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 : 제목 <심경>에 나오는 심은 심장이라 하면서 핵이요, 중심이라 했는데.. 내용에 나오는
"심무가애"에서 심은 마음인데.. 제목에 나오는 심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요?.
효진 : 저만 그랬나요.. <심경> 제목에 나오는 심을 마음으로 알다가..
<심경> 설명을 들으며 마음이 아닌 핵이요, 중심이라고 알았을 겁니다.
원전에 충실하라는 것을 벗어나고 싶지 않지만.. 심경은 서연님 말처럼 <마음 경>이라 해도 무난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나 '심경'의 뜻은 '반야부의 요약 핵심경'이라고 새기는 것을 잊지 마세요.
마음을 뜻하는 언어로 의, 식, 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요^^
이 셋의 차이가 무엇인지 기억하나요?^^.
서연 : 의는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알고픈 마음, 식은 안으로 갈무리하려는 수동적은 마음으로 기억이 되고,
심은 그 둘이 작용하는 근본 마음으로 마음 자리라고도 하지요^^..
맞지요?^^..
효진 : 딩동댕~..^^.. 그런데 <잡아함경>을 보면 마음을 주로 의와 식으로 사용할 뿐.. 마음의 근본인 심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인도인들은 근본자리인 마음보다 실제로 작용하는 알려는 마음과 기억하는 마음에 온통 관심을 집중한 것 같아요. 근본 자리인 마음은 그렇게 있는 것이니 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거나..
고대인들은 일체는 하느님에게서 라고 하니.. 시간이 흐르면서 그럼 하느님은 어디서?.. 하는 의문을 갖게 되고..
만물의 근본은 물이라 하니.. 후세로 가면서 물은 어디서?.. 하다가 물은 산소와 수소로 나뉜다는 게 발견됩니다.
그처럼 마음의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이 처음에는 많은 관심을 받는데.. 그 가운데 소수는 그런 의와 식은 어디서..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거지요.
<반야심경>이 나올 때는 이미 그런 의심에 답을 하는 선지식이 있었다는 게 됩니다.
그 증거가 바로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심무가애' 입니다. 여기서 마음은 중심이나 핵이 아니라.. 의와 식이 작용하는 자리인 근본마음입니다.
<반야심경>은 <금강경>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카피한 겁니까?.
서연 : 그것을 바탕으로 삼은 것은 틀림없지만.. 카피는 아니라고 보아요.
효진 : 그 말은 <심경>은 부처님 근본 사상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 시대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경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서연 : 그렇다고 봐~요.^^.
효진 : 반야경을 포함한 대승불경은 석가부처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지만..
절이나 땅 속에 묻혀있던 석가모니 설법 뭉치를 후에 발견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참선을 지도하는 선지식[선사]들은 한결같이 주장합니다. 내 앞에 부처님이 나타나면 단칼에 목을 베어라!
그 말은 네가 따 먹지 못할 포도는 결코 니께 아니라고 하는 것이며.. 남의 것이라면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면서
자신이 아닌 상대를 자기 주인으로 섬기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서연 : 그러나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들은 어리석은 자들은.. 불상의 목을 따거나 절에 불을 지르는 짓을..
얼마전 청와대를 시민에게 오픈했는데 유치한 자들이 그곳에 있던 불상을 훼손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들은 지들이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지..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른 로마 병사와 무엇이 다른가요.
효진 :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고 것을 말하기 전에 분명히 색은 색으로, 공은 공으로 알아야만 한다고 했잖아요.
우리 앞에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 색 세계를 부정하는 것은 반야심경을 모르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기에 공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사회 법을 어기지 않고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들은 얘기니.. 젊을 때 들은 얘기인데.. 진짜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강원도에 본사인 월정사가 있고 그 안에 선 수행과 법이 살벌하게 살아있다는 유명한 도량인 상원사가 말사로 있지요.
잘 모르겠지만.. 과거에 선 수행을 하는 승려들은 늘 배가 고픕니다.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본사나 신도들이 공양을 충분히 마련해 주는 것은 2000년 대 이후 라고 봅니다.
그것은 선 수행으로 유명한 상원사라고 예외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본사인 월정사는 항상 공양물이 풍부했죠.
상원사에서 여름 안거를 끝낸 승려들이 월정사로 내려오면.. 그날 절은 엉망진창이 된다고 합니다.
부처님 전에 올린 공양물을 안거를 마친 승려들이 허락도 없이 아그작 아그작 거덜을 낸다는 겁니다.^^.
서연 : 어찌 그럴 수가 있지요. 계율이 엄연히 있고 그것을 지키는 승려들이라면!.
