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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4-18
지경을 넓혀라 / 박정식 목사
데일겔러웨이가 쓴 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무지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한 교회가 있었는데 교회의 맴버는 4명이었습니다. 이 교회는 4명이 똘똘 뭉쳐서 더 이상의 성장을 거부했습니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데일겔러웨이가 이런 해답을 내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 교회의 공동묘지가 4개밖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무덤자리가 4개밖에 안 남아서 거기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전부다 라이벌이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좀더 진취적이거나 좀더 진보된 신앙 생각을 갖지 못하고 과거에 답습되거나 너무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생각을 갖는 것을 왕왕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 너무나 크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너무나 분명한데도 우리의 신앙의 사이즈를 키우지 못한 채 과거에 혹은 세상 속에 국한시키는 이런 약한 모습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요셉지파가 땅을 차지하는 그런 장면들이 나타나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합니다. 제일 먼저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 성을 정복했습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첫 번째 실패를 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남부 연합군과 더불어서 승리를 거두고 이제는 북쪽 연합과 더불어 승리를 이루게 된 다음에 그들은 가나안 전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 텅 빈땅을 서로 나눈 것이 아니라 교두보만을 확보하고 난 다음에 그 땅을 제비뽑아서 각자 지파별로 그 땅을 취하도록 분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14장부터 보게 되면 제일 먼저 그 땅을 분배받은 지파가 나옵니다.
바로 유대지파였습니다.
유대지파의 리더 였던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어떤 땅을 요구합니까?
좋은 땅이 아니고 비옥한 땅이 아니라 산지를 요구합니다.
"내게 산지를 주십시오. 내가 모세가 이 땅을 정탐하도록 나를 보내던 때와 같이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고 지금도 여전히 내게 힘이 있습니다. 내게 그런 기회를 주십시오. 내게 문제를 주십시오. 내게 좋지 않은 땅을 주십시오."
이것이 그의 요구사항이었습니다.
그는 충분히 기득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득권을 다 포기해버리고 산지를 요구합니다. 그 산지는 황량한 벌판입니다. 사람이 살기 참 어렵습니다.
이번에도 유대 산지를 밟고 왔는데 거기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 이 땅을 구했을까?' 좋은 땅이 너무나 많은데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은면 못 사는 그런 땅입니다. 비옥한 토지가 많은데 왜 그 땅을 요구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그 마음이 다른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민수기 14장을 보게 되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
거기서 그 마음이 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르와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영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 영이 다릅니다. 그 가슴속에 하나님을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척박한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바라보는 이런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갈렙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렙과 유대지파는 산지를 요구합니다.
위기의 땅, 또 강한 대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그런 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믿음의 눈으로 정말 그들 앞에 닥친 수많은 위기와 낙망을 극복하고 그 땅을 차지하고 맙니다. 그 땅은 그들에게 약속의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헤브론과 베들레헴을 통해서 헤브론은 믿음의 족장들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다윗이 태어나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완성에 대한 비전이 그의 가슴속에 존재했습니다. 현실은 척박하지만, 현실은 문제 투성이지만 그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위대한 꿈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유대지파가 산지를 자신의 것으로 삼습니다.
그 다음 가장 강력한 지파였던 요셉지파가 땅을 분배받는 장면을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요셉의 두 아들이 있지 않습니까?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그런데 그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이 마지막 운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는데 오른손은 둘째였던 에브라임의 머리 위에, 왼손은 장남이었던 므낫세의 머리 위에 얹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기겁을 하고 "아버님, 아닙니다. 오른손은 마땅히 장남에게 얹고 왼손을 차남에게 얹어야 하지 않습니까?" 했더니 야곱이 하는 말은 "아니다. 아들아,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적은 자가 더 큰 자가 될 것이다. 적은 자가 더 위대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른손을 차남에게 얹고 왼손을 장남에게 얹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창대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개 지파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굉장히 많은 수를 가진 그런 지파였습니다. 제일 큰 지파였습니다.
그들에게 이제 가나안땅을 분배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 본문 14절 말씀 보겠습니다.
(수 17: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제일 큰 지파입니다.
인구도 많고 나름대로 군사력도 뛰어납니다.
