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여강길(5코스 황학산길)
(2021년 3월 27일, 여주역∼명성황후생가)
瓦也 정유순
오늘은 여주 여강길 제2코스를 걸을 계획을 하고 집을 나섰으나, 오랜만에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는 기상예보(氣象豫報)가 있어서 조금 쉬운 길인 제5코스(황학산길)와 제6코스(왕터쌀길)로 일정을 변경한다. 경기도 성남시 판교역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는 경강선 열차로 여주역에 내려 시내버스로 가서 먼저 명성황후 생가를 둘러본 후 여강길 답사를 시작한다. 코스는 명성황후 생가에서 여주역으로 오는 역(逆) 코스다.
<여주 여강길 5코스 황학산길 지도>
버스에서 내려 도로를 건너면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이 감고당이다. 감고당(感古堂)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던 것을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져 철거 위기에 처하자 2008년 여주시에서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 복원하였다. 감고당은 조선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곳으로 숙종(肅宗)의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장희빈과의 갈등으로 왕비에서 물러난 후 복위될 때까지 머물렀으며, 후에 명성황후가 여주에서 한양으로 여덟 살에 올라와 왕비로 책봉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감고당 전경>
감고당의 편액은 1761년 영조(英祖)께서 효성이 지극한 인현왕후를 기려 하사하였다고 하며, 그 후로부터 이곳을 감고당이라 불렀다. 이곳은 조선 시대 중부지방 사대부 집안의 가옥구조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솟을대문과 이어져 하인들이 기거하는 방과 광이 있는 행랑채와 대문을 지나면 집안의 남자 어른이 손님 등을 맞이하는 사랑채가 있으며, 중문을 지나면 내당(內堂)으로도 불리는 안방마님이 기거하는 안채가 있다.
<감고당>
감고당 뒷문으로 나오면 소원바위가 나온다. 여흥민씨(驪興閔氏)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명문거족으로 내려온다. 그중 민유중(閔維重)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며, 그의 5대손인 민치록(閔致祿)은 명성황후의 아버지다. 민치록은 오씨 부인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별하며, 후에 한산 이씨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그래서 민치록은 부인과 함께 이 바위 아래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드려 53세의 나이에 얻은 딸이 명성황후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 바위는 <소원바위>가 되었다.
<소원바위>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조 고종(高宗)의 왕비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는 그 후 열여섯 살에 왕비가 되었고,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로 개화 정책을 주도해 나가다가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게 살해되어 처음에는 청량리(홍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남양주시 홍릉으로 합장하였다. 생가는 1687년(숙종 13)에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 남았었다. 1996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을 지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 생가>
생가 옆에는 <明成皇后誕降舊里碑(명성황후탄강구리비>가 있다. 이 비석은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4년(고종 41)에 명성황후의 고향 집에 세운 비다. 비각이 있는 자리는 어린 시절에 공부한 별당이 있던 자리라 한다. 반듯한 사각 받침돌 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되어 있다.
<명성황후 영정>
비석의 글씨는 아들인 순종(純宗)의 친필로 앞면에는 ‘명성황후가 태어난 옛 마을’이라는 뜻으로 <明成皇后誕降舊里(명성황후탄강구리)>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1904년 5월 어느 날 두 손을 맞잡아 눈물을 머금고 절하며 공경히 쓰다’라는 뜻의 <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敬書(광무팔년오월일배수음체경서)>라고 새겨져 있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
감고당과 명성황후 생가 사이에 있는 초가들은 여주자활센터에서 운영하는 소박한 민속촌이다.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기념품을 판매하거나 음식점과 카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기증한 한복을 무료로 대여한다고 하는데, 이른 시간에 와서 고요한 풍경만 보고 간다. 생가터 안에는 이외에도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의 묘와 신도비가 있고, 명성황후 기념관이 있다.
<명성황후 생가 민속촌>
<인현왕후 아버지 민유증의 신도비>
명성황후 생가가 있는 마을 이름은 여주시 능현동이다. 북쪽으로 황학산과 그 밑으로 조그만 야산인 승산(勝山)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능말, 성늪, 아래성 늪 등이 있다. 능말은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의 장인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묘를 쓴 이후부터 부르게 된 이름이다. 문화재로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경기유형문화재 41)와 명성황후생가(경기유형문화재 46), 민유중묘(향토유적 5), 임원준묘(향토유적 12) 등이 있다.
