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록 제6장
성부·성자·성령은 무엇인가
― 셋인가, 하나인가, 관계인가
기독교에서 가장 어렵다고 느끼는 교리 가운데 하나가 삼위일체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고 말한다.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사람도
“삼위일체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설명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성부란 누구인가?
성자는 누구인가?
성령은 누구인가?
그리고 이 셋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번 장에서도 교리부터 정답으로 제시하기보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보자.
1. 먼저 구분하자 ―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복음서에 없다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라는 문장을 직접 말씀하신 기록도 없다.
삼위일체는 초대 기독교가 예수님과 아버지와 성령에 관한 여러 성경 말씀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것인지를 오랜 시간 논의하면서 발전시킨 신학적 교리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한 후대의 교리.
둘은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2. 전통적인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성부가 성자는 아니며,
성자가 성령은 아니고,
성령이 성부는 아니다.
그러나 세 위격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다.
이것을 설명하려고 수많은 비유가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어떤 비유도 삼위일체를 완벽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에서도 삼위일체를 하나의 신비라고 말한다.
3. 마태복음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는 유명한 말씀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마태복음 28:19
여기에는 세 표현이 함께 등장한다.
아버지.
아들.
성령.
이 말씀은 후대 삼위일체 교리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한 구절 자체가 후대의 복잡한 삼위일체 교리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여러 말씀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4. 성부란 누구인가
‘성부’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거룩한 아버지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반복해서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다.
예수님의 하나님은 단순한 권력자의 명칭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관계적 언어가 중심에 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 아버지는 형상을 가진 존재인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 요한복음 4:24
그렇다면 아버지를 인간처럼 수염을 기른 거대한 존재로 상상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적 이미지일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육체적 남성의 형상을 설명하는 말이라기보다,
생명의 근원,
관계,
사랑,
근원적 존재를 표현하는 종교적 언어라고 묵상할 수 있다.
6. 성자는 누구인가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고백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따라서 전통적 기독교에서 성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 된다.
7. “하나님의 아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인간 부모와 자녀의 생물학적 관계처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특별한 관계와 정체성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아버지와 아들의 깊은 관계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서 왔으며,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며,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8. 요한복음 ― “나와 아버지는 하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 요한복음 10:30
이 말씀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 왔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이 말씀을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 하나 됨을 보여주는 말씀 가운데 하나로 읽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질문이 생긴다.
‘하나’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완전히 같은 한 인격이라는 뜻인가?
아니면 존재와 뜻과 생명의 깊은 하나 됨을 뜻하는가?
이 문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9. 성령은 누구인가
제25장에서 우리는 성령을 살펴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 요한복음 14:17
그리고 말씀하신다.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은 인간에게서 완전히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사람 가운데,
사람 안에서,
사람을 통해 역사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10.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인가, 한 위격인가
이 문제에서도 해석이 나뉘어 왔다.
어떤 사람은 성령을 하나님의 활동과 능력으로 이해하기 쉽다.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성령을 단순한 에너지나 힘이 아니라 하나의 위격으로 고백한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요한복음에서 성령이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고,
증언하며,
인도하는 존재처럼 묘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 기독교에서는 성령을 단순한 힘 이상의 존재로 이해한다.
11. 성령은 에너지인가
이 책에서 우리는 생명과 빛과 에너지를 묵상적으로 연결해 왔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성령=물리적 에너지
라고 과학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물리학의 에너지는 측정 가능한 자연과학적 개념이다.
성령은 신학과 종교적 경험의 언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에너지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는 성령의 역동성, 생명력, 활동성을 생각하게 하는 하나의 비유로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12. 셋은 정말 서로 분리되어 있는가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해보자.
성부,
성자,
성령.
셋을 완전히 독립된 존재처럼 생각하면 세 하나님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거부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핵심은 단순히 셋이 아니라,
셋이면서 하나라는 관계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계속 묵상해 온 하나 됨과 흥미로운 접점을 가진다.
