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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와 탑비, 장보고와 留學僧 세력의 합작품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25]
1. 부도와 탑비(塔碑) 출현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이 헌안왕(憲安王, 857∼861년)의 귀의를 받아 헌안왕 4년(860)
에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지어 우리나라 최초의 선문(禪門)인 가지산문(迦智山門)
을 개설하고 나자, 이를 뒤따라 사방에서 차츰 선문을 설립하고 국가로부터 공인받으려는 움직임이 활발
하게 일어난다.
대개는 각 지방의 실력자들이, 당나라의 선문 조사(祖師; 선종의 한 문파를 일으키거나 이의 법통을 계승할
만한 자격을 갖춘 우두머리 선승)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와 선문 개설 자격을 갖춘 선사들을 후원하여
우선 자기 지방에 선문을 개설해 놓은 다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내는 절차를 거쳤다.
가지산문의 경우도 장사(長沙; 장흥의 옛이름)현의 부수(副守; 부군수)이던 김언경(金彦卿)이 보조선사를
헌안왕에게 추천하여 헌안왕으로 하여금 왕사(王師; 국왕의 스승)로 초빙하게 했는데, 보조선사가 이를
사양하자 왕명으로 가지산에 주석(駐錫; 승려가 산에 들어가 머물러 사는 일)토록 하는 절차를 거쳤던
것이다.
물론 가지산에 터를 잡아 보조선사로 하여금 가지산문을 개설하도록 주선한 것은 이 지방의 실력자 김언경
이었다. 이 사실은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도판 1)의 비문 내용에서 밝히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로 전회의 ‘신라 선종과 비로자나불 출현’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보조선사가 이곳 가지산에서 20년 동안 주석하며 선지(禪旨)를 전파하다가 헌강왕 6년(880)에 77세로
열반에 들자 그 사리탑과 비석을 국가에서 세워주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헌강왕은 그 10년(884)에 보조선사 시호와 함께 창성탑(彰聖塔)이란 탑호를 왕명으로 내리고 묘탑인
부도(浮屠)와 탑비를 세우게 한다. 그리고 남종선의 시조인 6조대사 혜능(慧能, 638∼713년)이 남종선의
본산으로 짓고 살았던 보림사란 이름도 그대로 옮겨줌으로써 이곳이 우리나라 남종선의 총본산임을 공식
적으로 인정해 준다.
그런데 선종은 보통 양(梁)나라 때 보리달마(菩提達磨, ?∼528년)가 인도로부터 석가세존의 의발(衣;
가사와 발우를 말하며 정법의 법통을 이어가는 상수제자에게 전해주는 상징물임)을 전수받아 중국에 들어와
설립한 종파로 알려져 왔다.
그가 마하가섭 이래 28대조에 이르는 전법제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 선종의 시조가 되니, 중국 선종에서는 그가 가지고 들어온 의발이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에게까지 전수되었으므로 이들을 합쳐 33조사(祖師)라고 부른다.
그러나 중국 선종은 인도로부터 전해 왔다기보다 중국에서 중국적인 사고의 영향으로 출현한 혁신 이념
이라고 보아야 한다.
논리의 늪에 빠진 교종 불교를 건져내기 위해 초논리(超論理)의 방법으로 탈논리(脫論理; 논리를 벗어남)를
시도하여 개혁에 성공한 일종의 개신교(改新敎)인 셈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내세우지 않음)를 내세워 문자로 기록된 복잡한 경(經), 율(律), 논(論)의 논리
체계에서 벗어나고 직지인심(直指人心; 곧장 마음으로 터득함)으로 깨달음을 직접 성취하자는 취지였다.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방법을 그대로 본받아 바로 실천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사실 1500여 년 동안 수많은 천재들에 의해 불교 논리가 전개되어 왔다면 그 이론체계가 아무리 극명한 것
이었다 하더라도 자체 논리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 늪 속에서 벗어나는 길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각질화한 껍데기를 생살과 함께 벗겨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 수반되므로 감히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라 대개는 그대로 함께 늙어 죽는 것으로 끝마치게 마련이다.
원시불교가 일어난 중인도나 대승불교가 일어난 서북인도에서 불교가 소멸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2. 부도는 중국식 사당 성격의 건축물
그런데 중국문화권에서는 사계(四季)가 분명하여 아무리 무성한 산천(山川) 초목(草木)이라도 서리 한
번만 내리면 일시에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매해 경험하고 산다.
그래서 여기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복잡한 논리체계라도 필요하다면 일시에 부정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
하지 않는 사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중국적인 사고가 과감하게 불립문자, 직지인심을 내세워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사불란한 중앙집권적 절대권 유지라는 중국적 사회관이 만들어놓은 정통사상(正統思想;
올바른 계통만이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과 종법사상(宗法思想; 적장자가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불교에 영향을 끼쳐 의발전수(衣傳授; 가사와 발우를 전해줌)라는 비불교적이고 비인도(印度)적인 법통
(法統) 계승법을 수용하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선종의 이런 요소들이 선종을 중국화된 혁신 이념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반증으로 작용하게
된다.
종법 이념에 따라 대종(大宗; 큰집 종가), 소종(小宗; 작은집 종가)의 분파를 인정하게 되므로 정통제자와
무수한 방계제자를 인가할 수 있게 되니, 선종의 법맥 체계는 마치 중국의 제왕들이 자제를 분봉(分封)하는
것과 같은 질서를 가지면서 확장되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부터 그 묘제(墓制)도 중국식으로 바꿔 화장을 하지 않고 탑 안에
시신을 그대로 안치했던 것이니, 북송 진종(眞宗) 경덕(景德) 원년(1004)에 도원(道原)이 지은 ‘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 권3 제28조 보리달마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단정하게 있다가 돌아가니 후위 효명제 태화 19년 병진(필자주; 무태 원년 무신, 528년의 잘못임) 10월
5일이었다.
그해 12월28일 웅이산(熊耳山)에서 장사지내고 탑을 정림사(定林寺)에 세웠다.
3년 뒤에 송운(宋雲)이 서역으로 사신 갔다 돌아오다가 달마대사를 총령(蔥嶺, 파미르고원)에서 만났다.
손에 신발 한 짝을 들고 훨훨 날 듯 혼자 걸어가는 것을 보고 송운이 ‘대사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는 ‘서천으로 간다’ 하고 이어서 ‘네 임금은 이미 죽었다’ 한다.
송운이 듣고 정신없이 대사와 이별하고 동쪽으로 달려와 복명하니 명제는 이미 돌아가고 효장제가 즉위해
있었다. 송운이 그 일을 갖추어 아뢰자 황제가 묘광을 열어보게 했더니 오직 빈 관에 신발 한 짝만 남아
있었다. 온 조정이 놀라서 조칙을 받들어 남은 신발을 가져다 소림사(少林寺)에 두고 공양하였다.
당 개원(開元) 15년(727) 정묘에 이르러 신도(信都)라는 사람이 훔쳐다가 오대산 화엄사에 두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처음에 양무제가 대사를 만났으나 인연이 맞지 않았는데 위나라에 가서 교화를 행한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스스로 대사의 비문을 지으려 했지만 겨를이 없더니 뒤에 송운의 일을 듣고 이에 이루어내었다.
대종이 원각(圓覺)대사라 시호를 내리고 탑은 공관(空觀)이라 하였다.”
이로 보면 시신을 그대로 탑 속의 관에 안치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풍습대로 황제가 직접 비문을 지어 비석
을 세우고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있다.
탑호는 곧 묘호(廟號)와 같은 성격이니 탑, 즉 부도를 사당(廟)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조사의 전신사리(육신)나 화장해서 얻은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탑, 즉 부도는 당연히 사당의 성격을
갖는 건축물이어야 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불타의 사리를 봉안하는 솔탑파(率塔婆, stupa), 즉 불탑(佛塔)처럼 층탑 형태의 건축구조를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당 고종 총장(總章) 2년(669)에 세워진 <흥교사 현장법사탑>(도판 2)에서 그 형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육신을 그대로 봉안한 사리탑
그러나 점차 승탑은 불탑과 구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선종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는 8세기 중엽
경부터는 단층집 형태의 승탑, 즉 사리탑 양식이 출현하는 듯하니 중국 하남성 등봉현 회선사(會禪寺)에 남아
있는 <회선사 정장(淨臧)선사사리탑>(도판 3)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단층 팔각당형의 건축물로 동·서 양면에 앞·뒷문이 설치되어 있고 그 좌우에 해당하는 4면에 격자창이
표시되어 있다. 앉아서 열반에 든 육신을 봉안하기에 알맞은 구조다.
‘경덕전등록’ 권3 제31조 도신(道信, 580∼651년)대사조에서도 육신을 그대로 탑 안에 봉안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고종 영휘(永徽) 신해년(651) 윤 9월4일에 이르러 갑자기 문인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다음과 같이 내린다.
‘일체 모든 법으로부터 벗어나서 너희는 각자 제 생각을 지켜 미래를 시류에 따라 교화하라.’
말을 마치고 편안히 앉아서 돌아가니 나이 72세였다. 본산에 탑을 세웠는데 다음해 4월8일에 탑 문이 까닭
없이 저절로 열리는데 모습이 살아 있는 듯했다.
이후 문인들이 감히 닫지 못하였다. 대종이 시호를 대의(大醫)라 하고 탑호를 자운(慈雲)이라 하였다.”
남종선의 시조인 6조 혜능대사 역시 육신을 그대로 탑 안에 봉안하였다. 그래서 신라 승려 김대비(金大悲)가
개원 10년(722)에 중국인 장정만(張淨滿)에게 20천금, 즉 돈 2만냥을 주고 육조대사의 머리를 잘라오게
하였지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한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선천(先天) 2년(713) 7월1일에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신주(新州)로 가려고 하니 너희는 배를 대도록
하라 한다. 그때 대중이 슬퍼하며 좀더 계시라 하자 이렇게 말한다.
‘여러 부처님이 출현하셨어도 오히려 열반을 보이었다. 왔으면 반드시 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내 이 몸뚱이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대사께서 이제 가시면 언제 오시겠습니까.’
‘잎이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니 올 날이 없을 것이다.’
‘대사의 법안(法眼; 일체 법을 분명히 살펴볼 수 있는 눈)은 누가 전해 받겠습니까.’
‘도(道) 있는 사람이 얻을 것이고 무심한 사람도 통달하리라.’
‘뒤에 액난이 없겠습니까’.
‘내가 입멸한 뒤 5∼6년 만에 마땅히 한 사람이 와서 내 머리를 가져가리라.
내 예언을 들어보아라. 머리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나, 입 속에서는 음식을 삼켜야 한다.
가득 차는 것을 만나는 액난에, 버드나무가 관리가 되리라(頭上養親, 口裏須餐. 遇滿之難, 楊柳爲官). 또
내가 간 뒤 70년 만에 두 보살이 동방으로부터 올 터인데 하나는 재가신자이고 하나는 출가인일 것이다.
