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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과 나눔의 공간, 만남과 소통의 시간
김월강론1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1.
월강의 차시는 독자들에게 “차의 향기처럼, 차의 마음처럼 살아가라”고 넌지시 속삭인다. 예로부터 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들은 차를 수행의 수단으로, 예술의 영역으로 치환해서 차문화를 꽃피워왔다. 금강공원 금어사는 동래 차밭골에 위치하고 있어 스님은 차를 직접 농사짓고 법제하면서 차 생활을 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고, <차 한 잔 듬세>라는 시집 제목만 봐도 그의 시가 ‘끽다거’의 동양 정신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주옥같은 차시는 한마디로 월강이 완벽한 차인임을 증명한다. 보통 차인들이 차를 직접 재배하기보다는 음다만 하는데, 그의 차시를 보면 월강이 전인적 차인임을 알 수 있다. 열림과 나눔의 공간, 만남과 소통의 시간을 향유하는 시적 화자의 ‘끽다거’ 정신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형상화되어 있다고 볼 때, 그 시적 특성이 어떠한지는 짐작을 하고도 남으리라 본다.
시를 나타내는 한자의 시詩 속의 寺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사’로 읽을 때는 ‘절’을 의미하고, ‘시’로 읽을 때는 ‘관청’을 뜻한다. 시詩는 엄밀하게 절의 말이 아니고, 관청의 말이다. 이는 서민의 말이 아니라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시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다르다는 것이다. 일상의 원리가 자동화라면, 시의 원리는 비유다. 오늘날 절의 명칭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寺는 원래 중국 관청 부서의 명칭인데, 중국에 불교를 전한 서역 스님들을 접대하는 영빈관을 홍려사鴻攦寺라 불렀기 때문에 스님이 머무는 곳이 자연스럽게 ‘사寺’라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옛날의 사寺는 현재의 불교와 전혀 관계가 없다. 사寺의 士는 선비 사가 아니라 之갈 지의 변형으로, 그 의미는 ‘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寸은 법칙, 규칙을 나타내는 말로, 한마디로 시는 그냥 쓰는 게 아니라 시학원리에 따라 바르게 써야 한다는 촌철살인의 미학을 함의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무엇보다도 월강의 시적 바탕을 이루고 있는 감수성의 중핵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려는 순명과 함께 나누려는 보시의 인간적 따스함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애의 정신으로 무한 긍정이고, 열림이고, 나눔이라 하겠다. 부산pen 업무 논의 차 금어사를 방문하면, 그는 언제나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로 맞아준다.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흡인력은 존경의 마음을 품게 만든다. 그런 힘은 모두 차에서 나왔으리라 짐작해본다. 차는 천과 지를 만나게 하고, 차를 만든 사람의 영혼과 함께하는 이의 육신이 함께하기에 사람간의 진정한 소통을 이끌어낸다. 차시란 광의의 개념으로 볼 때, 삶의 응축된 아름다움을 차와 차문화를 매개로 하는 모든 영역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집 서평의 목적은 ‘끽다거’의 정신을 필두로 내세우고 있는 월강 차시를 대상으로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철학적, 문화적, 정신적, 문학적, 미학적, 불교적 요소들을 추출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2.
