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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82년(성종 13년) 9월 22일(음력 8월 10일) 경기도 용인현 (現 경기도 용인시)
사망 1520년 1월 10일 (향년 37세) (음력 1519년, 중종 14년 12월 20일) 전라도 능성현
(現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사사(기묘사화)
시호 문정(文正)
본관 한양 조씨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1. 개요
君,民,本爲一體, 心,體不可無一也。 人君當如保赤子, 以其心爲心; 以其形爲體, 可也。
임금과 백성은 본래 일체(一體)로서 마음과 몸은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임금은 마땅히 백성을 어린애처럼 보호하여 그들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그들의 몸을 자신의 몸처럼 여겨야 할 것입니다.
중종실록 중종 12년(1517) 1월 20일 2번째 기사 中 조광조가 중종에게 아뢴 말.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정치인.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과 출생지는 한양.
2. 생애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조광조/생애 문서를 참고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조광조는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평생 추구했다. 그것은 군주에 대한 철처한 성리학적 교육, 전국적인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실력과 파벌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채용 등이었다. 조광조는 이를 위해 군주가 성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이는 군주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으며 군주가 먼저 사사로운 욕심과 사심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며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스스로 정체(政體)를 세우고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하여 활용할 것을 비전으로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후대 사림파들에게도 모범이 되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는 소학과 향약(鄕約)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특히 조광조는 소학을 매우 중시하여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소학과 사서육경을 인쇄하여 보급하였고 지방 오지에까지 소학을 영향을 미쳤다.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향촌에 보급하는 동시에 지방에서의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사림파가 주도하는 성리학적 질서 확산과 도덕적 이상향 구현에 노력하였다.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그가 보급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소학은 성리학의 기초 이론을 담은 서적으로 여겨져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그의 스승 김굉필은 소학동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소학 연구에 치중하였으며 '업문(業文:문장에 힘씀)으로는 천기(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소학 예찬론자였다. 소학이나 사서 육경 외에도 삼강행실, 이륜행실, 주자가례와 같은 책을 널리 인쇄 및 간행하여 조선 8도에 배부 및 보급한 것도 유교적 도덕이념을 확산시키려 한 노력의 결과였다.
꼿꼿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으로 아무리 고관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 인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올바른 판단과 생각을 갖고 있다"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성격은 자신보다 능력이 모자라거나 대가 약한 사람들을 수하나 추종자로 만들 수 있지만 그와 능력이 비슷하거나 뛰어난 사람 혹은 그 못지 않게 심지가 강한 사람들의 혐오감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이다. 즉 학자로서나 정치인으로서도 스스로 적을 만드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그 성격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인지도...
그 외에도 조광조는 키가 매우 작은 편이었는데 부패한 대신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싫다고 하여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녀서 "조광조가 오면 멀리서부터 콧구멍만 보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말 그대로 우스개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조광조의 꼿꼿한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보인다.
조광조 일파의 개혁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조광조 일파는 공안개정(貢案改正), 노비종모법, 한전제(限田制) 같은 진보적인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비록 조광조가 현량과 실시 주장이나 국방에 대한 인식 반대파에 대한 편향적인 시각 등이 문제가 되긴 했지만 조광조는 공안개정, 노비종모법, 한전제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저 주장들만으로도 충분히 개혁가 소리를 들을 만했고 실제로 저 정책들은 민생 안정에 도움이 되는 진보적인 개혁이었다. 위훈 삭제의 경우 비록 조광조의 실제 언행을 보면 "해당 공신들은 실제 공이 없고 인간성이 좋지 않은 자들"이라는 공격만을 하고 "공신들의 과도한 기득권이 민생에 부담을 준다"는 종류의 발언은 보이지 않았지만 위훈 삭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신전의 특혜와 공적 영역으로의 환수였다.
특히 그가 방납문제의 대안으로 주장한 공안개정은 이후 이어진 공물변통 논의의 시초로 평가되기에 그가 실무에서 종종 보였던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선구안만큼은 실로 당대 최고의 혜안을 지닌 일세의 개혁가에 걸맞은 것이었다.]그 전에도 공안개정 따로 방납문제 따로 거론한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이 둘을 한꺼번에 연관된 문제로 화두로 올린것은 조광조가 최초였다고 할 수 있다. 조광조의 논리는 공안개정 즉 불산공물(不産貢物) 폐지가 자연히 방납유인 감소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공안에 있는 이상 방납인을 찾아갈 수밖에는 없고 공안에 없으면 그러할 이유가 없어지기에 이는 매우 직관적이고 명쾌한 논리였으나 그 이전까지 이 같은 방식의 접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불산공물(不産貢物) 폐지가 단순히 민호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것 이상의 해결이 시급한 구체적인 문제라는 것으로서 그 이전까지는 제대로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광조의 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가 그 같은 문제를 '방납'으로 정의한 것이다.
조광조 일파가 과격하고 편향적이라 남곤을 포용하지 못한 건 사실이나 기묘사림이 등장하고 그들이 노비종모법, 한전제, 공안개정과 같은 개혁을 외친 건 세조 때부터 시작된 훈구파들의 의한 조선의 모순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조광조 일파의 개혁 목표는 조선 초기의 국가운영 시스템으로 설정되었던 국역체제의 재확립이었다. 국역체제는 연산군 대의 폭정을 경험한 이래 본격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 대에 이르러서도 개선되기는커녕 도리어 악화일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국역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국가운영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양민과 수세전은 점차 흩어지고 버려지기 시작했고 이는 양민들이 국가권력과 관료들이 주도하는 수탈의 심화로 인해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해나가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조광조 일파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맞서 조선 초기의 국역체제를 복구하기 위한 개혁의 구체적인 방안으로서 노비종모법과 한전제를 들고 나왔다.
균전제와 한전제를 동시에 시행한다는 것은 당대에서 매우 급진적인 개혁책이었는데 왜냐하면 균전제를 실시하더라도 토지 보유자의 가족 인원과 소유 노비의 수가 많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보유 토지 결수를 넓힐 수 있지만 한전제까지 시행하면 아무리 점유자의 가족 구성원과 노비의 수를 늘리더라도 일정 이상의 보유 토지 결수를 넘어서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이와 같은 조광조 일파의 개혁론은 노비 증식과 농장 확대를 재산을 불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던 훈구파들에게는 치명적인 개혁론이다. 훈구파들은 조광조 일파의 개혁에 강력하게 저항해 조광조 일파의 개혁론을 좌절시키기 까지 하였다. 훈구파는 사실 국역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을 이용하여 재산 축적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국역체제의 복구를 주장하는 어떠한 논의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훈구파들은 조광조와 의외로 적대적이진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조광조의 과격한 공격은 고작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보니 증오 관계가 쌓일 시간도 아니었다. 사실 기묘사화는 이런 훈구파들을 친위세력으로 삼던 중종이 점점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친위쿠데타였다.