동시에 교화를 일으켜 우리 선종을 건립하고 절을 짓고 제자들을 많이 길러 내리라(필자주; 784년에
도의선사가 당나라에 건너가 처음 남종선을 받아온다).’
말을 마치고 신주 국은사(國恩寺)로 가서 목욕한 다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돌아가니 기이한 향기가 코를
찌르고 흰 무지개가 땅에 닿았다. 그 해 8월3일의 일이다. 11월13일에 탑 안에 들여 모시니 나이 76세였다.
(중략)
개원 10년(722) 임술 8월3일 밤중에 홀연히 탑 속에서 철사를 끊는 소리가 들리므로 승려들이 놀라 일어
나니 (건 쓴) 상주 한 사람이 탑 속에서 뛰쳐나간다.
대사의 목을 찾아보니 상처가 나 있다.
도적의 일을 갖추어 써서 주현에 알리자 현령 양간(楊侃)과 자사 유무첨(柳無)이 고소장을 보고 잡아들이는
데 힘을 더했다.
8월5일에 석각촌(石角村)에서 도적을 잡아 소주부(韶州府)에 보내 국문하니, 성은 장(張)이고 이름은
정만(淨滿)이며 여주(汝州) 양현(梁縣)사람으로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신라 승려 김대비에게 돈
2만냥을 받았는데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져오면 해동으로 돌아가서 공양하겠다고 했다 한다.
유태수가 이 사실을 듣고 나서 형벌을 가하지 못하고 몸소 조계(曹溪)에 이르러 대사의 상족제자인 영도
(令韜)선사에게 어떻게 처단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영도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국법으로 논한다면 죽여야 마땅하지만 다만 불교의 자비로 따진다면 원망과 친근이 평등한데 하물며
저 사람이 공양을 드리고 싶어서 구해가려 했다니 죄를 용서하는 것이 좋겠다.’
유태수가 아름답게 여기고 찬탄해 말하기를 비로소 불문이 광대한 것을 알겠구나 하며 그를 놓아주었다
(필자주: 육조대사의 알 수 없었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다. 머리에 건 쓴 상주가 배가 고파 돈을 받고 목을
자르러 왔고 그 도적의 이름이 장정만이며 이를 잡아 다스린 관리가 현령 양간과 자사 유무첨이었던 것이다).
(중략)
헌종이 대감(大鑑)선사라고 시호를 내리고 탑은 원화영조(元和靈照)라 하였다.”
우리나라에 선종을 최초로 들여온 이는 산청 단속사(斷俗寺) 신행(神行, 704∼779년)선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속성이 김씨이고 동경(東京) 어리(御里) 출신이며 급간 상근(常勤)의 아들이라 했으니 진골의 혈통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그는 보수 성향이 있는 신수(神秀, ?∼706년)계의 북종 선맥을 이어 왔다.
신수의 상수제자인 대조(大照)선사 보적(普寂, 651∼739년)의 제자 지공(志空)화상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돌아온 것이다.
4. 동방으로의 전래
그가 돌아왔을 때는 교종불교가 신라에서 만개한 상태로 불국사와 석굴암 조성이 한창 진행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전수해온 선종 이념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고, 그는 지리산 끝자락에 위치한 단속사
에 머물면서 인연 닿는 대로 이를 전파하다가 혜공왕 15년(779)에 76세로 이곳에서 열반한다.
그러자 삼륜(三輪)선사를 비롯한 제자들이 선종의 법식대로 화장하여 사리를 수습하고 부도를 세워 이를
봉안하려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선종에 대한 이해가 없는 조정에서 왕명으로 이를 세워줄 리 없었다.
30여 년을 기다리다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현재의 당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국상(國相)이며
병부령(兵部令) 겸 수성부령(修城府令)인 이간 김헌정(金獻貞)의 도움으로 헌덕왕 5년(813)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도를 해 세우고 탑비를 건립하게 된다. 그 전말을 현존한 몇 종의 비문 탑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단속사 터가 철저하게 파괴되어 부도나 탑비가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있어 그 형식을
짐작할 수도 없다.
그러나 원성왕(785∼798년)의 손자이며 희강왕(836∼837년)의 아버지로 익성(翌成)대왕으로 추존된 김헌정
이 직접 지은 비문에서 분명히 ‘부도를 만들어 사리를 두었다(造浮屠存舍利)’고 하였으니 우리나라에서 선문
조사의 부도와 탑비 건립은 신행선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야 할 듯하다.
그 다음 남종선맥을 최초로 이어온 이가 원적(元寂)선사 도의(道義)다. 오대(五代) 남당(南唐) 원종(元宗)
보대(保大) 10년(952) 천주(泉州) 초경사(招慶寺)의 정(靜)·균(筠) 두 선사가 편찬한 ‘조당집(祖堂集)’ 권17
설악산 진전사(陳田寺) 원적(元寂)선사조에 따르면 본래 도의선사 비문이 있었다 한다.
‘나머지 사실은 비문과 같다(餘如碑文)’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降峴面) 둔전리(屯田里)에 남아 있는 진전사 터에는 비석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비석의 탁본이나 내용 사본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도의선사 부도라고 생각되는 <진전사
지부도>(도판 4)가 남아 있어 보물 제439호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비석이 없어져서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는 현재로서는 이 부도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당집’ 권17 설악산 진전사 원적선사조의 기록으로, 그가 당 덕종 건중(建中) 5년(784), 즉 선덕왕 5년
갑자에 견당사 김양공(金讓恭)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가 서당(西堂) 지장(智藏, 735∼814년)의 심인(心印)을
얻고 백장(百丈) 회해(懷海, 720∼814년)의 인가를 받아 마조(馬祖) 도일(道一, 709∼788년)의 선맥을 모두
아울러 받아 가진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893년에 ‘문경봉암사지증대사비문’을 지으면서 “장경(長慶,
821∼824년) 초에 이르러 도의라는 승려가 있어서 큰 뜻을 세우고 서쪽으로 배를 타고 가 서당(西堂)의
속마음을 뵙고 지혜 광명을 지장에게 배우고 돌아왔다(長慶初, 有僧道義(缺落4字) 西泛賭西堂之奧,
智光智藏而還)”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 그래서 도의선사가 821년경에 귀국한 것을 알 수 있다.
5. 잘못 기록된 도의선사 행적
그런데 운허(耘虛)대사가 편찬한 ‘불교사전’에는 이후 도의선사가 설악산에 들어가 40년간 수도하다 돌아
갔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인명사전에서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어 필자도 의심 없이 이를 따랐었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부도 양식의 변화를 추적하다 보니, 그 설을 인정할 경우 844년에 세워지는 국보 제
104호 <염거(廉居)화상탑>(도판 5)보다 이 <진전사지부도>가 20년 가까이 뒤지는 결과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양식 진전이 전도(顚倒)되는 불합리한 현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40년 수도설이 근거 있는 얘기인지, 유관 자료를 모두 뒤지면서 확인하였으나 어디에서도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당나라에 있었던 세월이 38년이니 재당 근 40년이란 구절이 사전 편찬 당시에 잘못 끼어들어 이런
결과를 나았던 것 같다.
부도 양식으로 보면 <진전사지부도>가 <염거화상부도>보다 적어도 10여 년은 앞선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전사지부도>는 830년대에 세워져야 하니 흥덕왕(826∼835년) 때 건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서당 지장 문하에서 배출한 3대 동국선문조사 중의 하나로 남원 지리산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초조가
되는 홍척(洪陟, 또는 洪直)선사가 흥덕왕대에 뒤따라 들어와서 흥덕왕과 그의 아우이며 민애왕(閔哀王,
838∼839년)의 아버지인 선강(宣康)태자의 귀의를 받아 남원 지리산 기슭에 실상사를 짓고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북산의 도의와 남악의 홍척(北山義, 南岳陟)’으로 불리며 존경받았다는 지증대사 비문 내용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흥덕왕은 그 23년(828)에 바로 장보고에게 1만 군사를 빌려주어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게 한
주인공이다.
그러니 장보고 선단을 통해 신속하게 전달되는 당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래서 장보고 선단을 이용해 귀국한 홍척선사를 왕사로 대우할 만큼 남종선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듯하다.
그런데 홍척선사의 사형(師兄)인 도의선사가 고령으로 이 어름에 돌아가니 왕명으로 부도와 탑비 건립을
지시하고 시호도 내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원적선사라는 시호가 그렇게 내려진 것일 터이고 탑호도 있었을 터이나 비석이 파괴되어 그 이름이 무엇
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부도는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설악산 기슭의 진전사 터에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그 형식이 특이하여 이후 8각당형(八角堂形) 부도라고 하는 일반적인 부도 형식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기단부가 일반 석탑 기단부와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 위에 8각 연화대좌가 만개한 연꽃처럼 받쳐지고
그 씨방 위에 8각당집의 몸체가 8모기둥 모양으로 올려져 있다.
그 위로 8모 지붕이 부드러운 물매와 산뜻한 추녀 끝을 자랑하며 덮여 있고, 지붕마루는 뒤집어진 연꽃잎
으로 장식되었는데 그 위로 모란꽃 봉오리 모양의 돌구슬 장식이 올려져 마무리되어 있다.
그 돌구슬 장식 밑둘레에는 위로 핀 연꽃잎이 죽 둘러져 있다.
이런 부도 형식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진전사지부도> 하나뿐이다.
신라 석탑 양식이 통일신라 고유 양식인데 그 석탑의 기단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그 위에 목조 8각당집을
상징하는 석조 구조물을 올려 놓았으니 다른 나라에 있을 수 없는 고유 형식이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일반 석탑과 비슷하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기단부라 할지라도 용납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844년에 돌아가는 염거화상의 부도에서는 그 스승의 부도에서 보이던 기단
처리를 일신하며 새로운 부도 형식을 창안해 놓는다.
이는 보조선사 체징이 837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18주를 두루 여행하며 선지식을 만나보고 나서 ‘우리 조사
께서 말씀하신 것에 더 보탤 것이 없는데 어찌 멀리 가려고 노력하겠는가(我祖師說, 無以爲加, 何勞遠適)’
하고 840년에 장보고 선단을 따라 돌아온 뒤의 일이었다.
그러니 보조선사 체징이 당나라의 여러 조사 탑을 친견하고 와서 창안해 낸 독창적인 형식일 수도 있다.
5. 염거화상탑의 독창미
이제 국보 제104호 <염거화상탑>의 형식이 어떻게 독창적인가에 대해 살펴보겠다.
우선 기단부를 사자좌와 연화좌를 중첩하는 방법으로 일신해 냈다.
하단은 8모로 깎아 각면에 사자를 돋을새김으로 표현해 놓았다. 사자좌임을 표방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3단의 층급받침을 통해 간격을 줄여나가다가 그 위에 다시 8모 기둥을 깎아 내었는데, 각면에는
안상(眼象) 안에 보개(寶蓋) 보주(寶珠) 꽃타래 등 7보(七寶) 무늬를 돋을새김해서 장식하였다.
여기까지가 한 돌이다.