13. 요한복음 ―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믿으라.”
— 요한복음 14장 취지
여기에서는 단순히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아니다.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다.
상호적인 내재의 언어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을 공간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두 존재로만 상상하기 어렵게 한다.
14.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하나 되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 요한복음 17:21
이 말씀은 놀랍다.
아버지와 예수님의 하나 됨을 말씀한 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라고 기도하신다.
그렇다면 하나 됨이라는 개념은 삼위 안의 관계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에도 확장된다.
15. 그렇다면 인간도 삼위일체의 일부인가
여기에서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
요한복음 17장의 하나 됨을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보다 훨씬 더 나아간 주장이다.
전통적 기독교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한다.
이 책에서는 그 전통적 구분을 먼저 인정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인간을 하나 됨에 참여하도록 초대하신 사실을 깊이 묵상하고자 한다.
16. 삼위일체를 ‘관계’로 바라보면
삼위일체를 단순한 숫자의 문제로 바라보면 어렵다.
“하나인데 어떻게 셋인가?”
라는 문제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관계로 바라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인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행한다.
성령은 진리를 알리고 사람 가운데 역사한다.
즉 삼위일체는 단순히 숫자 퍼즐이라기보다 사랑과 관계와 하나 됨을 표현하려는 신학적 언어로도 이해할 수 있다.
17. 물의 비유는 충분한가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물을 자주 비유한다.
물은 얼음이 되기도 하고,
액체가 되기도 하며,
수증기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물이 세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부·성자·성령을 한 존재가 때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처럼 오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비유든 한계가 있다.
삼위일체는 비유보다 관계의 신비로 바라보는 것이 더 안전하다.
18. 태양의 비유는 어떠한가
또 이런 비유를 생각할 수 있다.
태양,
태양에서 오는 빛,
그리고 열.
셋은 구분되면서도 하나의 근원과 연결된다.
이 비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관계를 상상하는 데 도움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완벽하지 않다.
왜냐하면 전통적 기독교에서 성자와 성령은 단순히 성부에게서 나온 물리적 현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19. 도마복음 ― 하나 됨
도마복음 22에서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에 대한 독특한 말씀이 등장한다.
도마복음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리된 것을 하나로 바라보는 영성은 매우 강하다.
이것을 요한복음의 하나 됨과 함께 묵상하면,
신앙의 깊은 목적이 분열을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분리를 넘어 사랑과 하나 됨으로 가는 것이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20. 『그리스도의 강론』이 보는 아버지와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강론』에서는 아버지를 모든 존재와 표현의 근원으로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아버지의 개체화된 표현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강조된다.
이 관점에서는 아버지와 그리스도가 완전히 분리된 두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는 근원이고,
그리스도는 그 근원이 표현된 모습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인간 안의 그리스도 역시 이 신적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동일한 설명은 아니다.
따라서 반드시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21. 『그리스도의 강론』에서 성령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책의 영성적 흐름에서는 성령 역시 생명과 신적 활동, 내면에서 움직이는 영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아버지 = 근원,
그리스도 = 표현,
성령 = 살아 움직이는 신적 활동
이라는 식의 묵상적 구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 삼위일체의 공식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강론』과 저자의 묵상에서 가능한 하나의 해석적 구조다.
22. 저자의 묵상 ― 근원, 표현, 생명의 움직임
나는 성부·성자·성령을 이런 이미지로 묵상해 본다.
아버지 ― 생명의 근원.
그리스도 ― 그 생명이 표현된 모습.
성령 ― 그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역사하는 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니케아 신조의 삼위일체 정의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강론』을 함께 묵상하면서 정리한 저자의 영성적 표현이다.
독자는 이것을 하나의 생각으로 읽고 직접 판단하면 된다.
23. 포도나무 비유로 다시 생각해 보기
나는 포도나무의 이미지를 좋아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그리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 비유를 저자의 묵상으로 조금 확장해 보자.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
포도나무는 그리스도.