조광조 일파가 제거되고 조광조 일파의 개혁 활동이 조정에서 전면적으로 부정되자 그 결과 노비의 급증과 훈구파의 농장 확대는 꾸준히 계속되었고, 명종 재위 10년대 이후가 되면 국역체제는 회복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양민이 줄어들고 노비가 증가하는 양소천다 현상, 그리고 국가재정의 만성적인 적자 상황과 같은 위망에 직면하여 훈구파는 국가를 통제하고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김성우,「16세기의 사림파, 진보세력이었던가?」(『한국사 시민강좌』33, 2008)
쉽게 말해 조광조와 기묘사림의 집권기는 김안로 숙청 이후 중종사망 직전 몇년간을 제외하면 중종시대 전체중 가장 살육이 적었고 국가가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관한 건설적이고 발전적이며 생산적인 논의가 그나마 오가던 시대였다. 기묘사림들을 죽이려는 기도가 발각된 김우증의 난언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조광조는 살벌한 국문장에서 웃어버리거나 "저 아저씨 좀 정신 오락가락 하는 이상한 인간인데 죽이면 될까?" 같은 식의 미온적인 태도로 다수의 기묘사림이 조광조에 반발하고 있었음에도 귀양 선에서 끝내는 것에 합의를 해버렸다. 즉 조광조는 기묘사림 내에서는 그나마 온건파였던 셈이다.
이 점 하나만으로도 조광조는 소신은 강경했을지언정 정치지도자로서 굉장히 순수하고 관대했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극렬하게 대립하던 심정같은 정적마저도 그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드러낼 정도로 당대 조선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차마 인간적으로는 미워할 수 없었던 한 선량한 개혁가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는 말할 것도 없이 개인적으로도 청렴했으며 자신의 권한을 악용해가며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신의 복락을 구하기보다 그리고 누구를 죽이니보다 누구를 살리니보다 무슨 일을 할지가 더 중요했다. 대형옥사로 번질 수도 있었던 사건에서 집권세력의 지도자가 절제를 발휘해 사건을 마무리지은 것은 실로 그간의 권신들이 보인 바 없는 문명적인 정치행태였다. 이 짧은 사년이 끝나고 조선정부에는 조광조 사후 거의 이십년간 그 어떠한 진보와 개혁을 위한 노력도 없이 권간들의 얼굴만 바뀌며 살육이 벌어지는 야만적 정치행태만이 횡행했다.
다만 현량과 실시에 더해서 과거에서도 시와 문장을 없앤다는 것에 반대한 것을 이유로 당대에 조광조에게 억울하게 소인으로 몰렸으며 지금까지도 흔히 알려진 악명을 얻은 남곤 또한 억울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다. 남곤은 애당초 조광조를 천거하고 벼슬을 크게 높여줄 것을 청하는 등 적극 지원하면서 조광조의 올바른 개혁 부분에는 반대하는 파가 아니었다. 사관도 그렇다보니 남곤이 억울하게 주모자로 몰린 것을 모르고 조광조를 두고 대체 왜 중종을 거스르고 한편이던 남곤까지 적대해서 화를 자초했냐고 한탄하기도 했다. 후대에는 남곤의 숙청 주장도 조광조를 정말로 죽이려들기 보다는 '잠깐 관직에서 내쫒고 몇 년 귀양살이 시키는 정도면 되겠지' 정도로 온건하게 판단하다가 중종의 더 막나가는 방법에 휘말렸다는 해석도 있다. 한마디로 남곤 그리고 조광조 각각 모두가 할 말은 있었다. 잠시 타협점을 찾는 듯 보였으나 결국 그들 둘간의 갈등이 봉합되지 못했다는 것에 후세인으로서 서글픔을 느낄 뿐이다.
3.2. 부정적 평가
가장 대표적으로 여진족 속고내(速古乃) 토벌 관련 논의가 있다. 속고내는 여진족으로 1512년에 자신의 여진족 무리 400명을 이끌고 함경도 갑산 일대를 약탈하고 도망간 범죄자였다. 그러던 1518년 8월, 조선 정부는 "속고내가 함경도 인근에서 사냥을 한다"는 보고를 받았고 중종을 필두로 영의정 정광필, 병조판서 이장곤, 무신 유담년 등은 속고내 토벌을 논의하여 "몰래 기습을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마침 입궐했던 조광조가 "이 일은 가벼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중종은 다시 신하들을 불러들여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이 때 조광조가 한다는 말은 이런 것이었다. “여진족 추장 속고내에게 글을 보내어 꾸짖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그 때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 성대하게 토벌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듣고 있던 무신들의 어이를 날려버렸다. 정광필과 이장곤이 이렇게 반박했다. “말은 맞는 말인데 오랑캐가 득실거리는 변방에서 조광조가 하는 고매한 말은 통용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완곡하게 제지하려 했으나, 중종과 조광조는 막무가내였다. 옆에서 듣다가 어이가 없어진 무신 유담년도 정광필과 이장곤과 같은 의견이었다. “밭 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보고 길쌈하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북방의 일은 저희 무신들의 의견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중종이 조광조의 손을 들어줘, 결국 속고내 생포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조광조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속고내는 반역할 마음이 없는데 군사를 보내 기습하는 것은 안 될 말이며, 잡아보니 속고내가 아니면 그것대로 곤란하고, 속고내여도 기습하여 사로잡는 것은 도적의 짓"이라며 극구 반대했다. "속고내가 죄를 지은 뒤에야 죄를 묻는 군사를 보내야지, 기습은 의리에 어긋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하나하나 따져보면 논리라고 하기도 민망해지는데 조광조의 주장은 송양지인보다 더한 삽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하다못해 송양공의 경우 전술의 변화 등 변호할 여지라도 있지만, 조광조의 경우는 '범죄자 가운데 무조건 범죄 현장에서 현행범들만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의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조광조 일파를 두고) 왕망(王莽)의 일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중종 14년 12월 16일 기사. 금부도사 유엄, 조광조가 사약 받기 직전 자신의 일파와 조정 상황을 묻자 답하며. 원래 왕망은 유교 국가에서 역적의 대표주자인 망탁조의로 자주 비유되는 인물이지만, 왕망과 조광조의 행보를 비교해 보았을 때 지향점이 비현실적인 유교국가로의 개혁임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적절한 평이다.
개혁에 적극적이었으나 이는 밝은 정치적 감각에 의한 시대 개혁이 아니라 단지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한 학자의 성리학 독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치철학자, 유학자, 교육자로는 몰라도 정치가나 행정가로서는 낙제점인 인물.
