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을 위한 모험
---김보나의 시 다섯 편을 읽고
김도
안녕. 인사를 할 때 인간은 손을 흔든다. 아무것도 쥐지 못하게 펼친 손의 안쪽을 상대방을 향해 보인다. 그것을 흔든다. 추위에 떠는 사람의 입술이나 슬픔으로 무너진 사람의 등이 흔들리는 모양과는 다르게 손은 흔들린다. 그것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의 모양과 닮아있다. 손은 오직 흔들리기 위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외계인과 처음으로 조우하는 인류가 나오는 영화에서 인간은 우선적으로 인사를 고민한다. 외계의 감각 아래 공격적이지 않고 우호적으로 비쳐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뜻도 아닌 인사의 뜻으로 읽히는 행위를 성공적으로 나누어야 서로 다른 어떤 뜻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인사를 제외한 의도가 없어야 인사는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인사 자체는 어떤 당연한 상황을 상기시키는 것에 다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라고 할 것이 여기에 있고 너(희)라고 할 것이 지금 거기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이 나와 너 사이에서 분명할 때 바로 그곳에 다리가 놓이게 된다. 비로소 그 위로 말이 오갈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인사는 인사에 지나지 않는 힘으로 연결을 이룬다.
“키 작은 주인공이/딱 한 번 용기를 낸다”(「나의 모험 만화」)는 문장처럼 어느 이야기든 모험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단 한 번이라도 용기가 필요하고 인사는 물론 모험이다. 이미 잘 아는 사이, 다시 말해 더 알고 싶지 않은 사이에서 오가는 인사처럼 인사도 되지 못하는 몸짓이 아니라 잘 모르는 사이, 더 알고 싶은 사이의 인사가 갖는 열과 무게를 고려할 때 인사는 사건이다. 어쩌면 모든 인사는 딱 한 번 내는 용기이고 단수의 용기를 가진 자만이 인사를 할 수 있다. 그런 인사는 매번 첫 인사가 된다.
거부할 수 없는 인사
「춘일광상」의 화자는 목에서 종양이 발견되어 다양한 검진을 거치며 방사능에 수차례 노출된다. “어릴 적에 본 과학 영화에서는/방사선에 맞은 동물이/돌연변이로 변신했어요/이제부터 나의 꿈은/괴수 김보나가 되는 것”이라는 소망은 파괴나 이탈을 향하지 않는다. 헬리콥터와 총을 든 군인들에 둘러싸이는 “힘이 센 짐승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손을 흔드는 것”이다. 일단 총구를 겨눠야 할 필요를 느낄 정도로 위협적으로 거대한 괴수의 모습은 텔레비전이든 스마트폰이든 전세계로 송출될 것이며 괴수는 손을 흔든다. 어느 인간의 눈에도 인사로 보이는 괴수의 몸짓이 지구의 수많은 화면을 통과해 수많은 사람에게 닿을 것이다. 단순한 동작만으로 수많은 위협이 누그러지고 수많은 연결이 이루어진다.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간단하게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인사가 해내는 일은 경이롭다.
“안녕 나/갑상샘에 암이 생겨서/방사선약을 먹은 뒤로/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기 시작했어/팝핑 캔디를 삼킨 때처럼/몸 안이 반짝거리더니/괴수로 변해버렸어”(「춘일광상」)라는 고백으로 시작되는 편지이자 동일한 제목의 다른 시에서는 구체적인 청자와의 연결이 시도된다. 괴수는 광화문 정오의 사거리에서 “텔레파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중”이고 따라서 이 시는 텔레파시의 내용이며 독자는 텔레파시 도청자가 되거나 고백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셈이다. 고백은 용기를 내기만 했다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사랑을 기억하고,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텔레파시가 아니면 마음을 나눌 길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나누어진다. 만화부였던 청자가 이 고백의 목소리를 듣게 될지는 알 수 없어도 이 시의 독자는 확실하게 듣게 된다. 이때 발생하는 사랑은 독립적인 두 개체가 특정한 운동이나 행위를 통해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고 좁힌 거리를 오래도록 유지하는 상황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따로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따로 있지 않다는 연결을 확인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진실을 가르친다.
