼈던 듯하다. 朴대통령 일가족은 여름휴가 때면 진해 앞바다 저도에서 지냈다. 저도엔 일제시대에 지은 낡은 목조가옥 밖에 없어 밤엔 진해로 나와야 했고, 그럴 때마다 해군 경비정들이 출동하는 등 일이 번거로웠다. 72년 여름휴가를 끝내면서 박종규 (朴鐘圭.작고) 경호실장에게 "집을 수리해 잠잘 수 있도록 하라" 고 지시했다. 73년 대통령 일행이 다시 저도를 찾았을 때 목조가옥은 없어지고 2층 양옥 돌집이 들어서 있었다. 朴실장을 불렀다. "수리하라고 했지 누가 새로 지으라고 했어. 너는 뭘 시키면 꼭 이렇게 하더라. 짐 내리지 마. " 朴대통령은 6.25 이전 중사시절부터 데리고 다녔던 朴실장에게만은 반말을 했다. 막 돌아서는데 김정렴 (金正濂.73) 비서실장이 "진해엔 숙소가 미처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라며 겨우 붙잡았다. 그날 밤 측근들은 구수회의를 갖고 미리 와 대기중이던 정주영 (鄭周永.82) 현대그룹 회장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鄭회장이 대통령 앞에 섰다. "제가 지었습니다. 각하께서 쓰시는데 저의 사재 (私財) 인들 아깝겠습니까. " 현대건설에서 공짜로 지어준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어쨌든 대통령의 화는 풀렸다. 박정희는 그러나 정치자금에 관한한 후했다. 그는 정치자금을 직접 만지지 않았다. 누가 돈을 가져 오더라도 곧바로 비서실장에게 돈의 성격을 설명하고 넘긴다. 대통령을 대신해 정치자금을 주무른 주인공은 정치권력의 이동에 따라 같이 옮겨 갔다. 역시 김종필 (金鍾泌.JP) 로부터 시작된다. 새나라자동차.증권파동 등 4대 의혹사건들로 조성된 돈은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JP가 62년 12월 워커힐에서 최고위원들에게 공화당 창당에 대해 설명했을 당시 불만을 품은 최고위원들은 "불순한 자금으로 돈을 물쓰듯 한다" 며 안주 접시를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JP는 여유만만했다. 그 와중에 1차로 외유를 떠나면서도 정치자금을 걱정하는 정구영 (鄭求瑛.작고) 공화당 의장에게 "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이후 정치자금의 주인공은 반 (反) JP 실력자들이었고 정치자금의 가장 큰 파이프는 일본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부터 일본돈은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쓰비시 (三菱) 의 한국측 대리인으로 이후락 (李厚洛.73.세칭 HR) 비서실장과 가까웠던 박제욱 (朴齊旭.71.전 영진흥산 사장.미국 거주) 씨는 "63년 대선을 앞두고 미쓰비시로부터 1백만달러를 빌려 대선자금으로 사용했다" 고 주장했다. 그가 '빌렸다' 고 하는 것은 '몇년 뒤 당인리발전소 프로젝트를 미쓰비시에 주는 형식으로 갚았기 때문' 이다. 일본돈은 65년 국교정상화 이후 유.무상차관 형식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리베이트나 커미션이란 이름으로 정치자금화됐다. 일본 이토추 (伊藤忠) 상사 서울사무소장이었던 고바야시 유이치 (小林勇一.작고) 는 95년 일본 교도 (共同)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7년 총공사비 2천6백만달러인 영동화력발전소 프로젝트를 따면서 김성곤 (金成坤.작고.쌍용그룹 창업자.SK)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김형욱 (金炯旭.실종) 중앙정보부장에게 공사비의 7%인 1백80만달러를 커미션으로 주었다" 고 밝혔다. 당초 정치자금 창구인 SK에게 4%의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체결하려는데 갑자기 김형욱이 소환해 3%를 내놓으라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미국 자금도 들어왔다.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걸프 관계자는 "71년 김성곤으로부터 선거자금 1천만달러를 요구받고 협상해 3백만달러를 지급했다" 고 밝혔다. 걸프의 해외 정치헌금중 80%가 한국에 주어졌다는 불미스런 기록도 남아 있다. 69년 金중앙정보부장이 경질되고 71년 10.2 항명파동으로 SK가 사라지면서 정치자금 창구는 HR로 집중됐다. HR의 아들 이동훈 (李東勳.49.