문화란 한 시대의 응축된 결과물이자. 결정체가 아닌가. 곧 사상과 생각이 세련된 언어표현의 도움을 받아 핀 아름다운 꽃이다. 그러고 보니, 월강 스님이 내게 써준 ‘세계일화’라는 휘호 한 점이 생각난다. 세계가 하나의 꽃이라는 그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는 철학적 지혜를 그는 나에게 전해주었다. 월강 시인에게 있어 삶은 서예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피리소리로 달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는 월명 스님이 경주에 있다면, 부산에는 일필휘지로 천의무봉의 붓을 휘날린다는 월강 스님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서예’가 스님의 생활을 대표한다는 뜻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전에 스님은 서예 부문에 있어서 한국의 대가였다. 스님은 차밭골에서 직접 딴 찻잎을 금어암의 유명한 유천석간수로 달여 마시면서 절을 찾아오는 분들에게 “차 한 잔 듬세”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이는 다도를 통해서 진정한 삶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월강의 차시는 삶과 문학이 상호 삼투되어 서로가 유리되지 않도록 실천하는 과정에서 얻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일상의 ‘끽다거’가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되어 일상과 문학의 통합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월강 시학의 면모는 숙명 같은 ‘출가의 변’에서 그 특징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는 《물망초》라는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출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서울 조계사에서 다섯 가지 소임을 거치던 중 마지막으로 입승직을 놓고 금어사로 오기 전부터 시의 씨앗을 품어왔다고 하겠다. 용왕당의 석간수와 녹차나무, ‘은혜 갚은 차나무 신의 전설’로 비롯된 ‘동래차밭골문화제’는 그에게 차시를 품게 만들었던 것 같다. 대체로 그의 시는 ‘끽다거’의 소산이며, 차시는 수행의 한 모습인 것이다. 88편의 월강 시는 식물성적인 특성을 지닌다. 자연의 원형인 식물에 내재한 여러 사유들을 잘 읽어낸다. 시인은 이러한 자연친화적 일상을 통하여 삶 속으로 매몰되기 쉬운 시적 감성을 찾아낸다. 월강 시가 ‘부끄러움’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며, 시의 품격이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월강의 겸허함은 ‘다석’에서의 ‘음다’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반갑네
참으로 잘 왔네
차 한잔 듬세
차밭골 금어사 진입로로부터
양은순 문학의 길 따라
자네를 반기는 뜻으로
깃발시가 펄럭이고
숲속 가릉빈가는 축가를 부르네
방금 보름불공 마치고
차 마시려던 참에 자네가 왔네
다락실에서 풍기는
차 덖는 향기가 도량을 감돌아
도량신들과 기뻐하고 있네
사방으로 연둣빛 찻잎이 보이는
솔마당 차탁으로 가서
어제 덖은 햇차를 마심세
청아한 신선의 경지
다선일미의 삼매경을 체험하세
동산에 보름달이 뜨고
소쩍새 울 때까지
- <차 한잔 듬세> 전문
고대는 맑은 정신으로 담소를 나누기 위해 차를 마셨다면, 중세는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고, 근세는 커피를 마시고 깨어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현대인에게 커피는 식사 후 필수 기호식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보감을 쓴 명의 허준은 차를 ‘영약’이라 극찬했고, 미국 저널인 타임지는 차를 10대 수퍼푸드로 인정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부터 차 보급이 활발해지고, 1990년대 이후 건강식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당나라 육우가 쓴 <다경>에 의하면, ‘행실이 바르고 검소하고 소박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차가 적합하다고 한다. 평자는 차의 여섯 가지 덕목 중에서도 여섯 번째 ‘차는 예의를 갖추게 한다’에 주목해 본다. 왜냐 하면, 월강 스님은 그 어떤 분보다 예를 중요시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차나 한 잔 마시러 갑시다”가 인사였다. 그 원류는 조주의 ‘끽다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불문가지가 아니겠는가.
생애 첫 시집인 <차 한잔 듬세>에 제일 앞에 놓인 시, 첫 장을 여는 시가 불교의 화두인 조주 선사의 ‘끽다거’라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당나라 후기의 스님으로 고불, 천하조주라는 명성을 날린 동아시아 선불교의 거장, 조주 선사의 ‘끽다거’ 화두에는 그 자체가 ‘차를 마시는 것이 단순히 공간적 지리적 방향이나 여정’ 묻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하는 철학적이면서 불교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니 ‘차 한잔 듬세’라는 음다의 권유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 성찰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이 시는 선의 모든 문제는 내면자증으로 귀결된다는 불교적 진리를 전해주고자 하는 의도로 쓰였다고 하겠다. ‘차밭골 금어사 진입로로부터/ 양은순 문학의 길 따라/ 자네를 반기는 뜻으로/ 깃발시가 펄럭’이고, 축가를 부르는 숲속 가릉빈가 초록빛의 고적한 차밭은 아늑한 고향 같고, 신화 속의 고즈넉한 풍경이 된다.
