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영화 ‘귀향’이 재미없다고 투덜거리지만 나는 여러모로 볼만한 가치가 있는, 보아야만 할 영화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생바람이 불던 중국 서간도에서 피지못하고 사라진 여성 독립 투사들의 영혼들이 피를 토하며 억울함을 외쳤으나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다. 홀로 핀 들꽃처럼, 파묻힌 여성투사들의 업적이 이윤옥 시인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처럼 실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역사적 인물과 사실을 소재로 영화가 되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시대 전후의 사건과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너무나 좋은 영화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별로 영화화 된 것이 없다. 이 영화는 시민들의 지원금으로 14년 간에 걸쳐 제작되어 겨우 빛을 본 것이다. 더욱이 재작년부터 위안부 여성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배상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황급히 과거 문제로 돌려 한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단 한마디 ‘진실로 미안하다’라는 소리만을 듣고 싶어 했던 그들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았다.
이 영화는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 거기에 대한 뻔뻔한 태도를 규탄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2차대전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어떻게 인권이 철처하게 유린되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계 여성 인권의 해를 맞아 재삼 위안부 문제가 인권문제로 거론되고 있던 참이라 더욱 그렇다. 14 세 이후의 처자들도 있으니 아동인권이자 여성인권의 이슈이다. 주인공 정민은 14세의 외동딸로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어느날 졸지에 중국 목단강 위안소에 끌려가 구타, 고문, 병으로, 때론 총살로 죽은 20만 위안부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영화는 또한 무속과 무당이 우리의 문화의 일부분으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신 문화의 일부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귀향(鬼鄕)의 '귀'를 귀신 '鬼'자를 쓴 것을 봐도 무속이 이 영화에서 크게 차지함을 알 수 있다. ‘한’은 영어로 번역할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말이다. frustration, resentment, unfairness, full of tears and regrets 등이 합쳐진 한 단어로 번역이 잘 안되는 단어 중의 하나다.
전쟁 막바지에 퇴각 명령을 할 때 증거를 소멸하려고 일본군인이 쏜 총살에 주인공 친구가 대신 목숨을 바쳐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한 위안부 여성의 깊이 맺힌 한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속 무당인 것을… 그 누가 감히 미신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내 초등학교 시절 등교길에 서낭당이 있어, 울긋불긋한 복장을 한 무당이 춤을 추며 귀신에 홀린듯 칼춤을 추고 굿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 서낭당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마귀놀음의 굿이요 미신이라는 기독교의 서양문화에다 과학 만능의 사상이 팽패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김진명 작가는 ‘하늘이여 땅이여’라는 책에서 오천년동안 형성된 우리의 정신문화와 신비주의가 과학에 의해 철처히 부정당하고 폐기처분 되었다고 서술한다.
“다른 서양의 종교들은 살아서 건재하는데 우리의 굿이나 부적 서낭당 제사 등의 우리민속 문화만 과학의 속죄양이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외침에 공감이 간다. 일본이 노린 것은 바로 이런 우리의 정신적 문화의 파괴에 있었다. 그 영화를 통해 외국인들은 우리 고유 문화와 복장, 정서 그리고 아름다운 산하를 통해 한국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또한 전쟁이라는 국가 간의 갈등 속에서도 개인 차원에서는 인간은 결국 아무도 선하고 악한 구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잔인하게 위안부를 짓밟는 일본 군인들 중에서도 따뜻한 군인이있어 위안부를 도망가게 해주었고 같은 일본 병사 중에서도 살인하기를 거부해 상관에게 총살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포주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위안부들을 분노하게하고 외롭게 만든 것은 일본군만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고발한다. 면사무소에서 위안부들의 피해 신고센터를 설립해놓고도 위안부들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어떻게 감히 발힐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는 서기관을 통해서다. 위안부들이 당한 고통과 아픔을 그분들이 떳떳하게 발설하지 못할 죄로 가슴 속에 숨겨야만하는 사회적 정서와 문화 속에 살 때 그건 무속으로만 풀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 어느 사회, 정치, 국민들 차원에서도 그들의 아픔을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을 더 서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내죄가 아닌데도 나의 죄인양 가슴에 무겁게 지고 침묵해야만했던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귀향은 고향에 돌아온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분노가 아니라, 치유와 반성과 회복을 위한 것이다. 한 위안부 여인이 결국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거절했던 과거의 사진도 다시 찍게 만든다. 과거를 잊고 미래를 살기 위해서이다.
마침내 어머니 땅에 돌어온 그녀, 그제야 이땅에 대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애정을 갖고본 이 땅의 역사와 문화는 참으로 가슴아팠다. 젊은 두 아가씨들의 화합을 통해 자신의 잃어버렸던 친구를 회상하며 신세대와 구세대의 정신을 연결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젊은 아가씨에게 굿내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며 과거와 현재와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와의 화해하는 것도 보여준다. 산더미같이 쌓인 위안부의 시체 위로 날아가는 나비는 바로 그분들의 희생위에 서는 미래의 희망을 예견해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해후의 기쁨을 보여준다. 돌아와야할 우리의 자리, 고향, 우리의 문화의 소중함, 그리고 구세대 신세대의 만남이요 부모와 자식의 만남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 딸을 잃은 부모의 마음, 죽어서라도 그 딸들을 만나 오손도손 고향에서 일상 단순한 생활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을 보여주는 상상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행복은 소소한 일상의 평화로움에 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게 최고의 정부요 정치라고 항변한다.
위안부들이 강간으로 당하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 예기치 않은 임신으로 곤욕당하고 이름없는 자녀들이 태어나는 것에서 겪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 등을 더 소상하게 그리지 못한 점에서 완성된 영화는 아니라는 아쉬움이 있으나 그런대로 잘 다듬어진 시기적절한 영화였다.
이제 살아 남은 분들이 47 명 밖에 없는 이상, 그분들의 호소는 허공의 메아리처럼 흩어져 갈 것이다. 빈 좌석이 많아 텅 빈 영화관, 위안부들이 깊은 속내를 끌어내 그린 그림을 감상할 여유조차 없이 자리를 뜨는 관객을 본다. 젊은 한류인기인들의 방문에는 그렇게 열광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젊은 세대들에게는 별로 인기있는 주제의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 그 위안부 할머니들의 외로움이 더욱 가중될거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신숙희
* 필자 소개 - 신숙희 박사: 시드니 찰스 스터트대 스터디센터(Charles Sturt University Study Centre), 시니어 렉쳐러/교육지원 코오디네이터, PhD in TES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