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이러이러한 것을 할 수 있고, 배웠고, 완전히 익힌 사람에 대해서만
그가 이것을 체험 했다는 말이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것이 어리석게 들린다면, 당신은 여기서 봄의 개념이 변경되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고찰이 수학에서 어지러운 느낌을 쫓아내는 데 자주 필요하다.)
우리는 말하고 , 표현하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한 표현들의 생명에 대한 그림을 얻는다.
225.
이 자세가 망설이는 자세였음을 나는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그것이 하나의 자세이지 이 생물을 해부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기도 전에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내가 단지 시각적인 것에만 연관되어 있지 않은 이 개념을,
보이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할 수는 없을 거라는 점을 말할 뿐이지 않은가?
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망설이는 자세나 소심한 얼굴에 대한 순수한 시각적 개념을 지닐 수 잇지 않을까?
226.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개념을 확실히 정서적인 가치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오로지 지각된 구조를 기술하는 데만 사용될 수 있는
'장조(長調)'와 '단조(短調)의 개념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227.
예를 들어 얼굴의 윤곽을 그린 그림에 적용된 "슬픔"이라는 형용사는
타원 내 일단의 선들이 지니는 특징을 나타낸다.
그것은 사람에게 적용되었을 때(비록 연관성은 있지만)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는 슬픈 얼굴 표정이 슬픈 느낌과 비슷하다는 뜻은 아니다.!)
228.
또한 다음을 생각해보라: 나는 빨간색과 초록색을 볼 수만 잇고, 들을 수는 없다.
ㅡ그러나 슬픔의 경우에는, 내가 그것을 볼 수 있는 한 그것을 들을 수도 있다.
229.
"나는 애처로운 가락을 들었다"라는 표현을 한번 생각해보라!
그리고 이제 문제는 다음과 같다 :
"그는 그 애처로움을 듣는가?
230.
그리고 내가 "아니다. 그는 그것을 듣지 않으며, 오직 느낄 뿐이다"라고 대답한다면 ㅡ
ㅡ이로부터 우리는무엇을 얻는가?
실로 우리는 이런 '느낌'에 대한 감각기관조차 명시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 한다 :
"물론 나는 그것을 듣는다!" ㅡ
ㅡ 또 어떤 사람들은 : "나는 그것을 실제로 듣지 않는다."
그러나 개념적 차이들은 분명히 밝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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