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상
1. 중국불교
전통적인 평가에 따르면 법장은 화엄종의 3대 조사로 알려져 있다.
‘화엄’이란 말은 ‘꽃의 장엄’이란 뜻이며,
『화엄경(華嚴經)』은 방대한분량의 대승경전이다.
인도-티베트 불교와 대조되는 동아시아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특정 경전들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종파들이 발전했다는 점이다. 각 종파는 자신들의 소의경전을 붓다의 가르침의 결정체이자 최고의 교설
혹은 마지막 교설로 인식했으며, 다른 종파의 경전은 그 지고한 교설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진정한 의미의 중국적 불교 철학이 탄생한 것은
화엄종(華嚴宗)이나 천태종 (天台宗)과 같은 종파를통해서였다.
경전에 대한 이러한 중국적 태도는 티베트와는 대조적이다.
예를 들면 티베트에서는경전들이 시적(詩的)이며, 모호하고, 비체계적이며, 또한 표면상으로는 모순되며,
중관· 유식 철학의기반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지금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있다.
대부분 중국 종파들은 자신들의 철학 체계를 경전에서 찾아냈지만 티베트에서는 인도학파들의 철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경전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 경전과
그 주석을 강조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최초에 교조가 남긴 가르침과 그 의미에 대한 주석을 연구하는
전통적인 유교(儒敎)연구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인도와 중국 문명을 서로 구분하려는 경향이 있다.
히말라야와 미얀마 정글이라는 거대한 지리적 장벽이두 문화를 분리시킨 것으로 보고,
양자간의 문화 접촉이나 흡수는 간헐적이고 지엽적인 사건이었다고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도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인도와 중국의 문명은 중앙아시아에서만났으며,
불교는 카슈미르와 아프가니스탄의 잘발달된 무역로를 따라 중국에 전파되었다.
그 무역로는갠지스 평야에서 북서쪽으로 슈리나가르(Shrinagar)까지 뻗어 있으며,
거기에서 라다크(Ladakh)의레(Leh)까지,
그리고 카라코람(Karakorams) 산맥을 넘어 야르칸드(Yarkand)까지,
다시 타클라 마칸(Takla Makan) 사막의 주변까지 닿아 있다.
무역로는 타클라 마칸 사막의 남북으로 뻗어서,
서쪽으로는 카슈가르(Kashgar)와,
동쪽으로는 돈황과만난다.
남쪽으로는 야르칸드와 코탄(Khotan)을 만나고
북쪽으로는 쿠차(Kucha)와 투르판에 이른다.
이곳들은 중국의 수도 장안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지중해 연안의 항구인 안티오크 (Antioch)와
타이레(Tyre)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무역 요충지였으며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더왕이 인도 대륙 북서부로 대원정을 한 결과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인
박트리아에 그리스계 왕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 그리스 왕들은 주기적으로 갠지스 계곡을 침략했다.
인도를 통치한 그리스 왕들 가운데 밀린 다(Milinda) 혹은 메난드로스(Menandros)라 불리는 왕은승려가 되었고,
후에 아라한의 경지를 얻어 열반했다고 전해진다.
인도 예술에서 가장 초기 불상과불화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강한 영향아래 있던
간다라 지방,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카슈미르에서나타나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 말엽 그리스인들은
여러 이란계 부족들에 의해 박트리아와 인도 서북부에서 쫓겨났다.
1세기경부터 박트리아를 거점으로 삼았던 쿠샨왕조가 북인도 전역과 서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쿠샨왕조는 열성적인 불교도들이었다. 아직도 쿠샨왕조의 불탑에서 아름다운
유골함들이 수없이 발굴되고 있다.
