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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눕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반가운 얼굴도 있네요. 환영합니다.
어떻게 준비되셨나요?
손님 맞이하실 준비 어제 쉬는 날인데도 다들 오셔서 열심히 청소해 주시고 또 리허설 해 주시고 또 함께 기도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오늘 손님 맞는 시간이 아니라요. 저희는 우리의 잔치 자리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6명의 임직자들이 정말 행복한 전환점의 시간이 되기를 원하고요.
또 우리 공동체가 정말 6명의 새로운 또 임직자들을 세우면서 다시금 새로운 결단과 다짐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할 때 우리 함께 손잡고 나아갑시다.
아멘 다음 주 주일이 무슨 주일인지 혹시 아시는 분 계시나요?
몇몇 분들이 아시네요. 저희 하늘소망교회가 개척할 때 요거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습니다. 뭐죠?
네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개척은 원래는 마지막 주에 하려고 그랬어요. 종교 개혁 주일날 원래 개척하려고 그랬는데 리모델링이 좀 빨리 되면서 그냥 뭐 다 됐는데 빨리 가지 뭐 그래가지고 두 주 빨리 나온 게 이제 앞당겨진 겁니다. 그래서 원래적으로 따지면 우리는 이제 다음 주에 개척하는 거예요. 딱 이제 벌써 이제 지난주에 개척한 지 이제 한 주가 지났는데 아무튼 우리 하늘소망교회의 개척의 모토 정신은 뭐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이거를 분명히 기억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종교개혁주의를 이제 맞이하면서 좀 이 종교 개혁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나누고 또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뭔가를 바꾸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혁명 혁명이라는 단어와 또 개혁이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뭔가를 바꾼다고 하는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혁명은 옛 체제를 완전히 제거해버리고 새로운 체제로 세우는 것을 혁명이라고 말을 한다면 개혁은 옛 체제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잘못된 것들을 고쳐서 새롭게 나가는 걸 개혁이라고 합니다.
어떤 게 더 어려울까요?
둘 다 어렵지만 그중에 개혁이 더 어렵습니다. 개혁은 새로운 걸 짓는 데만 몰두하면 되지만, 혁명은 새로운 걸 짓는 데만 몰두하면 되지만 개혁은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고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이 잘 조화를 이루어서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혁명은 정적으로 여겨지는 대상자가 있으면 다 죽여버리면 됩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다 끝장 내면 이제 새로운 게 시작되는 거예요.
그런데 개혁은 반대파를 남겨둔 상태에서 그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고 새로운 과정으로 나아가야 되는 거기 때문에 이 개혁이라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개혁이 더 어려우니까 그냥 혁명해버리면 될까요?
뭔가 변화를 주려면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제거당하고 희생당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모든 게 다 부정되는 거기 때문에 혁명은 정말 이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개혁을 시도하죠. 그런데 개혁이 어렵기 때문에 개혁하다가 빈번히 실패하는 경우들이 많고 심지어 개혁하다가 잘못된 쪽으로 더 안 좋은 쪽으로 가는 그런 역사적인 모습들도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는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개혁을 성공시킨 종교개혁자의 후예들입니다. 500년 전에 개혁이 일어났고 그 개혁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죠. 많은 난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그 개혁은 성공했습니다. 새롭게 세워진 교회를 구교회인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세워졌다라고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하는 말을 썼습니다.
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새롭게 세워진 교회 개혁하여 새로워진 교회, 개혁하여 새로워진 교회 그래서 개신교 개혁하여 새로워진 교회 여러분 개신교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정확히 아시겠죠?
개혁하여 새로워진 교회 우리는 지금 개신교 성도들입니다. 종교 개혁 가운데 내려져 온 소중한 명제 하나가 있는데요.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이게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명제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한 번 교회가 개혁을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개혁을 일으키기 위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모습들 가운데는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개혁을 해도 또 새로운 변질이 일어나고 또 그 가운데는 개혁해야 될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되는 세상 가운데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는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의 세속화의 영향을 털어내고 교회다움, 성경적인 교회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는 변질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코로나라고 하는 긴 터널을 지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져버린 것 같아요. 그런데 코로나라고 하는 이 엄청난 터널이 우리에게 큰 흉터를 남기고 갔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예배 그리고 공동체 그리고 사역이 엄청나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관도 엄청나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많은 부분에 있어서 변질된 모습들이 지금 현재 현존합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있어서 코로나 전과 후가 굉장히 많이 달라진 것들이 있어요.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의 의식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온라인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환경도 변화가 됐습니다.