시인은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내포적 자아를 갖는데, 내포적 자아는 역사적 자아보다 그 능력이 몇 배로 증폭되어 ‘다’를 직관하고, ‘차향’에 정서적 반응을 보이며, 차의 속살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기 때문에 그 자아가 창조해낸 차시는 예사로울 수가 없는 것이다. 첫 연의 첫 행 ‘반갑네’라는 말은 맑은 정신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내방객을 맞아들이는 가장 적절한 멘트다. 손님을 더욱 편안하게 하는 대목은 세 번째 연의 ‘방금 보름불공 마치고, 차 마시려던 참에 자네가 왔네’ 하는 행이다. 이 말이 왜 필요했을까? 시인은 ‘차’를 마시면, ‘청아한 신선의 경지, 다선일미의 삼매경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음다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적 제재인 ‘차 한잔’을 통해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끽다거’ 정신은 <햇차를 마심세>에서 그 진정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냥 발밤발밤 나선 걸음을 아닐 테고/ 차 마시러 온 줄 알겠네’라는 시구는 참사람의 향기를 전해준다고 하겠다. <차 한잔 듬세>의 마지막 시구, ‘동산에 보름달이 뜨고, 소쩍 새 울 때까지’는 월강의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보여주며, 만남과 소통에 임하는 심덕의 자세를 나타낸다고 하겠다.
나는 복이 많아
새소리 물소리 들리는
푸른 숲속에 살면서
낮에는 햇빛차를 마시고
밤에는 달빛차를 마시네
어느 곳이든
차인(茶人)이 사는데
차밭이 둘러 있고
사계절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있다는 것은
이 얼마나 큰 복인가
이러한 복을
어찌 나 혼자만 수용하리
보름달이 뜨는 오늘 밤에는
도반들을 오라 해서
열무 국물김치와
군고구마를 다식 삼고
찻잔에 달그림자 드리운
달빛차를 마시리라
- <달빛차> 전문
‘낮에는 햇빛차를 마시고/ 밤에는 달빛차를 마시고’라는 시 <달빛차>에 담긴 시구를 보면, 시를 쓰는 순간, 시를 읽고 시를 생각하는 시간만큼, 시인은 낮이고 밤이고 같은 차인데 다른 차를 마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인 생활은 <두 잔의 차>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복이 많아 차밭과 옹달샘이 있는 절 안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복을 ‘어찌 나 혼자만 수용하리’라고 하면서 도반들과 차향을 나누겠다고 하는 그의 메시지는 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시는 햇빛차와 달빛차의 대립항을 포인트로 해서 항시 차를 생활화하면서 깨달음을 찾아나가는 스님의 성찰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어 감동을 준다. 비교와 대조는 인식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는가. ‘열무 국물김치’와 ‘군고구마’를 다식으로 삼고 찻잔에 ‘달그림자 드리운 달빛차’를 도반들 오라 해서 마시겠다는 것은 월강의 낭만적이고 인간적인 그의 부드러운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고, 이 시에는 달빛처럼 세상을 환히 비추고 싶어하는 시적 화자의 마음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시의 첫 행 ‘나는 복이 많아’는 삶의 순리적 지향점을 제시하는 바, 순행적 사고는 전체 시를 관통하는 그림자 형상이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시 <달빛차를 마시며>, <여래차>, <차를 우릴 때>, <차나무>, <어린 차나무들>, <햇찻잎>, <찻잎의 물방울> 등의 차시에는 어디서 누구와 어떤 차를 어떻게 마시고가 문제가 아니라 찻잔을 앞에 하고 앉아 그 향미에 젖어 다삼매에 빠지고 싶다는 진정한 차인의 자세가 담겨 있다. <찻잎의 물방울>이란 시, “실로 한가로운 중에/ 포근히 한숨 자고 일어나/ 녹차밭에 물을 주네/ 이처럼 단순한 울력으로/ 찻잎은 더욱 생기발랄하고/ 촉촉한 잎사귀마다/ 맑은 햇빛이 찬란하네/ 선사님들의 말씀처럼/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충만하시네/ 내 오늘 찻잎의 물방울마다/ 비로자나불이 시현하심을/ 명확히 깨달았네”는 곧 모든 것을 버리면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임을 보여준다. 그는 다도의 궁극적 목적은 오로지 깨달음에 이르는 것임 또한 이 시를 통해 보여준다.
