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예수를 믿자(눅24:13-35)
2020.4.12 부활절,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제인확금(齊人攫金)”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제나라 사람이 금을 붙잡다’라는 뜻이다(齊: 나라이름 제, 人: 사람 인, 攫: 붙잡을 확, 金: 쇠 금). 이 말은 여씨춘추(呂氏春秋) 거유(去宥)편에 나오는 한 도둑의 어리석음을 비유한 말이다. 제나라에 탐욕스러운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시장에 나갔다가 금을 팔고 있는 상인을 발견했다. 탐욕에 눈이 뒤집힌 그 사람은 느닷없이 금을 한 움큼 쥐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못가서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포졸들이 그에게 대낮에게 사람들이 많은 시장 한 복판에서 금을 훔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 눈에는 금만 보였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소”
이 도둑은 욕심으로 인해 눈이 가려 있었다. 이처럼 무엇인가에 눈이 가려진 사람은 앞에 사람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앞에 장애물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사기를 당하고 이단에 속고 있으면서 속는 줄을 모른다.
오늘 본문에도 눈이 가려서 부활하신 주님이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했던 두 사람 나온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이름이 기록되지 않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6)
오늘 본문은 부활절 당일 오후에 그들이 엠마오 마을로 가던 중에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25리(10Km) 정도다.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대화하며 걸어갈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서 주님을 알지 보지 못했다. 여기에 기록된 눈이 가려졌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크라툰토’인데, 이 말은 ‘00에 눌려있다’, ‘00에 붙잡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들의 눈이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31절).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곧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눅24:31)
그렇다면 처음에는 왜 그들이 눈이 가리어져 있었고, 나중에는 어떻게 눈이 밝아질 수 있었을까? 바로 이 점이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부활절 이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안 밝아지고, 영적인 문제에 해답을 얻기 바란다.
먼저 우리는 21절 말씀에서 이처럼 이들이 눈이 가려지게 된 단서가 될 수 있는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는 말과 “바랐노라”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21)
바랐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기대했다는 말이다. “바랐노라”라는 말의 뉘앙스에서 그들의 실망과 좌절감이 느껴진다. 그들이 무엇을 그렇게 기대했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속량해 주기를 기대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속량할 자”는 말은 영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로마제국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실 분으로 기대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해방은커녕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다.
두 제자의 탄식같은 이 말을 자세히 보면 그들이 기대했던 예수님에 기준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생각, 바램, 욕심)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이들은 자기들이 기대했던 생각의 틀에 붙잡혀서(=눈이 가려서) 예수님이 옆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던 부활에 대한 약속들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인 제인확금(齊人攫金)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할 예수는, 내가 생각하는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는 예수여야 한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엠마오 마을로 가던 두 제자의 영적인 상태가 사실은 바로 이 시대 수많은 성도들의 문제점이고 영적인 상태이기도 하다. 목회를 하다 보면 두 제자의 탄식 같은 말들을 들을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는 ~~ 해야 한다”
“나는 예수가 나에게 어떠했기를 바랐는데”
“나는 예수를 믿으면 부자 되고, 치료될 줄 알았는데 왜?”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하나님은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가?”
“하나님은 나를 합격시켜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는데”
누구라도 이런 종류의 말들을 들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탄식처럼 정말 주님이 우리들 곁에 없으신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분명히 주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고(마28:20),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 주셨다(행2:1-4). 문제는 포기되지 않고 나 중심의 생각과 신념과 포기도지 않은 욕심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슬픔과 좌절감을 가져다 주고, 주님이 내 곁에 계셔도 못보게 된다. 지금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예수를 믿는가 하나님이 생각하는 예수를 믿고 있는가? 나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가 아니면 성경의 관점으로 나를 보는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의 눈이 열려질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내 스스로는 열지 못한다. 사람은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영안을 열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열린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신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 불완전한 것에서는 완전한 것이 나오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눈을 열어주시도록 나를 드릴 수는 있을 뿐이다. 31절을 보라.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눅24:31)
여기서 사용된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헬라어 성경 원문에는 수동태형이 쓰였다. 다시 말하면 두 제자가 스스로 힘으로 눈을 밝게 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열어 주셨다는 말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닫힌 눈을 열어 주셨고, 또 오늘 우리들의 눈을 열어 주시는가? 이 점은 이 시간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그에 대한 해답은 32절과 27절에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경(구약)을 풀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모든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할 때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을 가렸던 것들이 벗겨지고 영적인 침체에서 회복된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예수를 믿도록 힘쓰자. 성경 어느 부분을 읽든지, 듣든지, 묵상하든지 내 관점과 생각를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하자. 내 눈을 가리는 영적인 제인확금(齊人攫金)의 요소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예수님만 굳게 붙들자. 세상이 혼란스럽고 사람들의 음성이 나에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 올수록 더욱 십자가를 묵상하자. 자기 신념에 눈이 가린 사람과 맞대응하고 음성을 높이면 결국 자신까지 침체에 늪에 빠지기 쉽다. 만약 용서가 안 될 때는 나를 용서하신 주님의 용서를 생각하자. 그래야 가슴이 뜨거워지고, 영이 회복되고, 눈이 밝아진다. 오늘 부활절 아침에 주님이 우리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난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 그렇다. 예수님을 만나게 함으로서 인생의 방황을 끝내게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고, 방황하는 영혼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성도가 좋은 성도다. 우리 지역에 사시는 모든 분들은 우리교회에 오면 인생의 방황이 끝난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안흥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해서 감사한다. 앞으로도 더욱 예수님 때문에 더 행복한 우리 모두가 되자.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