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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회화의 흐름
(1) 고대 회화
중국의 회화예술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5,000~6,000년 전 석기시대에 이미 도기(陶器)에 무늬나 간단한 동식물의 도안을 그려 넣었는데, 그것이 중국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회화예술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회화작품은 전국(戰國)시대 초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백화(帛畵)이다. 백화란 비단에 그려진 그림으로 장례의식에 사용되었으며 당시의 내세관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인물용봉도(人物龍鳳圖)」와 「인물어룡도(人物御龍圖)」는 선이 세련되고 형태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2,000여 년 전 중국 초기의 회화예술이 비교적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준다.
1972년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 마왕두이(馬王堆)에서 발굴된 한(漢)대 채색백화는 색채와 묘사가 생동적이며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신화적 내용이 표현되어 있다. 'T' 자형으로 상·중·하 3등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천상(天上)의 모습을 그렸고, 중간에는 묘지 주인의 생전 모습과 생활장면을 묘사했으며, 하단에는 물고기, 용, 거북이, 뱀 등이 있는 저승세계의 풍경을 묘사했다. 한대 초기에 유행하던 황로(黃老)사상과 유가(儒家)사상 및 후장(厚葬)풍속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인물용봉도」 - 비단, 묵필, 31.2 × 23.2㎝, 후난성 박물관 소장 - 1949년 후난성 창사시에서 출토된 백화이다. 전국시대 말기 작품으로, 최초의 백화로 알려져 있다. 두 손을 합장하며 기도를 올리는 모습의 여성 주위로 용과 봉황이 맴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회화가 종교나 정치 이념 및 철학을 설명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런 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회화예술로서 개인의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는 그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오늘날 회화 개념의 작품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위대한 화가 고개지(顧愷之, 348~409)가 등장하였다.
그는 그림 외에도 회화이론서인 『화평(畵評)』,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 등을 통해 체계적인 회화이론을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인 「여사잠도(女史箴圖)」는 비단 바탕에 엷은 채색으로 그린 그림으로 담담하면서도 유연한 선의 윤곽과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궁중의 사녀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그린 이 작품은 화장하는 여인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치게 구도를 잡은 솜씨가 뛰어나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당대 모사본으로, 1900년 의화단사건 당시 영국으로 반출되어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개지 「여사잠도」 부분 - 비단, 채색, 24.8 × 348.2㎝, 당대 모사본, 대영박물관 소장 - 동진(東晉) 때 고개지의 작품으로 원본은 이미 소실되고 모사본만 남아 있다.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한 폭의 동일 작품이 있으나 이는 남송 시기 모사본이며,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당대 모사본이 예술적으로 진본에 더 가깝다.
(2) 수당(隋唐)대 회화
남북조시대와 수대를 거쳐 더욱 계승 발전한 회화예술은 당대 이르러 중국회화의 전형(典型)을 이룩하였다. 귀족문화를 중심으로 도석(道釋)1) 인물화나 귀족의 초상이나 생활을 묘사한 그림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불교 회화에서도 더욱 성숙한 양상을 보이며 석굴 벽화가 크게 부흥하였다.
당 초기에는 정치적 색채가 강하여 작가의 개성을 표출하기 보다 궁정의 요구에 부합하는 회화 창작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 대표적 화가로 염입본(閻立本, 601~673)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당 태종(太宗)의 총애를 받은 궁정화가였으며, 인물화와 정치 색채를 띤 역사화에 능했다. 대표작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에서는 삼국시대에서 위진시대까지 역사적으로 알려진 13명의 제왕과 시종들의 모습을 차례로 형상화하였다.
당 중기에는 세밀하고 정교한 회화 기법이 웅장한 풍으로 변화되었고, 인물과 불상 위주이던 회화의 소재도 생활주변의 모든 것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외래 화풍이 전래되어 화단에 새로운 화풍이 가세하였다. 오도자(吳道子, 680~759)는 힘 있는 필법으로 수묵화의 시조가 되는 '백묘(白描) 기법'을 사용한 화가이다. 백묘 기법은 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선만으로 그리는 화법으로, 이후 북송의 이공린(李公麟)에 와서 완성된다.