그리고 사실 개혁적이라는 평가 역시 그가 임기 내내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이게 어디가 개혁적인 건지를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수꼴로 보일 이야기 투성이었으며, 중종이 총애해주지 않았다면 대체 뭔 배짱으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막가파식 행보에 불과했다.
당장 생애 문서에서 언급되는 모든 행적이 태클 걸 점 투성이인데, 그가 관직에 나아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이 박상과 김정의 상소문을 두고 그들을 탄핵한 대간들을 대차게 까버리면서 '난 저런 놈들이랑 일 못하겠으니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들을 전부 파직해주소서.'라고 중종한테 상소를 올리는 거였다. 즉, 막 들어온 신인 관료가 선배들을 상대로 캐삭빵을 건 거다.
그리고 그 다음 행적으로 논해지는 건 자신의 스승인 김굉필을 정몽주랑 같이 문묘에다 배향하려 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는 것 자체는 중종이나 다른 대신들도 긍정적으로 보았지만 김굉필의 경우 정몽주와 달리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무슨 학문적으로 성과를 낸 것도 아닌데, 오직 조광조 본인의 스승이라는 이유 하나로 정몽주랑 동급으로 취급하며 문묘에 올리려 든 거고 당연히 대차게 뜯겼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개혁책이랍시고 언급되고 있는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위훈 삭제 등은 아래에서도 자세히 다루지만, 그 어떠한 것도 사림의 위세 확대라면 모를까 조선에 도움이 되는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그나마 조광조 시절에 진짜 개혁책이라고 볼만한 건 노비종모법, 한전제, 공안개정, 이 세 개가 끝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조선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고, 폐단만 낳을 뿐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과정에서 성리학의 자질구레한 전통이나 규율에 얽매이면서 훈구파는 물론이고, 왕인 중종한테조차 유교 논리를 들먹이며 이걸 지켜야 한다고 허례허식에 매달리면서, 조금이라도 유교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등 아무리 봐도 개혁적인 성격의 인물은 아니었다.
아래의 문제점들을 보면, 조광조가 정치철학은 몰라도 정치적ㆍ행정적으로는 대단히 문제가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정치적으로. 물론 조광조는 정말 이례적일 정도로 출세하고 몰락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경험부족도 한 몫을 하겠지만. 조광조가 처음 벼슬에 오른 건 중종 10년인데 기묘사화는 중종 14년에 일어났다. 즉 조광조의 모든 행적은 단 4~5년 동안 벌어진 일이라는 의미다. 그것도 새파란 신참부터를 포함해서!
오늘날로 치면 폴리페서나 정치철학자가 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장관이나 비서실장 등 주요 요직을 맡고 비현실적인 정책을 입안하다가 숙청당하여 몰락한 케이스에 비유할 수 있다. 조광조에 대한 평가는 그 개인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실제로 관학파와 사림파에 대한 평가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참조. 조광조가 정치가, '행정가'라기보다는 '이론에 치우친 학자'라는 단점을 보여주는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게다가 아래의 문서들이나 생애를 참조하면 알 수 있겠지만 그 자신의 구호는 성리학 질서, 도덕이지만 그의 행위가 정말 도덕적인지도 의문이다. 생애 문서에서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종사 문서나 김굉필 문서에 있는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그에 대한 평을 보면 자질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성과는 부족했다. 당시 김굉필의 문묘 종사에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 또한 김굉필이 문묘 종사되기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었을 정도.
그렇다고 유명한 제자가 많이 나오거나 학파를 이루었나? 그것도 아니다. 김안국, 이장곤 등 여러 제자들이 있긴 했지만 이황의 제자들이 '퇴계학파'를 이루거나 그 수가 많았던 것과는 달리 김굉필의 제자로서 크게 할약한 이는 그리 많지도 않다.
그런 김굉필이 이런 논의가 나온건 추측하건대 딱 한 가지 이유다. 그가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것. 이것 외에 그토록 유학적 성과가 부족한 그가 문묘에 종사될 이유는 눈에 띄지 않는다. 문묘 종사라는 것이 결국 학통을 이어받았다는 뜻이기에 만일 정몽주와 김굉필이 종사되면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이 완성되므로 조광조의 그 파벌의 입지는 더욱 든든해진다. 조광조가 이러한 점을 노렸는지는 모르나 중요한건 그게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노렸든 안 노렸든 노렸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다.
소격서 문제도 그렇다. 전근대 유교적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왕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따지지 못하고 우회적으로 지적하며 특히 선왕들의 잘못을 언급하는건 더더욱 신중해야 했다.
예로 연산군 즉위 후 성종의 장례에서 불사를 벌이는 것과 관련해 논란이 벌어졌다. 그간 조선에서는 왕이 죽으면 수륙재를 베풀곤 했는데 정식 예법이 아닌데다 성종은 반불 군주였기에 논란이 벌어진 것. 연산군은 혼자선 결정을 못내리겠던지 인수대비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고, 인수대비는 조종조들도 다 행했고 불교를 없애란 말은 안 하였으니 안 할 수는 없다며 수륙재를 베푸는 쪽을 지지하였다.
연산군 또한 "조종조들께서 다 행하셨고 대행왕(성종)도 선왕(예종)을 위해 하신 일이니 나 또한 대행왕을 위해 하겠다." 며 지지하자, 대간과 유생들이 올린 반대 상소 중 연산군을 격노케 한 상소 한 장이 있어 상소를 올린 유생들이 처벌받는 일이 벌어진다. 이 때에 유생들은 연산군 입장을 지지하는 노사신을 비판하였는데, 그 상소에서 "세조께서 불교를 좋아하셨지만 고작 십여년밖에 재위하셨을 뿐이고 말엽에는 역신들이 또 준동했습니다." 같은 선넘은 말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세조가 불교를 좋아한 것을 두고 "이게 다 노사신 때문입니다. 노사신 그놈이 세조대왕을 현혹하여서 그리 된 것이고 그 때문에 세조대왕께서 그르치실뻔 했습니다. (그러니 노사신을 처벌하소서)." 이라며 세조의 잘못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 잘못은 세조 자신만의 의지가 아니라 노사신이 세조를 잘못 보필했기 때문으로 한정했다. 그나마 저 선넘은 문구도 대신들이 "유생들이 뭘 잘 몰라서...", "잘못을 지적하려다 보면 선넘는 말이 조금 나오기도 합니다. 처벌은 하지마소서" 식으로 대응했다. 이 시기의 대간, 유생들은 성종 시기를 거치며 엄청 강경해졌음에도 최후의 선까지는 넘지 않았고 그나마 선넘은 것조차 대신들이 "유생들의 본심이 아니고 쟤네들이 뭘 모르는데다 지적을 하다보니 잠깐 흥분한 모양이네요."로 대응해야 했다. 이와 비교해보면 조광조가 얼마나 선을 넘었는지 알 수 있다.