근데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교회가 말씀적인 교회가 되기 위하여 계속 개혁해야 된다고 했는데 어떤 개혁을 해야 할까 우리가 종교개혁 507주년 이제 앞둔 한 주 앞둔 오늘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는 이 명제를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함께 말씀을 나눠보려고 합니다.
먼저 6절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아멘 바울이 볼 때는 이 갈라디아 교회가 자신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진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진 그런 곳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그 올바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 역사에서 교회가 세워져서 건강하게 세워지고 있었는데 바울이 그곳을 떠나간 이후에 빠르게 다른 복음이 그 교회에 들어와서 그 교회가 이상하게 되었다고 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다른 복음은 무엇일까요?
다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복음이 아닌 다른 이야기들이 더해지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다른 복음은 율법주의적인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고 하는 명확한 복음을 바울은 선포했는데 이 율법주의적인 복음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구약에서 말씀하신 율법을 지키고 그리고 우리와 같이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입술의 고백만으로 믿습니다는 고백만으로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전해주신 복음에다가 자기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구약의 전통들을 합해놓는 그것을 사도바울은 다른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사람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갈릴리 교회가 이 갈라디아 교회까지 와가지고 다른 복음을 증거해서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혼란하게 되고 그래야 되는 건가 그렇게 사람들이 태도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 보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이 다른 복음이 바로 너희들이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외에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문제를 정확하게 찾아냈습니다.
지금 이 갈라디아 교회가 무엇을 개혁해야 되는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율법주의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을 그들 안에서 다시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것들은 흘려보내 폐기시켜야 될 것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말씀에 대한 이야기였고요.
종교개혁 당시로 한번 우리 들어가 볼까요?
종교개혁 당시의 말씀입니다. 구교인 로마 카톨릭이 1299년 톨로사회의라고 하는 회의를 하는데 이때 우리가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결정을 합니다. 그 결정의 내용을 몇 가지 들어보면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 성경을 해석하는 것 그리고 심지어 성경을 소지하는 것을 금한다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그런 결정이 내려졌죠. 게다가 그 당시에 미사를 드리는 그 시간에 성경을 읽고 각론하는데 그 내용을 라틴어로만 하게 해놨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독일이나 영국이나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 나라 사람들은 자기나라 말만 알고 있는데 라틴어를 모르는데 여기 앞에 선 설교자가 라틴어로 지금 여기 앞에서 제가 말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성경도 라틴어로 읽고 라틴어로 설교를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예배에 와가지고 지금 뭔가 은혜를 받아야 되는데 라틴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죠. 지금 우리가 볼 때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중세 시대에는요. 철저하게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단절시켜버리는 그러한 제도가 있었다는 거예요. 예배드릴 때도 설교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말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 중세 시대에 성경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 조각 그런 것들이 발달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 이유도 여기에 속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그림을 통해서라도 성경 이야기들을 접하는 거예요. 간접적으로라도 그 성경 말씀을 접하고 성경 말씀을 가지고 싶은 거예요. 심각한 영적 암흑기입니다.
근데 여러분뿐만 아닙니다. 1546년 트렌트회의라고 하는 곳에서 또 심각한 결정이 내려졌는데요. 이때 결정은 뭐냐면 성경 66권 외에 외경 위경 7권을 성경에 포함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지금 로마 카톨릭은요. 지금 이때 결정된 것처럼 66권에다가 7건을 더해서 73권이 그들의 전경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역사적으로 지켜온 성경 외에 다른 것들 위경이나 외경을 포함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경과 외경에서 말하고 있는 잘못된 비성경적인 교리를 가지고 그들이 교리를 만들어냈는데 그 교리가 뭐냐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천사들의 중보의 힘 연옥설, 그리고 공덕 축척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죽은 부모를 위해서 기도하고 또 막 어떤 하나님 앞에 헌신을 보이면 죽은 부모가 지옥에 갈랑말랑했다가 천국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막 이런다는 그런 거를 이때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이게 이제 그 당시에 교리화가 되다 보니까 여러분 그 어마어마한 성전을 짓는 과정에서도 자기들이 막 면죄부 같은 걸 판매하고 막 이러지 않습니까?