요셉지파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지금 가나안 중부지역을 그들의 분깃으로 준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유대지파같은 경우는 텅 빈땅을 차지 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대적들이 있는 산지를 취합니다. 사실 사람이 살 만한 곳도 아니지만 거기에는 강력한 적군들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아낙자손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누구를 보고 간담이 녹았는가 하면 이 아낙사람들을 보고 가슴이 녹았습니다. 평균 신장이 2 미터가 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고 그들이 기겁했습니다.
'그들은 장대하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
이렇게 외쳤던 사람들이 바로 아낙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유대산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지파 사람들은 그 강력한 대적들을 하나하나 파하고 그 산지를 자신의 소유로 하나하나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지파는 어떤 상황인가 하면 웬만큼 비어있는 땅을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중부지역에서 지금의 여리고를 좀 올라가면 넓은 평야 지대가 있습니다. 그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가나안 중부지역을 하나하나 차지하도록 그들에게 분깃을 준 것입니다.
유대지파보다 훨씬 더 기회가 좋습니다. 유대지파는 텅 빈땅을 차지 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적들이 있는 불모지를 차지합니다. 요셉지파는 꾀 많이 회복해 놓은 땅을 주고 거기서부터 점점 더 그들이 영토를 확장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좋은 땅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14절에 뭐라고 나옵니까?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너무 좁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큰 백성이 되었는데, 이렇게 하나님이 복을 많이 주셨는데 이 땅은 너무 좁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불평이었습니다. 원망이었습니다.
여러분, 14장과는 상당히 좀 대조적인 부분 아닙니까? 갈렙과 유대지파는 기득권을 포기합니다. 험한 땅을 요구합니다.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장 강력한 대적들과 더불어 싸워야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 땅을 결국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강력했던 요셉지파는 이미 텅비어버린 땅 그들이 정복해서 요셉지파에게 주는 이 풍성한 곡창지대를 지금 좁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이 산지를 향해서 전진해 나갔다면 가나안 중부 지역은 점점 더 그들의 소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교두보를 확보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믿음으로 비록 불확실하고 난관이 있긴 하지만 전진해나가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모든 산지들은 또 가나안 평지들은 다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강력한 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들을 선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내 쏟는 말은 불평이었습니다. 원망이었습니다. 더 큰 것을 주지 않는다고, 더 많은 땅을 주지 않는 다고 하는 원망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지파와 갈렙은 하나님을 품은 가슴으로 그들의 앞에 놓여진 가나안 산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황무지이고 거기에는 수많은 대적들이 살고 있지만 그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그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그들은 나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지파는 철저하게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미 꽤 많은 땅을 그들의 소유로 주고 나머지는 너희가 믿음으로 나아가서 차지하라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좁다고 불평합니다. 힘들다고 불평합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대상이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은 무얼 보고 살아가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물론 환경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환경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입니다. 환경을 향한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슴을 품고 내가 대하는 이 환경을 바라보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환경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위기를 바라보면 그 위기는 새로운 기회가 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민수기 14장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그 땅은 정말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땅의 모든 우상들은 다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여된 시각, 하나님이 결여된 가슴으로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면 우리의 미래는 우리를 삼키고 말 것입니다. 우리를 짓밟고 말 것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환경의 차이만이 아닙니다. 상황의 차이가 아닙니다.
그들의 가슴에 과연 하나님을 품고 있는가? 그들의 시각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가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7장 4절 말씀 보겠습니다.
(수 17:4) 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방백들 앞에 나아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우리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라 하셨다 하매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에게 기업을 그 아비 형제 중에서 주므로
그랬습니다. 요셉지파는 기득권을 요구하는데 그 기득권을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당당히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더불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땅을 주십시오."
지금 그 약속대로 그 땅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생각하고 있지만 그 약속을 가슴을 품고, 그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신뢰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한 걸음 내딛을 어떤 액션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행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보장은 가슴에 담고 있지만 그 약속을 붙들고 우리가 어떻게 한발자국 내딛을 것인가? 어떻게 미래를 향해서 내딛을 것인가는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을 아무리 믿고 있어도 행동치 않는 믿음은 그 약속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 약속을 믿는 한은 반드시 우리에게는 행함이라는 요소가 따라야 합니다. 약속을 믿는다.
그것은 곧 우리의 행동거지를 함께 연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이 아무리 자기 인생을 돌아봐도 스스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요. 집안도 그렇고, 자신의 능력도 그렇고 그래서 이분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복을 받게 해 주십시오. 제게 물질의 복을 주십시오.