염입본 「역대제왕도」 부분 - 비단, 채색, 51.3 × 531㎝, 보스턴미술관 소장 - 원본은 소실되고 현재 볼 수 있는 것은 후대의 모사본이다. 위 그림은 진나라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을 그린 부분이다.
한편, 남북조시대에 태동한 산수화가 이 시기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하여 이후 중국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사훈(李思訓, 651~716)은 귀족출신 화가로 청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흰색과 금색을 섞어 썼다고 해서 그의 그림을 청록산수(靑綠山水) 또는 금벽산수(金碧山水)라 한다.
왕유(王維, 701~761)는 시문을 겸비한 승려 화가로, 이사훈이 산수화에 색채를 넣은 공필화법을 확립했다면 왕유는 먹의 번짐 효과를 활용한 수묵선염법(水墨渲染法)을 기본으로 하는 사의 화법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은 바로 왕유의 그림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이후 명대 회화를 특징짓는 북종산수화와 남종문인화의 시조이기도 하다. 당 말기에는 안녹산의 난 등 정치적, 정세적 불안 속에서도 회화의 감상층이 대중화되고 민간회화의 저변이 확대되었다.
(3) 송(宋)대 회화
송대에는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도시가 생겨나고 시민계층이 등장하였다. 이에 따라 그림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직업화가가 활약하였고, 사대부계층의 회화가 발전하여 중국회화사상 가장 풍성한 작품들을 남겼다. 송대의회화는 기본적으로 궁정회화, 사대부회화, 민간회화로 분류된다.
궁정화가의 전성시대
'육조의 서(書), 당의 시(詩), 송의 화(畵)'라는 말이 있듯이 송대는 중국회화가 만개한 시기이다. 문학과 예술을 장려하는 시대적 분위기는 궁정에서부터 회화를 장려하기에 이르렀다. 오대(五代) 시기의 유명한 화가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관장하는 화원(畵院)인 한림도화원(翰林圖畵院)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화가들을 지원하였다. 송대의 화원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원으로 지칭되며 화풍을 주도하였다.
북송의 휘종(徽宗)은 황제의 신분이었지만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그림을 장려하고, 태학(太學)의 시험방법을 원용하여 전국적으로 화가를 모집하였다. 화원을 통한 인재 발굴은 남송에서도 계속되어 남송을 대표하는 화가 이당(李唐)·유송년(劉松年)·마원(馬遠)·하규(夏珪)등이 모두 화원출신이었다.
휘종 「부용금계도(芙蓉錦鷄圖)」 - 비단, 채색, 81.5 × 53.6㎝,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 화조도에 뛰어났던 휘종은 화려하고 섬세한 필치로 공필화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그림은 화사한 부용의 가지에 앉아 있는 오색 찬란한 금계와 나비가 과장적이리 만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그의 회화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곽희 「조춘도」 - 비단, 수묵, 158.3 × 108.1㎝,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북방산수화와 강남산수화
송대의 산수화는 기법에 있어서 한층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곽희(郭熙, 1023~1085?)는 자신의 화론서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삼원(三遠)'의 이론을 정립했다. 곽희의 삼원이란 고원(高遠), 심원(深遠), 평원(平遠)을 말한다. 고원은 높고 험한 산악의 기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 아래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는 방법이고, 심원은 산악의 깊은 형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의 앞에서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그 뒤편을 넘겨보듯 그리는 방법이며, 평원은 평탄하고 광활한 공간감을 표현하기 위해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내다보는 시선으로 그리는 방법이다. 이로써 화폭에서 공간적 기법이 한층 세련되어졌다. 이렇게 하나의 화폭속에 삼원법을 적용한 그의 그림은 장엄한 산수의 모습을 빠짐없이 보여준다.