그리고 그 위에 상단 연화좌대를 올려 놓았는데 연꽃잎을 두 겹으로 각각 16장씩 둥글게 돌려 새겨 활짝 핀
연꽃 모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딴 돌로 씨방을 8모로 깎아 다시 올려 놓았다.
8각당집의 몸체를 받치기 위해서다. 그런 다음 연목과 기와골이 분명한 목조 기와지붕을 석조로 번안하여
그 위에 덮어놓았다.
8각당집의 몸체가 한 돌이고 지붕이 또 한 돌이다. 석조적 결구의 효용성을 충분히 살리면서 목조적 8각
당집의 의미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8각당의 몸체는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우고 기둥 아래 위로는 평방(平枋) 창방(昌枋) 및 하방(下枋)을
상징하는 가로대를 끼워 목조 건축의 벽면 구성을 재현해 놓았다.
앞뒷면에는 앞문과 뒷문을 새겨 놓았는데 자물쇠와 한 쌍의 문고리가 표시되어 두 쪽 문이 닫혀 있는 모습
이다. 두 문의 좌우에 해당하는 각 4면에는 사천왕이 양각으로 새겨져서 사천왕이 사리를 외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탑신석의 받침돌인 8각 씨방돌의 8면에도 안상을 설치하고 그 안에는 주악(奏樂) 천인을 새겨 놓았다.
음악을 연주하여 사리를 즐겁게 하려는 배려인 듯하다.
상단 연화대좌는 <진전사지부도>의 연화 받침석을 확대한 의장이라 할 수 있겠으나 하단 사자대좌는 뜻밖의
발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두 불상의 연화대좌나 사자대좌로부터 차용한 것이니 전혀 엉뚱한 발상으로부터 말미
암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창조는 이렇게 가까이에 널려 있는 수많은 요소를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
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보조선사가 이런 기단부 도입을 시도하여 성공한 것은 중국 여행중에 장안의 초당사(草堂寺)에서 보았던
<구마라집사리탑>(도판 6)에서 그 발상의 단초를 얻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양식 기법으로 보아 당 현종 천보(742∼755년) 연간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이 사리탑은 구름에
휩싸인 수미산을 상징하는 수미대좌 위에 목조 8각당집이 올려져 있고 그 위로 4각 기와 지붕이 덮여 있는
모습의 석조 번안물이다.
8각의 몸체에 4각 기와지붕이 덮여서 조화가 깨지고, 몸체에 격자창과 아래위 명창 등을 지나치게 표현
하여 조잡한 느낌이 들며, 수미단의 반복된 구름장식이 지루하게 다가오지만, 8각당 부도 형식으로는 자못
참신한 의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보조선사는 아마 이를 보고 조사인 도의선사부도 건립 당시 새로운 부도형식 창안에 고심하던 일을 기억
하면서, 전광석화(電光石火; 벼락 불빛이나 부싯돌에서 일어난 불빛)처럼 부도형식에 대한 구상이 뇌리에
떠올라서 이를 기억하였다가 귀국한 다음 그 스승이 돌아가자 <염거화상탑>과 같은 독창적이고 참신한
부도 형식을 창안해냈던 것 같다.
이런 석조 8각당형 부도 형식은 통일신라 초기에 고선사지 3층석탑이나 감은사지 3층석탑에서 이루어낸
신라 석탑 형식만큼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 우리나라 고유 부도 양식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니, 우리는 그런 현상을 보물 제273호인 곡성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도판 7)에서 확인할 수 있다.
6. 절정에 이른 탑비미술
적인선사 혜철(慧徹, 785∼861년)은 속성이 박(朴)씨로 본래 서라벌 사람이었다.
그 선대가 벼슬을 버리고 삭주(朔州) 선곡현(善谷縣; 지금의 禮安)으로 낙향한 집안에서 태어나 15세에
부석사로 출가한 분이다.
헌덕왕 6년(814) 8월에 30세로 당나라에 가서 서당 지장선사의 인가를 받고 신무왕 원년(839) 2월에 귀국
하였다. 도의, 홍척에 이어 세 번째로 서당의 인가를 받아온 것이다.
이때는 장보고가 청해진 세력으로 신무왕을 등극시키는 등 장보고 세력의 절정기였으므로 당연히 장보고
선단에 의탁해서 청해진으로 귀국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적인선사는 장보고의 후원으로 건립하였을 무주관내 쌍봉사(雙峯寺)로 가서 한 해 여름을 나고
곡성 동리산(桐裏山)에 터를 잡아 대안사(大安寺)를 건립한다.
그리고 여기에 15년 가까이 머물러 살다가 경문왕 원년(861) 2월6일에 77세로 병 없이 앉아서 돌아갔다.
일찍이 문성왕(839∼857년)이 왕사의 예로 자문을 구하고 절의 주변에 살생을 금하는 당(幢)을 세우게
하였던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경문왕은 즉위 8년(868) 6월에 비문을 짓게 하고 시호를 내려 적인(寂忍)이라
하며 탑호를 조륜청정탑(照輪淸淨塔)이라 짓게 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이에 그 부도와 비석을 건립하게 되는데 부도는 현재까지 원형 그대로 전남 곡성군 죽곡면(竹谷面) 원달리
(元達里) 태안사(泰安寺) 경내에 보존돼 있다.
비석은 비신(碑身)이 파괴된 채 귀부(龜趺; 비석을 짊어지고 있는 거북 받침)와 이수(首; 용으로 장식한 비석
머리)만 부도 곁에 남아 있던 것을 1927년에 새로 비신을 깎아 세워 재조립해 놓았는데, 이수는 광자대사
비의 이수를 옮겨다 맞추어서 조화를 잃었다.
다행히 비문 내용은 화엄사에 필사본으로 남아 적인선사의 행장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은 원칙적으로 <염거화상탑> 양식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다.
사자좌를 하단으로 하고 연화좌를 상단으로 한 2중기단 위에 8각당형의 목조가옥 몸체를 올려 놓고 그 위를
연목과 기왓골 표현이 분명한 목조 기와지붕으로 덮은 구조다.
물론 석조를 번안하여 각 부재를 통돌로 깎아서 쌓아가는 축조적(築造的) 방법으로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런데 통돌의 배분이 <염거화상탑>과 달라졌다.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각각 하나의 통돌로 쓰고 있어,
하대석과 중대석을 하나의 통돌로 쓰고 연화좌대와 탑신 받침석을 각각 하나의 통돌로 썼던 <염거화상탑>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8각당형의 탑신석과 기와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통돌인 것은 서로
같다.
네모난 지대석을 2층으로 넓게 깔고 그 위에 8모로 깎은 하대석을 여유있게 깔아 놓았다.
<염거화상탑>에서는 상대석인 연화좌대보다 이 사자좌대의 폭이 좁아 안정감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사자좌대의 폭이 연화좌대의 폭보다 더욱 넓어져서 안정감을 되찾고 있다.
이것이 가장 큰 양식 진전 요소다.
그리고 8면에 사자를 돋을새김 해 입체조각처럼 높게 새기고 생동감을 극대화하여 살아 움직이듯 표현
하였다(도판 8).
그러면서 각면에 한 점 군더더기 장식도 보태지 않아 가을하늘처럼 맑고 깨끗한 국면을 만들어 놓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워 깎아 낸 8모나 층급의 모서리 표현이 산뜻한 느낌을 더해 준다.
아래쪽이 넓고 위로 갈수록 현저하게 좁아지는 상촉하관(上促下寬) 구성이 하단을 더욱 여유롭게 만드는데
날카롭게 깎은 모서리들이 이를 더욱 단단하게 느껴지게 한다.
다만 사자좌대 8각 받침돌의 8면에 각면마다 내부장식 없는 안상(眼象)이 2구씩 낮게 파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자의 돋을새김이 워낙 두드러져서 이는 거의 인식되지도 않을 정도다.
하대가 이렇게 넓고 높은 데 반해 중대의 8모 기둥은 3단의 층급받침을 한 돌에 나타내고 있음에도 불구
하고 매우 짧고 좁게 표현했다.
그리고 8모의 모서리도 하대처럼 시퍼렇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장단(長短; 길고 짧음)과 강유(强柔; 굳세고 부드러움)의 조화를 염두에 둔 구성과 표현이다.
그랬다가 상대 연화좌대에 가서는 다시 세 겹의 연꽃잎을 둘러낼 만큼 넓고 큰 연꽃받침을 만들어 놓는데
높은 씨방까지 한돌로 처리하였다. 씨방돌은 다른 돌로 처리하였던 <염거화상탑>과 다른 면이다.
그러자니 씨방받침이 낮아져서 안상 안에 주악천을 새겨 장식하던 장식성을 살리기 어려워지자 사자좌대
받침처럼 각 면에 장식 없는 안상 2구씩만 새겨 넣었다.
사자좌대와 연화좌대를 상징하는 사자와 연화의 표현은 강조하면서 나머지 장식은 간소한 것이다.
8각당집의 몸체인 8각 탑신석도 상촉하관 구성으로 안정감 있게 보이는데, 목조 8각당집을 상징하는 기둥
이나 아래위 방목(枋木) 및 앞뒷문 표시는 물론 사천왕 조각까지 <염거화상탑>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옥개석도 목조 기와지붕을 그대로 번안하여 기왓골과 당마루, 암수 막새 및 연목과 부연이 자세하게 표현
됐는데 추녀 끝이 산뜻하게 들려 올라가서 고온 다습한 남방기후 풍토에 적당한 건축구조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춥고 눈 쌓이는 강원도 지방에서 기와지붕의 처마 끝을 밋밋하고 묵직하게 처리하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다.
상륜부는 석탑의 상륜부처럼 앙화(仰花), 복발(覆), 보륜(寶輪), 보주(寶珠)를 설치했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폭을 줄여감으로써 경쾌하게 마감했다. 상륜부가 늘씬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앙화, 복발, 보륜, 보주 등의
간격이 위로 갈수록 늘어난 탓인데 기단부에서 안정감을 추구하느라 약간 답답해진 느낌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산뜻하게 들려 올라간 처마 끝과 늘씬한 상륜부가 보여주는 경쾌성은 예리하고 묵직
하여 천근 무게로 눌러 놓은 듯한 기단부 하대의 사자좌 무게를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이렇게 절제미의 극치를 보이던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 양식이 <쌍봉사철감선사탑(雙峯寺澈鑑禪
師塔)>(도판 9)에 이르면 장식미의 극치를 나타내 보인다.
하단의 사자좌와 상단의 연화좌를 중대 8모기둥으로 잇던 단순한 기단부가 복잡한 장식문양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것이다.
우선 하단 사자좌대 아래에 사자좌대보다 더 높고 넓은 운당초(雲唐草; 구름 당초 무늬라는 뜻인데 당초가
실재하는 식물이 아니므로 국화 잎새 구름 무늬라는 현실적인 이름으로 바꿔 부르겠다)무늬 받침돌이 첨가
되어 사자좌대의 단순성을 파괴한다.
높은 돋을새김으로 투각(透刻; 맞뚫림 조각)기법을 연상할 만큼 입체감을 살려 구름을 국화 잎새처럼 새겨
돌렸는데 고사리 어린순처럼 끝이 말려 들어간 표현이 많다.
