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6월7일 중국 도문시 봉오동 일대에서 대한북로독군부가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봉오동 전투를 기리는 봉오동 전투의 옛 전적비. 경기연구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답지 답사팀이 관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된 옛 봉오골반일전적지를 살펴보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독립투사들의 이야기가 재조명되고 있다.독립운동가들이 애국계몽운동, 평화시위 등을 통해 나라를 되찾고자 바쳤던 모습들이 새로이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흐름 속에서도 만주지역을 근거지로 무장투쟁을 했던 유산과 흔적들이 분단된 현실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을 더하고 있다.이미 수몰된 봉오동전투지와 당시의 정확한 위치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된 신흥무관학교, 이제는 중국의 영토가 된 백두산요새 등이 그러하다.과거 우리나라의 독립을 가져오는데 밑거름이 됐던 만주 지역 독립유적지의 흔적을 경기연구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와 함께 중국 현지에서 찾아봤다.
■ 봉오동 전투지
대일 무장항쟁이 한참이던 1920년, 대한북로독군부가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던 중국 길림성 도문시 일대는 지금은 저수지가 돼있다.그해 6월4일 북로제1군사령부의 협조하에 신민단 독립군 30여명이 북간도 화룡현 삼둔자를 출발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고 돌아왔다.이 보고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장 아라요시 중위는 다음달 1개 소대와 10여명의 헌병을 인솔해 불법으로 중국 영토인 화룡현 삼둔자로 침입했다. 봉오동 전투는 바로 삼둔자와 근처의 후안산에서 벌어진 소규모 전투에서 시작됐다.일본군은 310여명의 전력을 동원해 봉오동 지역의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두만강을 건넌 일본군은 삼둔자에서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 일본군이 독립군 매복지점 한가운데까지 들어서자 홍범도는 총성으로 공격을 명령했다.매복해있던 700여명의 독립군이 일제히 일본군을 향해 집중사격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발표에 따르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명을 냈고 가변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을 낸 것으로 기록됐다.봉오동 전투는 독립군 부대가 처음으로 연합해서 간도에 침입한 대규모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둔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전투지이지만 지금은 수몰된 채 새로 마련된 ‘봉오골반일전적지’라고 새겨진 비석만이 그 자리에서 역사적 사실을 대신하고 있다.
■ 대종교 삼종사 묘역
대종교는 일제강점기에서 종교라는 한계를 뛰어 넘어 독립운동의 일선에 섰던 민족집단이었다. 대종교의 제2대 교주를 지낸 김교헌은 경기 광주 출신으로,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학문에 출중한 인물이었다.그는 말죽거리 50여만평과 조계사 터 340간의 저택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활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대종교의 초대 교주인 나철이 단군교를 선포하면서 교도가 2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확장됐지만 국권이 침탈된 이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과 포교활동이 어려워지자 1911년 화룡현 삼도구로 총본사를 이전했다.이곳에서 청일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포교활동을 강화해 교도가 3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김교헌은 1916년 제2대 교주가 된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다시 길림성 화룡현으로 옮겼다.그는 1918년 11월 대한독립선언서에 39명 중 1인으로 서명,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21년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로 파송돼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도록 외교 교섭을 벌이기도 했다.그후 독립군과 함께 밀산으로 이동해 1923년 일제의 재만동포에 대한 학살 현장을 보고 비분과 과로로 병을 얻어 분사했다.서일은 북로군정서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끈 인물이다. 1911년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중광단을 조직해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한 인물로, 소련과 만주 등지에서 10여개 독립군 부대를 통합해 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재로 추대된 뒤 항일 독립투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는 이들 세인물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묘소의 주인을 알리는 안내문조차 남아있지 않다.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는 자물쇠만 채워져 있을 뿐이다. 비석조차도 오랜 시간을 그대로 감당해오면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닳아 있었다.
■ 신흥무관학교 터
요즘 흥행하고 있는 영화 ‘암살’에 등장하는 ‘속사포’(조진웅 분)는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매국노를 암살하고자 목숨을 바친다. 그는 신흥무관학교의 마지막 졸업생으로 남다른 총검술을 선보인다. 극중에서 그가 졸업한 신흥무관학교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인물들을 양성하는 독립군 양성학교였다.이회영 선생의 일가가 자금을 지원해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합니하 지역의 땅을 매입해 세워졌다. 신흥이라는 명칭은 신민회의 ‘신(新)’과 구국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이 결합된 것으로, 이 학교가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를 기본으로 독립운동을 목표로 설립된 것을 의미한다.신흥무관학교는 전략ㆍ전술ㆍ측도학 등의 이론과 보ㆍ기ㆍ포ㆍ총검술ㆍ유술ㆍ격검 등 독립군들의 전문적인 군사학교 역할을 수행했다. 1911년 12월 신흥문관학교는 제1회 특기생으로 김연ㆍ변영태ㆍ이규봉ㆍ성준식 등 4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1914년에는 백두산 서쪽기슭에 백서농장을 만들어 대규모 병력이 머무를 수 있는 군영을 마련해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훈련을 하였다.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약 2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그들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일제가 1920년 5월부터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 결국 1920년 7월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됐다.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땅에 만들어진 신흥무관학교는 어둠의 동토를 박차고 항일독립운동의 싹을 틔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된 지 95년이 흐른 시점에서 찾은 신흥무관학교터는 밭으로 이용되면서 당시의 민족운동의 흔적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지금은 당시의 정확한 학교터를 찾기도 쉽지 않게 됐다.높이 솟구친 옥수수밭 사이로 당시에 압록강을 건너 조국 독립의 불씨가 되겠다며 훈련을 받다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운동가들의 모습을 상상할 뿐이었다. 신흥무관학교터 앞으로 흐르는 물줄기에서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식혔을 훈련생들의 잔상만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일제 잔재 확실하게 청산하고, 민족 정기 바로세워야”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이 갖는 의미는.
국내의 독립운동도 그 의미는 크지만 기본적으로 일제의 지배체제 내에서 이뤄지다보니 방법 등에 있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중국 강역, 특히 만주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은 국내와 비교되는 이분법의 의미가 아니다.나라가 망했을 때 독립운동가들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상설적인 기구를 만들려고 했고 또 만들었다. 이런 기구들은 1911년 건립 당시부터 민주공화제를 지향했는데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제를 채택하게 된 뿌리가 됐다.-과거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정신이 우리 시대에 계승되기 위해 필요한 점은.서간도의 참의부, 북간도의 정의부, 신민부 등은 행정부와 의회, 법원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군부를 갖고 있었다.상해의 임시정부가 외교독립론을 추구한데 비해서 만주의 삼부는 모두 무장투쟁론을 주창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무장투쟁론은 일제를 무력으로 타도할 때 민족 해방이 이뤄진다는 지극히 당연한 노선이었고 독립운동의 정수였다.지금 한국 사회는 핵심을 벗어난 지엽적인 일들로 시끄러운 일이 너무 많다. 무장투쟁론이 가장 간결하게 민족이 독립할 수 있는 방안을 주창한 것처럼 지금 한국 사회도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거기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일제 식민지배가 좋았다는 식의 논리들이 횡행하는 것도 만주 무장투쟁가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매국적 논리들이란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광복 7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모습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점이 지속, 발전되기 위해 요구되는 점은.먼저 우리 내부를 정비해야 한다. 총론이나 구호로서의 광복 70주년은 요란하지만 구체적인 것을 찾기는 힘들다.아직도 우리 사회 내부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를 확실하게,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방법으로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작업으로 연결돼야 광복 70주년이 진정한 광복 원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