<능현동마을회관-네이버두산백과>
능현동 마을을 가로질러 올라가면 황학산이다. 황학산(175.3m)은 여주시내에 위치한 산으로 여강길이 조성되기 전부터 산책, 운동, 등산을 위해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래서 여강길 5코스 황학산길은 다른 길과 달리 강가를 걷지 않는 길로 먼발치에서만 강을 볼 수 있다. 산으로 오르는 동안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 나온 시민들을 자주 마주친다. 정상에서 수목원 쪽으로 조금 이동하면 맷돌바위가 산 아래를 굽어볼 수 있는 터를 만든다.
<황학산 정상>
<맷돌바위>
무료로 운영되고 있는 황학산 수목원은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연과 인간이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습지원, 석정원, 산열매원, 미니가든, 항아리정원 등 식물의 생태와 기능에 따라 특색화(特色化)한 14개의 테마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멸종위기에 처한 단양쑥부쟁이, 층층둥굴레 등의 보전과 복원, 산림문화 및 휴양서비스 제공한다. 뭇 생명들은 봄기운에 지표를 뚫고 세상에 첫발을 내민다.
<황학산수목원 전경>
<황학산수목원 반송>
이 수목원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따로 조성한 <양화소록원>이다. 양화소록(養花小錄)은 조선 초기 문신이자 서화가로 유명한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 저술한 원예전문서다. 강희안은 이 책에서“무릇 꽃을 재배하는 것은 오직 마음과 뜻을 굳건히 닦고 어질고 너그러운 성질을 기르는 데 있다.”라면서, 소나무에서는 굳은 의지를, 국화에서는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사는 은일(隱逸)을, 매화에서는 높은 품격을, 난초에서는 품격과 운치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나무와 꽃을 9품으로 나누었다.
<양화소록원>
<양화소록 내용 소개 액자>
황학산은 수목원을 포함하여 산 전체가 <황학산산림욕장> 길로 조성되어 있다. 여주 시내에서 접근하기가 편리하고, 평일 낮 시간대에도 걷는 사람들이 많아 안전하게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황학산 전망대에 오르면 여주 시내가 한눈에 조망되며 날씨가 좋은 날엔 남한강(여강)도 보인다. 황학산산림욕장 주변이 아파트 등의 인가로 둘러싸여 있어 황학산 정상을 기준으로 사방으로 많은 샛길이 있고 산책과 운동을 하는 주민들을 자주 만난다.
<황학산산림욕장 입구>
<황학산산림욕장 길>
황학산산림욕장 입구를 빠져나오면 도로를 달리는 교통 소음이 고막을 울리지만, 2016년 개통한 여주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세권(驛勢圈) 형성에 아파트단지 조성공사가 발 빠르게 움직인다. 아파트 숲속에 묻힐 세종초등학교와 세종중학교도 함께 발돋움할 것 같다. 지금의 여주역(驪州驛)은 여주시 교동에 있는 수도권 전철 경강선의 전철역이다. 원래 여주역은 1931년 수원∼여주 간 협괘(狹軌) 열차가 개통되면서 있었으나, 1972년 수려선(水驪線)이 폐지되면서 구 역사(驛舍) 자리에는 여주시민회관 건물이 들어섰다.
<여주역부근 도로>
<세종중학교>
<여주역>
첫댓글 명성황후생가 다시가본기분입니다....감사합니다....
선배님 고맙습니다.
선배님!
덕분에 여주 공부 잘했습니다.
건강 챙겨서 좋은 글 많이 챙겨주시니
많이 고맙습니다 ^^.
다알리아네요...
후배님 고맙습니다.
한강은 한반도의 중심이라
여주를 포함하여
한강 유역 주변에는
역사의 흔적이 많이 있는 것 같아요.
더 많이 공부하고 배워야겠죠.
<사진 : 앵두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