더불어 이 시기의 산수화에는 작가들이 장기로 하는 준법(皴法)을 내세움에 따라 이후 중국 산수화의 가장 특징적인 화풍을 이루어갔다. 회화의 기법과 사상이 한층 발전한 이 시기의 화가들은 산수화에서 산이나 바위를 묘사할 때 각각의 자연풍토에 적합한 회화 상의 준법을 창안해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마치 삼베를 훑어 놓은 듯한 부드러운 선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기법으로 강남의 산수를 묘사한 동원(董源)의 피마준(披麻皴), 산과 바위의 입체감과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묘사한 이사훈의 부벽준(斧劈皴), 붓끝을 모아 예리하게 창을 쓰듯 묘사한 범관의 우점준(雨點皴), 구름을 뭉쳐 놓은 것처럼 둥글둥글 말리는 듯한 필선을 중복시켜 바위나 산을 표현해내는 곽희의 권운준(卷雲皴), 그리고 붓을 옆으로 뉘어서 횡으로 쌀 모양의 점을 찍는 미불(米芾)·미우인(米友仁) 부자의 미점준(米點皴) 등 숱한 준법이 개발되어 중국회화의 묘사와 표현을 진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북방 산수화에는 험준한 산의 웅장한 기세가 화폭에 잘 담겨 있다. 범관의 「계산행려도」, 곽희의 「조춘도(早春圖)」가 이러한 북방 산수화를 대표한다. 이에 반해 강남 산수화는 강남의 부드러운 산세와 고요하고 풍요로운 정경을 서정적인 정취로 담아내고 있다. 강남 산수화의 대표 작품으로는 동원의 「소상도(潇湘圖)」, 거연(巨然)의 「추산문도(秋山問道)」를 꼽을 수 있다.
문인화의 발흥
문인화는 문사들이 취미와 수양의 방편으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뛰어난 기교를 바탕으로 황제의 명에 따라 그림을 그리던 화풍은 당대 왕유에 이르러 변화를 맞게 된다. 시인이었던 왕유는 직업화가와 달리 취미로서 비교적 자유로운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후 문인들의 그림은 송대의 소동파와 문동(文同) 등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소동파는 문인화를 '사대부화(士大夫畵)'라고 구체적으로 정의하였고, 명대의 동기창(董其昌)은 '문인화(文人之畵)'라는 하나의 장르로 확립하였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서 시, 서, 화에 정통하였고, 또한 직업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회화의 기교를 중시하지 않았다. 색채를 사용하지 않고 수묵으로만 그리는 것을 즐겼다.
송대의 소동파, 황정견(黃庭堅), 문동, 미불, 미우인 등 수많은 문사들은 뛰어난 그림 솜씨와 함께 문인화에 대한 이론을 다양하게 제기하였다. 소동파가 문동과 나눈 그림에 관한 글에서 피력한 '대나무를 그리기 전에 마음속에 오롯이 대나무가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라는 '성죽재흉(成竹在胸)'은 문인화에 대한 문사들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북송 화원화가 출신의 장택단(張擇端, 1085~1145)의 작품으로 중국 풍속화의 대명사로 꼽힌다. 청명절(4월 5일) 전후 당시의 수도 변경[汴京,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시(開封市)]의 번화한 풍경을 세밀하며 사실적으로 그려내었다. 길이 5m가 넘는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입부는 청명절 무렵, 변경 교외의 한가한 봄의 풍경과 정취를 표현하였고, 중간 부분은 당시 수로를 통해 상업이 번성하였던 변경의 활기찬 나루의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마지막 부분에는 화려하고 복잡한 시내의 찻집, 주점, 각종 상점과 사원, 공관 등 풍물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사회풍속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장택단 「청명상하도」 부분 - 비단, 채색, 24.8 × 528.7㎝,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4) 원(元)대 회화
송 멸망 후 들어선 원 왕조는 몽골족인 이민족이 세운 나라로, 사회적으로 몽골족과 한족의 갈등, 남북 문화의 대립, 문인과 귀족 계급의 모순이 만연한 시대였다. 원대의 회화는 일반적으로 복고의 기치 아래 기운(氣韻)을 중시하고 격률(格律, 형식)을 가볍게 여기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평범하고 담백하며 자연스럽고 진실함'을 강조하는 '평담천진(平淡天眞)'이 원대 회화가 추구하는 이상이었다.