길을 가든
산을 오르든
발 한번 삐끗하면
엎어지거나
나둥그러질 때가 있지요
인생길 역시
먼 눈 팔거나 해서
발 한번 삐끗하면
그와 다르지 않아요
옛날에
도를 묻는 수좌에게
선사는
이같이 대답했다네요
“네 발 밑을 보라.”고
- <발 밑을 보라> 전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이라면 자기 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는 유한한 생명을 유지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월강은 <발 밑을 보라>뿐만 아니라 <봄맞이> <쑥> <목련화> <설매> <할미꽃> 등의 시를 통해서 인생의 본질을 말하고자 한다. ‘쑥’ ‘목련화’ ‘설매’ ‘할미꽃’ 등은 전부 엘리어트가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들이다. 좋은 시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원관념을 보조관념으로 치환해서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다. 월강은 이런 기본적 시론을 잘 인식하고 깨달음의 시를 우리에게 전하면서 인생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전해주기에 월강의 시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툴게 잘못 가는 ‘인생길’이란 다소 추상적인 실체를 이해하기 쉽게 ‘먼 눈 팔거나 해서/ 발 한번 삐끗하면’으로 구체화해서 비유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관념’을 ‘구체적’으로 환치시켜 놓았다. ‘네 발 밑을 보라’는 말로 그는 ‘절문이근사’라는 인문학적 가치를 보여주고자 한다. “고개 힘이 없어/수그리고 있는 게 아냐/중생들에게/조고각하(照顧脚下)를/설한다니까”라는 <할미꽃>은 깨달음에 이른 지혜를 중생들에게 전하려는 스님의 원형이 ‘할미꽃’ 속에서 절묘하게 형상화되어 있다. 월강의 시들은 차향뿐만 아니라 인문학의 향기를 진하게 품고 있다.
차밭골 금어샘은
마사토 틈새로 나는
맑고 맑은 물이
찰랑 찰랑
바람 부는 어느 날
*비설처럼 착지한
암벽의 고란초
얼마나 신비로운가
산비탈 아래
옹달샘
청량한 물맛으로
목마른 생명들 살리니
얼마나 고마운가
- <금어샘> 전문
금어사의 ‘금어샘’은 월강 시에서 여러 번 제재로 쓰이고 있는데, 이 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산비탈 아래/ 옹달샘/ 청량한 물맛으로/ 목마른 생명들 살리니/ 얼마나 고마운가’라는 마지막 연이다. 이 표현은 많은 의미를 나타낸다. ‘산비탈 아래’가 품어내는 연상에 주목해 보면, 옹달샘의 생태적 매력이 대단하다는 인식에 다다를 수 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시인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묘사력의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청량한 물맛으로/ 목마른 생명들 살리니/ 얼마나 고마운가’는 옹달샘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종교적인 이상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 시의 압권이라면, ‘바람 부는 어느 날/ 비설처럼 착지한/ 암벽의 고란초’라는 두 번째 연이다. 상상을 통해 언어의 집을 짓게 됨으로써 형상화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상징과 연결되어 공생하면서 사는 공동체적 존재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며, ‘틈새’ ‘바람’ ‘비슬’ ‘암벽’ ‘산비탈’ 등 열거한 시청각적 이미지는 모두 삶의 아슬아슬한 극적 이미지들로 시인의 바이오필리아에 대한 염원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시는 함축과 내포가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어 감동을 준다.
