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마 고통에 반응하는 자유인일지도 몰라요.(자유인의 의미 2017.12.29)
귀농을 회고하면서 맨처음 떠오른 기억은 부산 대청동 카톨릭 센터에서 훔쳐본 광주사태의 모습이었읍니다.(닭들의 트라우마 2017.11.15)
6.25 전쟁중에 태어나서 생전에 다시 전쟁을 목격하였읍니다.
그동안 항상 함량 부족이던 저는 공무원,학생, 회사원등의 직업을 轉轉하였읍니다.
나의 인생 중반부 내가 상인이었을때 큰 교통사고를 만났읍니다.
조끔 의식이 돌아온 후는 과거를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그당시 기억나는 것은 담당 의사가 回診올 때마다 묻는 것이 `여기가 어딘가?'하는 질문이었읍니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기억할 수 없었읍니다.
사고당시 세계적 큰 사건은 일본 고베 지진이었는데 건물이 무너져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일본 고베일 것 같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소심하고 예의바른 저는 대답을 잘못할까 두려워 `혹씨 여기가 고베가 아닌가요?'하고 대답했읍니다.
그당시 나의 병상을 지켜준 카톨릭신앙의 멘토인 K바오로는 "아니다. 여기는 오사까다"라고 하며 용기를 복돋아주었읍니다.
그 K바오로는 사고후 생똥을 싼 나의 뒤처리 까지를 해주어 정말 받기 힘든 위로를 제가 받았읍니다.
나의 사고후 얼마 안되어 K바오로는 아들사고로 학교를 일찍 조기 명퇴하고 힘들게 생활하다 우리보다 일찍 하느님 곁으로 갔지요.
그 똑똑한 K바오로를 그동안 제가 멀리 했읍니다.
그에게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기도 했거니와 그의 힘든 모습이 내가 보기 싫었기 때문입니다.(선택지의 소멸 2017.11.28)
그외 여러가지 힘든 상황은 자연히 귀농쪽으로 생각을 모우게 하는 동기가 되었읍니다.
귀농학교 학생이 되다 (3)
1997년 서울 귀농 1기가 개설된 직후 저는 귀농에 관해 전국에서 관심을 보여준 여러 사람중에 한사람이었읍니다.
부산 귀농 1기전에 관심을 표명한 몇몇 친구들이 귀농 소모임을 만들었죠.
1기 이종원님, 부산 생협 생산자 김나야님, 자동차 시트를 만들었던 김상윤님(?)이 생각납니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시고 있는 이종원님은 조직이 미완성이었을때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읍니다.
부산생협 생산자로서 생을 마감한 김나야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친구였어요.
당시 학교는 환경연합의 지원을 많이 받았는데 그당시의 작은 인연은 오늘의 장병윤님과도 연결되어 있읍니다.
자동차 시트를 제조했던 김상윤님(?)은 초기 귀농학교의 모습이 브레이크없는 철마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면서 조직을 떠나기도 했읍니다.
귀농학교 개설후 동문회가 주축이 되어 운동을 이끌면서 못난 얼굴만 빌려준 김형규, 서석태 사무국장, 장희준님, 김동건님이 생각납니다.
특히 생각나는 동지는 서석태였어요.
서석태가 앞서나갈 때 그당시에는 주춤하며 따라가는 `의리'라는 의식도 어느정도 있었읍니다.
뒤에 환경연합 공동대표 였던 김희욱님도 빠질 수 없는 동지였읍니다.
그분은 사회운동의 리더가 가져야 할 덕목을 몸소 보여주셨읍니다.
나의 귀농에 관한 모든 생각의 단초였던 이병철 본부장님은 저에게 이데올로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었읍니다.
아마도 초기의 자료는 환경연합에 많이 남아있을거에요.
만약 지워지지 않았다면 귀농학교 자료에도 물론 많이 남아 있을거예요.
첫댓글 기억의 소중함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