쿠샨왕조가 갠지스강 유역의 실크로드를 지배한 사실은 불교 전파에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당시 불교는 주로 재가신자, 특히 상인과 전법승들에 의해 퍼져 갔다. 불교의 전파는 나라를 평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문명화 하는 효과가 있었다. 또한 불교는 쿠샨왕조와 귀족들의 적극적인 후원과 보호를
받았다. 동시에 중국의 후한(後漢)왕조(25-220년)도 대부분의 중국과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지배하였다.
그러므로 인도와 중국 문화는 직접 교류하게 되었고,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은 중앙아시아에 산재한상당수의 중국-인도 간 상업 공동체를 통해서였다.
중국불교에서 가장 초기의 현존하는 증거는 기원후65년부터이다.
쿠샨왕조와 후한의 몰락과 함께 코탄이나 카슈가르와 같은 오아시스 지역들은독립국가가 되었으며,
거기에서 불교는 수백년 동안 이란과 인 도, 그리고 중국의 문명을 이념적으로통합하게 되었다.
물론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에는 중국화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들어오기도 했다(그 가운데는 야만적인
침략자와 질병도 있다). 중국인들은 이민족을 몹시 혐오스러워 했고 외국의 종교와 낯선 복장을 한
야만인들을 아주 이상하게 여겼다. 유교화된 중국인들은 불교속에서 다분히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측면을 발견하였다.
출가한 승려들은 제사 의식 혹은 아들을 낳아 족보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조상에게 적절한 예를 갖추는
것을 하지 않았다(예를 들면 Gregory 1991: 106-7을 보라). 또한 윤회의 관념은 조상 숭배에 대해 많은
회의를 남겼다. 세속적 가치를 부정하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차원처럼 보이는
불교의 모습은 현실 세계와 정치-사회적인 관계들을 강조해 온 중국의 전통과 당연히 대립되었다.
정치적 권위로부터 승단의 독립을 주장한 것은 정치 질서에 대한 심각한 위협처럼 느껴졌다.
574-7년사이의 불교박해 기간동안 황제는 칙령을 내려서
‘불교는 불효를 저지르고, 재물을 낭비하고,
반란을사주하기 때문에 폐지해야만 한다’ 고 선언했다(Pas 1987: 73).
과연 천하의 중국 황제가 이상한 인도의관습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고대 중국 고전에서는 붓다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또한 중국불교 1천년 역사 동안에 주기적인 불교 탄압이 있었다.
법장 이후 약 1백여 년 뒤, 중국불교가가장 융성했던 당나라 말엽에 죽음을 무릅쓰고
왕에게 진언한 유학자들처럼 한유(韓愈, Han Yu,768 -824)는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에서, 현종(玄宗, 805-20 재위)
천자가 붓다의 사리에 예를 갖춘일을 매우 비판했다.
한유는 불교의 많은 결점 가운데 실제 신통력은 없다고 했다.
적어도 세상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인장수(長壽) 같은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만일 불교가 장수를 기원하는 것도 아니라면 그 이상한불교제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의 옛 성인들은 장수 했었는데
후한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뒤로는 오히려 황제와 그 왕조가 단명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근거가 있는 말이다.
불교는 후한이 몰락할 때까지 중국 내에서 외래 종교로 남아 있었다.
불교는 사실 5호16국 시대(221-589년)에 왕조들의 급작스런 몰락으로 인해 생긴
정 신적 진공상태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에게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으며,
지식인들은 그 외래 종교를 내면화 시켜서 중국적인 것으로 변화시켰다.
정치적인 분열과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에서 중국에는 개인적인 성향과 은둔이라는
전형적인 도가적특성이 등장했으며, 사물의 본질과 조화를 이루며 살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불교가 지식인들에게공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도교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불교의 명상에 관심을 두었다. 불교 개념들은 도교 용어를 통해 설명했으며,
노자(老子)가 인도를 여행하다가 붓다가 되었다거나 붓다를 가르쳤을 것이라는 설[노자화호설
(老子化胡說)을 말하며 중국의 입장에서 오랑캐인 인도를 계몽했다는 다분히 중국 중심적인 사상의
발로이다. -역자]도 제기되었다.
