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키코
주하림
테이블 위 케이크
케이크가 난방에 녹고 있다
동그란 어깨뼈를 드러낸 사촌 여자애들이 모여서 케이크를 먹는다
긴 흑발의 언니와 동생들
그만 먹자 키코, 크림은 몸에서 녹지 않아
왜 크림은 입에서 녹잖아 의자에 앉아서 먹자
여름에는 남자가 도망간다 멀쩡하게 같이 살던 남자가
그후로 의자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점점 좋은 의자를 모았고
언니는 의자를 쌓아놓고 의자 꼭대기에서 창을 바라보는 취미가 생겼다
그녀 표정은
빈방을 고통으로 채색하려는 듯
더운 곳에 가고 싶다
그리스, 덥고 인간의 환대로 가득한
언니의 의자 모으는 취미는 여름에도 가을에도 끝나질 않는다
남자가 또 도망간 뒤 이제는 취미 대신 아나키스트 땅 거래 집문서 공부를 시작했지
마지막 꿈꾸기와 더 나은 꿈 기억의 두 가지 빛이 섞인다
누군가 포크로 케이크 바닥을 긁는다
동그란 어깨뼈에 맺히는 땀
중학교는 다니지 말걸 파란 대문 뒤에서 옆 남고생 애들을 대주던 여자애와 오토바이를 타다 종아리 화상을 입던 애들뿐이었거든
잠들기 전까지 괴기한 생각
이제는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는 사촌들 그중 하나가 길바닥에서 발작하며 피거품을 뿜는다 간질이래 얘기 들었어?
블러드 문blood moon에 고백을 받았대
나는 너의 어느 쪽을 밀어도 만지고 싶은 미래
기억은 자기를 알아보는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대
하지만 천국에도 지옥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없었지
블러드 문이 뜬
바닷가
바닷가
천국이 지나간 자리
언니의 남자들은 언니 마음이 투사된 그림이야
키코, 그를 잠깐 사람으로 왔던 신이 쓴 글이라고 생각해
종아리 화상 때문에 졸업식 사진은 상반신뿐
잘려나간 하반신들이 걷고 있을
바닷가
끈적거리는 피의 해변
머리카락에 크림 닿는 것이 싫어 단발이 되었다 졸업식에 올 수 없는 부모와 누군가에게 일일이 실망할 기운도 없다 120페이지 종아리 화상이 벚꽃 잎처럼 보인다 비가 오기 시작
― 시집 『여름 키코』 (문학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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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림 / 1986년 전북 군산 출생. 서울에서 성장.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창작과비평》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과 『여름 키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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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키코」의 ‘키코’는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심연의 아침」에서 ‘나’ 또한 키코와 마찬가지로 “끔찍했던 일들”에 “끝장을 내자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과 다른 편에 선다. ‘나’는 여전히 “끔찍했던 일들”의 이후를 겪어내는 중이다. 그 일은 ‘나’를 “심연에 가라앉”게 만들지만, ‘나’는 ‘나’가 가라앉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나’ 는 심연에서 “내 힘으로” 떠오름으로써 어떻게든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피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결코 멍청이가 아니다!”라는 외침은 ‘나’를 심연에 가라앉히고 서서히 부패하게 만드는 외압을 뚫고 “목구멍 깊숙이 숨은 나”를 건져올리려는 힘에 의한 것이다. 시에서 ‘나’는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우스꽝스럽게 짚고 올라갈” “벽”으로 다가가는 일에서 물러서지 않기로 한다. 지나간 일과 내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짊어지기로 한다. 날로 희박해져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섭도록 정직한 방식으로.
_양경언, 시집 해설에서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Q1. 안녕하세요, 첫번째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이후 9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하셨는데요.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시를 쓴다고 말해도 제 시를 자세히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제 시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으리란 절망 속에 십 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어요. 그럼에도 어떤 날은 제 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메시지를 받거나 인터넷에서 다음 시집을 기다리고 있다는 글을 보기도 했어요. 시집을 묶으면서 제 시를 기다려준 그들을 떠올렸고 용기를 내어 이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기다려준 분들께 처음이자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Q2. 두번째 시집 『여름 키코』는 제목에서부터 첫번째 시집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해요. 이번 시집에서 첫번째 시집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사실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웃음) 다만 이제는 조금 더 제 색깔이 분명해지고 뚜렷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첫번째 시집에서는 무국적, 연극적 소재를 활용해 어둡고 이질적인 세계를 그렸어요. 존재의 충동이나 욕망을 인터뷰, 편지, 대화 형식 등으로 끌어와 표현하고자 했고요. 이번 시집에서는 조금 더 미니멀한 방식으로 그 안의 정서들을 확장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나이가 든 탓인지 (웃음) 화자들의 광기어린, 폭주하는 목소리가 첫번째 시집에서보다는 조금 조용해지지 않았나 싶어요. 첫번째 시집이 분열적인 화자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면 이번에는 그 목소리들을 통일하는 데 집중했어요. 그러면서 시적 에너지가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 장면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
Q3. 산뜻한 빛깔의 표지 뒷면에는 아이스크림이 새겨져 있어요. 제목뿐만 아니라 시어들도 많이 부드럽고 밝아진 듯하고요. 지난 시간 동안 시 외적으로도 변화가 있었을까요?
시를 쓰기 시작하고 십 년 동안은, 특히 등단 이후 몇 년간은 정말 악몽과 같았어요. 나를 온전히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죠. 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독자에게 외면받은 적도 있었고, 문단에서는 시 외적인 측면에서 평가받는 일이 잦았어요. 지치고 괴로웠죠. 그럴수록 내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거기에 불타 죽어가면서도 지금까지 써온 것들을 뛰어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했어요. 그 파토스가 제 이십대를 갉아먹었죠. 지금은 쓰는 것보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더 신경쓰고 있어요. 이제는 데카르트보다 데드리프트에 더 가까워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