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Cambodia)와 앙코르 왕조
캄보디아 전도(全圖) / 캄보디아 문장(紋章) / 국기(國旗)
◆ 캄보디아 개관(槪觀)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는 캄보디아는 동쪽으로는 베트남, 서쪽은 태국, 북쪽은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남지나해(南支那海)와 닿아있으며 전체 면적은 18만 평방km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두 배 정도이며 인구는 1천 6백만 정도이다.
인종은 크메르(Khmer)족 90%, 베트남인 5%, 기타 중국인 및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수도(首都)는 프놈펜(Phnom Penh)이다. 언어는 크메르어, 종교는 소승불교 95%로 명실상부 불교국가이다. 그러나 1인당 GDP 1,600달러(USD:2019)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중 하나이다.
국토의 70%가 평야지대이며 외곽의 국경지대는 비교적 낮은 산지로 라오스를 통과하며 흘러온 메콩강이 캄보디아 남부를 지나 남지나해로 흘러들면서 비옥한 메콩델타(삼각주)를 이루고 있다.
국토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톤레삽 호수가 있는데 건기에는 바다로 흘러들다가 우기에는 강물이 역류하여 호수가 평소의 3배 정도로 넓어진다고 하며 그때의 넓이는 서울 면적의 2배 정도나 된다고 하는데 어업을 생업으로 하는 수상가옥이 많이 있고 배로 된 학교와 교회, 관공서들이 호수 위에 떠 있다.
◆ 캄보디아 약사(略史)
캄보디아는 크메르(Khmer)족이 세운 크메르 왕조가 인근의 베트남, 미얀마, 태국과 힘겨루기를 하고 또 한족(中國)의 침입(제갈량의 맹획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도 견디어 내며 성쇠를 거듭한다.
앙코르왕조는 7세기 자야바르만 2세(Jayavarman II)에 의하여 ‘캄푸챠(Kampuchea)’란 이름으로 롤류오스(Roluos) 지역에 건국되며 당시 중국에서는 이 캄푸챠를 진랍(眞臘)이라고 불렀다.
AD 12, 수리야바르만 2세(Suryavarman II) 때 국토를 넓히고 지금의 앙코르와트(Angkor Wat)를 건설하게 되고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에 이르러 참파(Champa:베트남)의 침입을 막아내며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이때의 도시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고려) 전체인구가 250만 정도였다고 하니 앙코르 왕조의 번성함을 짐작할 만하다.
이때 타프롬(Ta Prohm:어머니에게 헌사), 프레아칸(Preah Khan:아버지에게 봉헌), 앙코르톰(Angkor Thom), 바이욘(Bayon) 등 아름다운 불교와 힌두교 사원들이 건립된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로 ‘도시’라는 의미이고, 톰(Thom)은 크메르어로 ‘크다’는 의미라고 한다.
15세기 중엽에 들어 앙코르 왕조의 쇠락과 주변국들이 강대화며 아유타야왕국(Ayutthaya)의 침공으로 앙코르왕국은 수도를 남쪽의 프놈펜으로 옮기게 된다.
아유타야는 시암(Siam/Thai) 족이 세운 국가로 현재의 태국에 있던 왕국이다.
아유타야의 왕 파라마라자(Paramaraja)는 수백 년 동안 앙코르 왕국으로부터 지배와 간섭을 받았던 원한으로 철저히 유린(蹂躪)하고 수많은 문화재, 신들의 무희(舞姬)인 압사라(Apsara), 수많은 대신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다. 앙코르를 손에 넣은 아유타야도 오래지 않아 이곳을 떠나고, 앙코르 왕조도 폐허가 된 앙코르로 수도를 옮길 능력이 없어서 버려진 도시가 된다.
이곳 앙코르(Ankor)는 밀림 속에 묻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도시가 되었는데 1860년 프랑스의 식물학자 앙리 무오(Albert Henry Mouhot)가 재발견하여 세계에 알려지기까지 400여 년 동안 밀림에 묻혀 유령의 도시, 폐허 도시로 인류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곳이다.
캄보디아는 근대화 과정에서 주변국들과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정권다툼을 빚게 된다. 1975년 폴 포트(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루주(Khmer Rouge)에 의하여 공산화되었다가 1979년 공산정권이 무너지기까지 어이없는 동족 대량살육이 이어져 킬링필드(Killing Fields)라는 치욕의 오명을 남기게 된다.
전 인구 750만 중 공산정권에 의하여 살해당하거나 행방불명된 수가 250만이었다고 하니 국민의 1/3이 희생된 셈이며 숙청 과정에서 지식인이 대상이 되었는데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는 사람, 안경을 쓴 사람, 심지어 양복을 입은 사람까지 무조건 인민재판-살해의 과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학살현장 / 해골 박물관 / 살인마 폴 포트
그로 인하여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 국토에 깔린 지뢰와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불구자가 발생하였고 지뢰박물관, 해골사원 등이 등장했으며, 풍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후진국 대열에서 허덕이고 있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