보통 이런 문양을 운당초로 부른다. 이는 <구마라집사리탑>(도판 6)에서 보이던 구름무늬의 도입으로
보아야 할 터이니, 이런 의장의 도입도 철감선사와 생시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
체징의 권유에 따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둥근 고리 모양으로 국화 잎새 구름띠를 둘러놓고 나서 그 안에 8각 띠받침을 좁게 표현하고 사자를 8면에
돋을새김하였는데, 각 모서리에는 국화 잎새 구름무늬를 기둥처럼 한 줄기씩 세워서 구획을 나눠 놓았다.
사자의 표현은 아직 생동감을 크게 잃지는 않았지만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의 그것과 비교하면
조금은 도식화한 듯하여 이를 의식하고 새겨낸 듯한 느낌이 든다(도판 10).
여기까지 한 돌로 되어 있다. 그리고 3단의 층급받침 위에 중대석이 역시 좁고 낮게 올려 있는데 8면 모
서리에는 하단의 사자좌대에서처럼 국화 잎새 구름무늬를 기둥처럼 한 줄기씩 세워 놓고 각면마다 박쥐
처럼 날개를 편 가릉빈가(迦陵頻伽; 사람머리에 새의 몸을 가진 날짐승으로 그 소리가 아름답다.
극락조라고도 부름)를 새겨 넣었다. <염거화상탑>에서는 칠보를 새겨 넣었던 자리다.
그리고 홑겹 연꽃잎이 위로 피어난 연화좌대가 3단의 층급받침 위로 이어지는데 홑겹이라 높이가 아주
낮아 날렵한 느낌을 준다. 두 겹, 세 겹으로 표현했던 <염거화상탑>이나 <적인선사탑>의 연화대석과
비교하면 가장 경쾌한 연화좌대라 하겠다.
그러나 연꽃잎 표면에 만개한 연꽃 한 송이와 굴곡이 심한 꽃잎 받침을 조각하여 장식하였으므로 화려한
장식성은 앞의 두 부도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이에 반해 그 위에 탑신 받침으로 솟아난 8각 씨방이 연화좌대보다 두 배 가까이 높아 주객이 전도된 구성을
보여주는데, 8면에는 2중으로 안상을 깊게 파고 여러 모양으로 날갯짓하며 노래하고 있는 가릉빈가를 각면
마다 높게 돋을새김해 놓았다.
<염거화상탑>에서 보이던 의장 그대로다. 그런데 안상을 깊게 파냈기 때문에 8모의 모서리가 마치 무슨
기물의 손잡이 모양으로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휘어진 표현을 보이게 되었다.
생동감이 분출하는 역동적인 표현이다. 복잡한 장식성으로 도식화하기 쉬운 분위기를 일순간에 생동감
넘치게 반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위로 탑신석을 받치도록 마련한 받침대가 다시 뒤집어 놓은 연꽃잎 장식으로 꾸며지며 이 상판 연화
좌대는 마무리된다. 그런데 중대석 받침돌로부터 상단 탑신석 받침돌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8각당집을 상징하는 탑신석은 8면을 둥근 기둥으로 나누었는데 기둥머리포와 공포(包)까지 표현해 놓았다.
앞뒤로 문이 나 있어 자물쇠가 표시되고 그 좌우로 사천왕이 각면마다 돋을새김되어 있으며(도판 11),
남은 2개의 벽면도 공면으로 남겨두지 않고 한 쌍씩의 비천상을 돋을새김해 각면을 빈틈없이 장식하고 있다.
마치 인도 조각에서 보이는 화면충전(畵面充塡; 화면을 가득 채움) 양식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탑신석이 한 돌이고 그 위에 덮은 목조기와 지붕 모양의 옥개석이 또 한 돌이다.
그래서 <쌍봉사 철감선사탑>은 전체적으로 네 덩어리의 돌을 쌓아서 만들어낸 셈이다.
옥개석에는 역시 목조 기와지붕의 기왓골과 당마루, 암막새, 수막새 및 연목과 부연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다만 연목 깊숙이 천장을 상징하는 곳에는 8각당집의 보머리가 8면을 나누어 놓으면서 보개, 보당,
보주 등 칠보무늬가 낮은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다.
부도가 이와 같이 그 양식을 정비해 나가니 그에 부수되는 부도비(浮屠碑; 사리탑비 혹은 탑비라고도 부름)
도 자연히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장 초기에 세웠었다는 신행선사비가 어떤 모양을 하였는지 알 수 없고 진전사지 도의선사비나 흥법사
염거화상비 역시 흔적조차 없어 그 양식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안사 적인선사사리탑비는 귀부와 이수가 남아 있어 그 비의 형식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귀부는 기본적으로 태종무열왕의 귀부와 같은 형태에서 양식 진전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거북머리가 용머리
처럼 바뀌어 있다.
거북 등의 귀갑 무늬도 상당히 도식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른발을 뒤집고 있다(도판 12).
이수 역시 태종무열왕비의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듯하나 용들이 구름 속에 잠긴 듯 표현되었고 정면 상단
에는 여의주(如意珠) 앞에 금시조(金翅鳥; 迦樓羅라고도 하며 용을 잡아먹는 새)를 표현하여 용을 제압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면 중앙의 금시조 위와 양쪽 가장자리 용머리 위 세 곳에는 여의주가 불꽃(火炎)을 뿜어내는 화염주(
火炎珠) 형태를 표현해 놓았다(도판 13).
이런 탑비 양식은 보물 제170호 <쌍봉사철감선사탑비>(도판 14)에 그대로 이어지는데 이수에서 금시조의
표현이 사라져 용들이 활기를 되찾은 것이 다르다.
여전히 거북의 오른발은 뒤집어 표현하였으며 화염주는 귀꽃 모양으로 화염을 과장해 놓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경문왕(861∼874년) 시기에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인 곡성 대안사나 화순 쌍봉사에서
이렇게 찬란한 부도 미술이 피어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당시 정세와 연결해 가면서 규명해 본다.
7. 철감선사 탑비 건립 시말
쌍봉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한림랑(翰林郞) 최하(崔賀)가 지은 ‘무주동리산대안사
적인선사비송병서(武州桐裏山大安寺寂忍禪師碑頌幷序, 872년)’에 따르면 헌덕왕 6년(814)에 당나라에
건너가 남종선의 시조인 육조(六祖) 혜능선사(638∼713년)의 법증손(法曾孫) 서당(西堂) 지장(智藏)선사
(735∼814년)에게 인가(印可)를 받고 돌아와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산조(開山祖)가 된 적인(寂忍)선사
혜철(慧徹 혹은 惠哲, 785∼861년)이 신무왕 원년(839) 2월에 귀국하여 최초로 하안거(夏安居)를 지낸 곳이
이 무주(武州) 관내 쌍봉사라 하였으니 쌍봉사가 늦어도 839년 이전에 창건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후 철감(澈鑑)선사 도윤(道允, 798∼868년)이 이곳에 주석하며 일문(一門)을 개설하여 쌍봉산문의 이름을
만방에 떨치게 되니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대당신라국고봉암산사교시지증대사적조지탑비명병서(大唐新羅
國故鳳巖山寺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幷序, 924년)’에서 쌍봉 운(雙峰 雲)이라 한 것도 바로 이 철감선사
도윤(道允)의 윤(允)을 동음(同音)으로 표기한 것일 터이다.
철감선사는 만년에 이곳에서 주석하다가 열반한 듯 그 부도인 국보 제57호 <쌍봉사 철감선사탑>과 탑비인
보물 제170호 <쌍봉사 철감선사탑비>가 남아 있으나 비신(碑身)이 망실되어 선사의 행장과 절의 사적은
자세히 알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이 비문에서 뽑아냈다고 생각되는 내용이 현존 최고(最古)의 선종사서(禪宗史書)인 ‘조당집(祖堂集)’
권17에 수록되어 있고 철감선사의 수제자로 사자산문(師子山門)을 개설한 징효(澄曉)대사 절중(折中,
826∼900년)의 탑비가 남아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기록을 토대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장보고전(張保
皐傳) 등 당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철감선사의 행장과 쌍봉사의 현황을 대강 짐작할 수 있으니 이를 약술
하겠다.
철감선사는 속성이 박씨(朴氏)이고 한주(漢州) 휴암인(巖人)이라 하였으니 현재 황해도 봉산 출신이었다.
누대 호족으로 조부와 부친이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함은 그의 신분이 육두품 이하의 향족(鄕族)
이었음을 나타낸다. 어머니는 고씨(高氏)이고 16개월 만에 선사를 출산하였다 한다.
18세 되는 헌덕왕 7년(815)에 화엄 10찰(刹) 중의 하나인 김제 귀신사(鬼神寺, 歸信寺)로 출가하여 10년
동안 화엄학을 익히고 나서 28세 때인 헌덕왕 17년(825)에는 사신 행차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건너
간다.
이곳에서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년)의 제자로 육조대사의 법증손에 해당하는 지주(池州) 남전
보원(南泉 普願, 748∼834년)선사를 찾아 뵙고 인가를 받는데 남전선사는 “우리 종(宗)의 법인(法印)이
동국으로 돌아가는구나(吾宗法印, 歸東國矣)” 라고 탄식했다 한다.
철감선사는 스승 남전선사가 열반한(834년) 이후에도 13년 동안이나 당나라에 더 머물러 있다가, 당(唐)
무종(武宗)이 회창(會昌) 5년(845) 8월에 폐불을 단행하자 이를 지켜본 다음 회창 7년, 즉 문성왕 9년
(847) 4월에 50세 나이로 귀국선에 오른다.
무종이 도사 조귀진(趙歸眞)의 망언을 듣고 불사(佛寺) 4만여 개소를 헐고 승니 26만여 명을 환속시키는
소위 회창법난(會昌法難)을 일으키는데, 그 다음해 3월에 무종이 갑자기 돌아가고 4월에는 조귀진이
사형당하며 복불령이 내려지는 생생한 인과 현장을 목도한 뒤의 일이었다.
이해는 바로 청해진 대사 장보고가 청해진에서 반란을 꾀하다가 부하 장수인 염장(閻長)에게 속아서 살해
당한 지 만 1년이 되는 때였다.
철감선사가 당나라에 건너간 지 3년 뒤인 흥덕왕 3년(828)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여 제해권을 장악
하기 시작하고 장보고가 살해된 지 1년 뒤에 철감선사가 돌연 귀국하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하게 해준다.
더구나 장보고의 득세기인 희강왕 2년(837)에 당에 건너갔다가 그 조사인 도의선사의 가르침과 중국 선사
들의 가르침이 다름이 없다 하여 3년 만에 귀국하는 가지산문(迦智山門) 3대 조사 보조선사 체징이 장차
그 개산지(開山地)를 청해진 부근 장흥(長興) 보림사로 한다든가, 역시 장보고가 한창일 적인 신무왕 원년
(839) 2월에 귀국하는 동리산문 개산조(開山祖) 적인선사 혜철이 귀국하여 첫 하안거지(夏安居地)로
무주관내 쌍봉사를 택한 것은 모두 청해진 세력과의 깊은 관계를 시사하는 사실들이다.