원대 문인화는 송·금 사대부의 회화를 계승하였다. 문인화는 특수한 사회 계층의 산물이므로 원대 문인화 역시 당시 시대 배경 및 사회적 분위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조맹부(趙孟頫, 1254~1322)와 전선(錢選)은 문인화의 변화를 추구한 화가로, '사대부의 기상'을 그림 속에 반영할 것을 요구하며 개성과 창의적 예술 경지를 개척하여 중국회화의 대표적인 장르로서의 문인화를 발전시켰다. 조맹부의 「인기도(人騎圖)」에서는 화가의 특수한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어 이민족 왕조의 관료로 살아가는 한족 지식인의 훈고학적 학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밖에 황공망(黃公望, 1269~1358)·오진(吳鎭)·예찬(倪瓚)·왕몽(王蒙)은 원말사대가(四大家)로서, 이민족의 지배하에서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도인이나 은사(隱士)가 되어 이상과 울분을 시와 그림에 의지하였다. 중국 10대 명화로 꼽히는 황공망의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저장성의 부춘강과 부춘산을 배경으로 한 수묵산수화이다. 황공망이 72세 때 무용(無用) 스님을 위해 그리기 시작해 3~4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으로 불에 일부가 타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앞부분은 저장성 박물관에, 비교적 긴 뒷부분은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분리 소장되어 있다. 2011년 6월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서 교류전이 열리며 '양안 화합'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황공망 「부춘산거도」 부분 - 종이, 채색, 33 × 636.9㎝,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5) 명(明)대 회화
원이 멸망하고 다시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건국되자, 문인들의 은일적인 삶의 태도도 바뀌었다. 회화 또한 고요한 산수를 다루는 화풍에서 벗어나, 화가들은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제재, 즉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가 성행하였고, 문인화의 매화, 난, 대나무 및 잡화(雜畵)도 유행하였다. 명대 회화는 창조적인 회화 활동보다는 전대의 화풍을 모방 계승하는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명대 초기에는 궁정회화와 절파가 남송의 화풍을 계승하며 화단을 이끌었고, 중기에 이르면 쑤저우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오파가 출현하는데, 이들은 송원 시기 문인화의 전통을 계승하여 화단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명 말기에는 정치적 혼란과 명청 교체기라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형식주의와 전형주의를 부정하는 개성주의 화풍이 출현했다. 서위(徐渭)와 명말 승려화가로 대표 되는 개성파 화가들이 등장하면서 짧지만 활기를 띠었다.
절파
절파(浙派)는 대진(戴震, 1389~1462)을 중심으로 한 저장(浙江) 지역의 화파를 말한다. 대진은 궁정화가로 활동했으나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리며 직업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절파는 남송의 마원과 하규를 계승하여 당시 궁정화파와 쌍벽을 이루어 화단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산수화는 부벽준을 사용하여 붓의 흔적이 명확하게 드러나며, 화폭을 뒤덮을 정도의 구름과 안개를 배치하여 풍부한 질감을 살려 그린 것이 특색이다. 대진 이후 절파는 오위(吳偉)와 왕악(王諤)에게 계승되어 발전하였지만, 후기에 이르러 과장된 기교를 좇고 무절제하게 수묵을 이용함으로써 그림의 함축성이 사라지게 되었다. 명대 중엽에 이르면 오파가 이들을 대신하게 된다.
오파
오파(吳派) 쑤저우(蘇州)의 옛 지명인 '오(吳)'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을 통칭하며, 절파에 대립되는 문인 남종화파이다. 선덕(宣德, 1426~1435) 연간에 쑤저우의 심주(沈周, 1427~1509)가 출현함으로써 원말 왕몽 이후 침체하였던 문인화가 다시 전성기를 구가한다. 자연풍경이 아름다운 쑤저우는 원대 이래로 많은 화가들이 활동하며 문인화의 기반을 이루었던 곳으로, 특히 심주와 더불어 그의 제자인 문징명(文徵明, 1470~1559)과 당인(唐寅, 1470~1509)으로 인해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명의 사대가로 일컬어지는 심주·문징명·당인·구영(仇英)은 모두 오파와 관련이 있다. 원 사대가로부터 영향을 받은 심주는 산수화는 물론이고 인물화와 화조화에도 뛰어났으며, 대담한 필치와 간결한 구성이 두드러졌다. 오파가 심주에 의해 창시되었다면 화단에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문징명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많은 제자를 길러 내며 참신하면서도 근대적인 채색의 문인화를 남겼다. 구영은 치밀하고 정확한 필법과 농염한 채색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당인은 초기 문징명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이당과 곽희의 화풍을 배워 청아하고 웅장한 화풍을 이어갔다.