불교가 중국의 지적 전통 속에 흡수되는 최초의 단계는 도가와의결합을 통해서였다.
공자(孔子)는 “나는 신성스런 존재 앞에서 외경감을 느낀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황제가 붓다의 사리 앞에 예를 올리는 것이 한유에게는 ‘해괴한 짓’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붓다는 야만족 출신이어서 중화의 말을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는 옷 입는 것도 다릅니다. 또한
옛 성현들이 규정한 대로 말하거나 입지도 않았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나 부자간의 의무에 대해서도
알 지 못하며 …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는데 이 더럽고 불결한 뼈다귀를 지엄한 궁성 안에 들여
놓도록 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처사라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신은 이 뼈다귀를 관원들에게 주어
강이나 불속에 던져 버리길 바라며, 그렇게 해서 불교를 뿌리 뽑고 그 가지까지 없애서, 영원히
소멸시키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행히 영향력 있는 친구들이 천자의 노여움을 달래 주었기에 한유는 악어가 우글거리는 남쪽 변방의
지방관리로 좌천되는 것으로 감형되었다.
불교는 중국에 소개된 후 처음 천년 동안 주로인도나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번역과 포교를 한 승려들에의해서 전파되었다. 이들 가운데
지루가참(147-86년에 활동),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
진제(眞諦)와 같은 이들이 있고,
육로와 수로를 거쳐 중국에 경전을 들여오기 위해
인도로 험난한 여정을떠나야 했던
법현(法顯, Faxian 337- 418),
현장(玄?), 그리고
의정(義淨, Yijing 635-713) 같은 중국인이있다.
때로는 이러한 여정을 황실이 후원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국가에서 토지를 제공하거나
사찰 건축을후원하는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국의 불교사찰들이 권력을 획득하고
일시적인 특권을 누리게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어쩌면 이런 점 때문에) 사찰과 승려들은 국가의 감시를 받았으며 언제나
이상한 외국 관습을 유포시킨다고 의심받았다. 중국 승려들은 처음에는 거부하기도 했지만 후에는
황제 앞에 엎드리는 것과 같은, 인도에는 없는 의례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적대적인
유학자와 도교 사원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주요한 불교 탄압은 446년과 574년, 특히 842-45년사이에 발생하였다.
마지막 탄압에서는 구족계를 갖춘 26만 5백명의 비구와 비구니가 강제로 환속당했다.
5호16국 시대는 수(隋, 581-618)와 당(唐)왕조에 의해 끝난다.
한때 중앙아시아까지 지배하였던강력한 중국제국은 결국 중앙아시아에서 전투적인 이슬람 군대와 만났다.
지금의 러시아 투르케스탄에 위치한 탈라스(Talas)강 전투(715년)에서 당나라의 군대는
아랍군에게 결정적으로패배했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 전투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당시 서부 중앙아시아의 불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당나라 시대에는 엄청난 후원이 제공되어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고 방대한 경전들이
한역되었으며 독자적인 저작들이 나타났다.
불교의 교리는 도교와 약간 달랐다.
당나라 시대의 불교 교리는 단순한 소개를 넘어 그것을 흡수하고창조적으로 자기화 하였음을 보여 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중요해진, 특히 842-5년의 탄압 이후수행 중심적인 불교 전통 가운데서
한편으로는 종종 비도덕적이고 반(反)지성적인 경향을 강조하는선(禪)이,
다른 한편으로는 염불 특히 아미타불(阿彌陀佛)에 대한 염불이 유행하게 된다.
챈(Wing-tsit Chan)이
“천태사상과 함께 중국 불교사상의 최고 발달을 이루었으며 …
마지막 황금기에중국불교의 형이상학적 기초를 형성하였다.”고 말하는 것에서
대당시대에 화엄이 철학적통합을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Chan 1963: 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