이처럼 청해진 세력과 도당 유학승 세력인 선사들과는 밀착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으니 철감선사도 비록
장보고가 살해된 뒤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장보고가 키워 놓은 청해진 선단에 의해 귀국길에 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청해진 쪽으로 들어오다 영산강 하구인 영암 구림이나 이를 거슬러 올라 나주 회진(會津)
에서 내려 부근 선종 사찰에 우선 주석하였을 터인데, 혜철선사가 머물렀다는 쌍봉사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쌍봉사는 나주에서도 영암에서도 완도나 장흥에서도 광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민애왕(閔哀王) 원년조에 따르면 장보고가 신무왕 김우징(金祐徵)의 청으로
민애왕을 축출하기 위해 5000병력으로 경주로 진격할 때 청해진에서 무주(지금 광주)로 진군하자 무주의
관군(官軍)이 쌍봉사 부근 철야현(鐵冶縣; 지금 남평면)에 나와 접전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쌍봉사가 남도
에서 해륙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철감선사는 이 쌍봉사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염장 같은 배신자가 청해진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비위에 맞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장담사(長潭寺)에 주석하여 제자를 기르기 시작한다. 뒷날 사자산문(師子山門)을
개산(開山)하는 징효대사 절중(折中)도 이곳에서 입실(入室)한다.
8. 청해진 세력의 정신적 지주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문성왕 17년(855) “춘(春) 정월(正月)에 국왕이 사신을 보내 서남 백성
을 어루만진다”고 하였다. 철감선사가 58세 되는 해였다. 서남이라면 청해진 세력이 있는 무주 일대이니
이곳에서 어떤 소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다.
아마 장보고를 살해한 배반자 염장 일파가 장보고 친위 세력에게 제거되는 정세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에 배반자를 두둔할 필요가 없는 신라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이를 무문(撫問; 어루만지며 고통을
물어봄)하는 형식으로 무마하려 했던 듯한데, 이를 계기로 장보고와 관계가 깊었던 선사들이 차례로 이
지역으로 내려와 선문을 개설하여 선지(禪旨)를 전파함으로써 청해진 세력의 정신적 지주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는 이곳의 안정을 희구하던 신라조정에서도 바라던 바라 이곳의 개방적 진취적 분위기를 감안하여 청해진
세력 및 선종 세력과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있는 도당(渡唐) 유학생(留學生) 출신으로 지방관을 삼아 이들로
하여금 왕명을 받들고 선사들을 초빙하는 형식으로 각처의 선사들을 집결시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를
후원했던 모양이다. 가지산문의 개산조(開山祖)인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체징의 탑비에서 대강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헌안왕 3년(859)에 보조선사가 무주(武州) 황학난야(黃壑蘭若)로 이거(移居)해오자 국왕은 유학생 출신인
장사현(長沙縣) 부수(副守) 김언경을 보내 입경(入京)을 청하지만 보조선사가 사양하자, 다시 영암군(靈岩郡)
승정(僧正) 연훈(連訓)법사와 봉신(奉宸) 풍선(馮瑄) 등으로 하여금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이거할 것을
청하는 왕지(王旨)를 전하게 하고 이를 관력(官力)으로 후원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철감선사도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쌍봉사에 주석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보조선사보다 6세나 연장
이라서 장보고와의 인연이 더 깊었을 철감선사이니, 아마 서남백성을 무문하는 문성왕 17년(855)경에
보조선사가 가지산에 터를 잡는 형식을 거치며 쌍봉사에 주석하였을 듯하다.
이후 철감선사는 10여 년 동안 쌍봉사에 주석하며 착실히 문도를 길러내고 주변 지역을 교화하다가 경문왕
8년(868) 4월18일에 홀연 열반에 드니, 문도들은 조정에 시호를 내리고 묘탑과 묘비를 세워주도록 주청
하여 허락을 얻어냄으로써 이와 같이 호화찬란한 부도와 탑비를 건립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적인선사탑과 비석이 적인선사의 열반(861년) 후 8년 만인 경문왕 8년(868)에 세워진 것으로 미루어보아
철감선사 탑비도 철감선사 열반 후 5∼6년은 지나서야 이루어진 듯하니 빨라야 경문왕 12년(872)경에
세워졌을 듯하다.
그런데 경문왕 8년에 세워진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이 절제미의 극치를 보이고 그 직후에 건립
되었을 <쌍봉사 철감선사탑>이 장식미의 극치를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는 경문왕 시대(861∼874년)가 신라 하대에 있어서 일시 호황을 누리던 중흥기였기 때문이다.
원성왕(785∼798년)의 왕위찬탈 이후 태종무열왕계의 진골 왕손들로부터 끊임없이 도전받아왔던 왕권의
정통성 문제가 신무왕(神武王, 839)과 문성왕(文聖王, 839∼856년)이 등극하면서 완전히 해소되어 그 후
임금들은 떳떳이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 그 첫째 이유다.
태종 무열왕의 9세손이며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의 증손자인 김양(金陽, 808∼857년)이 신무왕을 옹립
하고 문성왕을 사위로 삼아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해준 것이다. 그래서 문성왕은 김양이 돌아가자 서불한을
추증하고 김유신의 전례에 따라 장례를 성대히 지내고 태종무열왕릉 곁에 배장(配葬)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거기다 경문왕은 신무왕의 외손자이자 문성왕의 생질이며 헌안왕의 맏사위로 왕위계승에 있어서 어떤
흠집도 없을 뿐만 아니라 15세에 이미 국선(國仙)이 되어 그 총명과 덕망이 천하에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의 통치를 만족해하지 않는 백성은 없었다.
그런 위에 왕실과 장보고 세력이 화해하고 조정에서 장보고 세력의 해상활동을 묵인하기에 이르니,
당시 청해진의 잔존 세력들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과 중국해안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무역과 약탈을
일삼았던 듯하다.
그래서 경문왕대만 하더라도 재위 14년 동안 일본에서 신라구(新羅寇)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만 무려 14회에
이른다. 그러니 청해진 세력의 외호를 받고 있던 무진주 일대의 선문에서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선사들의
부도와 탑비를 이와 같이 호화찬란하게 건립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로자나불상과 통일신라의 왕도문화 · 변방문화
[한국 불교미술의 원류 26]
1.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
보물 제244호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판 1)
대구 팔공산 동화사(桐華寺) 비로암(毘盧庵) 대적광전(大寂光殿) 안에는 보물 제244호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판 1)이 봉안되어 있다. 이 불상은 오른손 주먹으로 왼손 식지(食指; 둘째 손가락)를
감싸쥐면서 오른손 엄지로 왼손 식지를 살짝 누르듯 댄 지권인(智拳印)을 짓고 있어 금강계 만다라의 주존
으로 등장한 비로자나불좌상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지권인을 지은 비로자나불좌상 형식은 화엄 불국사에서 불국세계를 총체적으로 구현해내는 과정에
처음 출현한다는 사실은 지난 24회 ‘비로자나불상의 출현’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나왔다.
그래서 불국사 비로전에 봉안된 국보 제26호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제24회 도판 3)은 지권인을
지은 불상 형식의 시원을 이룬다는 사실도 지적하였다.
그런 비로자나불 형식이 선종의 도입과 더불어 선종사찰의 주불로 영입된다.
이는 깨달음의 목표를 불성(佛性; 불타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의 본질에 두고 있는 선종으로서는 그 불성의
본질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는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모시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도판 2)
그래서 우리나라 남종선의 총본산으로 공인되는 장흥 보림사에서도 이런 양식의 비로자나불상을 본존불로
모시었으니, 헌안왕 2년(858)에서 4년(860) 사이에 만들어지는 국보 제117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寶林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도판 2)이 그 효시를 이룬다.
이후 이런 비로자나불좌상 양식은 신지식인 선종 이념의 확산과 더불어 참신한 신식 불상양식으로 인식되어
차츰 전국으로 전파되어 나갔던 듯하니,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그렇게 만들어진 불상 중
하나였다.
보물 제247호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도판 3)
그 사실은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동시에 만들어진 보물 제247호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도판 3)에서 출현한 보물 제741호 <민애대왕 석탑사리호(舍利壺; 사리를 담은 항아리)>(도판 4)에 새겨진
<민애(敏哀)대왕 석탑기(石塔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애대왕 석탑 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 보물 741호 [ 도판 4]
동국대학교도서관 통일신라시대 경문왕 3년(863년)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아가리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재는 크고 작은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보인다.
아가리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
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
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
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탑을 만든 시기가 경문왕 3년(863)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이는 황수영 선생이 1969년 ‘신라민애대왕석탑기(新羅敏哀大王石塔記)’라는 논문으로 세상에 알린 내용
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민애대왕 석탑기>가 새겨진 사리호는 1966년 전문 도굴꾼들에게 절취되는 과정에
파괴되어 그 파편의 일부가 분실됨으로써 전문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부분만으로도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과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만들어진 내력을 짐작할 수 있으니, 옮겨보면 대강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국왕이 삼가 민애대왕(817∼839년)을 위해 복업(福業)을 추숭(追崇)하려고 석탑을 만든 기록.
대체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설치하면 이익 되는 것이 많다고 한다. 비록 팔만사천 법문(法門)이 있다
지만 그중에 마침내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널리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은 탑을 세워 예배하고 참회하며
도를 닦는 것보다 더 넘치는 것이 없다.
엎드려 생각해보니 민애대왕 김명(金明)은 선강(宣康)대왕의 장자이고 금상(今上; 현재 임금인 경문왕)의
노구(老舅; 아버지의 외삼촌, 경문왕은 민애왕의 작은매형인 희강왕의 손자임)이다. 개성(開成) 기미(己未,
839년) 대족월(大簇月, 1월) 23일에 문득 백성을 버리니(돌아가니) 춘추 23세였다.(이하 파손되었으나 추정
가능)
이미 2기(二紀, 24년)가 지나서 복업을 추숭하려고 동수(桐藪; 오동나무 숲이란 뜻이니 동화사를 가리킴)의
원당(願堂) 앞에 석탑을 새로 세운다.(이하 파손으로 문맥 불통)
함통(咸通) 4년(863) 계미 무역월(無射月, 9월) 10일에 기록하다. 한림(翰林) 사간(沙干)인 이관(伊觀),
전지(專知) 대덕(大德)인 심지(心智), 동지(同知) 대덕인 융행(融行), 유내승(唯乃僧)인 심덕(心德), 전지
대사(專知大舍)인 창구(昌具), 전(典)인 영충(永忠), 장(匠)인 범각(梵覺).”
여기서는 다만 현재 비로암 대적광전 정면에 서 있는 <비로암 삼층석탑>을 세운 내력만 기록하고 있다.
민애대왕(838∼839년)의 추복을 위해 경문왕(861∼875년)이 석탑을 그 원당 앞에 세운다는 것이다.