동기창(董其昌) 「봉경방고도(崶涇訪古圖)」 - 종이, 수묵, 80 × 29.8㎝,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동기창의 남북이종론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은 17세기 동기창이 남종과 북종으로 나뉜 불교 선종에 비유해 산수화의 유파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이분화한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북종화는 직업화가들이 외면적 형사(形似)에 치중하여 그린 기교적, 장식적인 그림을 말하며, 남종화는 북종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고, 서정적이며 사의적인 측면을 중시해서 그린 품격 높은 그림을 말한다.
즉, '문인화인 남종화가 직업화가인 화원이 그린 북종화보다 훨씬 뛰어나고 동양미학의 본질을 갖고 있다.'라는 남종화 우위론이라 할 수 있다. 동기창은 당나라의 문인화가 왕유를 남종화의 시조로 보고, 그 전통이 오대의 동원과 거연, 북송의 미불을 거쳐 원말의 사대가와 명대의 오파에게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그가 주장한 남북이종론은 이후 300년간 문인화 창작의 지침으로 작용하였다.
서위와 명말의 승려 화가
시와 서법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서위(徐渭, 1521~1593)는 회화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독창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여타의 화가와 달리 묵을 대범하게 사용하여 묵을 뿌리는 기법으로 대나무, 연잎, 포도 등 꽃과 식물의 제재를 단숨에 그리며 자신의 거친 성정과 병적인 광기를 개성적으로 화폭에 쏟아냈다. 한편, 명 말에 들어서면서 이민족에 나라를 빼앗긴 울분 속에 승려가 되어 은거하며 그림에 몰두하는 '승려 화가'들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인물이 '명말사승(明末四僧)'이라 불리는 팔대산인(八大山人, 1624~1703), 석도(石濤, 1630~1724), 점강(漸江), 석계(石谿)이다. 그중에서도 명 왕실의 후예였던 팔대산인과 석도의 화풍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팔대산인의 화풍은 매우 간결하여 붓 하나로 물고기와 새등을 특이한 형상으로 그려내었다. 석도의 그림은 묵을 쓰는 방식에서 서위와 닮은 면이 있지만, 공백이 많은 특유의 선화(禪畵, 명상을 강조하는 선종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화파)가 특징적이다. 특히 그는 황산(黃山)에 오래 기거하며 산의 정경과 바위, 노송(老松), 운해(雲海)를 즐겨 그렸다.
서위 「묵포도도(墨葡萄圖)」 - 종이, 수묵, 116.4 × 64.3㎝,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팔대산인 「안만첩(安晩帖), 성난 물고기」 - 종이, 수묵, 31.8 × 27.9㎝, 교토 천옥박고관 소장 - 성난 표정의 물고기를 통해 작가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만주족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였다.
(6) 청(淸)대 회화
청대 회화는 당시 정치·경제·국제 정세 등의 여러 가지 영향 아래 송·원·명의 회화 전통을 계승하여 문인화, 궁정회화 및 민간의 연화(年畵)와 판화 방면에서 새로운 특징을 드러내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더불어 명대에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여러 전도사들이 중국에 들어오며 서양회화의 기법과 화풍을 전파시키기도 하였다.