그게 다 그 교리가 이미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 교리에 이미 젖어 있는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내가 면죄부를 받으면 돈을 내가지고 이렇게 면죄부를 받으면 나는 하나님 나라 갈 수 있어 성경을 기초한 복음이 다른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질돼버린 겁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이런 일들이 있었던 거예요. 종교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하게 문제를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외친 그 슬로건 중에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오직 성경으로 오직 성경으로 그리고 그들이 한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뭐였냐 바로 성경을 각 나라의 말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번역된 성경을 출판하고 또 설교도 그 나라의 말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읽고 묵상하고 그 가운데 은혜를 받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한번 점검해 볼까요?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우리 안에 영적인 지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그 여러 가지의 과정 속에서 우리 안에 있는 교회관이라는 것이 굉장히 많이 흔들림이 있었어요. 교회관 성경에 기초한 교회관이 아니라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교회관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에베소서 14장 15절 하반절부터 우리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스스로 세우느니라
아멘 교회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하고 있는데요. 교회를 하나의 생명체 유기체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머리이시고 우리는 각 지체를 이루고 있는 한 몸이라는 거예요. 한 몸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를 돕고 세우고 또 한쪽이 연약하면 그쪽을 향해서 같이 도와주고 세워주고 회복해야 하고 그것들이 교회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이죠.
그런데 코로나라고 하는 이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 안에 잘못된 변질된 교회관이 들어왔는데요. 이런 교회 안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흩어진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이제는 당연하게 여기고요. 모이지 못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별로 편안하게 생각합니다.
공동체가 응집력이 약화되기 시작해요. 이 몸이 하나여야 되는데 이 몸에서 막 떨어져 나가 있는데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코로나 가운데 우리가 진흙같이 똘똘 뭉쳐져서 하나의 공동체로 이루어져야 되는데 모래같이 그냥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흩어져버리는 겁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교회와 다른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이에 동조하는 성도들도 생겨납니다. 교회는 예수님은 좋은데 나는 교회가 싫어 나는 그래서 나는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나는 예수님을 믿어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가나안 성도라는 말을 씁니다. 가나안 성도 거꾸로 안 나가죠. 안 나가 나는 교회는 안 나가는데 나는 예수님 믿어 예수님은 믿지만 나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상처받고 나 아픈 거 그거 싫어 이런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또 과거처럼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교제하고 돕고 사랑하는 일을 꺼립니다. 예배만 드리면 되지 뭘 그렇게 모여서 뭘 해야 되고 또 무슨 소그룹을 모임을 하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근데 이런 것들은요. 지금 변질된 복음입니다. 변질된 교회가 아니에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주를 맞이하면서 다시금 우리 안의 교회관을 개혁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회는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몸 이룬 공동체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누가 아프고 연약하다면 서로 돌아보시고 또 함께하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처음에 이제 새로운 지체가 달라붙으면 뭔가 어색하고 연약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온전하게 하기 위하여 붙여주신 우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각 지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더욱더 하나 되기 위하여 힘쓰고 애쓰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0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은 이런 개혁을 외치면서 자기의 심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 속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죠. 수많은 핍박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외부적으로 오는 그런 박해를 떠나서 내부적인 그런 모함과 공격도 바울에게는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안에서 공격하기 시작해요. 타협해라. 그리고 율법을 수용해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바울을 향하여 타협점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그 타협을 거절하였습니다. 왜냐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죠.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타협할 수 없다라고 하는 분명한 그 마음이 개혁을 하는 데 있어서 우뚝 서게 하신 것입니다.
또 종교개혁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봅니다. 마틴 루터는요. 종교 개혁을 하는 과정 속에 교황으로부터 파면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를 지지하는 독일의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서 황제 앞에 서서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그래서 1521년 4월 17일 청문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가지 질문을 받아요. 첫 번째 질문은 그대가 그대의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들은 그대의 것으로 인정하는가 두 번째 질문은 그대는 이 책들에 쓴 내용을 철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마디로 쉽게 말하면 이거 니가 쓴 책이지 얘 두 번째 그런데 너 이 쓴 책의 내용 철회할 마음 있어 두 가지를 묻는다는 거예요.