조광조는 명색이 성리학, 유교정치 복원을 외치는 사람이 '소격서를 없애지 않은 건 세종과 성종의 잘못'이라고 대놓고 돌직구를 때렸다.
마지막으로 현량과 문제도 현량과는 명목상 각 지방에 숨은 인재들을 발굴한다는 이유로 시행한 제도이지만 정작 뽑은 사람들이 정말 우연하게도 서울 태생의 명문가에 중앙에 대한 연줄이 있는 자들이었다. 거기다가 조광조와 가깝던 안당의 경우 자식 셋이 모두 현량과에 합격했다. 이것이 우연이라기에는 미심쩍다.
결론을 내자면 위의 3가지가 우연이 아니라면 조광조는 유교정치와 성리학 질서의 복원을 외쳤지만 뒤로는 원칙이나 자신의 구호를 파괴하며 자파 세력의 이익만을 위해 골몰한 것이 된다. 설사 모두가 그렇지는 않고 일부만 그렇더라도 그의 진정성에는 의심이 들 수 밖에 없는 일. 이렇게 보면 유학자에게는 모욕이 될 수도 있는 왕도와 패도를 나쁜 의미로 섞어서 행하며 살아간 인물로 볼 수도 있다.
3.2.1. 소격서 철폐
또 유명한 사례로는 소격서 철폐에 관한 것이다. 이 소격서 철폐 주장으로 조광조는 당당하게 골수 사대주의자임을 증명했다. 국가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소격서(昭格署)라는 곳이 있었는데, 조광조가 이것의 철폐를 위해 밤새도록 무릎 꿇고 궁궐에서 상소를 읽은 것은 유명하다. 그런데 소격서 폐지 이유로 내세운 게 2가지인데, 첫째는 "성리학으로 운영되는 나라에서 도교 따위 미신에 의지한 기관을 운영한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라는 것이다. 여기까진 당시 사상적, 학문적 근거 등을 보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조광조가 이 주장을 했을 때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그래도 반대하는 신하는 없었다. 어차피 조선의 통치이념상 당연히 조광조만 유교맨이 아니고 훈구파조차 어쨌든 유교를 지향하는 만큼 당연히 명분은 조광조에게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중종의 폐지 반대 논리는 궁색하다.
그런데 2번째가 문제였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인 명나라 황제가 할 일이지, 일개 제후왕인 전하께서 할 일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한 것(…). 사실 이것도 후술할 세종대왕의 오점 운운만은 못해도, 중종 입장에서 꽤나 자존심 상하는 발언이다. 게다가 조광조는 엄연히 조선 국왕의 신하인데 자신이 모시는 왕의 권위를 폄하했으니, 사실 역적으로 몰리기 충분하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아직 명나라를 진심으로 상국으로 섬기던 때가 아니라, 그저 국익을 위해 충성하는 척 연기할 때였다. 외왕내제가 완전히 폐지된 원 간섭기 고려와 달리, 조선은 원 간섭기 전의 고려에 비해 외왕내제 요소가 많이 없어졌을 뿐 흔적 자체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멸망하는 순간까지 묘호 사용을 폐지하지 않은 게 그 증거다.
여기까지도 그렇다 치자. 이때 중종은 폐지를 요구하는 조광조에게 "세종, 성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며 반론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 대왕이나 성종 대왕이나 성군이셨어도, 소격서를 폐지하지 않은 건 잘못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당시는 신하가 공을 세우면 왕의 덕이고 왕이 실수하면 신하의 실수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는데, 엄연히 신하에 불과한 조광조가 비판한 상대는 한국사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과 중종의 아버지인 성종이었다. 세종도 엄밀히 말하자면 성종의 증조할아버지였고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최고의 성군으로 여겼고, 성종 역시 뛰어난 업적 덕분에 그에 준하는 성군 대우를 받았다. 이건 "왕 모욕+조상 모욕=불충"으로, 역적 취급도 얼마든지 가능한 발언이다.
물론 왕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소 과격한 발언을 할 수는 있다. 연산군 초반기에 유생들이 과격한 상소를 올리자 연산군이 관련자들을 죄다 잡아들이려 했는데, 판서급 대신들이 "군주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과격한 표현을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라며 해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왕의 오점' 운운하는 이 발언은 지금 봐도 상당히 무례한 말인데, 그걸 면전에서 들은 중종은 대놓고 너 처형은 못할지라도 화를 꾸역꾸역 참으며 마음에 담아두었을 확률이 높다. 이는 조광조가 관료로서 개념은 제로였던, 학자에 가까운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차라리 "세종 대왕, 성종 대왕 시절에는 어떠어떠한 사유가 있어서 폐지를 못한 것일 뿐 지금은 폐지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라고 했다면 두 왕 때에는 단순히 이유가 있어서 못한 것이므로 왕들의 치부 문제는 되지 않으면서도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폐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되기에 중종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왕의 권위에도 도전하는 모습에서만큼은, 보통 성리학 근본주의자라 비판받는 부분과 정반대로 오히려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자유로운 모습이다. 다만 이건 듣기 좋게 표현한 말이고, 자기가 그렇게나 절대시하던 성리학의 명분론을 정작 본인은 지키지 않으면서, 왕을 함부로 비판했다는 의미도 된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자기가 믿는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면서도 그 종교의 가르침 중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은 내용은 과감히 무시해버린 점에서 2010년대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던 셈이다.
조광조는 조선이 성리학적 이념에 근거하여 국가를 운영하기를 원했고, 그의 정책들은 한결같이 이런 기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성리학을 통한 이상적인 국가의 형성을 기대했지만 흑백논리를 앞세워 너무 과격하고 성급하게 개혁정책을 밀어붙였고, 중종에게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조광조는 결국 실패하여 죽음을 맞았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중종의 탓도 있다. 사림파가 과감을 넘어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정도의 발언을 거리낌없이 내뱉은 것은 중종의 무한해 보이기까지 했던 신임을 믿었던 탓이 크다. 하지만 중종 입장에서는 조광조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은 처음부터 바라지 않았고, 단지 왕권 강화를 위하여 사림파와 훈구파의 상호견제를 통한 힘의 균형을 꾀했던 것이다. 만약 너무 커진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조광조의 성품으로 보아 언젠가 그가 왕에 준하는 권력을 잡고 전횡할 여지가 있었기에 중종의 판단은 틀리진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가 뿌려놓은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이라는 이상은, 결국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파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현실화되었다.