가지는 우리.
그리고 나무 전체를 흐르는 생명력이 있다.
나는 그 생명의 움직임을 성령과 연결해서 묵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수액=성령’이라는 공식은 복음서의 직접 설명이 아니다.
묵상을 돕기 위한 비유다.
24. 하나의 생명, 다른 역할
나무에는 뿌리가 있다.
줄기가 있다.
가지가 있다.
잎이 있다.
열매도 있다.
모양과 역할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이 이미지를 통해 일체동일이라는 표현을 묵상해 왔다.
여기에서 ‘동일’은 모두가 똑같다는 뜻이 아니다.
역할은 다르지만 생명의 관계에서는 분리할 수 없다는 의미다.
25. 하나 됨과 차이는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가 된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모든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하나 됨도 모든 개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
하나 됨은 차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차이 때문에 서로를 적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 됨에는 자유와 존중이 있어야 한다.
26. 삼위일체와 사랑
기독교 전통에서는 삼위일체를 사랑의 관계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한 사랑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과 아름답게 연결된다.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의 관계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신앙 역시 사랑의 관계로 나타나야 한다.
삼위일체를 아무리 정확히 설명해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얻은 것인가?
27.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직접적인 문장은 요한일서에 나타나며 예수님의 직접 어록은 아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예수님도 사랑을 중심적으로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며,
제자들에게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사랑은 매우 중요한 열쇠다.
28. 성부·성자·성령과 우리
그렇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려운 신학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끝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근원이라면 우리는 생명의 근원을 기억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사랑과 생명의 삶을 배운다.
성령을 묵상하면 그 생명이 지금 우리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결국 하나 됨으로 간다.
29. 삼위일체를 믿으면서 분열한다면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과 사람을 계속 나누고 미워한다면 무엇인가 모순되지 않는가?
성부·성자·성령의 하나 됨을 고백하면서,
교단 때문에 싸우고,
교리 때문에 미워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인간 이하로 본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의 개념은 알고 있어도 하나 됨의 삶은 놓치고 있을 수 있다.
30. 저자의 묵상 ― 삼위일체보다 중요한 하나 됨의 삶
나는 삼위일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의 신비를 모두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서 매우 분명하게 발견되는 것은 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리고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나는 이 두 말씀 사이에서 오래 머문다.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하나 됨이 인간의 하나 됨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매 가운데 하나는 분리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삶이 아닐까?
31.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라는 묵상
이 책에서 저자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표현을 중요하게 사용해 왔다.
이 표현이
“나라는 개별적 인간이 우주의 전능한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한 인격이다.”
라는 식의 자기 우월성으로 흐르면 위험하다.
예수님의 하나 됨은 오히려 사랑과 섬김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아버지와 하나 됨을 묵상한다면 그 열매는
교만이 아니라 겸손,
지배가 아니라 섬김,
분리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32. 삼위일체를 한 문장으로 말한다면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삼위일체란 성부·성자·성령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의 신앙 고백이다.”
그리고 이 책의 묵상적 관점에서는 한 문장을 더 덧붙이고 싶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한다는 것은 분리 속에서도 하나 됨을 보고, 그 하나 됨을 사랑과 생명의 관계로 살아내는 길을 찾는 것이다.”
두 문장은 같은 것이 아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교리적 요약이고,
두 번째는 저자의 묵상이다.
오늘의 묵상
오늘 삼위일체를 머리로 설명하려고 하기 전에 한 가지를 생각해 보자.
나는 하나 됨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가족과 하나 되려 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있는가?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보자.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하나 됨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다.
오늘 한 사람과의 벽을 조금 낮추어 보자.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을 선택해 보자.
그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삶에서 묵상하는 작은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부록 제6장 한 줄 묵상
“삼위일체는 성부·성자·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는 기독교의 신앙 고백이며, 그 신비의 열매는 분리보다 사랑과 하나 됨을 살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예수님 말씀으로 성경 이해하기 운동본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