어쨌든 죽음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도착할지도 모를 죽음과 마주보아야 하는 종양을 확인했을 때 「춘일광상」의 화자는 연결을 희망한다. 연결은 다만 손을 흔들면서, 화자에게서 무슨 말이 발생하고 있는지 들려주면서 이루어진다. 그저 인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인사처럼 그저 연결이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연결의 말이 나타난다. 어쩌면 죽음과 마주보는 것은 사랑과 마주보는 것에 다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말풍선을 향한 관심
「나의 모험 만화」에서 화자는 적극적으로 청자이기를 희망한다. 화자가 그리는 만화의 주인공은 다들 지나치는 사육장의 토끼를 홀로 돌보면서 “혹시 동물의 말을 알아듣게 되었나/귀 기울여” 보는 사람이면서 “자신의 말은 구름을 닮은/말풍선에 밀어놓곤”하는 사람이다. 만화에서 통상적으로 구름을 닮은 말풍선에는 해당되는 인물의 소리 내지 않는 마음 속 말이 들어간다. 희곡으로는 방백인 셈이고 만화 속 인물은 마음을 읽는 초능력 따위가 없으면 이 말을 들을 수 없으며 오직 독자만이 읽을 수 있다. 토끼의 말을 듣기 위해서든,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말은 구름 풍선에 밀어 넣는 과묵한 주인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인물은 이 만화를 그리는 시의 화자다. 만화를 통해 화자가 “보여주고 싶다”고 고백하는 것은 주인공의 “독서기록장에는 쓰지 못한 문장 혹은/어린 토끼에게 건초를 부어주며 쏟아낸 마음”이며 그가 쓰는 “성장소설”이다. 외계인이 학교를 짓밟느라 친구가 쓰러져도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 쓰러진 친구가 되살아나는 종류의 이야기다. 자신 앞에 굴러온 축구공을 힘껏 차거나 자신이 빌려준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짝꿍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해도 주인공의 모험은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이 딱 한 번의 용기를 내어 시작하는 모험은 성장소설을 쓰는 것이다. “이 모험의 끝은/친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듯”이.
“(훗날…)”이라는 만화적인 장치는 어른이 된 퇴근길의 화자가 그리던 모험 만화의 주인공과 이 시의 화자를 구분하는 벽을 무너뜨린다. 마치 만화처럼 “칸칸이 나뉜 지하철에서 나는/백팩의 무게를 버티며 서 있다”. 현실적인 풍경과 만화적인 인상이 뒤섞이는 가운데 화자는 “칸 속 사람들의 말풍선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화자에겐 마음을 읽는 초능력이 없지만 “내년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왜/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지//해가 진 뒤로/저마다의 모험은 어떻게 지속되는지” 토끼 사육사 앞의 주인공처럼 귀를 세우고 있다. 이와 같은 귀의 기울기만으로 퇴근길이라는 집단적인 운동에서 으깨지는 물감처럼 피로하게 뭉개지기 쉬운 열차 칸의 빽빽한 사람들에게 자리가 발생한다. 그것은 퇴근 후 각자의 보이지 않는 밤으로 넘어간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모험이 펼쳐질 지면이다. 모험은 그저 “(계속)”된다. 그것이 모험이 지속되는 방법이다.
모두 필요해서 가능해지는 축복
“나는 아무데나 축복이 필요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바티칸에서 온 사람」) 이 문장은 중의적이다. 축복이 한 명의 범위에만 적용될 때 아무데는 일상적으로 해석된다. 예컨대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지각하게 생겨서 헐레벌떡 뛰어갈 때는 열차가 때마침 들어오는 축복이 필요하다. 유명한 음식점에 갈 땐 줄이 길지 않을 축복이나 건강검진에선 값비싼 병이 발견되지 않을 축복이 필요하다. 축복이 필요하지 않은 데가 없으므로 축복은 아무데서나 필수적인 것이다.