그 원당이 현재 대적광전이니, 원당과 함께 이 탑을 조성했다고 보아서 이 탑이 이루어지는 경문왕 3년(863)
전후한 시기에 대적광전에 봉안된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만들어졌으리라고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추론이다.
2. 동화사와 보림사 비로자나불좌상은 동일 양식
그런데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흥 보림사 대적광전에 봉안된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동일 양식인 것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우선 지권인을 지은 것이 같고, 육계(肉)가 상투인지 머리통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커진 것이 같으며,
이중착의법(二重着衣法)으로 가사를 두 벌 입어 양쪽 옷깃을 풀어헤친 듯 앞가슴을 드러내 놓은 것도 같다.
보림사 철불이 858년에서 860년 사이에 만들어졌으니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목과 허리가 좀 짧아지고 무릎 높이가 높아져 있다.
지권인을 지은 두 손 높이도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
래서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다 조금 더 긴장된 모습을 보여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이 큰 차이점
이다. 옷주름을 도식적으로 처리한 것이나 결가부좌한 두 발을 모두 옷자락 속에 숨긴 표현도 이 불상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어놓은 요인 중의 하나다.
형식의 틀에 갇혀서 이를 탈피하지 못한 채 말라 죽어가는 신라 왕도문화의 실상을 반영하는 듯한 조각기법
이다.
이에 반해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옷자락을 자유분방하게 멋대로 풀어헤치고, 옷주름도 사실성을
염두에 두며 형식성을 타파하고, 두 발은 시원스럽게 옷자락 밖으로 드러내 활달한 기상을 표출하고 있다.
틀에 얽매여 노쇠화해가는 신라의 왕도문화와 새로운 이념을 바탕으로 참신하고 건실한 새 문화의 창조를
모색해 가는 변방문화의 대조적인 현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는 국화잎새 구름무늬와 불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에 구름을 탄 화불(化佛)이 좌우에 4구씩 돋을새김되고, 그 정상 부분에는 삼존불좌상 형태의 화불이
하나 더 표현되어 모두 9구의 화불이 장식됨으로써 그 화려한 장식성을 과시하고 있다.
문성왕 이래 왕권의 정통성을 되찾고 추악한 왕위 다툼을 청산하여 실추된 왕권을 잠시나마 회복하고 난
뒤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해상세력과 대타협을 이루어냄으로써 일시 재봉춘(再逢春; 가을에 꽃피는 현상)
을 맞이하였던 경문왕 시대의 왕권 과시 욕구가 이렇게 화려한 장식성을 요구했을 것이다.
연화대좌의 상대(上臺)는 위로 핀 연꽃잎(仰蓮)을 2중으로 돌려 장식했는데 연꽃잎 표면에 다시 배추잎새
같은 덧장식을 가하였고, 중대석에는 국화잎새 구름무늬와 사자상을 높은 돋을새김으로 전면을 장식해
놓았다. 8면을 상징하기 위해 운각(雲脚;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낸 상다리나 난간 기둥) 형태의 구름당초
기둥을 8면에 세우고 그 사이 8면에 사자상을 입체조각에 가깝게 높게 돋을새김해 놓았다.
그리고 하대는 아래로 핀 연꽃잎(覆蓮; 뒤집어진 연꽃)이 쌍엽으로 장식되어 있다.
연화좌와 사자좌, 수미좌의 의미를 함축한 복합적 의미의 좌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바로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제25회 도판 9)의 기단부에서 보여주던 복합적 대좌의 의미다.
이것이 이미 이 불상에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혹시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도 이런 형태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868년)이 돌아간 해가 경문왕 8년(868)이고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조
성된 것이 858∼860년이며 이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조성된 것이 경문왕 3년(863) 전후한
시기이니 이 셋이 서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3. 불상 건립의 정치적 배경
사실 이 셋은 서로 미묘한 인연에 얽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 얽힌 사연을 대강 정리해 보겠다.
원성왕(785∼798년)이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으로부터 왕위를 훔치고 나서 그 손자인 헌덕왕
(809∼826년)이 조카 애장왕(800∼809년)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면서부터 신라 왕실은 근친간의 왕위
다툼으로 편할 날이 없게 된다. 특히 헌덕왕의 아우인 흥덕왕(826∼836년)이 죽고 나서는 다툼이 극에
이른다.
이미 헌덕왕 14년(822) 정월에 헌덕왕이 그 아래 아우인 흥덕왕을 태자로 삼고 그 아래 아우인 선강(宣康)
태자 충공(忠恭)을 각간으로 삼으니, 선강태자 김충공은 흥덕왕 10년(835) 2월까지 13년 동안 상대등
자리에 있으면서 대권을 행사한다. 사실상 부군(副君)의 위세를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선강태자 김충공이 흥덕왕에 앞서 흥덕왕 10년에 돌아가게 된다.
이에 흥덕왕은 충공의 맏사위이며 자신의 사촌아우인 아찬 김균정(金均貞)을 상대등으로 삼고 충공의
장자인 대아찬 김명(金明, 817∼839년)을 시중(侍中)으로 임명한다. 그런데 흥덕왕이 다음해인 흥덕왕
11년(836) 12월17일에 갑자기 돌아간다. 후사를 분명히 결정하지 않은 채 돌아갔던 듯하다.
이에 상대등 자리에 있던 김충공의 큰사위 김균정이 김양(金陽, 808∼857년)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나아
간다.
김양은 명주군왕 김주원의 증손자로 태종 무열왕의 9세손에 해당하므로 왕위 계승문제에서 발언권이 가장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자 당연히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생각하던 시중 김명은 이에 반발하여 작은매형인 희강왕 김제륭(金悌隆,
836∼838년)을 부추겨 왕궁으로 쳐들어가서 큰매형인 김균정을 잡아 죽이게 한다.
김제륭은 김균정의 손아랫동서이기도 했지만 친조카이기도 했다. 김명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한 김제륭은
큰동서이자 숙부인 김균정을 죽이고 자립하고 나서 처남인 김명을 현재 총리격인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이때 김명의 나이 21세였다.
그러나 김명은 자신에게 대권을 넘겨줄 줄 알았던 작은매형 희강왕이 자립하여 보위에 오르자 이에 불만을
품고 희강왕 3년(838) 1월에 시중 이홍(利弘)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좌우를 살해한다.
김명의 야심을 그제서야 눈치챈 희강왕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줄 알고 목매 자살하고 말았다.
이에 김명은 22세로 보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희강왕 2년(837) 5월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김명의 야심을 간파하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난다. 그는 낙동강 하구인 양산 황산강(黃山江)에서 배를 타고 장보고가 대사
(大使)로 있는 청해진으로 간다.
장보고에게 1만 군사를 빌려줄 때 그가 시중으로 있으면서 이 일을 적극 후원했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김우징은 여기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김명이 본색을 드러내 희강왕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우징은 군왕을 시해한 역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장보고에게 군사를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장보고로부터 5000군사를 빌린 김우징은 김양과 함께 3월에 무진주까지 공략해 들어갔다가 민심의 향배만
확인하고 되돌아온다.
민심의 소재를 파악하고 난 그들은 왕도 공략에 자신감을 가지고 군세를 다시 정비해 12월에 대공세를
취하여 쌍봉사 근처인 무주 철야현(鐵冶縣; 지금의 南平面)에서 왕의 군대를 대파한다.
승승장구 밀고 들어가 민애왕 2년(839) 기미 윤정월 19일에는 대구에 당도한다.
민애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구 서교에서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왕군이 대패하여 죽은 자가
과반수나 되었다.
왕은 나무 아래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패군하자 좌우가 모두 달아나 홀로 남게 되었다.
왕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댁(月遊宅)으로 들어가니 병사들이 뒤쫓아와 왕을 시해하였다.
이에 우징의 조카이자 사위인 김예징(金禮徵) 등이 김우징을 맞아들여 보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신무왕(839년
4월∼7월)이었다.
그러나 신무왕은 등극한 지 3개월 만에 돌아가고 그 장자인 경응(慶膺)이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다.
이가 문성왕(839∼857년)이다.
문성왕은 등극하고 나자 이런 교서(敎書)를 내려 장보고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군사권을 공식 인정
한다.
“청해진 대사 궁복(弓福)은 일찍이 군사로 선대왕을 도와 선조의 큰 역적을 토멸하였으니 그 공업(功業)과
열의(烈義)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에 진해장군(鎭海將軍)을 삼고 아울러 장복(章服; 관리들이 입는 의복)을 내려주노라.”
그리고 문성왕은 청해진에 피란해 있을 때 약속했던 대로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 둘째 왕비)로 맞아
들이려 한다. 먼저 문성왕 4년(842) 3월에 진골왕족으로 왕위계승에 가장 확실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김양의 딸을 첫째 왕비로 맞아들인 다음 문성왕 7년(845) 3월에 진해장군 장보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맞아
들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왕도 귀족들이 섬 사람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완강하게 반대하므로 왕도 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문성왕 부자를 보호하여 옹립하는 데 절대적인 공로를 세운 장보고는 이 소식을 듣자 몹시 분노하였다.
그래서 다음해인 문성왕 8년(846) 봄에 청해진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신라 왕도로 다시 진격해 들어가 반대한 귀족들을 쓸어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무주인 염장(閻長)이 거짓으로 반란에 가담하는 척 장보고 진영에 들어와 환대하던 장보고를
술자리에서 칼을 빼앗아 찔러 죽임으로써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
러자 구심점을 잃은 청해진 해상세력은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산발적으로 신라조정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던 듯하다.
그래서 신라 조정은 문성왕 13년(851) 2월에 청해진을 혁파하고 그 무리를 곡창지역인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김제)으로 옮겨 농사를 짓게 한다.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던 뱃사람들이 농사짓는 일에 적응할 리
없다. 그래서 이 정책은 실패하고 이들은 모두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문성왕 17년(855) 정월에 문성왕이 사신을 보내 서남 백성을 어루만졌다는 사실은 다시 돌아온 청해진
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국왕의 배려였을 듯하다. 그래서 청해진 세력은 강화만이나 아산만 등의
해양세력과 연계를 맺으면서 서서히 제해권을 되찾아가는 듯하니, 이 시기 일본에서 신라구(新羅寇)의
침략에 시달리며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런데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립하는 흥덕왕 3년(828) 4월 이후로 이 청해진 선단(船團)에 의해 수많은
당나라 유학생과 유학승들이 내왕했던 것을 현존하는 비문(碑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흥덕왕 5년(830)에 쌍계사 진감(眞鑑)선사 혜소(慧昭, 774∼850년)가 귀국하고 희강왕 2년(837)에는
보조(普照)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이 당나라로 건너갔다.
이해 9월12일에는 봉림산문(鳳林山門)의 시조인 원감(圓鑑)선사 현욱(玄昱, 787∼868년)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 무주 회진(會津)으로 귀국했다 하니 장보고 선단이 아니고서는 이런 뱃길을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무왕 원년(839) 2월에는 적인(寂忍)선사 혜철(慧哲, 785∼861년)이 돌아와 쌍봉사에 머물다가 곡성
동리산(桐裏山)에 대안사(大安寺)를 짓고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이때가 장보고 세력이 극성을 한 시기이니 이 쌍봉사나 대안사 모두가 장보고의 시주와 후원으로 설립
경영되는 절이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문성왕 2년(840)에는 보조선사 체징이 귀국하여 무주(武州) 황학(黃鶴) 난야(蘭若; 精舍, 즉 절의 의미)에서
거주하였고, 문성왕 7년(845)에는 성주산문의 시조인 낭혜(朗慧)화상 무염(無染, 800∼888년)이 귀국한다.
