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9] 장덕희(張德姬) - 눈물 속에, 감사 속에 3. 나는 기적을 지켜 보았다 - 3
21 며칠 후에 회개를 하고 찾아온 민 집사의 손에는 토마토 한 광주리가 들려 있었다. “권사님, 이 토마토 잡수어 보세요” 내 꾸중을 듣고 돌아간 민 집사가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그녀는 회개하고 교회를 다시 찾아왔다.
22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 토마토를 시원한 물에 담가두고서 오는 이마다 하나씩 주었다. 그리고 나도 식기에 잘게 썰어서 세 번을 먹었다. 한 가지 기적이 생겼다. 그 과일을 먹고 난 뒤에 내 몸은 어지러운 기운도, 아픈 것도 없어졌다. 건강을 되찾게 된 것이다.
23 생로병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건강을 지켜주심을 뼛속 깊이 체휼하게 됐다. 하루는 교회에 우물이 없어서 우물을 파게 되었다. 그때 우물 파는 데 사용하는 괭이를 쳐다보면서 괭이와 대화를 했다.
24 “괭이야.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 이 세상의 숱한 괭이들 가운데 너는 특별히 선택받았어. 아마 너를 만든 사람은 선한 공적이 많은 사람이었고, 너 역시 참 착한 일을 했는가 보구나. 어떻게 해서 통일교회의 우물을 파게 됐니.
25 너는 너 자신의 가치를 알고 있겠지. 6천 년 고대하던 인류의 소망을 설파하는 이곳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의 목마름을 흡족하게 충족시켜 줄 우물을 파고 있는 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 아울러 나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해 봤다.
26 59년 6월 20일, 목포에서 해남으로 가게 됐다. 김소래 집사의 딸이 해남에 사는데 ‘꼭 우리 교인을 만들어 달라’는 간곡한 부탁 때문에 가게 된 것이다. 해남에 도착해서 창고로 쓰던 방 한 칸을 1천1백 원에 얻어 깨끗하게 단장한 후 전도를 시작했다. 얼마 있지 못하고 그 집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27 교회를 집 안에 두면 집이 망한다고 야단들을 하면서 방을 비워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입장에 있을 때 서울에서 전보가 왔다. 선생님께서 지방 교회를 순회하시는 도중에 해남에 들르시겠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해남에 찾아오셨다.
28 집회 장소가 없어서 김소래 집사 딸 집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다. 집회를 마치고 선생님을 환송한 뒤에 나는 벽을 붙들고 분함을 참지 못해서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부족해서 이렇도록 비좁고 누추한 곳에서 집회를 가졌다는 것을 생각하니 몹시 슬퍼지는 심정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29 그 후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하나님께 간구했다. 우리가 마음 놓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예배 장소를 달라고. 결국 1만 5천 원짜리 방을 얻을 수가 있었다. 61년 7월에는 학생들 40여 명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