그래서 제일 수월한 것이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10년동안 새벽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게 도와주십시오. 믿습니다. 드디어 10년만에 주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내가 너에게 해주마. 그런데 지금까지 복권 한 장이라도 사봤니?"
행동이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지만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약속은 공수표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 요셉지파는 모세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여호수아에게 우리에게 우리의 기업을 주십시오. 요구합니다. 지금 여호수아는 모세가 약속한 그 기업을 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중부지역 비옥한 토지를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가 많고 그들이 번창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착하고 번성할 수 있는 그 땅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행동하지 않습니다. 약속은 상기시키고 기득권은 요구하지만 그 약속을 향해서 그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4절 읽어보겠습니다.
(수 17: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그 땅을 줌에도 그들은 지금 불평하고 있습니다.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군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잘못된 공로의식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되면 요셉지파는 굉장히 프라이드가 강했습니다.
"우리가 누군데 이렇게 대접하느냐? 아니, 우리 조상이 누군데?"
아마 요셉지파는 모든 지파에 대해서 굉장히 우월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지파는 요셉 아닙니까? 그 요셉이 어떤 사람입니까? 나머지 모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 결국 애굽의 종으로 팔려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그를 붙드시고 그를 인도하셔서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런데 야곱을 비롯한 모든 그의 식솔들은 가나안땅에 기근이 오는 바람에 모두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요셉 때문에 애굽 땅에 가서 정착을 하고 애굽 땅에 가서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 요셉의 후예들의 가슴속에는 그 좋지 않은 공로의식이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들은 우리 조상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우리조상들 때문에 너희들은 산 줄로 알아라. 그리고 우리가 지금 장자는 아니지만 장자나 마찬가지의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공로의식이었습니다. 조상 때부터 행했던 나름대로의 공로의식들, 우리가 당연히 다른 모든 지파들 보다 더 유별난 대우를 받아야 되고 더 기득권을 행사해야 된다는 의식들이 그들의 가슴속에 그득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많은 공동체들이 어려움을 갖는 이유중의 하나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 잘못된 공로의식입니다. 제가 많은 우리 동역자들을 만나보면 교회가 가능성들은 많이 있습니다. 비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그 가능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하고 비전을 성취하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가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주역들이 과거의 너무 지나친 공로의식에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 그 공로의식 때문에 '우리가 누군데..' 싶은 어떤 배척감과 갈등이 그 공동체 속에 팽배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뚫고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교회는 더 이상 성장 가능성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헌신과 진정한 섬김은 그 공로의식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존재해야 합니다. 나를 하나님이 한번 사용해 주셨다. 나를 하나님께서 멋지게 들어 사용하셨다. 이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가슴속에는 어떤 공로의식이 깊이 뿌리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게 반응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깊은 기억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께 들인 요만큼의 헌신과 희생들은 오래도록 오래도록 가슴속에 자리잡습니다.
한번 여러분, 10년전을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 별로 기억안납니다.
그런데 뭐가 기억납니까? '
그때 내가 이렇게 했는데...' 나름대로 공로의식들이 굉장히 오래도록 여운이 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잘 나가다가 시험드는 경우는 그런 과거의 공로의식들이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을 때입니다. 오늘을 바라보면 좌절과 낙심이 온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줍니까?
다 해줍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해주는 것이 뭐 있습니까?
그런데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해 준 것이 기억이 납니까?
그런데 자식들은 부모가 못 해준 것 가지고 다 기억하며 구시렁거립니다. 그렇게 다른 것입니다. 사랑으로 뭔가 행동하는 것하고 공로의식으로 가슴에 담아놓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했던 것, 우리가 순종했던 것 그것은 은혜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내게 성령의 감동을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응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얼마나 은혜입니까?
그런데 많은 경우는 내 속에 공로의식이 남아있습니다. 내 속에 행했던 일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섭섭한 것입니다. 연조가 많을수록 '섭섭이'가 많아집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나도 한때는 열심히 헌신했었다.' 그 한때도 얼마나 위대한 것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것 때문에 은혜의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국한된 삶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한번 오늘에 되살려서 함께 공존하고 함께 격려하는 그런 공동체의 모습을 가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바른 주인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공동체 안에서 정착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왜 경험하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바른 주인의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권속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미 헌신했던 분들은 그 헌신 때문에 은혜의 공동체가 여기까지 세워졌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십시오. 뒤늦게 합류하신 분들은 앞으로 여러분의 눈물과 희생을 통해서 더 많은 하나님의 비전이 은혜의 공동체 안에서 퍼져 나간다는 것에 대해서 기꺼이 합류하시고 헌신하십시오. 그것이 바른 주인의식입니다.