장보고의 피살 소식을 듣고는 문성왕 9년(847) 4월에 쌍봉사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868년)이 돌아오고
사굴산문(山門)의 시조인 통효(通曉)대사 범일(梵日, 810∼889년)도 뒤따라 들어온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오가는 뱃길에서 장보고 선단과 깊은 인연을 맺어 청해진 주변의 서남해안 지방을
근거지로 삼고 남종선을 전파해 갔던 것이다.
적인선사 혜철이 곡성 동리산에 대안사를 건립하여 동리산문을 개설하고 살다가 그곳에서 열반하여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과 그 비석을 남긴 것이나 철감선사 도윤이 화순 중조산 쌍봉사에 살면서 남종선지를
전파하다가 열반하여 <쌍봉사 철감선사징효탑>과 그 비석을 남긴 것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보조선사 체징은 장흥 가지산에 가지산문을 개설하고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최초로 조성하거나 주변의
선배 선문 조사들의 부도를 감조(監造; 감독하여 만들어 냄)하여 선문조사들의 부도와 탑비 양식을 정비해
놓음으로써 선종미술의 선구를 이루어 놓는다.
이것이 모두 장보고 선단과 무관한 일이 아닌데 바로 그 선종미술 양식이 장보고 세력이 타도한 민애왕의
원찰을 짓는 데 심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니 역사 속에서 물고 물리는 오묘한 인과는 헤아릴 수 없다 하겠다.
4. 평신도들이 만든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도판 5)
신라말에서 고려초에는 철로 만든 불상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 작품은 그 대표적인 예로,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臺座)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이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는 이 시기에 가장 유행한 형태로, 상대와
하대에는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중대는 8각을 이루고 있다.
불상 뒷면에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남아 있어서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신라 국토의 서남해안에서 처음으로 출현하자 이 양식은 선사들이 곧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던 듯, 신라의 동북변경 지역인 철원에서도 이런 양식을 가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국보 제63호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遮那佛坐像)>(도판 5)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조상기(造像記)를 등뒤에 새기고 있어 그 조성 연대가 함통 6년(865, 경문왕 5)인 것을 알 수 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만들어지고 난 뒤 5년 만의 일이고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이 만들어지고 난 뒤 2년 만에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조상기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불기(佛紀) 1806년에 멀고 가까운 데 사는 향도(香徒)들이 장혼(長昏; 오래 묵은 어리석음)을 깨우쳐
대각(大覺; 큰 깨달음, 부처의 경지)을 이루고자 절 일에 스스로 몸을 던져 이 불상을 조성해 냈다.
때는 당 의종(懿宗) 함통(咸通) 6년(865, 경문왕 5) 을유 정월이고 장소는 신라국 한주(漢州) 북계(北界)
철원군(鐵原郡) 도피안사(到彼岸寺)다. 그 대표는 용악 견청(龍岳 堅淸)이고 인연을 맺은 거사(居士;
불교를 믿는 남자 재가신도)는 1500인이다.”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국왕의 발원과 시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도피안사 철조비로
자나불좌상>은 변방 철원 일대의 평신도 1500명의 발원과 시주 및 노력봉사로 조성된 것이니 그 성격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권인을 짓고 이중착의법으로 옷을 두 벌 입어 가슴이 넓게 드러나 있으며 육계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육계 부분이 커져 있다는 양식적 공통성이 있으나 느낌은 전혀 다르게 전해 온다.
우선 순박한 얼굴 표정에서 가식없는 천진난만성을 읽을 수 있고 거침없는 옷주름 표현에서 꾸밈없는
당당한 생활 자세를 감지할 수 있다.
굵고 긴 목과 넓고 튼튼한 어깨, 늘씬한 허리와 장대한 팔다리, 두툼하고 큰 손, 이 모든 것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건강하고 순진한 향촌의 청년상이다.
그러나 지략과 무예에도 만만치 않을 듯하니 이 지방을 다스리던 호족(豪族) 자제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세련되고 복잡한 표정과 살집 좋은 몸매, 도식화한 옷주름 처리, 화려한 광배와 대좌, 이런 것들이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면모이니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는 비교할 만한 특징들이다.
<취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판 6)
이 시기에 조성연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니 경북 봉화군 물야면
(物野面) 개단리(皆丹里) 취서사(鷲棲寺) 대웅전 서벽에 봉안되어 있는 <취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도판 6)이다.
얼핏 보아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계열의 불좌상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는데,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 비해 양식화 현상이 두드러져 동화사 불좌상을 의식하며 조성했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이중착의법으로 가사를 두 벌 입었으나 두 벌 입은 가사의 상호 연결이 불분명하여 두 벌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표현한 것 같지는 않다.
오른쪽 어깨 위로 반단식(半袒式; 반쯤 어깨를 드러내 놓는 방식) 표현을 한 옷자락이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나온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허리띠 매듭도 둥근 고리 형태로 처리해 사실성을 잃었고 두 팔뚝을 타고 내린 옷주름이나 두 다리에서 생긴
옷주름도 모두 도식화되어 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마치 수면(水面) 위의 물결
처럼 상징화되고 말았다. 가슴으로 흘러내린 가사 깃에 화문단(花文緞)을 댄 것 같은 표현도 장식성을 더
보탠 것이라서 이 역시 양식화 현상으로 보아야 할 요소다.
이렇게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취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그
앞에 건립된 석탑에서 석탑조성기(石塔造成記)가 새겨진 사리석호(舍利石壺)가 발견됨으로써 그 조성연대를
짐작케 해주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경에 벌써 이 사리석호는 석탑으로부터 반출되어 이 절의 승려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1929년 일본인의 소유가 된 것을 총독부 박물관이 매입해 들였다고 한다.
<취서사 사리석호>(도판 7)
이 <취서사 사리석호>(도판 7)의 생김새와 표면에 글자를 새겨 넣는 방법 등은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현 <민애대왕 사리석호>(도판 4)와 거의 동일한 양식이다. 크기도 서로 비슷하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출현 <사리석호>의 높이가 8.5cm이고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현한 <취서사
사리석호>의 높이가 8.1cm다.
<취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양식이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좌상> 양식과 유사했던 이유를 이것으로
재확인할 수 있다. <취서사 사리석호>의 표면에 새겨진 조탑기(造塔記)의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석언전(釋彦傳)의 모친 명단(明端)과 돌아가신 아버지 이찬(伊) 김양종(金亮宗) 공(公)의 막내딸이 친히
스스로 큰 서원(誓願)을 일으켜 전담(專擔)으로 불탑을 세운다.
이미 정토(淨土; 깨끗함으로 가득 찬 이상의 나라인 불국토)의 업(業)에 감응(感應)하여 겸해서 예국(穢國;
더러움으로 가득 찬 현실세계인 중생의 나라)의 생령(生靈)을 이롭게 하였으니 이 뜻을 효심(孝心)으로 순응
(順應)하여 이 탑을 세운다.
불사리(佛舍利; 부처님의 사리) 10알이 들어 있고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면(面)을
만들어 넣었다. 도사(導師; 인도승)는 황룡사 승 현거(賢炬)이다. 대당(大唐) 함통(咸通) 8년(867)에 세우다.
(이상 표면) 석장(石匠; 돌을 다루는 장인) 신노(神)(밑바닥).”
승려인 언전의 막내 누이동생이 그 부모인 이찬 김양종(金亮宗) 부부를 위해 이 탑을 세우고 불사리 10알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한 장을 봉안한다는 내용이다.
그해가 함통 8년, 즉 경문왕 7년(867)이라 했다. 이때 이미 이찬 김양종은 돌아갔던 모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란 의미인 고(考)자를 쓰고 있으나 김양종의 부인 명단(明端; 김씨였기 때문에 성을 생략했을 것이다)
은 아직 생존해 있었던 모양이라 모친(母親)이라 쓰고 있다.
이찬의 지위에 있었다면 김양종은 왕실 측근인 진골귀족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10 헌덕왕(憲德王) 본기(本紀) 2년(810) 조에 보면 정월에 파진찬(波珍) 김양종으로
시중(侍中)을 삼는다는 기록이 있고 3년(811)조에서는 정월에 시중 김양종이 병으로 면직하였다 쓰여 있다.
김양종이 헌덕왕(809∼826년) 초에 이미 총무처장관격인 시중을 지냈으므로 고관인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관등 제4위 파진찬으로 시중을 지낸 인물이 관등 1위인 이찬에까지 올라 있었다면 상당한 나이까지 성공
적인 삶을 살아간 왕실 측근 인물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민애왕의 복권(復權)을 상징하는 동화사 비로암의 창건(863년) 직후에(867년) 이보다 약간 규모는
작지만 거의 같은 양식으로 원찰을 세웠다면, 이 원찰의 주인공인 이찬 김양종은 민애왕과 함께 복권된
그의 측근 중신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민애왕으로 인해 야기된 극심한 왕위쟁탈전으로 골육간에 원한이 사무쳤던 신라 왕실의 대타협을 위해
경문왕이 민애왕의 원찰을 세워 그의 복권을 공식 인정하자 민애왕 편에 섰다가 신분과 지위를 박탈당하였던
왕족들도 따라서 사면 복권이 이루어졌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양종 집안에서도 승려가 되었기에 살아 남았던 석언전과 그 막내딸이 김양종 부부를 위해 그
들과 인연 있는 땅인 봉화 물야에 원찰을 세우게 되었던 모양인데, 그 건립 방식은 민애왕의 원찰인 동화사
비로암을 모방했던 듯하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현존하는 미술품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5. 보조선사 창성탑(彰聖塔)과 그 비석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남종선맥을 이어온 원적(元寂)선사 도의
(道義; 784년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821년 귀국)의 법손(法孫; 법을 이은 손자 제자)으로 그의 의발(衣;
가사와 발우, 정법의 법통을 이어가는 상수제자에게 전해주는 상징물)을 이어받은 전법제자(傳法弟子)다.
그래서 그는 전라남도 장흥 가지산(迦智山)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도의선사를 초조(初祖; 첫째 조사)
로 하는 가지산문을 열었다.
이후 보조선사는 이곳 가지산문에서 20여 년간 주석하면서 선지(禪旨; 선종의 종지)를 널리 전파하며
서남해안 지역을 교화하다가 헌강왕 6년(880) 4월13일에 77세로 열반에 든다.
그러자 제자 의거(義車) 등이 헌강왕 9년(883) 3월15일에 선사의 행장(行狀)을 엮어 왕에게 바치며 사리탑과
비석을 세워줄 것을 청한다. 이에 왕은 곧 시호(諡號)를 보조(普照)라 하고 탑호(塔號; 탑 이름)를 창성(彰聖)
이라 하며 절 이름을 보림사(寶林寺)라 정해 주고 정변부사마(定邊府司馬) 김영(金穎)에게 비문을 지으라
명한다.