당연히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네 제가 쓴 책이 맞습니다고 시인했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하루를 유예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날 저녁에 지인들에게 쓰는 편지에 자기의 마음을 담아서 편지를 기록했는데 그 편지 내용의 일부가 이렇습니다. 이 순간 나는 황제와 사절들 앞에 서서 철회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점점점 나는 내일 철회에 대한 답변을 할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였지만 이 하루 이상은 허락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한 영원히 한 글자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황제 앞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처리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여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현명하지도 않은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요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그 외침의 소리를 했습니다. 수많은 종교개혁의 과정 속에서 회유를 받았고 타협의 제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위협을 받았고 죽을 위기를 겪었습니다.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가요. 지난 역사 가운데 짧은 역사지만 짧은 역사 가운데 통회하고 회개해야 될 내용들이 있습니다. 바로 신사 참배에 대한 그런 내용들이죠. 신사 참배의 문제는 교회냐 신사냐 하나님이냐 천왕이냐 선택의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택하고 하나님을 택하면 그 당시에는 굉장히 핍박을 받을 수 있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교회가 교묘한 방법으로 타협합니다. 교회와 신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별개의 문제다.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신사는 나라에 대한 애국이다 이렇게 논리를 폈어요. 그래서 이 논리 가운데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또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해도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잘못된 우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도요. 다양한 모습의 타협을 요구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특별히 코로나를 지나면서 주일 성수에 대한 타협이 우리 안에 너무 많습니다. 지금까지는 주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주일날 예배 시간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주님께 예배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기본적인 인식을 우리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에 온라인 예배가 드려지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교회가 아닌 가정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내가 가고 싶은 어디에 가서도 예배드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일날 교회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요즘 간혹 있습니다.
근데 뿐만 아니라 주일날 그 동일한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 외에도 이제는 다른 시간대에 예배를 드릴 수 있다 보니까 주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 그냥 설교 한 번 듣는 것만으로 난 예배드렸어라고 자기만족하는 분들도 계시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 하늘소망교회가 새벽 예배를 온라인으로 열어놓고 제가 그 새벽 시간에 못 드리는 분들은 여러분들 일과 중에 언제든지 드리십시오라고 오픈해 드린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근데 지금 말씀드리는 건 주일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조금 이 코로나 전과 이후에 우리의 신앙관에 있어서 이 주일 성수에 대한 부분도 점검해 보자는 거죠.
과연 이렇게 예배하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주일성수했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런 말로 우리는 타협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타협의 뿌리를 뽑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을 온전히 지킬 수 있어요. 이것 외에도 여러분들이 한번 이번 종교개혁주를 맞이하면서 우리 안에 어떠한 개혁에 필요한 지점이 있는지를 한번 소그룹에서 나눔도 가지면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우리는 어떤 것들이 잘못돼 가고 있는가 저는 이번 임직식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 지난 1년 동안 기도하는 과정 속에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임직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좀 이렇게 만져주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여러분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지금 해왔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어떤 시각으로는 뭐 우리가 뭐가 달라라고 여길지 모릅니다. 근데 분명히 지점이 있어요. 한번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우리도 여기 지금 우리가 지금 준비하고 오늘 진행하는 임직식 이 과정에서도 여전히 개혁해야 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데 그냥 행사나 형식이 되지 않기를 원하고요.
오늘 오후는 정말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의 잔치입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 기쁘게 즐겁게 서로를 축하하고 축복하고 세워지는 사람들을 마음껏 축복하고 또 이미 세워졌던 분들은 이제는 후배들이 들어왔으니 내가 더 열심히 본이 되어서 함께 우리 공동체를 세워가야지 또 그 외의 분들은 나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저렇게 세워주실 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더 힘쓰고 해서 신앙생활해야지 그런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종교 개혁을 이제 507주년을 한 주 앞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려고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보실 때 지금 나의 신앙은 어떠한지,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복음이 혹시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타협하고 있지 않은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이 명제를 기억하고 늘 개혁하는 그러한 길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