제일화재 회장) 씨는 미 의회 증언에서 "아버지가 스위스은행 비밀계좌 등을 통해 돈을 관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대통령의 정치자금" 이라고 증언했다. 문제는 이같은 정치자금 조성과 실력자들의 '떡고물' 챙기기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다. 70년대에 김용태 (金龍泰.71) 전의원은 朴대통령과 정치자금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朴대통령은 "받고 싶어 받나, 할 수 없으니까 받지" 라는 반응을 보인 뒤 정치자금을 만지는 실력자들의 뒷돈 챙기기에 대해선 "인간이란 어차피 다 이중인격자야. 돈 챙기는 놈들, 내가 다 알지"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朴대통령은 정치자금을 '필요악 (惡)' 으로 받아들였고, HR의 말처럼 '떡을 만지다 보면 떨어지는 떡고물' 을 적당히 눈감아 주면서 통제했다는 얘기다. 실력자들이 권좌에서 떠날 때 솔직히 고백하면 박정희는 대체로 '사면' 해줬다. 71년 박태준 (朴泰俊.70.자민련 총재) 포항제철 사장이 보험금 리베이트로 받은 6천만원을 "정치자금으로 써주십시오" 라며 박정희에게 가져갔다. 朴대통령이 "가져가 마음대로 써 봐" 라며 돈을 돌려주자 朴사장은 "제가 쓰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통이 그렇게 작아" 라며 웃었다. 당시 6천만원이면 서울시내 괜찮은 집 10여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포항제철은 박정희가 만들어준 '종이마패' 덕분에 정치자금으로 돈을 뜯기지 않았다. 포철이 설비구매에 한창이던 70년 3월 박정희는 朴사장을 청와대로 불러 "힘든 일 없나" 하고 챙겼다. 당시 실력자 SK.HR 등이 외국업체들로부터 커미션을 받곤 그 업체와 구매계약하라고 朴사장에게 압력을 넣는 통에 포철 건설 자체가 부실화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朴사장은 자신이 구매계약의 전권을 행사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박정희는 "필요한 내용을 메모해봐" 라고 한 뒤 즉석에서 건의서 왼쪽 위 여백에 사인을 해주었다. "일일이 나 만나러 오기 힘들 때 필요할 것 같아서 사인해주는 거야. " 이후 포철은 실력자들의 외압에서 벗어났다. 포철 성공의 신화 속엔 '포철에서만은 정치자금을 빼돌리지 말라' 는 박정희의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70년대 중화학공업의 견인차였던 오원철 (吳源哲.69) 전경제2수석은 10월유신도 이같은 의지의 연속이라고 설명했다. "朴대통령은 국운을 걸고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추진하고자 했는데, 그 과정에서 예전처럼 정치자금이 빠져나가선 안된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정치자금의 수요를 줄이기 위해선 돈 안드는 정치가 필요했던 거죠. " 물론 유신은 영구집권욕의 산물임이 분명하지만 朴대통령이 '정치권력은 경제발전을 위한 수단' 으로 생각했던 인물인 만큼 일리가 없지 않은 설명이다. 중앙정보부 국내정치 담당으로 뼈가 굵은 C씨는 "유신으로 정치자금 수요가 이전의 10분의1 이하로 줄었을 것" 이라고 추산했다. 유신 이후 정치자금 창구는 경제관료인 김정렴 비서실장으로 단일화됐다. 金실장은 "매월 공화당 운영비 1억원, 유정회 운영비 2천만~3천만원, 朴대통령의 촌지와 격려금 등 1년에 30억~40억원 정도 들었다" 고 말했다. 그 돈들은 "건실한 기업들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최고 1억원에서 최하 1천만원까지 모은 것" 이라고 김정렴씨는 주장한다. 정치자금이 사실상 사라지면서 대통령의 촌지만 남았다. 비서실 직원 등에게 명절에 일괄적으로 지급하는 촌지는 20만~30만원, 특별히 누구를 격려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1백만원을 넘기는 촌지는 거의 없었다. 다만 군부대 지휘관 같이 조직을 거느린 경우 하사금 액수는 수백만원대에 이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