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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10. 마지막 종례의 전달사항 240523
똑똑똑.
신호대기 중인 차. 누군가 내가 앉은 조수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쌤! 히히 저녁 드시러 가세요?”
“야 인마!! 너 왜 하이바 안 썼어? 죽을래? 너 내일 학생부로 와! 알았어?”
신호등의 파란불이 들어왔다.
“네, 내일 봬요!”
효석이가 탄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순식간에 저 앞으로 멀어져갔다. 그리고 그 대화는 우리가 이승에서 서로 나눈 마지막 말이 되었다.
“이 선생, 그거 알아? 지금 우리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데 소년원에 가 있는 애가 하나 있어. 그게 이 선생네 반이고, 다음 주에 복귀한다네?”
“소년원이요?”
그 일이 있기 2년쯤 전, 야근하던 중 말없이 한참 무언가를 읽던 교무부장 선생님께서 마치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름 모를 다른 나라 외신을 전하듯 무심하게 던진 말씀이었다.
남들은 몇 년이 가도 한 번쯤 경험해 볼까 말까, 싶은 일들을 생애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해에 몰아서 다 만나게 되는 듯했다. 복학생, 가출, 자퇴, 흡연, 수업 거부. 하다 하다 이제는 소년원에 갔던 아이가 돌아온다니. 나부터도 소년원에 들어가 본 적이 없고, 그곳에 다녀온 친구도 없다 보니 매체를 통해 접하는 무시무시한 이미지에 급속히 빨려들기 시작했다. 푸른색 수인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은 눈빛 서늘한 소년―이라기엔 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너무 성인이지만―들이 누군가 자기를 건드리기만 하면 살아온 인생 내내 쌓아온 분노를 활화산처럼 분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일촉즉발의 공간. 게다가 그곳에서 살아남아(여기부터 내 머릿속에서는 ‘살아남아’가 ‘그곳을 평정하고’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얼마나 거물급 인사일 것인가! 지금까지 학급 아이들에게 한 것처럼 툭툭 쥐어박고 이단옆차기를 날리다가는 어느 으슥한 뒷골목에서 둔기로 뒤통수를 가격당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이제 조, 종례부터 존댓말을 써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날이 되었다. 조례를 위해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복학생 녀석들과 교실 뒤에 앉아 킬킬대고 있을까, 아니면 책상에 두 발을 올리고 만만해 보이는 녀석들을 으르고 있을까.’
평소보다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을 주고 교실 문, 손잡이를 돌리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교실 분위기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다른 아이들의 것과 똑같지만 아직 때가 덜 묻은 깨끗한 교복을 입은 노랑머리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네가 효석이구나. 인마, 학교에 처음 왔으면 교무실로 담임 선생님을 먼저 찾아왔어야지.”
“아! 그렇네요. 내일부턴 인사 잘 드리겠습니다.”
사실 규모가 작은 시, 군 지역에서는 서로 학교가 달라도 한두 다리만 건너면 대부분 서로의 존재를 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왔어도 ○○중학교의 누구라고 하면 ‘어느 형의 동생, A라는 아이의 친구’ 같은 관계 속에서 쉽게 그 위치를 파악하게 된다. 효석이는 그중에서 꽤 유명한 친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온갖 말썽과 사고를 쳤지만, 천성이 밝고 명랑해서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배, 후배들에게도 귀여움과 사랑을 받는 캐릭터였다. 선후배 사이의 위계질서가 무시무시했던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온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 새로 알게 된 선배 누나와 까르르거리면서 복도에서 정담을 나누고 있어도, 지나가던 남자 선배들이 그 모습을 봐도 귀엽다며 머리를 쓱 쓰다듬고 지나갈 정도로 모두에게 희한하게 사랑을 받는 녀석이었다. 가끔 학급 분위기가 험악해질 때면 자기가 나서서 담임에게 아이들의 의견을 표현하고 때로는 대신 혼나기도 하면서, 담임의 체면도 살리고 아이들에게 쏟아질 분노도 자연스레 삭힐 수 있게 해 주는 윤활유 같은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런 녀석이 어쩌다가 소년원까지 가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을 물어봐도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만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로부터 친한 누나에게 버릇없이 굴었던 후배를 자기가 나서서 혼내주려던 것이 일이 좀 커져서 그리된 것이라고, 억울한 ―억울하지 않은 아이들은 없지만― 면이 좀 있었던 것이라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말주변이 좋으니 어떤 선생님들께는 간사하고 겉과 속이 다른 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무사히 3학년까지 진급할 수 있었다. 자동차 정비 기술을 익히는 데 그렇게 성실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현장 실습을 자동차 정비업체로만 나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로 나가면 특유의 친화력 덕분에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성공적인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을 테니 걱정이 덜했다. 고민은 다른 데 있었다. 