3.2.2. 현량과
사실 조광조의 정치도 그렇게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현량과에서 나타나는 공정성 문제도 그렇고, 김식은 아예 대놓고 시험지의 이름 가려놓은 봉인을 찢고 과거제에서 사림들을 뽑았으며, 조광조 일파였던 이조의 낭관들은 자신들의 편이 아닌 관료들을 큰 잘못을 하지 않아도 "자질이 없다"며 파면해서 쫓아내기도 했다. 명백한 월권행위였는데도 조광조는 "내가 쫓겨난 사람들하고 같이 공부해봐서 아는데, 걔들 소인임 "이라며 무마시켰다.
하지만 조광조의 주장은 궤변에 불과했다. 사람에 대한 평판은 한 사람의 평가에 좌우되어선 안 된다. 한 사람의 평가만으로는 그 사람을 공정히 판단하기 어려운데 조광조는 이 짓을 한 거다. 이쯤 되면 자신을 공자, 맹자, 주자의 환생이나 그에 맞먹는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너무나도 당연하겠지만 조광조는 저 셋에 비하면 학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흑백논리는 더 심해져서, 조정 신료를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고 "군자와 소인은 함께 일할 수 없다"면서, 소인무리, 즉 소인배(小人輩)들을 정치판에서 배제시키려 했다.
당연히 그들이 말하는 소인은 조광조의 반대파와 훈구세력이었다. 조광조는 훈구파뿐만 아니라 심정, 이행, 이항, 홍경주 등 기존 관료들도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전부 소인 취급했다. 그런데 이들은 정치나 행정에서 자신보다 행정 능력과 정치적 관록이 많고 먼저 등용된 선배 관료들이다. 이것을 오늘날로 치면, 초선에서 재선 정도의 국회의원이 자신의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한참 나이 많은 총리와 장관이나 상대당의 다선 선배 국회의원에게 욕지거리와 인격모독적 발언을 한 거나 다름없다.
오히려 정치가로서의 능력은 '소인'인 남곤 일파가 더 뛰어났다. 그들의 세력인 김정은 옥사자를 여럿 생기게 한 데 비해 반대 세력인 정광필, 남곤은 되려 현실정치가로서 능력은 괜찮았고, 정광필의 경우엔 훗날 유배되자 백성들이 슬퍼했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인망도 높았다. 이장곤 또한 문신이었지만 문무를 겸비하고 있고 군사적 식견 또한 조광조 일파보다 훨씬 높았다.
무엇보다도 조광조 일파 중 안당은 훈구세력은 아니었지만 신진세력과도 거리가 멀었다. 남곤도 마찬가지로 조광조의 등장 이전엔 신진 세력의 리더이기까지 했으며 조광조를 천거하고, 이후에도 계속 밀어줬던 인물이었다. 한마디로 "내 편 아니면 다 소인 ㅋㅋ"라고 한 것에 더 가깝다. 오히려 이런 모습은 공자가 추구했던 모습과 상반된다. 공자는 "소인도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소인을 교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대표적으로 자로가 이런 인물에 속한다. 소학만 중시해서 논어는 까먹은 듯 문제는 이런 기류가 조선 후대로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특히 현량과의 공정성 문제는 조광조의 도학정치, 원칙주의 자체에 치명적인 도덕적 타격을 가하는 문제였다. 현량과의 원형인 향거리선제의 경우, 이것이 시행되던 당시에도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켰으며, 구품관인법으로의 변화를 거친 육조시대에는 문벌귀족이라는 정치적 괴물을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현량과 시행에 반대하던 대신들 역시 이런 과거의 선례에 따라 반대론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조광조가 이를 강경하게 밀어붙여 현량과를 시행하자마자 예상됐던 문제들이 바로 터져나왔다. 이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부작용이 뻔히 예측되는 정책을 억지로 시행하다 개망신당한 꼴이고,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도학정치를 위한다던 현량과를 악용해서 자기 당파의 세력확대를 추구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딱 좋은 일이다.
현량과는 천거되고 합격한 이들이 대게 중앙의 명문가 출신이란 데서 보면, 지방관들에게 직접적인 천거 권한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나마 나은 것은 이렇게 추천된 이들을 왕이 직접 실력을 검증한다는 거지만, 이미 중앙이 추천을 틀어쥔 이상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긴 어렵다. 향거리선제와는 달리 '현량'이라는 조금 애매한 기준만을 보고 선출하기에 당연히 공정성이 보장되기 더 어렵고, 잘못 뽑았다고 벌을 주는 것도 없어 추천하는 사람은 자기 맘대로 추천한다고 해도 상관없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점에서 보면 조광조와 그 일파는 현량과는 향거리선제에서 따왔다고 했지만 실상은 구품관인법에 더 가깝다.
여기에 김정이 대간, 형조판서에 있을 때에는 감옥에 사람이 넘쳐나고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특별조사까지 해야 할 정도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천인 신분에서 출세한 사람들이었다. 이는 조광조의 개혁안 역시 철저한 신분차별, 혹은 성리학적 신분질서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조광조는 훈구파의 모순은 인식했으되, 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사림파의 독단적인 방식으로 진행했고, 여기에 대한 비판을 군자-소인론으로 막아버렸다. 대표적으로 남곤은 '사림의 지도자'에서 졸지에 '훈구파의 일원'으로 낙인찍혔다. 남곤이 "조광조를 등용해야 합니다"라고 중종에게 간하면서 조광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음에도.
남곤이 조광조 일파에게 가장 트집을 잡힌 부분은 '유교 경전 읽고 마음 닦기도 바쁜데 어디서 시나 글을 좋아하느냐? 이런 막돼먹은 인간 같으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헌데 아이러니한 게, 공자는 논어에서도 제자들에게 "옳은 심경을 자극한다"고 시를 많이 권장했던 사람이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왜 시를 안 배우느냐"라고 타박했다고 전한다.
그러자 남곤은 "그럼 명나라와 외교할 때 시나 글 짓는 재주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라며 반론했다. 실제 그는 영의정 재직 시절은 물론, 그 전에도 뛰어난 글 솜씨로 명과의 외교를 전담한 사람이었다. 당시 명과의 외교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남곤의 반론이 정론(正論)이고, 조광조 일파의 말이 억지였다. 즉 사림파들은 달리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모호한 기준을 들먹이며 일단 매도부터 하고 본 것이다. 이를 오늘날로 치면 사림파는 외교관에게 너무 허례허식에 집착한다고 비판하고, 외교관인 남곤은 외교에는 의전이 필수적이라고 반박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조광조의 개혁 내용을 보더라도, 민생이나 국방 등의 현실에 대한 문제인식에 한계가 많고, 그에 대한 현실적 대책도 부실하다. 뜻이 좋은 것들도 있지만, 제대로 실행방법을 알지 못하며 결정적으로 핵심인 왕인 중종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고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등 현실파악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현량과는 기묘사화와 함께 폐지되며, 조광조가 복권된 뒤에도 재실시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초에 조광조 일파가 설사 지극히 양심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이 사람 좋은 것과 사람 잘 뽑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 공자조차도 자기 제자 재여를 보면서 자기가 사람 잘못 봤다는 식으로 말한 기록이 있다. 무려 유교의 대성현인 공자조차도 후대에 성인으로 숭앙받는 것과는 별개로 자기는 사람 보는 눈이 마냥 정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조광조 같은 급이면 말할 것도 없다. 아닌말로 구밀복검의 유형의 사람이라면 인품이 아무리 좋아봐야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소용없다.