어떠한 사물을 볼 때, 무엇을 보았느냐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느냐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보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은 소재에 그치는 얘기지만 어떻게 보느냐는 그 주제와 표현방법까지를 포함하는 범주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위해서는 형상화 능력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물 인식의 눈이라고 하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하겠다. <숲속의 명상>이란 시와 마찬가지로 월강 차시에는 <숲길 시화전>이란 시도 있어, ‘숲속’이 여러 번 나온다. ‘싱그러운 숲길 시화전은/ 흔하게 볼 수 없는/ 산중의 경사라면서/ 꾀꼬리새는 축가를 부르고/ 다람쥐는 손뼉을 친다.’라는 두 번째 연은 선명하게 부각되는 형태의식이나 주제의식의 상상화에 힘입어 작품의 문학성을 견인한다. 두 번째 연의 ‘꾀꼬리’와 ‘다람쥐’의 축가와 박수에 이어, 마지막 연에 ‘공원을 산책하던 사람들’ ‘약수터에 오가는 사람들’로 확장해나감으로써 자연과 사람이 함께 지배적 심상이 되어 문학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아침 해돋이 때로부터
푸른 허공과 같은 마음을 열고
사뿐사뿐 솔밭길을 거닐며
산새들과 인사를 나눈다
이끼 두른 천년바위
무언설법의 여래상 앞에
향불 사르는 마음으로
합장 반배 올린다
하루의 한가로운 삶은
하루 신선이라 하지 않는가
되도록이면 망상부리지 말고
번뇌는 시냇물에 띄우리라
혜가는 소림사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 달라 했지만
나는 마음 편케 사는 법을
숲길에서 깨달았네
- <숲속의 명상> 전문
월강 스님의 일상은 ‘아침 해돋이 때로부터/ 푸른 허공과 같은 마음을 열고/ 사뿐사뿐 솔밭길을 거닐며/ 산새들과 인사를 나눈다’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솔밭’과 ‘산새’라는 자연친화적 세계관을 축으로 한다. 이는 월강 시인의 현실 인식과 작가정신의 발로다. 그는 언제나 시 작업을 통해 자연이라는 미래적 유비쿼터스 환경 안에 머물고자 몸부림치며 문명 속에서도 자연을 벗하는 선량한 시민으로 남으려 한다. ‘혜가는 소림사 달마에게/ 마음을 편케 해 달라 했지만/ 나는 마음 편케 사는 법을/ 숲길에서 깨달았네’라는 결구를 보면, 자성의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차인의 정신을 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시는 에코필리아와 토포필리아가 함께 만남으로써 문학적 가치를 발한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나’를 철저히 탐색하면서 개인을 초월하여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숲속에서 명상하는 이유일 것이다. ‘산새들과 아침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여는 바와 같이 월강 시인은 항상 푸른 허공과 같이 마음을 열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 할 공존의 미학을 추구한다. ‘이끼’ ‘시냇물’ 등의 시어는 월강 시인의 에코필리아적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핵심 제재라 하겠다. 이런 제재가 여러 시에 일관되게 전개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의 시정신은 ‘공존’과 ‘공생’을 축으로 하는 ‘세계일화’ 정신에 있다고 해도 좋을 듯싶다.
그의 시는 단순히 삶을 소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이 과연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철학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미적 감동과 시적 신뢰를 획득한다. 이런 그의 세계관은 ‘방문 앞에 있는/ 녹차밭을 보면서/ 차 마시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생차잎을/ 따먹기도 하고/ 대접으로 차 마시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라고 하는 <드문 일>이란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자족과 자성이 특출한 그의 시적 상상력을 만나면, 어떤 사물도 속살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풍경의 이데아는 ‘자족’의 미학 속에서 ‘평화’라는 하얀 살결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도시문명의 염증에 시달리는 우리네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어서 감동을 준다.
