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나폴리, 통영의 관광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변화는 한때 어두컴컴하고 시끌벅적했던 뒷골목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한려수도, 충렬사, 남망산 조각공원 등으로 대표되던 기존의 관광 명소들이 보는 것에 그쳤다면 최근 통영의 뒷골목에서 생겨나고 있는 명소들은 직접 참여해서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더해준다.
통영 명소의 변화 중심에는 마을 벽화로 유명한 동피랑 마을이 있다. 하지만 동피랑 마을만 있는 게 아니다. 바로 건너편에 서피랑 마을과 강구안 뒷골목에서 또 다른 놀라운 변화의 움직임들이 진행되고 있다. 늦가을 서피랑 마을과 강구안의 뒷골목을 찾았다.
한때 집창촌 형성, 도심 오지 전락
'통영 21'·주민 손잡고 거리 디자인
칙칙한 골목·계단 화사한 색 입히고
마을 구석구석에 조각가 조형물
백석 詩·이중섭 작품·윤이상 악보…
강구안 뒷골목 '문화가 있는 풍경'
■색과 글이 돋보이는 서피랑 마을 철거 위기의 달동네, 동피랑 마을이 벽화마을로 탈바꿈해 국민적 명소가 되었다면 건너편에 위치한 서피랑 마을은 이제 막 밝은 곳으로 나가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는 상태다. 서피랑은 서쪽 끝에 있는 높은 비랑(비탈의 지역 사투리)이란 뜻. 서피랑은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곳이고,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배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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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피랑 마을의 99계단. |
서피랑 마을은 한때 윤락가였다. 일제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통영이 어업으로 번성하고, 전국에서 수많은 어선원들이 몰려들면서 항구 뒤편의 산비탈에 위치한 서피랑 쪽에 성매매 업소들이 생겨났다. 1970년대 호시절엔 80여 채의 가정집 형태로 된 집창촌이 형성됐다고 한다. 80년대 후반까지 명맥을 이어가다 지금은 '숨기고 싶은'사연만 간직한 채 그 자취를 감추었다. 지역 사회에서 외면 받고, 지역 주민들마저 떠나다보니 도심속 '후진 마을'이 돼 버렸다. 시내버스도 하루 4회만 통과할 정도로 찾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동피랑 벽화마을을 만들어 낸 통영시 행정협력단체인 '푸른 통영 21'이 지난해부터 지역 주민과 손잡고 밝고 활기찬 '서피랑 마을 만들기' 사업을 시작했다. 테마가 있는 99계단 길을 만들고, 마을 구석구석에 미술 조각가들의 조형물을 설치했다. 칙칙한 마을길과 골목, 계단에는 밝고 화사한 색깔을 입혔다. 낡고 빛바랜 마을길에 거리색채 디자인이 가미되면서 화사한 마을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동피랑의 주제가 벽화라면, 서피랑은 색과 글이 넘쳐나는 마을을 상징하도록 한다는 계획입니다. 서피랑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풀듯이 조형물을 찾아가서 보고, 느끼는 재미를 가지도록 하려고 합니다." 통영의 동피랑 벽화마을에 이어 서피랑 마을 만들기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푸른 통영 21'의 윤미숙(52)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윤 국장과 함께 서피랑 마을을 찾아가 봤다. 서피랑 마을은 통영시 명정동에 속해 있다. 마을 구경은 주민센터에서부터 시작된다. 노랗고 푸른 색깔을 두른 주민센터 건물이 이채롭다. "자, 지금부터 작품 찾기를 시작해 보죠. 첫 번째 작품을 찾아보세요." 머뭇거리는 기자에게 윤 국장이 주민센터 바로 옆에 서 있는 조각품을 가리켰다. '반가워요'라는 주제의 작품이다. 넓적한 나무 위에 걸터앉아 오른손을 들고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외부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서피랑 주민의 모습을 담고 있다. 두 번째 작품은 주민센터 건너편에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란 작품이다. 바다에 일하러 나간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모습을 나타낸 작품이다. 이어지는 작품은 물고기 등에 올라 탄 '서피랑 왕자'다. 물고기 비늘을 나타내는데 수많은 숟가락들이 사용된 게 눈길을 끈다. 왕자 옆에 앉아서 기념사진 찍기에 좋은 곳이다.
이 같은 조각품들은 500여 m구간의 충렬사 가는 길에 모두 10개가 설치돼 있다. 작품에 사용된 나무들은 폐선 해체 작업과정에서 나온 것들을 재활용한 것이라고 윤 국장은 설명했다. 99계단도 만날 수 있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99계단에는 계단마다 색깔을 달리하면서 번호가 매겨져 있다. 박경리 선생의 시를 비롯해 30여 편의 작품들이 소개돼 있다. 꽃잎 의자와 말뚝박이 의자, 엉덩이 의자 등의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마을 뒤 편 언덕배기에 서 있는 서포루에 오르면 마을 전체와 통영항 일원, 미륵도 등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강구안 뒷골목과 백석 시인 서피랑에서 항구 쪽으로 향하니 바로 강구안이다. 통영항의 중앙동 일원을 강구안으로 부른다. 항구가 육지로 들어온 형상이다. 개울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입구라는 뜻이란다. 통영에 오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곳이다. 닻을 내리고 줄지어 서 있는 어선들과 이순신 장군 광장, 고요한 호수 같은 바다 풍경이 인상적이다. 특히, 야경이 아름답다.