그리고 현량과 건에서 양심의 양자도 꺼낼 수가 없다. 단순하게 말해서 현량과는 겉으로는 온갖 입발린 고상한 명분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무리짓기에 불과했다. 애초에 인간본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제도이며 현량과를 도입된 결과도 그렇다. 지금 한국에서도 어떤 돈이나 계층, 권력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정시 100%가 독재자의 권력에서 나왔지만 독재 이후 온갖 언론과 매체에서 한입으로 정시를 욕하면서 분위기를 만들어 수시를 도입한 이후 백날천날 터지는 부자와 고위층들의 수시비리에도 불구하고 공정을 부르짖는 정치가와 언론이 모른 척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고상하게 공정을 부르짖는 정치가들부터 그들의 자식이 온갖 수시비리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면 표어나 명분과 같은 것들은 입발린 말에 불과한 것이다.
즉 시험제도와 천거제의 장단점은 항상 존재하지만 천거제가 도입되고 악용되는 그 동기나 개념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세계각지를 막론하고 진짜로 나라나 교육을 생각해서 무슨 시험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천거제나 그와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자고 하겠는가? 고위층이나 특권계층의 사리사욕, 계층의 대물림과 재생산에 있지 그들이 말하는 고상한 명분은 입에 발린 말이며 현대로 비교하자면 지균제도 등의 몇몇 보완제도 역시 그 과정에서 면피용의 명분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3.2.3. 지나친 성리학 집착
사실 당시 사림파들은 민생과 부국강병보다는, 성리학 이념 전파를 중점으로 두었다. 물론 사림파들은 이 역시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사림파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세상은 성리학 이념이 곳곳으로 전파되어 성리학 이념에 따른 질서가 만들어져 자리잡은 세상이기 때문. 물론 이렇게 함으로서 나라가 안정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민생과 부국강병에 소홀한 면도 있지만 피차 전근대에는 그 2가지도 국가(왕조, 왕)에 앞설 수 없다는 걸 감안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성리학 이념 전파는 민생ㆍ부국강병과 비슷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시대상을 보면, 전대의 임금이 조선조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이었고 그것도 유교에서 지향하는 군주와는 180도로 다르면서 게다가 유교적 질서를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에 신하들은 임금을 갈아치우는 중종반정을 꾀했다. 물론 동시에 민생과 부국강병에도 문제가 생긴 건 덤이다. 그런데 하필 또 연산군 이전의 임금은 조선조 최고의 성군 중 하나로 꼽히는 성종으로, 성종은 연산군과는 반대되는 인물이었다. 이러니 사림파 입장에서는 '유교적 질서를 잘 따르던 성종대왕 때는 나라가 잘 굴러갔는데, 유교적 질서를 개나 줘버린 연산군이 왕이 되니 나라가 개판이 되었다'라고 인식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럼 결론은 '다음 왕 때에 확실하게 유교적 질서를 다져서 다시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 나오게 해선 안 된다.'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또한 조광조는 물론 그와 함께 했던 사림, 그리고 통상적으로 사림파라 부르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지방 선비~신입 공무원 내지는 신진 그룹 격으로,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대다수가 성리학만 주구장창 파던 사람들이고, 벼슬에 올라도 아직 경험이 짧다 보니 당연히 실무에 약할 수밖에 없다. 진작부터 현실적인 민생대책 등을 연구했다든가 하는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고, 경험이 부족해도 타고난 능력이 대단하다면 어느 정도의 식견을 내보일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많을 리는 없다. 그러니 민생대책ㆍ부국강병책에 대해선 잘 모르고 아는 건 성리학이니, 성리학 이념 전파를 우선시할 수밖에. 물론 그렇기에 이들은 정책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대신이 아니라 대간에 있던 것이고, 때문에 이들이 모르는 민생대책ㆍ부국강병은 대신들이 마련해주면 되는데, 이들의 진짜 문제인 것은 그런 대신들조차 '우리 편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에 따라 존중하고 말고를 가르며, 자기네들만이 주가 되려고 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한 마디로 자기 분야에서만 활약하면 될 것을 잘 모르는 분야에까지 알지도 모르는 주제에 훈수질만 잔뜩 한 셈. 흔히 말하는 좆문가나 씹선비와 동일하다.
사림파들이 민생안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붕당의 형성 시기부터이며, 이는 현실에 눈을 돌린 것에 가깝다. 붕당들은 다 같이 민생에 관심이 깊었다. 이기론으로 인해서 방식이 갈리긴 했지만 어쨌든 민생을 살려야 한다는 것에선 별로 다르지 않았다. 특히 양란(왜란과 호란)을 거치며 나라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지자 이를 위한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인들이 특히 민생안정에 관심이 깊었다.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 자체가 민생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 또한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상당기간 동안 집권상황이었기 때문에, 민생에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는 처지였다.
이에 대해서 성리학 자체의 보수성과 수신(修身)을 통한 어짊의 확대라는 측면을 볼 때, 그리고 당시 사회의 최대 모순이 훈구파의 토지겸병과 수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훈구세력에 대한 공격과 그 부의 축소가 국가와 백성을 위한 급선무임은 분명하다는 견해도 있다.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이지만, 제도나 사회구조상의 변화가 없이 훈구파만을 공격한다면, 그 다음 집권세력이 그 위치를 차지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사태를 악화시킬 게 당연하다. 실제로 조광조가 의도한 대로 사림파가 집권한 후 바로 그렇게 되었다.
방납의 폐단을 거론했고 이에 대한 계책으로 공안개정을 주장했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논의가 된 건 이이와 류성룡 때다. 당시 조광조의 주장은, 훈구파가 세조, 중종 때 받은 방납의 권리 때문에 전황이 일어나는 걸 비판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훈구파를 싹 쓸어버리고 사림파의 세상을 만드는 것 말고는 특별한 해결책이 없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에게는 성리학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다. 실전에 투입할 관료로 쓰자면 빵점이었다. 물론 그가 죽지않고 오래 활동했다면 좀 달라졌을 수는 있다. 그가 죽을 때는 고작 37세였으며 그가 과거에 급제한 지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남곤은 기묘사화 당시 49세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지 26년차, 갑자사화~중종반정 시기의 공백기만 빼면 벼슬살이도 24년이나 해본 사람이다. 그리고 둘 다 사림의 범주에 있다.
