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수 1장 1-9절
설교제목 : 화이위조(化而爲鳥)
혹시 여기서도 바쁜가요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한가위의 풍성함이 우리의 영혼과 가정 가운데 깃들길 기도합니다. 추석 당일 성묘를 잠시 다녀왔습니다. 성묘 후에 발왕산에 잠시 들렸습니다. 발왕산 정산 스카이워크를 가기 위해 케이블카 타는 승강장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18분 동안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와 보니 확트인 전망이 아름다웠습니다. 발왕산은 천년 주목 숲길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다른 일정 때문에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잠시 앉았다가 내려가려 하는데, 작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혹시 여기서도 바쁜가요. 잠시 쉬어가세요.”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정상에 올라와서는 바삐 서둘러 내려가는 이들을 향한 일침 같았습니다. 한가로이 노닐 수 없는 저 자신의 마음에 잠시 여러 생각들을 하게 하는 문구였습니다. 바쁘게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다가도 바쁜 숨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리듬이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강을 건너 가라하신 땅으로
사도행전을 마치고, 이번주부터 여호수아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무덤이 어딘지 아무도 모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며 그의 사명을 위임하였습니다. 모세와 함께 했던 긴 세월 동안에 많은 것을 습득하였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책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를 보좌하던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스라엘 자손 곧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서,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2).”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직접적인 사명을 위임하십니다. 그에게 주어진 책임은 요단 강을 건너서, 하나님께서 주는 땅을 가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경계를 넘는 이행의 과정입니다. 40년 광야에서 배회하던 옛 삶을 넘어서 새 삶으로 나아가는 과제입니다. 모세가 홍해 건너기를 통하여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무의식의 바다를 넘는 경계 넘기를 시행한 것처럼,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를 통하여 자신과 백성 전체의 전환을 시도해야하는 과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배없이, 다리도 없이 강을 건너는 일은 기꺼이 모험할 수 있는 용기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광야에서 늘 쳇바퀴처럼 돌던 이스라엘 백성을 진일보하도록, 삶의 이행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이는 바로 우리 안의 여호수아의 과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여호수아에게 부과된 과제는 강을 건너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땅도 아니고, 내가 바라고 고대하던 땅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주시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역으로 가서 그곳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여호수아 전체는 암묵적으로 땅의 정복보다 땅의 분배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갖고 싶어하는 땅을 내가 차지하는 것이 가나안 땅의 정복 역사가 아닙니다.
주어와 목적어가 바뀌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는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내가 차지하고 싶은 욕망의 땅을 향한 길이냐?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으로 갈 것인가?”라는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우리의 내면의 전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알고 지내는 한 정신과 선생님은 “가정과 일과 공부와 나 사이에서 헤매면서 가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라며 추석 덕담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이 많은 일들을 수행하며 자신의 길을 반추하는 것만으로 길을 여전히 잘 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으로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삶이 여호수아를 함께 읽어가며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면서 여호수아의 두려움과 낙담을 넘어서게 하십니다. 먼저 모세에게 말한대로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하시면서,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 큰강 유프라테스 강에서부터 서쪽 지중해까지 동서 남북의 모두 영토가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땅의 약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자원이 풍부하고 비옥한 곳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척박한 땅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거주해야하는 땅의 영역이 바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한 살만한 영역도 있지만, 척박하기 그지없는 불모의 땅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할 땅은 바로 우리 인생이 차지할 땅과 길과도 닮아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직접적으로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함께하시겠다는 5절의 말씀을 다시 9절에서도 반복합니다. 여호수아의 든든한 배경은 그의 가문도 그의 힘도, 오랜 세월 모세를 보필하던 지도자로서의 지식과 노하우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굳게 붙들라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지혜와 힘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든든한 반석 위에서 삶을 영유하는 자는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위기와 혼돈 속에서도 여전히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 인생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어떤 삶의 순간에서도 든든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두려움과 낙담
하나님은 왜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두 번이나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제 아무리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여호수아조차도 두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9)”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굳세고 용감하여라(6,7,9)”고 세 번이나 당부하십니다.
두려움과 낙담, 굳셈과 용기가 대비되는 표현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땅을 가야하고 전쟁도 치르면서 다가올 시간 앞에 서야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야기합니다. 그 두려움은 인간 본성 안에 지극히 당연한 본능적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불안을 가중시켜 옴짝달싹 못하게 앞으로 발을 딛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병이 됩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불안의 병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굳세지라고 주문합니다. ‘굳세라’는 ‘강해라(Be strong)’는 의미로 번역이 됩니다.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내적 외적으로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자아의 강인함은 두려움으로부터 몰려오는 모든 불안에도 당당히 길을 가게 합니다.
낙담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낙담은 사전에 보면, “바라거나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며 실망하고 맥이 풀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걸어가면서 낙담할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홀로 오롯이 백성들의 죄를 짊어져야할 때도 있고,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도 있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실망하고 낙담하는 문제에 직면해야 했을 것입니다.
주후 360년 경에 로마의 스키티아(Scythia)에서 태어난 존 카시안(John Cassian)은 여덟가지 악덕 중에 하나로 낙심을 지목합니다. 카시안은 낙담이 영혼을 갉아먹어서, 유익한 만남을 피하게 하고, 벗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고, 마음에 앙심과 태만함을 가득 채운다고 합니다.[엄성옥 옮김, 《필로칼리아 1》, 은성, p114, ,김기석목사 2012년 11월 11일 설교에서 재인용]
낙담은 바라던 기대가 좌절되고 실망하기 때문에 타인이나 과제로부터 원한과 무기력과 나태함을 자꾸만 소환시켜서 우리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낙담 대신에 용기를 내라고 합니다. 자신의 기를 끌어올리는 것, 자신의 내면의 힘을 불러일으키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두려움과 낙담을 넘어서 굳세고 용감하게 우리가 가야할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화이위조 - 가운데의 길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서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7-8).”
이 말씀은 얼핏 보면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말씀을 철저히 지키면, 네가 성공가도를 달릴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책을 공부하는 것은 그 말씀을 묵상하며 내면화해서 삶 속에서 구현하라는 의미입니다. 읽고 또 읽어도 이해함이 없다면 그것은 주문과도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말씀을 다른 이를 향한 적용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때로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이지만, 홍수에 마실 물이 없듯이 영혼의 목마름을 해갈 되지 못합니다. 때때로 말씀이 주는 울림조차도 설교인지 선동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문자적으로 다 지킬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것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선전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점으로 삼으라는 의미에 더 적합한 듯 보입니다. 그럴 때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치우치지 않음이 바로 가운데의 길일 것입니다. 이쪽이 아니면 저쪽의 길이 아니라 이쪽과 저쪽을 아우르는 가운데의 지향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말이 쉽지, 따르고 지향하기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라고 주문하시는 듯합니다. 모든 삶의 기준이 자본과 명예, 성공으로 가늠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점 삼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크게 용기를 내어야 하는 일입니다. 치우치지 않고 가는 길 또한 여간 쉽지 않습니다. 이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그것은 화이위조(化而爲鳥)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장자의 소요유의 1편에서 북쪽 깊은 바다에서 곤이라는 물고기가 크기에 몇 천리 되는 붕이라는 새로 변화될 때 가능합니다. 자신의 변화가능성, 잠재력을 실현하여 변화된 존재만이 그 가운데 길을 지향하며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이 힘겹고 어려워도 건너야 할 요단강이 있다면 넘어가야 합니다. 그 길에서 두려움과 낙담 대신에 굳세고 용감하게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신뢰로 중력의 무게를 견디며, 가라하신 땅으로 뚜벅뚜벅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가운데 길을 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