청 초 문인화의 창작기법은 모두 명말 동기창의 화풍을 계승하였다. '사왕오운(四王吳惲)'이라는 문인화가들이 당시 화단을 이끌었는데, 왕시민(王時敏)·왕감(王鑑)·왕휘(王翬)·왕원기(王原祁)의 '사왕'과 오력(吳歷)·운수평(惲壽平)의 '오운'은 청초 육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들은 오파의 전통적 남종화를 이어받아 청대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울러 이들 '정통화파'와 구분되는 '개성화파'는 명말 나라를 잃고 은거한 팔대산인, 석도 등의 개성적인 화풍에 영향을 받아 청대에도 일정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청 중엽에 이르면 사회경제의 발전에 따라 황제들의 지원으로 궁정회화가 더욱 흥성하였고, 특히 양주(楊州)를 중심으로 '양주팔괴(揚州八怪)'라는 문인화파가 등장하여 혁신적인 문인화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청 말에는 근대적 도시로 부흥하는 상하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해상화파(海上畵派)와 혁신적 화풍으로 중국회화의 면모를 새롭게 한 광저우의 영남화파(嶺南畵派)가 점차 영향력 있는 화파로 부상하게 된다. 해상화파와 영남화파는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하며 근대회화와 현대회화를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오창석 「도석도(桃石圖)」 - 종이, 수묵채색, 180 × 96㎝, 상하이 박물관 소장 - 해상화파에 속하는 오창석은 서법, 회화, 전각 모든 방면에서 뛰어났다. 그의 화조도는 생기발랄한 특징을 지니며 묵을 중심으로 선명한 채색을 잘 배합하였다.
양주팔괴
건륭 연간에 양주는 대운하의 요충지이자,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소금 상인과 섬유 상인들이 미술 활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일시에 많은 화가들이 양주로 몰려들었다. 이런 까닭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화풍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바로 '양주팔괴'이다.
팔괴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이론이 분분하나 대체로 정섭(鄭燮), 이선(李鱓), 금농(金農), 나빙(羅聘), 이방응(李方膺), 황신(黃愼), 고상(高翔), 왕사신(汪士愼)에 화암(華嵒), 민정(閔貞), 고봉한(高鳳翰)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이들은 양주에서 그림을 팔아 생활하였지만,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들과는 달리 문학적 교양이 높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들의 화풍은 가깝게는 명말 석도와 팔대산인의 영향을 받았고, 멀게는 명 중기의 심주나 서위와도 연결되어 있다.
해상화파
19세기 중엽 아편전쟁 이후 무역항과 상업도시로 새롭게 번성한 상하이에 화가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해상화파'를 형성하였다. 해상화파 화가로는 '삼임(三任)'으로 대표되는 임웅(任熊)·임훈(任熏) 형제와 임이(任頤, 1840~1895) 그리고 임이의 제자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을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평민 출신으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삼았다. 따라서 이들의 화풍은 기존의 문인화에 민간화풍을 흡수한 아속(雅俗)이 공존하는 예술적 특징을 띠고 있다. 이밖에 조지겸(趙之謙)·허곡(虛谷)·포화(蒲華) 등도 해상화파의 화풍을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조지겸은 '금석파(金石派)'2)의 장점을 흡수하여 회화와 서법 및 전각 등의 장르를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오창석과 치바이스(齊白石)에게 영향을 주며 근대적 화풍으로의 변화를 이끌었다.
(7) 근현대 회화
중국의 회화는 현대에 접어들어 서양회화가 유입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데, 중국의 전통 회화를 계승한 중국회화와 서양회화로 크게 양분되어 발전을 지속하였다. 서구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중국의 젊은 화가들이 서양의 화풍을 소개함에 따라 서양회화의 기법이 중국회화에 도입되고 미술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비교적 일찍 유학에 나섰던 리수둥(李叔洞), 쉬페이훙, 린펑민(林風眠), 류하이수(劉海粟) 등은 서구의 미술을 중국에 소개하는데 힘을 쏟았던 화가들이다. 동양 화풍과 서양 화풍의 만남은 어느 한 쪽의 예술을 위축시키기보다는 서로의 장점을 흡수하였다. 수묵에 기초한 전통적인 중국회화는 전통을 계승해 가면서도 서양회화의 기법을 받아들여 한층 다양한 양식을 선보이며 발전하고 있다.