조광조는 신진 사림 중에서 가장 온건파에 속했으며, "땅은 좁고 인물이 없으니, 노비나 서자라도 능력이 있다면 관직에 뽑아 써야 한다"라는 지론(持論)을 내세워, 하인들에게도 공손히 대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공손히 대했다는 게 전부다. 상술(上述)했듯, 실제 기록을 보면, 조광조 일파가 세력을 잡고 있을 때 투옥되거나 쫓겨나거나 죽은 사람들은, 천인(賤人)에서 관직 등에 올라 출세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이는 성리학의 기본 입장이기도 하다. "백성과 아랫사람에게 자상하게 대하고 보살피되, 신분의 구분은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기본입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분수에 넘게' 행동하는 천인들을 결코 가만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인정을 받고 공을 세워 올라온 만큼 이들을 못마땅해하는 건 조광조 일파의 입장일 뿐 정당성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구신(舊臣)들의 토지 독점을 비롯한 각종 사회문제에는 적극적이었다고 할 수 있고, 생의 마지막 순간 금부도사를 맞이하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한다. 하지만 상술(上述)했듯, 금부도사에게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날이 저물도록 방에 들어가서 가끔 밖을 내다보며 다른 사자(使者), 즉 사약이 취소되었거나 연기되었음을 알리는 사자가 오지 않나 기다렸다고 한다. 금부도사가 기다리다 지쳐 투덜대자 그때야 자진했다. 덤으로 조광조는 "남곤, 심정이 좌의정, 이조판서가 되었다"고 하자, "내가 죽는 게 당연하다"' 탄식했지만, 그때 남곤은 조광조를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조광조는 정치판에서 적과 아군을 구분해낼 능력도 없었다는 뜻이다.
사실 남곤은 소장파에 가까웠다. 사장(詞章/辭章), 즉 시가(詩歌)와 문장에 능했고 훈구파들과도 친했기에, 조광조의 당과 멀어지고 소인으로 몰렸던 것이다. 심정도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조광조 사형에는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실록을 보면, 조광조의 최종 처리를 위해 중종과 대신들이 모였을 때 정광필과 남곤은 죽음을 각오하며 조광조의 사형을 극렬히 반대하여 사형을 면하게 하자는 입장이었고, 심정은 "대신들의 중론을 따라야 하며, 중도를 잃어서는 안됩니다" 정도의 의견만 내고 있다. 적극적으로 조광조가 죽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건 중종 하나뿐이다.(중종실록 14년 11월 16일 기사)
그러나 조광조에 대해 변호해주자면, 조광조가 중시한 건 《소학》으로, 요즘으로 치자면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우는 바른 생활 교과서 쯤 된다.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 때 배운 바른 생활 교과서의 내용을 다 지키는 사람은 없듯, 조선시대에서도 그걸 다 지키려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시대는 사화가 2번 일어나고 중종반정도 일어나던 터라 더 그러했는데,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조광조는 소학대로 기초적인 유교적 도덕을 지켜가며 이러한 일들이 두 번 다시 없기를 바랐으리라는 짐작이 가능하고, 그래서 강경하게 되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스승이 일명 소학동자라 불리는 김굉필이다. 스승의 학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게 덕목이던 시절이라 소학을 중요시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기초적인 도덕에 충실한 조광조는 현실과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학교에서 배운 도덕을 다 지키고 사는 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도 그것을 강요하며 지키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걸 실천하려다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현대에 와서도 어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점을 구조적 문제에서 보기보다는 개개인의 도덕성, 의식 문제, 혹은 국민성 문제로 보는 사고방식은 상당히 흔한 관점이다. 이를테면 한국/정치에서 "정당과 이념보다 정치인의 도덕성과 청렴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논리가 이에 근거를 둔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도덕과 원칙이 매우 자기중심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당장 조광조와 그 일파는 "내 편 아니면 다 소인"이라고 하며 자기 일파가 아닌 사람들을 내쫓으려 들었고, 이를 위해 시험지의 봉인을 뜯고 내쫓는 등 공정성을 어기는 행패를 부리는 것조차도 옹호하는 것을 보면, 결국 도덕이라는 기준이 일반적인 도덕이 아닌 그냥 자신의 입맛에 맞는 도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조광조 일파가 행한 사람을 '군자'와 '소인'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즉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자칫하면 군자가 소인으로 몰리고 소인이 군자로 몰릴 수 있어 절대 쉬운 게 아닌데, 조광조와 그 일파는 자신만만하게 자신들만을 군자라 하고 반대파는 소인이라 칭했다. 그리고 이 논리는 사림파 집권-붕당의 발생 이후 상대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상대를 폄하하고 밀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두고두고 써먹힌다.
4. 여담
야담집 《어우야담》에 의하면 , 어느 날 세수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외모를 보며 "이게 어찌 사내의 길한 상인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참고로 '길상'이란 복을 많이 받을 관상을 뜻한다.
키가 매우 작았다고 한다. 관료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게 싫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녔기에 "조광조가 오면 멀리서부터 콧구멍만 보였다"는 일화도 있다.
조광조 초상화는 총 3가지 초상화가 있는데 경기도 용인 심곡서원 사당에서 조광조의 위패와 함께 모셔둔 초상화와 조광조 유배지인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 조광조 유허비와 함께 모셔둔 초상화가 있으며 다른 하나는 1750년경 국오 정홍례가 그린 초상화가 있다. 참고로 정홍례가 그린 초상화는 문서에 있는 본문 초상화가 원본 초상화이다.
