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트릴 수 없는 멍에
예레미야 28:1-15
예레미야를 흔히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는 안타까운 예언을 선포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이런 메시지는 사실 선포하기에 좋은 메시지는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끌려간다는 말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성전이 파괴되고 도시가 파괴된다는 말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에게나 기분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메시지를 선포하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이 확실함을 행동으로 보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27장 2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말씀하시되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걸고” 했습니다.
줄과 멍에를 목에 걸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온 몸으로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몸으로 예언활동을 한지 4년 다섯째달이 될 때가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 다른 선지자인 하나냐가 성전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예언하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냐의 예언은 한 마디로 예레미야가 선포하고 온 몸으로 증언하는 예언과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벨론 왕이 이미 빼앗아간 성전 모든 기구를 2년 안에 되돌린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바벨론으로 끌고 간 포로들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냐의 예언은 정말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이고 희망을 주는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거짓 예언이었고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대로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똑같은 하나님의 예언자인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차이 나는 극과 극의 예언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냐도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만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냐도 선지자인데 어떻게 이렇게 차이 나는 예언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차이는 오늘날에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정확하게 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내 생각과 내 뜻을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도 하는데 어느 때는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전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먼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대부분 이단에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생각과 내 뜻을 전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전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고난보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원합니다.
십자가보다는 부활의 메시지를 원하고 바르게 살라는 말보다는 축복받으며 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만을 전하기 쉽고 때로는 거짓을 덧붙여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 내 마음에 맞고 내 기분에 맞는 말씀만을 좇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생활보다 인간의 생각을 따라 신앙생활하기가 쉽습니다.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때로는 고난의 말씀이라도, 내 마음에 맞지 않는 말씀이라도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에이든 토저가 쓴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내 자신의 신앙과 본질과 정체성을 가감 없이 들여다보게 하는 책인데요, 이 책에서 저자는 진짜와 가짜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 진짜는 험한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 진짜는 솜사탕 복음을 거부하고 가시면류관 복음을 믿습니다.
- 진짜는 주님의 ‘일’보다 ‘주님’에게 우선순위를 둡니다.
- 진짜는 행복보다 거룩을 열망합니다.
- 진짜는 신앙의 기본에 충실합니다.
반대로
- 가짜는 인스턴트일 뿐입니다.
- 가짜는 인격의 변화를 소홀히 합니다.
- 가짜는 하나님의 징계를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 가짜는 행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합니다.
- 가짜는 신조를 무시합니다.
- 가짜는 신학을 경시합니다.
- 가짜는 감정을 등한히 여깁니다.
- 가짜는 영적 균형감이 없습니다.
여러분, 진짜 신앙은 내가 좋아하고 내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닥쳐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레미야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예레미야의 멍에를 깨트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멍에는 힘들고 비극적이고 전하기에 거북한 말씀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냐의 말은 듣기에 좋고 희망적이고 격려가 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냐의 말만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냐의 말만을 좋아해서 예레미야의 멍에를 깨트리는 잘못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냐의 말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예레미야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냐처럼 예레미야의 멍에를 깨트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짜 신앙생활을 위하여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예레미야의 멍에는 무엇입니까?
먼저, 예레미야의 멍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멍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멍에를 사용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기 위해 줄과 멍에를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그것도 4년 이상을 걸고 다녔으니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겠습니까?
예레미야의 멍에는 나라가 망하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였습니다.
예레미야의 목에 걸려있는 멍에는 정말 힘들고 어려운 멍에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나라가 망하고 사람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간다는 말을 전하는 것이 어찌 부담스럽지 않겠습니까?
결코 기분 좋은 일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진실한 분명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하나냐가 깨트린 멍에는 정말 기분 좋은 메시지였습니다.
바벨론의 멍에가 이렇게 깨트려질 것이고 그 결과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돌아오고 성전 기물들이 2년 안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은 얼마나 기분 좋은 말입니까?
그러나 그 기분 좋은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생각이요 사람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듣기는 좋았을지 몰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거짓된 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고 능력 있고 구원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르고 내 뜻과 다르고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반대로 내 마음에 딱 맞고 내 뜻에 일치해도 그것이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고 거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예레미야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냐가 전해주는 사람의 말을 더 좋아했고 그것을 따라가려고 했습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어떤 것이 내 마음에 들고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가를 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하나냐처럼 예레미야의 멍에를 깨트려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야의 멍에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레미야의 멍에는 고난의 멍에였습니다.
멍에를 맨다는 것이 고난입니다.
예레미야가 4년여 동안 목에 멍에를 매고 다녔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나라가 망하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다는 말을 전하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멍에를 매고 고통스러운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궁극적으로 유다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해 하나냐가 깨트린 멍에는 고난을 회피하는 멍에였습니다.
원수의 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한다는 말씀이었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 메시지였겠습니까?
사람들이 좋아하고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냐가 깨트린 멍에입니다.
정말 하나냐가 예레미야가 매고 있던 멍에를 벗겨서 깨트렸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고 시원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냐의 깨트린 멍에는 거짓이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고 그러기에 그 멍에대로 바벨론의 멍에가 깨트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고난이 따르고 십자가가 따르고 멍에를 매는 것과 같은 고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멍에를 우리는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온 인류를 구원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하나냐가 주장한 것처럼 고난이 없는 회복은 우선은 좋을지 몰라도 그것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없고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짊어진 멍에를 우리가 짊어질 때 우리도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은 사울 왕을 통하여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도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다윗은 그 고난의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고 끝까지 인내하였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진정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예레미야의 멍에를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냐의 깨어진 멍에만 좋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난 없는,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은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없고 구원할 수 없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예레미야의 멍에를 받아들이고 짊어지는 고난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레미야의 멍에는 희망의 멍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멍에를 매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였습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그나마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라가 살고 많은 사람들이 사는 길이었습니다.
27장 11절에 보면 “그러나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 밭을 갈며 거기서 살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유다 나라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너무 커서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내가 너희를 돌봐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지라도 70년이 지나면 내가 너희를 해방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레미야의 멍에는 희망의 멍에요 자비의 멍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적국에게 항복할 수 없다.’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자’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매국노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큰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돌보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여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의 멍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표시요 희망의 표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간의 짧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냐처럼 예레미야의 멍에를 깨트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생각에 기초하여 쉽고 편하고 안락한 길만을 추구하면 안 됩니다.
거짓된 사람의 말에 속아 예레미야의 멍에를 깨트리면 안 됩니다.
내 마음에 틀린다고 내 기분에 맞지 않는다고 멍에를 깨트리면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냐가 멍에를 깨트렸을 때 이제는 나무 멍에가 아니라 사람이 꺾을 수 없는 쇠 멍에를 만들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 다윗의 목에 매인 고난의 멍에는 정말 감당하기 어려움 멍에였습니다.
때때로 그 멍에를 깨트리고 인간적으로 행동하고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두 번이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그 유혹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그 고난의 멍에를 내동댕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름 부은 받은 자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 멍에를 매고 말씀을 따르고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인간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 고난의 멍에를 영광의 멍에로 바꿔주셨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이스라엘 최고의 성군, 이스라엘 최고의 신앙인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예레미야의 멍에를 매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구원의 길이고 새롭게 하시는 길이고 궁극적인 축복의 길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입니다.
이 믿음을 갖고 끝까지 멍에를 매고 주님을 따라가서 주님과 함께 승리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