녀석이 건실한 업체로 실습을 나가기보다는 그냥 동네에 남아서 하던 대로 배달일을 해서 돈을 모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아이가 살던 도시는 농업이나 제조업보다는 관광업이 주로 활성화된 곳이라 부모가 사업체 혹은 조그만 가게라도 하나 갖고 있지 않고서는 적당한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어려운 곳이다. 공부와도 진작에 담을 쌓았으니, 교사나 공무원이 되는 것도 언감생심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일거리가 바로 배달이다. 고등학교 1학년 생일만 지나면 원동기 면허를 딸 수 있어서 불법인 것도 아니다. 물론 근로계약서를 쓰고 정식 직원으로서 배달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배달을 하면 건별로 보수를 받기도 했지만, 꾸준히 일하는 경우 주 단위나 월 단위로 급여를 받는 일이 흔했다. 효석이네 아버지는 시내를 돌며 파지를 모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은 아직 생계 일부를 함께 꾸려갈 의지가 없었다. 자연스레 효석이는 배달일을 뜨문뜨문하면서 자신의 용돈과 생활비를 마련했다. 최저 시급이 5천 원을 조금 넘던 때에 학교엘 다니면서도 저녁과 밤에만 하는 배달 일로 월 200만 원 전후를 벌게 되니 굳이 손톱에 빠지지도 않는 기름때 묻혀 가면서 2교대로 일하면서 더 적은 돈을 받는 선택을 한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도 효석이는 출근하던 길이었다. 사실 그전에도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아이들이 있었다. 2012년에 한 명, 가냘픈 체구였지만 강단이 있어 보였던, 할머니와 둘이 살던 여학생. 2013년에 또 한 명. 수업 시간에 무슨 이야기를 해 주면 가만히 듣다가 “진짜요?” 하면서 살면서 그런 이야길 처음 들어본다며 신기해하던 남학생. 담임으로 만나진 않았어도 수업 시간에 만났던 아이들이고 그 예쁠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게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만나는 아이마다 오토바이를 제발 안 탔으면 좋겠고, 만약에 불가피하게 타더라도 제발 과속하지 말고, 와리가리(핸들을 급격히 꺾으면서 오토바이를 좌우로 흔들며 타는 것)하지 말고, 칼치기(앞 차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추월하는 것)하지 말고 하이바는 제발 좀 쓰라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그날 만난 효석이도 헬멧을 쓰고 있지 않았다. 아마, 하도 같은 말을 많이 하다 보니 헬멧을 쓰지 않은 효석이의 안전도 안전이지만 내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에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회식 자리에 앉은 나는 효석이를 비롯한 아이들의 철 없음을 나무라고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고 아이들의 시급을 떼어먹는 불량한 업주들을 흉보고 아이들에게 안전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는 지역사회를, 교육청을, 정부를 욕하며 술에 잔뜩 취했다.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가물가물한 채로 일어난 아침 핸드폰에 와 있는 메시지에 취기가 순간 싹 달아났다. 부고라니.
회식하러 가던 선생을 보고 효석이도 한 잔 생각이 났던가 보다. 새벽 늦게 알바가 끝난 뒤 그즈음에 연락되는 친구들을 모아 술을 한 잔 걸쳤단다. 그래도 눈을 좀 붙여야 아침에 학교엘 갈 수 있을 테니 술을 마신 채로 오토바이에 올라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찬바람 맞아가며 남이 먹을 걸 나르던 그 피로가 취기와 함께 몰려왔을 것이고, 집으로 간다는 마음에 긴장이 풀린 그 몸은 아마 도로의 울퉁불퉁한 부분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 짧은 순간 아이는 오토바이에서 날아올라 하필 거기에서 허공을 가르고 있던 전봇대에 부딪혔고, 그 늦은 새벽 그곳을 지나는 행인을 만나지 못해 신고가 늦었다는 나쁜 우연들을 거듭 만났다.
일과를 마치자마자 달려간 그날 저녁 효석이의 빈소에서 효석이 아버지를 처음으로 뵈었다. 전화로 늘 못난 자식을 맡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던 그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인생이 허망하다는 것을 느낀 중년 남자의 얼굴은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 그 자리에 계시는 것만 같았다. 셔츠 속으로 귀퉁이가 보이는 색이 바랜 손목의 문신 그 빛깔이 아버지의 지금 모습 같아서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좋은 기회라도 만난 양 소주를 짝으로 갖다 놓고 마셔대고 있는 효석이의 친구인지 거지새끼들인지 모를 철부지 미성년자들을 보고도 뭐라 한마디 말이 떨어지지 않아 못 본 척 돌아 나왔다. 빈소가 있던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에 앉아 끊었던 담배를 물었다. 목구멍을 따갑게 하는 그 연기를 뿜으며 문학 교과서 학습활동에나 나올 법한 혼잣말을 연신 뱉었다. 그날 저녁 좀 더 다정하게 말해 줄걸. 따뜻하게 말해 줄걸. 회식 간다고 말하지 말걸. 그러나 전해질 수 없는 공허한 말은 허무함과 아린 마음만 더 키울 뿐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입관을 마치고 장지로 가는 길 중간에 학교가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졸업을 못 하고 죽으면 한이 맺히니 매장이나 화장을 하기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한 번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 주는 게 지역의 풍습이라고 했다. 화창하게 맑은 날 오전, 관을 실은 운구 차량과 버스가 학교 운동장에 들어왔고 효석이의 동생이 형의 영정 사진을 들고 버스에서 내려 3층 교실로 올라왔다. 그해 효석이의 담임은 자동차과의 박 부장 선생님이셨지만, 1, 2학년 내리 담임을 맡았던 내게 마지막 인사말을 하라고 말씀하셨기에 이미 교실에서 효석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실 뒷문으로 효석이는 천천히 들어와 제 자리에 앉았다. 검은 옷을 입은 어른들이 최선을 다해 교복을 차려입은 아이들을 다독이는 가운데 나는 마지막 종례를 시작했다.