한편 축복이 한 명의 범위를 넘어설 때 아무데는 신성하게 해석된다. 예를 들어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털어놓는다는 사람의 말을 다 들어주고 어떤 말도 꺼내기 어렵도록 침묵이 무겁게 짓누를 때 신께서, 하늘이, 세상이, 당신을 돕기를 바란다는 말을 간신히 이끌어내는 축복은 밖을 향한다. 나의 문제보다 당신이나 그들의 축복을 바랄 때 발생하는 힘이 곧 신성이다. 그러한 축복은 아무데나 필요하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러지 않았던 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티칸에서 온 진짜배기” 성수를 지하철에서 판매하는 여자도 있을 수 있다. 마셔 보시겠냐며 여자가 성수를 들이 밀 때 화자는 “생각했다. 마실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다. 이 물은 모든 것을 치유한다. 나는 나아진다. 소음을 내며 달리는 열차 밖을 나서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다.”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힘이 깃들어 있는 물이어서 모든 것을 치유하여 나를 더 나은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치더라도 화자의 기대는 땅 밑의 얼기설기 굴을 지나는 열차에서 내려 지상의 낮으로 나가 걸어가는 것을 향한다. 지상의 낮을 걸어가는 일은 누구나 언제든 하는 일처럼 보인다. 기껏 모든 것을 치유한다는 성수를 마시고 그게 다인지 김이 빠져서 기적의 물 같은 것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의미처럼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열차든, 건물이든, 짓는 건물이든 생계를 위해 벗어나선 안 되는 자리에서 낮을 보내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는 서울에서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더 나은 존재, 말하자면 자유를 누리는 존재를 의미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치유되어 나아진 나는 빛을 쬐며 걸어간다. “왼편으로 빈 손을 내밀었고, 누군가 뭘 얹는 감촉을 느꼈는데, 그것은 차갑지도 찰랑이지도 않았다.” 화자는 성수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화자는 여전히 열차에 앉아서 성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갑지도 찰랑이지도 않았다는 말에 기대어 그것이 성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 화자는 갑자기 열차를 벗어난다. 낮을 가르며 걸어갈 때, 빈 손을 내밀었을 때 누군가 그 손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차갑지도 찰랑이지도 않는 수많은 종류의 것이 화자의 빈 손에 닿을 수 있다.
교황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pontifex는 직역하면 다리를 놓는 자다.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잇는 의미의 다리일 것이다. 그 다리를 건너가면 「바티칸에서 온 사람」의 성수처럼 모든 것을 치유하고 나아질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꿈꿀 때 펼쳐지는 모습처럼 달콤하고 고소한 음식이 끝없이 솟는 하얀 식탁이나 포도주가 솟구치는 분수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다만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다”는 신의 세계보다는 지극히 인간의 세계적인 소망을 고백한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건너가야만 얻어낼 수 있는 구원보다 천국과 신성은 이 세상의 “낮을 가르며 걸어갈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우리에게 낮을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정말 감동적인 시군요.” 교황님을 울게 한 시는 화자의 말과 달리 이 시일지도 모른다. 그때 당시엔 이 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별은 떠오른다
빛의 속도는 우주의 크기에 비해선 느리기 때문에 밤하늘의 별 중에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별이 섞여있다. 오래 전에 보낸 빛이 지금 여기 닿고 있을 뿐이고 별이 있던 자리에는 지구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부드러운 이 어둠뿐”이 남아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상은 극단적인 고독의 비약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과학적인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우리와 별들의 시차가 밤하늘을 이루는 빛의 대부분을 이미 죽은 것처럼 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라붙은 찻잎에 들끓는 물을 부을 때마다 향내가 살아났다. 따뜻한데 죽어 있던 차를 마시면 마른 장작의 기분을 알 것 같다. 속에서부터 불씨가 타오르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물을 삼켜 살아나는 불이 있다면.”(「황차의 별」) 우리가 마시는 찻잎은 차나무에서 수확한 잎을 덖고 말리고 묵힌 것이다. 지금 살아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에 끓는 물을 부으면 그것으로부터 풀려나오는 것은 물을 연노랑 빛으로 물들인다. 찻잎은 자기 안에 갇혀있던 것을 풀어주기 위해 몸을 부풀린다. 찻잎이 죽었다는 것은 과학적인 사실이겠으나 뜨거운 물속에서 부풀어 오르며 물에 색과 향을 풀어버리는 찻잎을 보고, 맡고, 마시는 사람은 그것을 살아있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고대 인도 사람들은 불의 신이 인간과 신을 연결해준다고 믿었다. 제물을 살라 신에게 닿도록 연기를 흩어놓기 때문에 그렇다지.” 불에 타는 것은 재로 흩어져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파괴를 파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닿기 위한 탈바꿈으로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고독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이미 그 자리에 없을 별의 빛이 우리라는 세상에 닿을 때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짓는 것처럼.
안녕. 너는 거기에 있구나. 인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