다락실 옆으로
흐르는 시냇가에
고란초 있는 차샘은
드물 것이다
방문 앞에 있는
녹차밭을 보면서
차 마시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생차잎을
따먹기도 하고
대접으로 차 마시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 <드문 일> 전문
언술로 쓴 이 시에는 <담담하게 살아요>란 시, ‘꿈 같은 세상살이/ 애착심도/ 집착심도/ 다 버리고/ 오로지 담담한/ 달처럼 살아가요’라고 하며 고백하는 달관한 사람의 자족적인 자세가 듬뿍 담겨 있다. 이런 세계관은 ‘세상만사/ 한 생각 차이로 말미암아/ 희로애락이 전개되는구나’라고 쓴 <한 생각 차이>라는 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차를 마신 만큼 선이 되고, 차를 즐긴 만큼 인의를 배우고 중정의 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가의 근본이 되는 중도 또한 스님이 추구하는 인생관이기에, 스님은 다락실 옆으로 흐르는 시냇가에서 고란초 있는 차샘과 방문 앞에 있는 녹차밭을 보면서 차 마시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하고 있다. 속세의 땅이란 땅은 ‘억’소리가 나는 투기의 현장이고 문명의 이기가 손을 뻗쳐 삭막하기 그지없다. 가슴에 문을 닫고 나와 나, 나와 식물, 나와 동물 사이에 벽을 높이는 단절의 공간에서 자기도취에 만족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이라면 월강은 가슴과 눈을 열어 자연이 보내는 발신음을 듣고자 숲속에서 언제나 ‘차인’이란 내포적 자아를 취한다.
‘느림’과 ‘절제’의 미학이 우리 삶에 필요하다는 논리적 접근은 실증주의와 물질주의가 현대 사회의 특성으로 파악되면서부터 줄곧 호명되어 왔던 이슈다. 월강 시인 역시 지성인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저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래 <인생이란 수레바퀴>라는 시는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철학적 명제를 ‘수레바퀴’라는 제재에 담아 심리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느림의 미학으로 응축되는 ‘절제’의 미학을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큰길, 작은 길, 샛길’과 ‘큰수레, 중간수레, 작은수레’가 인생의 미적 거리라면, 과거와 현재의 거리, 실감과 정서의 거리는 월강 시의 미적 거리가 아닐 수 없다. 삶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대상을 응시하고, 그 대상을 직접적인 시의 대상으로 삼되 미적 경로라는 프리즘을 가지고 미적으로 응시하는 월강 시인의 미의식이야말로 바로 시를 쓸 때 기본으로 삼아야 할 자양분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세계관과 인생관은 ‘마음이 부자인 인생을 살라하네’로 시작하는 <지족>이라는 시에도 잘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시에 두루 나타난다.
오늘도
인생이란 수레바퀴는
큰길 작은길
샛길에서도
덜컹덜컹 삐뚤삐뚤
굴러가는데
쉴곳을 만났으면 쉬어가야 하는데
목마르고 배고프면 먹고 가야 하는데
헐떡이며 그냥 달리네
큰수레 중간수레 작은수레
저마다 꿈을 찾아서
모두 모두 행복을 찾아서
날이면 날마다
저물도록 달려가네
- <인생이란 수레바퀴> 전문
자아와 세계와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게 서정의 원리다. 그래서 서정 장르의 특성을 한마디로 ‘세계의 자아화’라 한다. 문학은 ‘자아’와 ‘세계’라는 두 층위간의 결합 양상에 따라 갈래가 생기지만, 시의 경우는 대체로 자아와 세계가 만남으로부터 생성된다. ‘쉴 곳을 만났으면 쉬어가야 하는데/ 목마르고 배고프면 먹고 가야 하는데/ 헐떡이며 그냥 달리네’라는 시인의 현실진단은 대단히 예리하고 적확하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힘들어도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문명비판적 시각은 황금만능주의로 물든 시대상에 비추어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이 시의 서두는 ‘오늘도/ 인생이란 수레바퀴는/ 큰길 작은길/ 샛길에서도/ 덜컹덜컹 삐뚤삐뚤/ 굴러가는데‘와 같은 비정상인 현실의 진단으로 시작하는데,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모습이고 현실이다. 월강 시의 시적 가치는 그 만남의 반응이 반성적 성찰, 즉 깨달음으로 응축된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삶에 대한 올바른 대처가 필요하다는 월강 시인의 시정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비판정신은 작가정신의 발로다. 여기에 지성인적인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갈 바람이 휘몰아서
나무 뿌리 위에 포개졌던 낙엽들
“숨차고 목마르다.” 하는 소리
구름이 들었는지
오늘은 비를 내린다
기다리면 봄이 온다는 바람으로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
차가운 비 내려도
얼고 마른 입술 벌려 배시시 웃는다
땅속 옹크리고 자던 꽃씨들
실눈 뜨고 살그머니 일어나
“무슨 소린가?”