조광조가 어떤 성품이었는지 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전해내려오는 몇몇 야사가 있는데 어느 날 산책을 하던 길에 조광조는 지나가던 여인들의 모습을 보고 계속 뒤돌아봤고 반면 함께 걷고 있던 남곤은 옆으로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앞서 걸어갔는데 조광조는 지나는 길에 여인들을 훔쳐본 것을 보고 자신의 수양이 부족함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권별이 저술한 해동잡록에서는 "관을 단정이 하여 아침부터 해가 저물때까지와 땅거미가 질 때부터 삼경까지 오뚝이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으며, 맑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곤 했는데, 비록 밤이 짧은 한여름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단정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조광조를 사모한 한 아낙네의 상사 설화인 화헌파수록에 의하면 어느 날 밤 조광조가 책을 소리내면서 읽고 있었는데 이웃집 아낙네가 조광조의 책 읽는 목소리를 듣고는 연모함을 이기지 못해 몰래 담을 넘어 책을 읽고 있는 조광조의 방에 들어갔다고 한다. 조광조는 갑작스럽게 자신의 방에 들어온 아낙네에게 "당신은 양반집 처녀로서 담을 넘는 그르쳤으니, 내가 당신을 죽여 당신 집안의 명예를 세워주겠소." 라고 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며 칼을 뽑아 들어 그녀에게 주었다. 이에 그녀가 사양하지 않고 칼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려는 모습을 보고 조광조는 " 이는 개과천선하려는 것이오. 반드시 허물을 뉘우칠 것이니 벌을 감해 주겠소. 밖으로 나가 매화나무 가지를 꺾어오시오." 라고 말하자 그녀는 회초리를 꺾어 가지고 왔다. 그러자 조광조는 성내며 회초리를 맞아 죄를 경계하라고 하여 그녀의 종아리를 때린 후 집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또한 조광조가 밖에 나갈 때마다 조광조 외모에 반해 여인들이 앓았다는 얘기와 또는 사모한 것과 담을 넘어와서 조광조에게 고백했다는 여인들이 있을 정도라는 일화가 떠돌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 야사나 실록 등 언급되지 않은 출처 미상의 사실 무근인 기록들이다. 앞서 조광조를 사모한 한 아낙네의 상사 설화를 바탕으로 이리저리 내용이 뒤섞여 현대인들에게 왜곡되어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 조광조와 여인들 관련한 정확하고 실체적인 일화는 본문에 언급돼있는 것이 전부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상현동 산 55-1)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청렴과 소박함을 강조했던 선생의 삶처럼 수수하게 꾸며져 있고,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부인 이씨와 한 봉분에 누운 합장묘로 주변이 아파트 숲이라 '도심 속 공원'같은 느낌이다. 묘 앞에는 대리석 묘표와 평상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는 선조 18년(1585)에 세워졌는데, 신도비의 글은 노수신이 지었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다. 묘 바로 앞은 광교신도시 끝자락인데다가 과거 신분당선 건설 당시에는 묘 앞을 지나는 43번 국도(포은대로) 밑으로 노선이 정해지면서 한동안 시끄러웠다.
한편, 현 수지로의 상현동 구간은 과거 그의 호(號)를 따서 '정암로'라고 이름지었지만, 도로명주소 개정 등으로 인해 수지로로 편입돼서 사라졌다. 묘 앞의 도로명은 포항 출신에 용인에 유택을 삼은 정몽주의 호가 붙은 길이 생긴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도 그의 시호인 문정(文貞)을 딴 도로인 문정로는 존재한다. 또한 한국민속촌 근처에는 조광조와 그와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노년을 즐기기 위해 만든 정자인 사은정이 남아있는데, 그 앞을 지나는 도로인 사은로도 있다.
조광조는 기묘사화로 사사될 때 그의 아들 조정은 갓 2살배기였고 그나마도 일찍 죽었는지 직계 후손이 없었다. 후대에 복권이 되니 임금은 조광조의 고향인 용인에 터를 내주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원주에 살던 당조카를 불러 조광조의 대를 잇게 했다.
선조 때 복권된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한 서원이 여러 곳에 세워졌는데, 이중 대표적인 곳이 서울의 도봉서원(서울시 기념물)과 용인의 심곡서원(사적)이다. 용인 심곡서원의 경우, 위에 언급한 조광조의 묘 근처(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 (상현동 203-2))에 자리잡고 있으니 묘소와 함께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조광조의 승진 속도는 조선사 여러 권신의 예에 비견할 정도로 이례적으로 빨랐는데 조광조만큼 빨리 승진한 사람이 없을 정도. 물론 굳이 찾자면 27살에 영의정이 된 구성군 이준을 들 수 있지만 이준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아들로 세조에게는 조카가 된다. 세조가 죽을 때가 다 되어가면서 기존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이준을 골라 자신의 후대가 되는 예종의 세력을 만들어주려고 영의정에 앉힌 것이다. 후에 공신들을 포함한 신하들은 이걸 막기 위해서 "왕족은 관직에 오를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못을 박아버린다. 한편 정작 예종은 신공신 세력이 구공신보다 더 부담스러웠는지, 친위 세력으로 삼기는커녕 즉위하자마자 구공신과 손을 잡고 신공신을 대부분 숙청했고 이준 또한 관직을 모두 잃고 목숨만 겨우 부지했다. 굳이 있다고 하면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사간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1591년 2월 13일 하루만에 13단계를 건너뛴 이순신이나 일개 갑사에서 1년만에 병조참지(정3품)까지 급상승한 유자광 정도다. 2명 모두 전쟁과 반란이라는 비상시국으로 파격승진한 것을 생각해보면 조광조의 승진 속도를 체감할 수 있으며 전형적인 청요직의 경로를 타고 승진한 것으로 조광조의 직책에 실무를 맡은 관직은 단 하나도 없다. 이러고도 현재의 장관격인 판서와 같은 정2품까지 승진까지 했다.
조광조의 후손인 조문보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
조광조라는 이름과 기묘사화가 맞물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 떠오른다는 말이 있고, 정말로 패러디되기도 한다. 조광조의 기묘한 사화 1(2편)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8번 후보자인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은 조국 전 법무부장관을 조광조, 윤석열 검찰총장을 윤임·윤원형에 비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광조의 문중인 한양 조씨 대종회에서 "정암 선조와 우리 한양 조씨 문중과 국민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조국을 윤임과 윤원형, 윤석열을 정암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비판했다.
5. 대중매체
1985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에서는 배우 유인촌이 연기했다.
1991년 ~ 1992년 SBS 드라마 <유심초> 에서는 배우 한진희가 연기했다. 69화 이후에 투입된다.
1996년 KBS 드라마 <조광조>에서는 배우 유동근이 연기했다. 재밌게도 전작인 <장녹수> 에서 연산군을 연기했던 배우가 그대로 이어서 조광조 역을 맡았다.
1996년 SBS 드라마 <임꺽정> 에서는 배우 태민영이 연기했다.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 에서는 배우 차광수가 연기했다.
최인호의 소설 <유림>에서는 1권의 주인공으로 다뤄진다.
경희궁에서 공연한 고궁 뮤지컬 <대장금> 에서도 등장한다. 근데 비중이 뮤지컬 <대장금> 이 아니라 뮤지컬 <조광조> 수준. 아이돌의 무대를 연상케 하는 '조광조의 소격서 혁파가' 대표곡인데 제법 들을 만하다. 조정석 버전김태훈 버전
네이버 웹툰 <조선홍보대행사 조대박>의 등장 인물 조대박과 조팔선은 조광조의 후손이다.
<경제왕 연산군>에서는 성리학을 도외시하고 산업화와 현대적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연산군에 비판적이었으나, 해동제국사 병사(해병)이 되고, 연산군이 지은 경세서인 '주해헌천정요'를 읽은 뒤에는 이 새로운 학문에 감화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경제 파트만 빼놓고 읽는 등 연산군의 의도와 괴리되는 방식으로 이해하다가 사고를 칠 뻔하게 된다.