보림사는 중국 남종선의 시조인 6조(祖)대사 혜능(慧能, 638∼713년)이 남종선의 총본산으로 광동성 영남도
소주(韶州)부 곡강(曲江)현 쌍봉산(雙峯山) 조계(曹溪)에 짓고 살았던 절 이름이다.
그러니 가지산문이 우리나라 남종선의 중심 선문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것이었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도판 8)
그런데 보림사가 6·25전쟁중에 전각 대부분이 불타 없어지는 참화를 입었으나 그 당시에 만들었던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해서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제25회 도판 1)와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도판 8) 등 문화유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서 초기 선종미술의 면모를 온전하게 전해 주고 있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비문을 통해서 이 보조선사 창성탑과 탑비가 조성된 것이 헌강왕 10년(884) 9월19일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돌아간 지 만 4년 5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탑과 비석을 세우는 공사 기간이 이만큼 걸렸다는 얘기인데 적인선사의 탑과 비석을 세우는 데 11년 걸린
것에 비하면 상당히 신속하게 진행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지산문의 비중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보물 제38호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도판 9)
뿐만 아니라 이미 남원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 산문을 연 시조)의 부도인 보물 제38호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도판 9)을 비롯해서 동리산문(桐裏山門)의 개산조 혜철
(慧徹)의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제25회 도판 7)과 사자산문(師子山門)
의 초조(初祖) 도윤(道允)의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雙峯寺澈鑒禪師澄昭塔)>(제25회 도판 9) 등 우수한
사리탑이 만들어지고 있어 사리탑 양식이 어느 정도 정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공기를 단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보물 제157호인 이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의 구조를 자세히 관찰하면 어째서 이런 추측이 가능한지 그
의문이 풀리게 된다.
우선 기단부 하대 맨 아래층 8면에 안상(眼象)을 새긴 것과 그 위층 8면에 사자상을 새긴 것이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870년)의 의장(意匠)을 계승한 것이다. 더 소급하면 바로 그 사부(師父) 염거(廉居,
?∼844년)화상의 부도인 <염거화상탑>(제25회 도판 5)의 사자상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위층은 운당초문(雲唐草文; 직역하면 구름당초무늬라는 의미이나 당초의 의미가 모호하므로 국화
잎새 구름무늬라고 바꿔 부르겠다), 즉 국화잎새 구름무늬를 둥글게 높은 돋을새김으로 표시하였으니 이는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상·중·하 삼층으로 이루어진 하대석은 사자좌와 수미좌를 상징한 것이다. 이들 삼층 하대석은 각층이
한 돌로 되어 있어 상당히 높은 느낌인데 지대석 높이도 만만치 않아 그 높이를 더해 주고 있다.
그 위로 8면 중대석이 드높게 자리하고 있다. 스승 염거화상의 부도인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이나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 제273호) 및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국보 제57호)에서 보인 낮고
좁은 중대석의 빈약한 표현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이는 보물 제38호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의 중대석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할 터인데, 안상 안에
팔부신장상(八部神將像)을 돋을새김한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의 장식성을 배제하고 단순하게 안상만
8면에 가득 차게 새겨놓았다.
그런데 그 안상 새기는 기법이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의 탑신석 받침돌 부분에 8면에 안상을 새기던
기법 그대로다.
기둥 전체를 배흘림으로 깎아서 팽만감으로 넘치게 한 다음 안오금을 주며 2중으로 안상을 파고들어가
8모의 모서리가 실패의 손잡이처럼 둥글게 불거져 나오게 하고 가운데에 가로금을 그어 대나무 마디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팽만감을 과시하고 있다.
드넓은 공간에 어떤 장식도 베풀지 않은 것이 그 팽만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이렇게 한껏 부풀어 오른 중대석 위에 그보다 지름이 그리 넓지 않은 앙련(仰蓮; 위로 핀 연꽃) 연꽃대좌를
한 돌로 만들어 얹었다. 그런데 연꽃잎 표면에 배춧잎 모양의 장식무늬를 넣은 것이나 널찍한 연꽃잎 표현이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의 연화상대석을 그대로 계승한 느낌이다.
이로써 사자좌, 수미좌, 연화좌의 의미를 모두 함축하는 기단부를 마련한 것이다.
다만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의 탑신석 받침에 해당하는 연꽃 씨방 부분의 팽만감 넘치는 처리방식을
중대석으로 옮겼기 때문에 이 부분은 8면의 낮고 예리한 층급받침을 중복하는 것으로 단순화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이 낮고 예리한 층급받침을 별개의 돌 하나로 처리하여 독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날카롭게 깎아서 시퍼렇게 날이 선 층급받침 위에 조금의 여유를 주지 않고 거의 그 넓이 전체에
해당하는 크기의 탑신석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8면의 벽면을 만들고 있는 모서리 기둥과 아래위 방목(枋木)
표현도 예리한 수직선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러면서 약간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상촉하관(上促下寬) 현상을 나타냈다. 8면 중 앞뒷면에는 문비
(門扉; 출입하는 문)를 상징하는 문고리와 자물쇠 장식이 표현되어 있고 그 양 옆면에는 사천왕(四天王)이
하나씩 표현되어 있다. 수미산 꼭대기에 모셔진 조사의 사리를 사천왕이 수미산 기슭 사방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 위에 또 처마 끝이 넓지 않고 물매 급한 기와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딴돌로 새겨 덮어 놓았다.
8개의 지붕마루가 합쳐지는 정상의 용마루 위에는 복발(覆),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주(寶珠)를 굵은
대나무 형태의 찰주(刹柱)에 꽂아 높이 장식해 놓았다. 대나무의 마디 표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고 맨
위에 얹은 보주는 불꽃을 사방에서 피워내고 있는 화염주(火炎珠) 형태다.
이 화염주 형태는 <쌍봉사 철감선사징소탑비>(제25회 도판 14)의 이수에 꽂혀 있던 그 모습 그대로다.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이 이런 구조를 갖추게 되니 이제까지 지붕돌의 물매가 넓고 중대석이 낮고
좁아서 마치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와 앉은 듯하던 선사들의 사리탑 양식이 거꾸로 땅에서 솟아오르는
죽순 모양으로 강인하고 굳센 느낌을 표출하는 새로운 양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중국의 남종선이 우리 선종으로 토착화해 나가는 현상으로 파악할 만한 미술 양식의 변화라 하겠다.
보조선사가 중국에 유학 갔다가 중국의 여러 선문을 역방하고 나서 도의선사의 가르침과 다름이 없음을
간파하고 그곳에서 인가를 받지 않고 3년 만에 그대로 귀국하여 본국선맥을 계승하여 가지산문을 개설한
사실과 일치하는 부도양식의 변화라 하겠다.
보물 제369호 <석남사 부도(石南寺浮屠)>(도판 10)
이제는 외부에서 날아온 선종이념보다 우리 땅에 뿌리를 내려 거기서 솟아난 선종이념이 우리에게 필요
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듯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도 양식은 경남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가지산 석남사(石南寺)의 도의선사부도로 그대로 이어지니
보물 제369호 <석남사 부도(石南寺浮屠)>(도판 10)가 그것이다.
이는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이 완성되는 884년 직후인 89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가지산문이 신라 왕경 쪽으로 세력을 확산해 나가면서 언양 가지산을 도의선사와 인연 있던 터로 만들기
위해 이 부도를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도 양식이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양식을 바로 뒤잇고
있어서 이 부도를 세운 사람이 보조선사의 제자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두 사리탑을 비교하여 동일양식 계열임을 밝혀 보겠다.
우선 기단부 하대 아랫단 8면 중 4면에 사자가 돋을새김되고 윗단에 국화잎새 구름무늬가 양각되어 사자
좌와 수미좌를 상징하는 것이 같다. 중대석이 배흘림으로 깎이고 8면을 안상 처리한 것이 같은데 다만 이
<석남사부도>에서는 안상 중심에 십자형 꽃무늬를 넣고 그 양쪽에 두 줄의 가로띠를 새겨넣은 것이
다르다.
그 결과 중대석에서 마치 북통과 같은 느낌을 받게 하고 있다. 상대석은 위로 핀 연꽃 모양으로 넓지 않으며
위에 8면의 탑신석이 올려져 있는데 비록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처럼 연화대석 위에 꽉 차지는 않지만
거의 같은 넓이를 차지하여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 양식을 계승한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게 한다.
지붕돌의 짧은 처마와 급한 물매 역시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을 계승한 것이고 노반과 복발, 보륜, 보개,
화염주 형의 보주 등도 이를 계승한 것이다. 다만 앙화와 보개가 커지고 찰주의 죽절문(竹節文; 대나무 마디
무늬)이 보륜형태로 양식화한 것이 다를 뿐이다.
그 결과 전체적으로 보아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처럼 땅에서 솟아나는 죽순 모양을 하게 되었다.
6. 국보급이 보물급 대접받아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역시 현존하는 사리탑비 중에 완전한 것 중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그런데 보물 대접밖에 받지 못하고 있으니 재고해야 할 일이다. 이 비석의 조형적 가치는 물론 그 내용과
현존 유물의 관계 등을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처럼 중요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 없을 터이니,
이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귀부와 비신(碑身; 비석 몸체), 이수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는 부도와
마찬가지로 그 이전에 존재했던 부도비의 여러 양식을 참고하여 독특한 탑비 양식을 고안해 낸 듯하다.
귀부의 거북머리가 용머리 형태인 것은 <대안사 적인선사탑비>(제25회 도판 12) 귀부와 <쌍봉사 철감선사
탑비>(제25회 도판 14) 귀부와 마찬가지다.
정수리에서 뿔이 솟지 않은 것은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의 귀부를 닮았고 귀갑 주변을 조개 모양
으로 특별처리하지 않고 귀갑의 연속으로 처리한 것은 <쌍봉사 철감선사탑비>의 귀부 양식을 계승하였다.
비신꽂이에 장식된 비운문(飛雲文; 나는 구름 무늬)과 연꽃잎 무늬의 자잘한 표현이나 입을 크게 벌려
이빨로 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은 모습 및 오른발을 뒤집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진전된 양식이다.
이수에서 세 개의 화염주(火炎珠; 불꽃을 피워 내는 구슬)를 중앙과 양쪽 귀에 뿔처럼 꽂는 대신 용머리를
그렇게 돌출시켰고 세 마리씩의 용머리를 좌우 비석 머리에 배치하였다.
이는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비>(도판 11) 양식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홉 마리 용머리를 이수에 표시한 것이다.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비>(도판 11)
그러면서 이수의 높이를 낮추고 좌우에 구멍을 뚫어 무게를 줄임으로써 경쾌한 느낌이 들게 하였다.
이런 구조 때문에 비석이 천 년 세월을 온전하게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대체로 비석이 쓰러지는 것은
비신이 이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출처] :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6 /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