가만 귀 기울이게 하는 겨울 빗소리
- <겨울 빗소리> 전문
외부 세계의 충격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이 인간의 존재 양식이라 할 때, 월강 시인의 경우, 이 반응은 단순한 수동적이 아니라 그 외부 세계를 자기가 갖고 싶어 하는 세계로 변용시켜 자아와 세계가 동일성을 이루도록 하는 능동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마음은 수동적 기록자인 동시에 능동적 참여자인 것이다. ‘낙엽들/ “숨차고 목마르다.” 하는 소리/ 구름이 들었는지’라든지 ‘꽃씨들/ 실눈 뜨고 살그머니 일어나/ “무슨 소린가?” 가만 귀 기울이게 하는 겨울 빗소리’ 라는 인식은 사물과 소통하는 것으로 시적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마음의 토양이 그만큼 비옥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의 시에 스며든 이런 동화의식은 공생의 가치를 고양시키기에 독자와 정서적 공감대를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월강 시인의 시세계는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중정中正의 철학 세계요,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의 세계이며 좀더 불교적인 말로 표현하면 중도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가까스로 축생보를 피했을 뿐인데
미련퉁이는 그것도 모르고
몹쓸 죄업을 되풀이하네
사람 몸 다시 받아 나기가
마치 바다에 떨어진
바늘을 찾기보다 어렵다는데
- <미련퉁이> 전문
월강 시집 해설의 마지막 시로 <미련퉁이>를 놓는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생과 사는, 존재의 양면성이면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고자 한다. 삶은 언제나 연기 속이다. 죽음은 살아 있는 자의 운명이므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월강 스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윤회’로 승화되는 불교적 교리 속에서 이해된다. 시의 매력은 ‘윤회’라는 불교적 화두를 이해하는 데 있다.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고 하는 사상으로 불교에서는 중생이 삼계육도(三界六道)의 세계에서 미(迷)의 생사를 거듭 하는 것을 말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전통적 윤회관을 수용하여 불교적, 논리적, 핵심적인 가르침으로 정착시켰다. 알고 보면 ‘금생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가까스로 축생보를 피했을 뿐인데’ 인간은 그걸 모르는 ‘미련퉁이’라는 스님의 이 시는 ‘깨달음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 시를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월강 시의 근원은 깨달음의 인식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보는 일상이, 사물이, 사건이 이렇게 불교적 윤회에서 풀이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은 아니다. 시에 나타나는 우리 삶은 본래적 의미의 생성적 질서와 그 환희의 인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는 마음을 열어 놓고 사물과 교감을 나누고 사물의 진면과 교응하길 좋아한다. 그의 직관과 관조는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어서 어떠한 인위도 만들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윤회를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 특히 강조해왔다. 그러나 스님은 윤리도덕의 차원을 넘어선 해탈의 차원에서 이 윤회를 강조하고 있다.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열반이나 극락왕생을 보다 중요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 한 생에서 다음 생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데 대한 관심보다, 현실의 삶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깊이 다스려서 언제나 고요한 열반의 세계나 불국토에 있는 것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고 점검하도록 하는 데 치중하였다고 하겠다.