“그동안 고마웠다. 덕분에 행복했다. 마지막 종례의 전달 사항. 천국에 가서도 행복할 것.”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그렸던 말들은 음성이 되어 밖으로 채 다 나오지 못하고 울음 속에 묻히고 말았다. 검은 옷과 교복들이 남긴, 긴 울음이 꼬리를 끌고 교문 밖으로 사라진 뒤 나는 학교에서 5분만 걸으면 닿는 바다로 향했다. 백사장까지 나가면 불어오는 바람에 버티고 서있지 못하고 쓰러질 것만 같아서 바다에 수직으로 잇닿은 골목의 끝에 서 있는 전봇대에 기대섰다. 그리곤 아마 내가 세상에 처음 나왔던 날 이후로 가장 많은 울음을 쏟아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울음은 그 시간 이전과는 다른 선생이 하나 태어나게 된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해 내가 정한 급훈은 금연이었다. 황‘금’ 같은 인‘연’. 담배 좀 줄이자고, 적어도 학교 안에서나 교복을 입고는 피우지 말자는 의도를 나름대로 위트 있게 표현한 거였다. 아이들이 돌아간 교실에서 홀로 급훈이 들어가 있는 액자를 올려다보며 아이들을 존재 자체로서 대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보여 주는 행동으로써 그들을 멋대로 규정했던 철없음을 반성했다. 찰나의 순간도 뒤로 돌릴 수 없는 내가, 그와 마주한 이 귀한 시간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아이를 내일부터 영영 볼 수 없게 된다면 어떤 태도로 그를 대해야 할까. 나는 스스로를 삼가기로 했다. 후회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건 내가 살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교사들이 흔히 저지르는 심판자, 인도자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흔히 노인들에게 더 가까이 있으리라 마음대로 착각하지만 죽음의 발톱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없다.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면, 아침에 눈을 뜨고 교복을 챙겨입고 버스를 타고 멀쩡하게 교문으로 들어서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귀해 보일 수가 없다.
그래, 오늘 행복해야 하고, 지금 즐거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고,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를 알게 된다.
그때부터, 학생다움이라는 말, 규제와 금지라는 말, 그 말들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 있어야 그다음도 있는 것이다. 삶의 지속, 그것을 위해 선생이 학생에게 해 줄 말은 무엇일까.
살아있기만 하면 괜찮아.
조금 힘들어도 괜찮아.
지금 남들이 너 보고 뭐라고 하든 괜찮아.
그래, 너니까 괜찮아.
이 문장들의 앞 성분을 다 빼고, ‘괜찮아’만 남겨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해 겨울, 해묵은 사진 앨범을 정리하다가 애써 잊고 있던 효석이와 다시 만났다. 무슨 역마살이 끼었는지 학교로부터 시외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여섯 시간은 걸려서야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식을 올린다는 담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식장을 찾아온 우리 반 아이들 사이에서였다. 학생이지만 차비가 제법 들기도 하고, 어차피 서울을 거쳐 와야 하니 서울에서 좀 놀 것까지 생각해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돈을 마련했다고 했다. 부모님의 가게에서 일을 도운 친구도, 단기 알바를 구한 친구도 있었다. 그마저도 안되면 부모님을 졸라 아예 부모님이 차를 몰고 식장까지 온 친구도 있었다.
‘선생님 행복하세요♡’라는 문장을 한 글자씩 아홉 명이 나눠 든 그 사진 속 우리들은 참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속 효석이는 ‘생(生)’이라는 글자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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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음엔 단편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점점 빠져들며 읽으니 제자를 생각하는 선생님의 심정이 잘 담겨있어 감동이 일었습니다. 짧게 살다간 제자. 우리 동창중에 황석영(황수영) 작가가 있지만 정민형도 이에 못지않은 글솜씨를 가지고 있군요. 모아서 책을 출간해도 좋을듯 싶습니다. 응원합니다.
과찬의 말씀!
고맙습니다.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