효진 : 말했잖아요. 부처님이 나타나면 그의 목을 치라고!.. 그렇게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때 부처님은 외부에 있는 불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기를 구속하고 있는 거대한 파워입니다.
서연 : 그건 바로 기독교인이 믿고 의지하는 그들의 신 아닌가요?.
효진 : 바로 그것입니다.
수행자는 부처님이 되려고 하는 자이지.. 부처님의 종이 되려는 자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때
부처님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닌 마음 안에 있는 것이죠.
그러니 내 마음 안에서 나를 조종하는 나 아닌 주인이 있다면 그런 자는 죽여야만 나의 본 마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서연 : 기독교인으로는 상상도 못할 엄청난 파사현정이네요.
효진 : 잠깐.. 기독교와 불교는 패러다임이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즉 둘을 비교하면서 이게 저것보다 낫다고 함부로 재단 할 수 없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축구와 야구 룰을 동등하게 놓고 비교하는 것과 같아요.
<반야심경>에서 보면.. 색은 겉[현상] 세계의 법으로 지키지고.. 공은 속[본체] 세계의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속이 겉을 덮을 수는 없지요.
예를 들면
깡패를 대할 때와 검사를 대할 때..
깡패라 하여 두려워 하고, 검사라 하여 굽신하는 등 마음 상태가 달라지면 아니됩니다.
속으론 깡패이든 검사이든 차별을 두지 않아요. 허나
깽패를 검사처럼, 검사를 깡패처럼 대하면 아니 되지요.
겉으로는 깡패는 깽패로 분명히 알고 상대해야 하고, 검사는 검사로 알면서 대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서연 : 지금.. 그런데 검사가 깽패가 된 세상이라고 말하려는 거죠?^^.
효진 : 그게 아니라.. 검사는 깽패가 아니듯.. 검사는 검사다워야 검사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려 했는데요^^..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라고 하셨어요.
업보의 세계는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상 세계입니다.
작자가 없다는 건 나의 주인은 실체가 없는 공이라 하는 거구요.
이 법은 나 뿐 아니라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러니 별 것도 아닌 걸 듣고 발끈 발끈 화를 내는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지요.
서연 : (인상을 팍 찡그리며) 지금 저를 보고 훈계하시는 거예요!!!
효진 : (흠짓 하면) 공이 무언지 설명하고 있는데..
서연 : (아차 하면서) 가끔 얘들이랑 남편은 군기를 잡아야만 하거든요..
효진 : 공이란 십계처럼 발끈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발끈할 자가 없다고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발끈 발끈합니다.
발끈하는 나가 있고, 발끈하는 너가 있다는 거지요.
<심경>에 나오는 '뒤바뀐 헛된 생각[전도 몽상]' 이란..
상원사 수행 승려들이 월정사에 벌인 행패도 되지만..
발끈하는 자가 본래 없는 데.. 마치 주인 것처럼 행세하는 생각[에고]이
비로 전도된 생각입니다.
서연 : 불교를 접하며 문득 문득 놀라는 것은.. 분명 신과 같은 절대자를 세우지 않고 있음에도
그런 절대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 이르면
공이라 하듯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데도..
어떤 절대자 보다도 더 위대한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신묘한 경험을 하게 돼요.
효진 : 그러기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묘한 (주문)이라 하는 거 아니겠어요?^^.
서연 : 그렇겠지요.. 심무가애..
얻을 것이 없음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해
마음이 걸림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갑니다.
제가 보기엔
뒤바뀐 헛된 생각이 떠나니.. 공을 이해함[깨달음]
마음이 걸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어지는데.. 색 세계에서, 그리 될려면
반야바라밀을 열심히 행해야 하고.. 방법
열반에 이른다.. 공을 성취한[깨친] 결과가 되네요.^^..
아무래도 <반야심경> 내용은 너무 어려워요..
효진 : 이해가 어려운가요 아니면 실천이 어려운 것 같은가요?..
서연 : 둘 다겠지요. 안 것 같다가도 다시 깜깜해 지니.. 어째서 눈,귀,코,입,촉이 없다는 거지? 하게 되거든요.
효진 : 그런 면이 있어서 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탐욕을 버리라는 불교적인 삶 태도가 아닌..
탐욕을 멋대로 펼쳐서 경쟁에서 이기는 자가 존경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구조입니다.
마음에 걸림이 없는[심무가애] 자유가 아닌.. 몸에 걸림이 없는[신무가애] 자유를 권하는 사회에서
시민의 정상적인 자유, 평등, 평화가 자랄 수 있을까요..
저 자신이 아이들에게 불교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기 어렵지요..
사회적인 패자의 길을 권하는 것 같아..
아제 아제! 아제 아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