요셉지파는 이것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만 고착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조상이 누군데...우리 조상들이 어떤 일을 행해 주었는데...우리를 이렇게만 대접하는가?' 그들은 도무지 행동하지 않고 공수표만 믿고 있는 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책임감을 더 강하게 소유할 수 있어야 되고 희생은 더 많이 하려는 결단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경륜이 아무리 붙어도 이것이 바른 크리스챤들의 진정한 면모라는 사실입니다.
15절 말씀 보겠습니다.
(수 17:1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지금 너희가 있는 그 땅이 좁은 것은 안다. 그러나 너희는 그 땅을 중심으로 충분히 땅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라. 그리고 가나안 중부 지역을 다 차지하라. 그 모든 땅이 다 너희들의 것이 될 것이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6절에 보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수 17:16)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그들의 눈에는 비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불안한 미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강한 대적들만 눈에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는 지금 하나님이 품어있지를 않습니다. 그들의 눈은 믿음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바른 시각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약한 민족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장 번성했던 지파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그런 지파가 과거에 국한된 삶을 살아갈 때 오늘을 철저하게 망각하고 오늘을 배척당하는 그런 약한 모습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17절 말씀 보겠습니다.
(수 17:17)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권면합니다. 너희들은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가슴에 품기만 하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그들은 넉넉히 승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여호수아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과거 40년 전에 열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땅을 탐지했습니다.
열 명은 전부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땅은 너무나 거민들이 강하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다. 우리는 도무지 이길 수 없다. 그 땅은 우리를 삼키는 땅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시각, 하나님을 가슴에 품었던 시각으로 그 땅을 봤을 때 '그 땅은 우리의 밥이다.' 이것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고백 아닙니까?
지금 그 고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특히 여호수아가 에브라임지파의 리더 아닙니까? 자기 지파입니다. 남의 지파가 아닙니다. 그런데 묘합니다. 여호수아가 느끼는 절망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와 동일한 리더였던 갈렙은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그 비전을 향해서 하나님의 꿈을 외쳤을 때 유대지파가 그를 따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지파는 전혀 따르지도 않습니다. 그 영향력이 그들에게 증폭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을 품은 가슴으로 미래를 대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기득권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왜곡된 결단을 내리지도 않습니다.
자기 동족이지만 그들에게 정말 하나님을 품고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볼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 말씀 보겠습니다.
(수 17:18)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그 산지는 네 것이 될 것이다. 네가 개척하라.'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전진하면 그 땅은 그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텅빈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뭔가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불확실하지만 오히려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하나님께 무릎꿇고 전진해 나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보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척자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모든 삶에도 그렇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척자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 다합니다.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 줄을 잘못 섰기 때문에 아니면 때를 잘못 탔기 때문에 기타 등등 많습니다.
예전에 보면 저희 집안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 우리 집안이 땅이 굉장히 많았답니다.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동네 사람이 운신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할아버님이 다 주색잡기에 빠져서 다 탕진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집안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집안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이렇게 못사는 것은 큰할아버지 때문이다. 그것이 논리로 통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제가 너무나 많이 들어봤습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입니다. 내 인생은 이제 내가 써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때를 잘못 만났습니까?
부모를 잘못 만났습니까?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친척들한테 멸시 당하고 천대 당하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닐 때 제 속에 굉장히 앙금이 있었습니다. 내가 부모님만 제대로 만났으면 내가 이러고 살지는 않았을 텐데. 꿈도 있었고 야망도 있었는데 다 깨졌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제가 깨닫게 된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런 부모님 안 만났으면 나는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그분들은 제게 꼭 필요한 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상황과 조건을 원망하고 그것을 비난하다보면 우리의 삶은 더 어두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상처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과거의 포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제는 그 모든 위기와 문제를 헤쳐나가야만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개척하라.'
신앙도 우리가 개척해나가야만 하고 삶도 내가 개척해 나가야만 합니다. 핑계거리를 찾거나 문제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이루실 비전이 있다는 것, 나를 통해서 성취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나가야만 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생활을 할 때 교회 안에서 절망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이 바른 교회를 못 만난 성도들의 비극적인 고백들이 많이 있는 시대입니다. 상처도 많고 아픔도 많습니다.
