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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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4 00:20
물빛 38집 원고 (정해영)
하이디
조회 수 360 댓글 0
붉은 끈
정해영
사과를 깎으면
껍질이
구불구불 살아난다
끈 같기도 하고
길 같기도 한
붉은 인연의 줄 따라
너에게 가는 길처럼
제 살을 깎아야
생겨나는 길
발아래 언뜻
낭떠러지가 보인다
향긋한 사과 냄새
몸 안으로 스며든다
사과즙이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한 입씩 베어 먹는
조각의 사랑
먹고 나면
금방 눈물고이는
툭하고
껍질 떨어지는 날
뿌리칠 수 없는
속살의 긴 그림자
칼끝이 지나간
그 사람의 생애를 본다
찡긋 웃는다
정해영
기차여행을 하다
이야기도 시들해 질 무렵
그와 내가 가방에서 꺼낸
우연히 표지가 같은 책
그는 앞부분을,
나는 절반 이상을 읽고 있다
나란히 앉아
그는 앞에 있고
나는 뒤에 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유희처럼 슬픔의
씨를 뿌리는 주인공의
젊은 날을 지나고 있다
그것이 불행의 열매로 무르익어
따지 않으면 안 되는 노년
내가 지나가고 있다
그는 가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눈부시게 올려다보고
나는 계속 아래를 보고
눈시울을 붉힌다
가끔씩 우린 마주 보고
찡긋 웃는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시작과 결말이
인사를 한다
똬리를 튼 생의
머리와 꼬리가 슬쩍 스치는
순간이다
분
정해영
삶으면 뽀얗게
분을 뒤집어 쓰는
감자
제 몸이 낸 것이다
그녀는
클래식을 듣지도
고전을 읽지도 않지만
주름살이 많아진 다음
하는 일은
산 속에 들어가
어릴 적 나물 이름을
동무처럼 불러 보거나
강가에 나가
다슬기를 잡는다
하루는 삶고
하루는 쉬고
또 하루는 국을 끓인다
비닐 속에 퍼 담아
봉지 봉지
지척에 있는 사람에게
보낸다
그녀의 몸이 내는
분이다
그녀는
삶이 자신을
바닥에 주저앉힐 때
나물을 뜯거나
다슬기를 잡으러 간다
시간의 심이 뭉툭하다
정해영
가늘게 벼린 연필심
오래 쓰다 보면 뭉툭해 져
세밀하게 쓸 수 없다
그녀의 시간도
오래 쓴 연필처럼
굵고 투박하다
몇 시 몇 분이 아니라
그때 다리 아플 때,
막 아침 먹으려는 참
이런 투다
하루는 묽어서
저어도 멀겋다
뜨는 것도 가라앉는 것도
없다
넘어지면
깨져 버리는
항아리 같은 몸이
시계추에 매달려 가고 있다
반짝이는 점이 아니라
어둑한 면을 향해 가고 있다
쉬는 듯 가는 듯
시간의 심 뭉툭하다
꽃이라는 도시
정해영
산맥의 험로를 지나
공기가 점점
희박해 지는 길
까마득히
높은 가지위의 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는
땅위에 서 있지만
공중에서 더 잘 보이는
떠 있는 도시
허공에서 길을 잃어
흩어져 버린
잉카의 요새가
저러 했을가
가늘고 뾰족한
연둣빛 바람이
세밀하게 조각 해 놓은
태양과 구름의 문양
신비의 동물 라마가
물을 나르고
보이지 않는 제국의 힘이
향을 피워 올리는
높고 가벼워서
몰락마져 아름다운
꽃의 도시
미소, 씨앗을 머금은
정해영
무꽃이 피었다
억세어진 가지와
질겨진 이파리위에
연 보랏빛 무꽃
농사는
쓸모가 제일 큰 꽃일
것인데
쓸모를 잃은 꽃
밭고랑 마다
평평한 햇빛이 흐르고
굴곡진 바람이 지나가고
가끔씩 비가 내린다
여물대로 여물어진
시간의 꽃대위에서
흩어지는 연보랏빛
씨앗을 머금은
은은한 미소
잃은 것을 찾은 듯
넉넉한 쓸모가
빼곡히 들어 차 있다
뒷걸음질
정해영
어릴 적
걸음마를 배울 때
어머니는 키를 낮춰
손뼉을 치면서
이곳저곳으로 길을 만들어
걸음을 여물게 해 주었다
살다가 몇 번은
땅 끝에도 서게 되지
하이에나처럼 달려드는
파도 앞에서
뒷걸음질을 해야 하는데
그 길 밖에는 길이 없는데
모르는 사이 밀려온
낭떠러지 끝에서
두 살 아이 마음으로
뒤로 발을 밀어 본다
사과 꽃 떨어진 자리
어슴푸레 사과 냄새 나듯
밤마다
어디서 들려오는 손뼉소리
손뼉 따라 길이 열리던
그 소리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또 옮긴다
저 뒤쪽 어디에
앉은뱅이로 앉아 있을
어머니 손뼉 소리
그치지 않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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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빛 38집 원고 (정해영) / 하이디
꽃나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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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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