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속에 피는 청춘-
2024년 3월 15일 금요일 따스한 날씨
한 달에 한 번, 부부 동반 모임에서 등산하는 날이다. 입춘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침 기온은 3도, 5도라 도톰한 잠바를 걸쳤다. 그래도 남편은 얇은 잠바를 걸치고 나섰다. 늙을수록 추위를 타기 마련인데 기분만 청춘이리라. 함께 지하철을 타러 나가 경로우대권 발급기 앞에서 신분증을 꺼내 올린다. 토큰 하나 굴러 나온다. 공짜 토큰이라 좀 떳떳하지 못한 마음인데, 개찰구 노란 지면에 갖다 대니 ‘사랑합니다’ 하며 기계음 아가씨가 찜찜한 마음을 감싸준다. 하지만, 남편도 아니면서 사랑 고백을 하니 뜬금없다. 버스 탈 때 ‘안녕하세요’‘감사합니다’ 인사말을 들었을 때는 거부감이 없었다. ‘산뜻한 기분 좋은 인사말이 뭐 없을까?’ 생각을 굴려본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도 좀 식상하고. 전 국민 대상으로 지하철 개찰구 인사말을 공모해 보면 재미있겠다. 늙은이야 그저 받은 토큰 하나를 보물 숨기듯, 겉옷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 지하철을 탄다. 반월당역에서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고 영대 역에 닿았다. 출구 구멍에 토큰을 넣으니 또 한 번 ‘사랑합니다’ 한다. ‘허 참, 사랑밖에 난 몰라 아가씨구먼!’ 구시렁거리며 2호선 역을 걸어 나오니 영대역이 영대 정문으로 이어져 있다.
“하, 신기하네요!”
“뭐가 신기해? 한양대와 고려대도 대학과 지하철역이 이어져 있는데….”
“그래요? 서울대에 3개월 연수 다닐 때 지하철 역 내려 1km 이상 걸어 다녔는데….”
하면서 손 전화기에서 ‘지하철역이 대학과 이어져 있는 대학’을 검색하니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대학이 500m 이내에 지하철역을 두고 있다. ‘지하철 이용 수요자가 많아서일까? 젊은이들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한 배려에서일까?’ 어쨌든 ‘젊음이 재산이다’는 생각에 가슴이 요동친다.
영대 정문에서 동기들을 기다리며 보니, 머리에 흰 눈 내린 듯, 머리카락 희끗희끗 날리는 남자 동기들이 애련하게 다가오고, 햇살 받아 반짝이는 까만 머리 대학생들이 활기차게 정문을 들어선다. 봄눈 뜬 나무들이 남의 대학 캠퍼스로 들어서는 늙은이들에게 다랑귀처럼 달라붙으며 말을 건다. 금방 알을 까고 나온 병아리 주둥이인 양 뾰족뾰족 노란 생명을 다닥다닥 매단 산수유나무는 ‘생명을 얻는 일은 알을 까고 나와야 주어지는 선물이지!’ 속삭이고, 매화나무는 겨우내 얼마나 용을 썼는지, 아직도 언 땅을 밀어 올리며 용을 쓰느라 붉게 피어나며 '이런 신념과 투지가 있어야 생명을 다시 피어 내는 봄을 살 수 있는 거야!’ 이른다. 곁을 스쳐 가는 대학생들을 보니 그들의 심장부터 예사롭지 않다.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아라.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밀 이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고등학생 때, 설렘으로 읽었던 ‘청춘 예찬’이, 오늘 아침, 칠순의 심장에 찾아와 물방아를 돌린다. 심장에 손을 얹어본다. 거선의 기관처럼 요동치는가? 장작불 지펴둔 아궁이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가? 주체할 수 없다. 옆에 같이 걷는 오 교장의 손을 잡아당겨 내 가슴에 달라붙은 봄기운 다랑귀를 알린다.
“내 가슴에 손 한 번 대어 봐요. 이렇게 가슴이 뛰고 설레기는 처음이야.”
내 들뜸에 그저 웃는 그녀의 얼굴도 햇살 아래 소녀의 미소로 피어나고 있다. 그녀의 남편, 정교수도 뒤따라오며 말을 건다.
“수필 쓰기에 도전하고 싶은데 수필 어떻게 써요?”
“평생 논문만 쓰던 사람이 수필을 쓰겠다고요?”
인생 2막을 부드럽게 펼쳐보고 싶다는 정교수의 마음이 느껴진다. ‘그래, 우리 이 나이에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지!’
“내 홈페이지에 수필 창작론 책들을 읽고 발췌해 둔 것들이 많아요. 링크 걸어 보낼게요. 참고될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학내 커피숍에 들어갔다. 오늘 행사 주최 측인 정교수 부부가 차를 사는데 18명이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푸치노, 고구마 라테, 유자차 등 평소 마셔보지 않았던 차들을 '이건 뭐꼬. 이것 마셔볼까?' 하면서 기분 끌리는 대로 시켰다. 누군가는 아메리카노를 아프리카노로 시켰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는 메뉴판에서 골랐기 때문에 그런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노출되지 않았다. 찻값이 쌌다. 싼값에 이런 맛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청춘이 누리는 젊음의 혜택일까? 야외 차탁으로 나와 대학 졸업 50주년 기념행사를 의논한다. 도중에, 스님 동기가 볼펜을 가져와 한 자루씩 나눠주니 반갑다. 요즘 나는 전자책으로 영어 회화 공부를, 남편은 중국어 회화 공부를 하는데, 노트에 정리하며 듣다 보니 볼펜 약이 잘 나오지 않아 답답했는데, 스님은 요즘 무슨 공부에 도전하느라 이 볼펜의 요긴 성을 깨우쳐서 선물로 준비해 왔을까? 둘러보니 자기 영역에 몰두하는 문 여사가 우선 눈에 띈다. 하모니카 연주가로서 공연까지 다니는데 부럽기만 하다. 나도 첫사랑 남자랑 데이트 할 때는 기타를 들고 다녔지만, 손 놓은 지 오래고, 하모니카도 배우고 싶지만, 이것저것 달리할 것이 많으니 아직 손잡지 못하고 미련만 잡고 있는 과제인데….
새삼, 나를 돌아본다. 머리에 흰 눈 내리듯, 머리카락 희끗희끗 휘날리는 나이라 나에게 허락된 날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날마다 깨치며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겹다. 그래서 아침에 눈 뜨면 ‘오늘도 우리, 살아 있네요!’ 남편한테 두 손가락 흔들어 보이며 서로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문 여사는 아침마다 서로를 안아주며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듣는단다. 건강 체크의 의미로. 그렇다. 아직 우리의 심장은 거선의 기관처럼 요동치며 살아있다. 그러니 ‘눈꽃 속에 피는 청춘’이 아니고 무엇이람!
학내 식당에서 대학생들 틈새에 끼여 앉아 함박 스틱으로 점심을 먹고, 학내 민속촌과 영대박물관을 들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 흔들리며 심장 위에 경건히 손을 얹고 속삭였다.
‘오늘도 축복처럼 얻은 소중한 시간에 감사하고, 죽어가는 식물도 살려내는 ‘초록손가락’처럼 둘레의 생명들을 보듬는 향기로 살아가야지!‘
(2024.3.15. p15) p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