치바이스(1864~1957)
치바이스는 개성파 화가인 서위, 석도, 양주팔괴, 오창석 등의 화풍을 계승하였다. 그는 화조화에서 붉은 색채의 꽃과 선명한 먹의 잎사귀를 기본 구도로 하는 '홍화묵엽(红花墨叶)' 일파를 이루며, 오창석과 더불어 '남오북제(南吳北齊)'라 불리었다. 특히 그의 회화는 중국 민간예술의 소박한 풍격과 전통적 문인화의 화풍이 어우러져 독보적인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전각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이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고, 80세 이후로는 새우를 소재로 한 그림에 몰두하였다. 1953년 '인민예술가(人民藝術家)'의 칭호를 받으며 중국회화의 대부로 군림하였다.
쉬페이훙(1895~1953)
쉬페이훙은 상하이 푸단(復旦)대학교 프랑스어과에 들어가 고학으로 학업을 이어가다가, 일본과 프랑스에 유학하며 서양회화를 배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쉬페이훙은 중국과 서양의 미술 특징을 융합하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유화와 소묘에 있어서 중국의 전통적 조형기법을 흡수하는 동시에 서양회화의 소묘법을 혼용하였다. 또한 중국 현대예술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후학을 발굴하는 데 힘을 쏟아 국민 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말'을 즐겨 그렸는데, 그의 말 그림은 중국인들에게는 생동하는 삶의 정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펑쯔카이(豊子愷, 1898~1975)
펑쯔카이는 중국 만화(漫畵) 화풍의 개척자로, '만화'라는 명칭도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화풍은 매우 담백하며 철리적인데, 서양회화의 투시 원리와 중국의 붓과 먹의 기법을 응용하여 신선하고 기발한 화풍을 개발하였다. 그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소재들을 재기 발랄하게 표현하여 소박하면서 대중적인 가치를 형상화하였다. 또한, 서화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은 만화를 심미적 세계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다첸(張大千, 1899~1983)
'국화(國畵)대사'라고 불리는 장다첸은 중국의 전통 화법을 두루 학습하여 전통 화법의 바탕 위에 서구의 추상화를 도입, 독보적인 중국회화의 경지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이자 거작인 「장강만리도(長江萬里圖)」는 먹을 화폭전체에 퍼지게 하는 중국 전통회화의 발묵(潑墨)법과 색을 입힌 독창적인 기법으로 완성되었다. 현대 중국회화의 가치를 세계에 알린 개척자로서, 1949년이후 대륙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돌며 자신의 미술 세계를 전파하였다.
장샤오강(張曉剛, 1958~ )
장샤오강은 왕광이(王廣義), 웨민쥔(岳敏君), 팡리쥔(方立鈞) 등과 함께 중국 당대 미술을 주도하고 있는 화가로 중국 신미술운동의 주역이다. 이들은 톈안먼(天安門) 사건을 통해 목격한 사회 현실과 위안밍위안(圓明園) 사태3)에서 경험한 정치적 탄압을 바탕으로 한층 성숙해진 예술적 기량을 살려 미학적 지평을 확대하였다. 장샤오강은 가족과 혈연을 작품의 주요 제재로 삼는데, 그가 표현하는 고요하고 정지된 인물 형상은 격동의 시대를 겪어낸 중국인과 중국 사회의 자화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대표 작품으로 「창세편 : 한 공화국의 탄생 2호(創世編 : 一個共和國的誕生二號)」, 「대가족(大家庭)」 시리즈, 「망각과 기억(失意與記憶)」 등이 있다.
각주
1) 도석(道釋) : 도교와 불교를 아울러 이르는 말. 도석화는 동양화에서 신선이나 부처, 고승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2) 금석파(金石派) : '금석학'은 고고학의 하나로, 전대의 청동기와 비석, 특히 그 위에 새겨진 문자가 주된 연구대상이다. 광의의 범주로 죽간, 갑골, 옥기, 자기, 명기 등 일반 문물에 새겨진 문자들도 포함한다. 청대에는 고증학의 영향으로 금석학이 더욱 성행하였다. 금석파는 금석학파를 말한다.
3) 위안밍위안(圓明園) 사태 : 톈안먼 사건 이후 베이징 외곽 위안밍위안 지역의 화가를 중심으로 한 반체제집단을 1996년 중국당국이 강제 해산한 사건을 일컫는다. 이후 그들 중에는 외국으로 망명하거나 일부는 쑹좡(宋莊) 예술지구로 옮겨 새로운 예술 작업에 몰두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