제가 가끔 우리 새가족반모임을 마치시고 은혜의 교회에 등록하신 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제 뒤통수가 저밀 때가 있습니다. 제 심장이 뻐근할 때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물론 제 앞이니까 은혜의 교회 좋다고 이야기 해주시는 것은 좋지만 또 한편으로는 뻐근해 집니다. 부담감입니다. 여러분, 완벽한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은혜의 공동체를 좋게보는 것은 참 아름답고 복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함께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안에 문제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문제 있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문제가 왜 없겠습니까? 저부터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배우기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에게 "박목사님, 어떤 교회 참 좋던데요." 하고 정보를 주시면 저는 즉각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게 충고해 주십시오.
저는 얼마든지 배울 용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더 나은 교회를 일구고 좀더 나은 비전을 향해서 나가는 것뿐이지 완전한 공동체가 어디에 존재하겠습니까? 주님 앞에 가기까지는 완전한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개척자의 정신으로 나아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삶도 가정도 신앙생활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믿음의 시각으로 담대하게 매일매일 다가서는 삶을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은혜의 공동체에서 참 감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장로님들이 고맙고 우리 동역자들에게 고맙습니다. 왜냐하면 기득권을 요구하거나 어떤 자신의 프라이드를 앞세우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에 헌신하는 것을 보면 저의 마음이 뻐근합니다. 감격스럽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그분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배움 받는 부분이 참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서로 거룩한 영향력이 증폭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의 교회가 좋다는 것이 목사 때문에 좋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목사보다 위대한 동역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개척자의 정신을 가지고 정말 자신의 버거운 인생에서도 그것 때문에 절망하고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의 무거운 짐까지 지고, 교회의 모든 짐까지 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집니까? 사람은 섬김을 통해서만이 영향력과 다른 사람에게 위대한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좀더 뭔가 새로운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고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것에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좀 넓게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뭔가 기도할 때도 풍요로운 것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할 수 있는 것, '하나님, 제게 좀 더 많은 일을 주십시오.
제게 좀더 많은 하나님의 사명을 주십시오.
제게 좀더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제게 축복을 주셔도 그 물질을 가지고 저 혼자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많은 것으로 주께 부요케 하는 그런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위대한 개척자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나만 생각하면 분깃이 아무리 많아도 여전히 적습니다. '왜 이것밖에 안 주십니까? 우리 식구가 얼마인데요?' 왜 이것을 자꾸 요구하십니까? 거기에는 더 이상의 가능성과 비전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십니까?
당신의 가슴속에는 어떤 것을 품고 있습니까?
요셉지파는 하나님의 복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전혀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길만한 준비도 안되어 있고 다른 모든 지파에게 영향력을 드러낼 준비도 안되어 있습니다. 주저앉아만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지파이고 가장 탁월한 지파임에도 불구하고.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을 통해서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그것이면 전부 아니겠습니까? 전부 받은 것입니다. 비록 내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우리는 이미 다 받고 출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넘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덤입니다. 왜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만 합니까? 왜 적다고 불평만 합니까? 우리는 지금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자그마한 것이지만 이미 내게는 넘친다는 것을 고백하고 신앙의 면에서 삶의 모든 면에서 다시금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믿음의 시각을 가지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정말 그 부유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부유함입니까? 내가 누리고 내가 세상을 향해서 나름대로 향유하는 그 부유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서 그들을 일으키고, 그들을 구원해 나가는 이 거룩한 부유함, 이 거룩한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에게 얼마나 풍성하게 임재할 것인가를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슴속에 그런 비전들이 심겨지고 작은 것이지만 요만큼의 인생 속에서 이미 넘친다는 고백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우리의 삶에도. 그래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향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서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믿음의 시각으로 인생을 좀 넓게 바라보고 내게 남겨진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영향력을 드러내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풍성한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받지 못한 사람처럼 원망하며 절망할 때가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작은 물질의 어려움 때문에, 환경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까지도 상실해 버린 채 푸념과 절망의 삶을 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하나님을 품는 가슴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되게 하셔서 오늘 한 뼘 밖에 안 되는 삶의 현장에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다가설 때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영향력이 드러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확장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감사하고 헌신하는 삶 속에 더 많은 것으로 채우시고 모든 사람을 부요케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더 드러내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저희 모두를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