3.
시인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일상에 자리한 집착과 무분별심을 보면서, 그것을 깨달음으로 승화시켜 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의 시풍은 다도의 ‘중정’과 불교의 ‘윤회사상’을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하여 시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중도사상은 월강 시인의 시를 감동으로 이끄는 특질이라 할 것이다.
제대로 시를 볼 줄 아는 독자들은 위대하고 큰 것이 주는 압도감보다 작고 절실하고 당연한 것이 주는 소박한 감동에 더욱 매료되는 법이다.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이를 구원해야 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이다. 힘든 생의 극복을 위한 시작이 큰 감동으로 다가서는 것은 시인의 이러한 노력이 시 속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잴 수 없는 행복을 잴 수 있게 구체어로 치환하는 능력은 시인으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숲속의 식물성적인 푸르름과 찬잔 속의 평화로움과 여유로움에 펼쳐지는 ‘선다일여’의 향연은 <등불>, <기도>, <자성불>, <꿈>, <기다림>, <반성>, <무서운 과보>, <석간송>, <행복한 보리수>, <행복한 오늘>, <세 천사>, <억새꽃>, <차꽃이 보이는 방에서>, <불타난봉>, <인신난득>, <화택의 아이들>, <주인공 부르기>, <나는 누구인가>, <심지광명>, <구름을 보아라>, <원숭이의 꿀사발>, <야릇한 마음>, <사막의 거목>, <내 둘레의 벗들>, <낮달>, <물소리>, <끽다불>, <공>, <확연무성>, <허수아비>, <허공>, <담쟁이>, <아기 섬초롱꽃>, <섬초롱불><연꽃>, <풀꽃>, <솔 그림자>, <달칯차를 마시며>, <햇차잎>, <목련화> <설매>, <할미꽃>, <샛별>, <까치를 보며> 등 좋은 시의 등장으로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바로 이런 시적 원리를 통해 시가 생성된다는 데서 우리는 그의 시가 힘을 갖는 이유를 ‘선다일여’를 통해 찾을 수 있다.
동래 차밭골 금어사라는 작은 암자에 살고 있는 스님이기에 그의 시적 질료들은 향토적이고 토속적이면서도 일상적인 것들이다. 작고 고개를 낮추고 사는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그렇다고 주제가 거창하거나 수사가 화려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큰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건 왜일까.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에 눈길을 주고, 자기 것보다도 남의 것을 더 챙겨주는 배려심이 큰 때문일 것이다. 상생과 공존을 지향하기 위해 사물을 다도의 세계관으로 호명하고, 그것들에 내포된 의미를 찾아 불교적 삶의 원리로 환치시켜내는 탁월한 능력도 한 원인이라 하겠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에서 작고 소박한 깨달음을 삶의 태도를 취하기에, 그의 시가 감동적으로 읽히는 것이리라.
이 시집에는 삶에 힘들어하는 이를 구원해야 할 작가적 사명이 충분히 펼쳐져 있다. 현대시의 독자들이 타락된 시어에 지쳐 있을 때라 더욱 큰 감동으로 다가선다고 하겠다. 월강의 시선은 작고 여리고 애틋한 사물들에 대한 애정으로 물결친다. 주변에 널려 있는 사물들을 인격화시켜 존재 가치를 고양시키는 시적 작업이 전체 시를 관통하며 그림자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인 스스로가 삶의 부피와 무게를 포용하겠다는 뜻이리라.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원리를 발견하여 시로 승화시켰기에 독자들은 그의 시적 지향성과 미적 진보에 신뢰를 보낼 것으로 믿는다. 이런 독자의 신뢰는 차향이 나는 ‘양은순 문학의 길’을 오르며 숲속 사물에 눈길을 두고, ‘깨달음’을 찻잔에 담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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