지난해부터 강구안 뒷골목에 색다른 볼거리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강구안의 뒷골목은 한때 부산의 서면이나 남포동 골목을 연상케 할 정도로 번잡했다. 어지럽고, 불법 주차 차량들로 붐비던 골목이 이야기와 풍경이 담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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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피랑 마을의 조형물 '물고기와 노는 아이' |
이 역시 '푸른 통영 21'이 기획하고 만들어가고 있다. 보도블록이 새롭게 깔리고, 미술 작가들이 참여해 만든 수제 가게 간판과 스토리가 있는 가게 소개 글, 꽃단장한 화단, 태양광 가로등, 쉼터 등이 들어섰다. 특히, 골목 벽 곳곳에 천재시인 백석 선생의 작품 20여 점들이 전시돼 눈길을 끈다. 또, 통영에서 2년가량 작품 활동을 한 화가 이중섭의 작품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를 형상화한 높이 4m의 조형물이 골목 입구에 설치됐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환경 조각가 그룹인 '아트 북 콜렉티브'가 만들었다고 한다.
골목 안에 들어서니 가게 간판들이 미술 작품처럼 예쁜 색과 글로 만들어져 인상적이다. 골목 벽에 걸려 있는 백석 시인의 작품들을 찾아가 읽는 재미가 있다. 백석 선생은 통영 출신 여인을 사랑해 통영과 관련한 4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1936년, 24세 때 백석은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통영 출신의 란(본명 박경련)이란 여인을 만나 마음을 뺏긴다. 서울에 살던 백석은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 몇 차례 통영을 방문했지만 매번 집 주변만 기웃거리다 돌아가곤 했다고 한다. 당시 그 여인을 보지 못한 서글픈 마음을 안고 충렬사 입구 돌계단에서 쓴 시가 '통영'이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 낭창하였습니다"란 내용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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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구안 뒷골목에 설치된 '윤이상과 자전거' |
강구안 뒷골목을 거닐다 보면 통영에서 가장 오래된 여관과 음식점도 만날 수 있다. 55년 된 대장간인 삼성공작소도 구경할 게 많다. 작곡가 윤이상의 가곡 '달무리' 악보를 자전거와 함께 형상화한 작품도 볼 만하다.뒷골목을 모두 돌아보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 3척과 조선 판옥선 1척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겠다.
글·사진=송대성 선임기자 sds@busan.com
TIP
■찾아가는 법 부산에서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거가대교를 이용하는 게 편하다.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2시간 정도. 거가대교를 지나 거제에서 58번 지방도를 타고 통영 방면으로 달린다. 58번 지방도에서 고현 쪽으로 우회전해 진입한 뒤 14번 국도를 이용해 통영 방면으로 향한다. 통영에 진입, 미늘 삼거리서 통영 해안로를 따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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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피랑 마을의 충렬사 가는 도로변. |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사상 서부시외버스터미널(1577-8301)을 이용하면 된다. 오전 6시 10분부터 20~30분 간격으로 오후 7시 40분까지 출발하는 직행버스를 이용한다. 요금은 1만 900원. 1시간 40분 소요. 통영종합버스터미널(1688-0017)에서 서피랑 마을까지는 661번 시내버스가 운행하지만 하루 4회 운행할 뿐이어서 다소 불편하다. 따라서 대부분의 통영 시내버스들이 정차하는 적십자병원에서 내려서 도보로 10분 정도 걷는 것이 좋다. 강구안은 중앙시장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해 통영의 여러 명소들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여행 문의: 푸른 통영 21 055-649-2263, 통영관광안내소 055-650-4681.
■먹을 곳 강구안 뒷골목과 도로 변에는 맛집들이 많다. 뒷골목에 위치한 이중섭 식당(055-645-4151)은 해물된장찌개와 멍게비빔밥, 물메기탕 등이 잘 팔린다. 볼락 무김치가 밑반찬으로 나온다.43년 된 새집 식당(055-645-5608)은 해물탕, 37년 된 풍년식당(055-645-5027)은 생선구이와 회,찌개 등으로 구성된 한정식을 주된 메뉴로 한다. 도로 변에는 오래된 충무김밥집들이 즐비하다.이른 아침시간, 복국과 시락국에 입맛이 당기면 인근의 서호(새벽)시장으로 가면 된다.
송대성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